그는 한국 의료계에서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의사 700명과 직원 3000명을 거느린 ‘길병원 의료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병원과 언론사, 문화기관과 학교를 포함해 모두 17개의 사회법인을 이끌고 있는 이길여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나이 예순여덟살. 남들 같으면 서서히 은퇴를 생각하겠지만, 그의 행보는 더욱 정열적이다. 지난해 가을 ‘경인일보’를 인수하더니 이번엔 경원대학교 제9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9월6일 오후 2시. 기자는 경기도 성남시 경원대학교 총장실을 찾았다. 우선 고희를 앞둔 할머니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사한 옷차림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이 예쁘게 나와야 한다며 정면에 대형 거울을 갖다 놓으라고 주문할 때는 사춘기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낭랑한 목소리는 또한번 그의 나이를 의심케 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막힘이 없다. 오히려 그런 당당함 때문에 배석한 홍보팀 직원은 혹시나 ‘말실수’가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대학 총장과 종합병원 이사장, 언론사 회장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이룬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맨 마지막에 맡은 경원대학을 택하고 싶습니다. 경원대학에는 내가 아직 충분한 노력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경원대학교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울 생각입니다.”
“복지와 환경 개선에 힘쓸 것”
이길여 총장은 요즘 일주일에 3일을 경원대에서 보낸다. 그만큼 경원대를 하루 빨리 정상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98년 경원학원을 인수하던 당시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일도 상당히 신경쓰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 총장으로 선임되기 직전 학생들과 경원발전위원회를 만들기로 약속까지 했다. 절차 문제는 풀렸지만 아직까지 학생들은 이길여 총장 체제를 관망하고 있다. 총학생회는 학부제 문제를, 노동조합은 ‘낙하산 인사’를 거론하며 이총장을 압박하고 있다.
―경원대로 오시면서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중에서 독재정권과 싸우고 학원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학생들에게 보상조치를 해주겠다는 부분이 눈길을 끕니다.
“명예를 회복시켜줄 생각입니다. 제적된 사람들 다 복적시켜 주려고 합니다. 이제 와서 복적하려면 돈도 없을 테고 하니까 장학금도 주려고 합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원대는 오랫동안 학내분규로 몸살을 앓아왔습니다. 총장께서는 10대 사학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도 밝히셨는데 무슨 복안이라도 있습니까.
“우선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복지와 환경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교실, 운동장, 기숙사 등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대학발전위원회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돈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병원쪽도 파업사태로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금은 비밀이니까 말로는 못하겠고…. 어떻게든 할 겁니다. 병원에 가면 병원돈이 학교로 갈까봐 걱정하고, 학교에 오면 학교돈이 병원으로 갈까봐 걱정해요. 하하하. 내가 맡고 있는 19개 사회법인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가 되면 다 떼어낼 겁니다. 나는 한푼도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총장께서 살아오신 과거를 살펴보면 근성과 승부욕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글쎄요. 나는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거기에 최선을 다한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성공해서 큰 종합병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의사가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고 의사가 돼서는 환자가 좋아서 정성껏 환자를 돌보았어요. 그러다 보니 환자가 많아지고 병원을 더 짓게 되었어요. 그런 과정에 좋은 의사도 만들고 싶었고, 간호사도 길러내고 싶었어요. 그때 그때의 요구에 충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요.”
이총장의 병원 운영방식은 저돌적이었다.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수십억원이 들어가는 기계도 두말없이 사들였다. 병원을 짓는 것도 수지타산을 맞춰보고 되겠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식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대외 홍보에 주력한 부분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신문지상에 실린 길병원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최초’라는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길병원은 흥미로운 이벤트도 자주 선보였다.
―경영자는 거액의 돈이 들어가는 투자를 앞두고 고민하게 마련인데, 이 총장의 의사결정 과정은 매우 신속했습니다.
“내가 병원을 개업하고 수많은 수술을 해봤는데 기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술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던 기계가 지금도 병원에 있어요. 그 기계와 똑같은 것을 들여왔는데도 내가 쓰던 기계가 아니면 수술을 못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의사들은 기계에 예민합니다. 새로운 기계를 빨리 사와야 내가 편리하고 환자들이 편리하거든요.”
―이 총장의 대외 활동이나 길병원의 프로그램은 그동안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언론플레이의 귀재’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그렇게 말한다면 좀 섭섭한 생각이 들고… 하하하. 80년대 초에 내가 여자의사협의회 회장을 했습니다. 해보니까 여의사들이 안 보이는데서 많은 봉사를 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숨어서 일하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문을 만들고 대화의 장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여의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차 높아졌어요. 내가 결혼을 안 한 여자여서 더 관심이 컸나 봐요.
―병원 이사장을 넘어서 언론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자꾸 책임의식을 느꼈어요. 좋은 의사를 길러내고 싶었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인천지역을 위해 문화사업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부터 있던 것이 우리 시대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을 살려서 후세에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세대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 문화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어요. 그래서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고 있는 고서들을 사들여 전시회도 열고 했는데, 거기서 국보가 나왔어요. 나는 언론을 잘 모르지만, 언론이 자기 색깔을 갖고 좋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꼭 언론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다가 내게 주어졌습니다.”
경인일보 인수 배경
―주변 상황 때문에 언론사를 인수했다는 말씀입니까.
“경인일보를 운영하시던 분과 누님 동생하며 지낼 만큼 친했습니다. 그분이 건강도 좋지 않고 건설업도 부진하다면서 경인일보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어요. 그래서 두 달을 고심하다가 맡았어요. 내가 그동안 해온 일과 잘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경인일보의 색깔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해온 좋은 사업들과 조화시킨다는 구상이었지요.”
―경인일보를 인수하면서 지면개선과 투자확대 등을 약속했는데,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별로 못한 게 사실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직 그럴 만한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경인일보는 전부터 잘 되던 곳이기 때문에 내가 일일이 신경 쓸 것은 별로 없습니다. 가끔씩 내가 ‘책임을 물을 거야’라는 말도 하니까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얘기 나가면 그분들이 정말 스트레스 받는 거 아닙니까? 언젠가는 내가 가서 족칠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요?”
―경인일보를 인수한 지 1년이 다 됐습니다. 기자들은 이제 뭔가 나올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네들이 해야지. 내가 무슨 기사를 쓰나, 편집을 하나…. 나도 다 생각하고 있어요. 임금도 다른 회사보다는 더 올려줬어. 길병원하고 임금을 비교해보니까 기자들 아무것도 아니더구먼. 이래 가지고 되겠는가 해서 많이 올려주라고 했어. 그러나 노조에서 해달라는 걸 다 해줄 수는 없잖아.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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