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동토의 붉은 별 바렌츠해에 지다

  • 진병관·김경진·신재호·전쟁소설 데프콘, 동해 및 남북 공동저자

    입력2006-08-11 12:2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수고했네, 세르게이. 당직을 인수받겠다.”

    사령실로 들어선 함장 겐나디 랴친(G. P. Liachin) 대령이 활기찬 얼굴로 부함장을 치하했다. 세르게이 두드코(S. V. Dudko) 중령으로부터 절도 있게 경례를 받은 랴친 대령은 즉시 당직 인수절차를 지시했다.

    “부함장 세르게이 두드코 중령, 함장님께 지휘권을 인계합니다.”

    “14시부로 함장이 지휘권을 인수한다.”

    영관급 장교답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가 교차했다. 기울다 못해 완전히 쓰러져 가는 구소련의 영광을 당분간 절대 재현하지 못하겠지만, 러시아가 이렇게 핵잠수함을 계속 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너무 기뻤다. 조국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러시아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외국에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바로 핵잠수함이었다.



    “신입 수병들 근무태세는 어떤가? 당직 이수과정이 3회나 있었군.”

    함정근무일지를 넘겨받은 랴친 대령이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해당 부서마다 지휘자가 있지만 인간이 쉬지 않고 근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급자들도 그 지휘임무를 맡을 수 있도록 훈련받으며, 당직 수행자격이라는 특별한 절차를 통과해야만 부서장 임무를 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전투함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당직이다. 전투나 위기상황 발생시의 총원전투배치가 아닌 경우에 함정의 지휘는 모두 당직체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탑승요원 중 20퍼센트가 첫 항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적응이 매우 뛰어난 편입니다. 두 명이 당직 이수과정을 통과했습니다.”

    “대단하군.”

    부함장 두드코의 보고를 받은 함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최고 수준의 순항미사일 공격형 잠수함 쿠르스크, 탑승한 승무원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두드코 중령은 곧 있을 어뢰 발사 훈련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령실 요원들의 함정 통제상황도 좋았고 조금 전에 실시된 공격수행훈련을 무장반 요원들이 썩 잘 마쳤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의 팀워크를 보면서 부함장은 젊은 승무원들이 지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빈사상태에 빠진 러시아 해군을 밝은 미래로 이끌어갈 소중한 자원이었다.

    잠시 후, 사령실로 바그리안체프(V. T. Bagriantsev) 대령과 그의 참모진이 들어섰다. 쿠르스크가 속한 제7 잠수함 전대의 지휘관인 바그리안체프가 온 것은 조금 뒤에 실시될 어뢰사격훈련을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함장 랴친 대령이 그들을 절도 있게 맞았다. 미국 항공모함과 같은 대형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건조된 쿠르스크 같은 순항미사일 잠수함들은 단독작전을 하지 않고 반드시 동료 잠수함을 동반하고 공격에 나선다. 만약 대규모 작전일 경우 정찰잠수함과 공격형 잠수함 수 척, 그리고 다른 순항미사일 잠수함도 함께 배속되며, 여기에 다시 순양함과 구축함등 대규모 수상전투함 전단까지 가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 해군에 소속된 초음속 폭격기인 백파이어까지 합동공격에 참가한다. 이번 훈련은 이런 대규모 작전상황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쿠르스크가 제7 전대의 기함이기 때문에 전대장과 참모들도 탑승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훈련은 쿠르스크의 단독항해로만 짜여 있었다. 전성기에 러시아 해군이 실시했던 대규모 훈련을 떠올리던 두드코 중령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두드코 중령은 전대장과 참모들에게 가상 작전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작도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순간 함장석 바로 위에 붙어 있는 인터폰으로 긴박한 보고가 울려 퍼졌다.

    -사령실, 소나실입니다. 방위 0-3-0에 수중음을 접촉했습니다. 잠수함으로 추정됩니다.

    “알았다. 식별부호 1을 부여한다. 추적을 시작한다.”

    랴친 대령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이곳 해역에 출몰하는 미 해군의 공격원잠과 접촉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두드코 중령은 정체불명의 잠수함 접촉에 움찔했지만 함장의 차분한 대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실, 소나실입니다. 표적 1의 추정거리는 1만 미터입니다. 방위 3-2-0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최대속도로 가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향 패턴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급으로 추정됩니다.

    “젠장, 여긴 우리 러시아의 안마당입니다. 놈들이 이곳까지 맘대로 유린할 수는 없습니다.”

    소나실의 두 번째 보고가 이어지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장교는 7전대의 작전참모였다. 그리고 그 불만에는 내심 이곳 해역에 또 다른 우군 잠수함이 없다는 것과, 러시아 수상함정들이 초계활동을 펼치지 않은 것에 대한 힐난이 섞여 있었다.

    무르만스크와 세베로도빈스크, 그리고 비디아예보 등 바렌츠 해에 위치한 러시아 해군의 주요 기지들은 북쪽의 콜라 반도로부터 둥글게 감싸는 형태로 수중고정소나망(SOSUS)이 운용되고 있었다. 만약 적이 이곳을 침범할 경우, 가장 먼저 수중고정소나망이 탐지하고 곧이어 육상기지에 배치된 대잠초계기나 대잠헬기들이 출격해서 적 잠수함을 저지하게 된다.

    “현 상황은 귀항 후, 상부에 심각하게 보고해야 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적 잠수함이 출몰했는데도 우리가 경고받지 못한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7전대 작전참모의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해저바닥에 부설된 SOSUS는 저인망 어선들의 그물에 종종 훼손된다. 그것을 복구하고 유지하는 비용을 이제 러시아 해군은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두드코 중령은 작전참모의 힐난을 수긍하지만 작전항해를 자주 해보면 그런 일도 이제 일상사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7전대장 바그리안체프 대령과 함장 랴친 대령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질주와 표류, 전형적인 양키군. 저건, 놈들이 자기네 잠수함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지. 무능한 녀석이라면 저렇게 도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인지 랴친 대령이 씩 웃으며 부함장에게 말했다. 두드코 중령도 미소로 함장의 판단에 동의했다.

    미국 잠수함은 상대방을 먼저 포착할 경우 미리 예정지점으로 질주(sprint)한 다음, 소나 효율이 좋은 수심과 위치를 선택하여 그곳에서 기관을 정지하고 조용히 해류를 따라 표류(drift)하는 전술을 자주 쓴다. 상대가 접근해올 때까지 숨죽이고 매복해 있는 것이다.

    “한 놈이 더 있을 거야. 자기들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겠지. 교활한 양키들!”

    이번엔 7전대장 바그리안체프 대령이 응수했다. 잠수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전대장님, 이것은 좋은 실전 훈련입니다. 작전구역 변경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놈들을 따돌린 다음 뒷덜미를 잡겠습니다. 이곳 해역에서 다시는 얼쩡거리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강력하게 경고해주겠습니다.”

    함장 랴친 대령이 전대장에게 요청했다. 그는 양키 잠수함을 처리하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바그리안체프 대령은 잠시 주저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그 역시 피가 끓는 바다 사나이였다.

    “좋소. 작전구역 변경요청을 받아들이겠소. 단, 다음 안전보고 간격까지에 한해서요. 그때는 추적을 멈추고 사령부로 보고해야 하오.”

    작전중인 잠수함은 지정된 시간에 사령부와 정기적인 통신을 실시해야 한다. 이른바 안전보고간격(Subcheck Interval)이라고 하는 통신보고를 하지 않으면 비디아예보(Vidiayevo)에 위치한 잠수함 사령부에서는 수중의 잠수함과 통하는 장거리 초장파(ELF) 통신망을 가동하여 잠수함에게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서방측 해군의 경우, 통상적으로 통신확인을 명령한 후 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잠수함 수색작전이 시작되고, 만약 4시간이 경과할 때까지도 통신응답이 없으면 잠수함 실종(Sub Miss)을 선포한다. 그것은 사실 잠수함 침몰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잠수함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전보고간격만은 절대 지켜야 했다.

    “물론입니다. 전대장님.”

    전대장의 흔쾌한 응답에 랴친 대령이 어깨를 펴며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제 실로 오랜만의 숨바꼭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잠수함들과의 추격전이 시작되자 두드코 중령은 잠시 긴장했다.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침로를 변경한다. 좌현 15도! 방위 2-9-0을 향한다. 기관 전속!”

    “침로 변경! 좌현 15도! 방위 2-9-0!”

    “증속합니다. 기관 전속!”

    랴친 대령의 명령에 잠항관과 기관장이 힘차게 복창했다. 1만 8,000톤의 거함 쿠르스크에 장착된 스크루 두 개가 맹렬히 회전하며 거친 바렌츠 해에 물거품을 일으켰다. 미국 원잠이 고속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역시 이쪽에서 최대속도로 움직이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잠수함이 수중에서 30노트 정도의 고속으로 움직이면 소나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스크루가 고속으로 회전하면 캐비테이션(Cavitation)이라는 항주 잡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정된 지점에서 미국 원잠이 허탕을 치는 동안 함장은 뒤를 잡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또 다른 미국 잠수함이 있다면? 그러나 두드코 중령은 함장을 믿고 있었다. 랴친 대령은 러시아 잠수함 승무원들에게 은신처라 불리는 지점을 알고 있었다. 복잡한 해류 변화, 그리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온도층으로 음파가 난반사하는 곳이다. 로스엔젤리스의 성능 좋은 소나도 이곳에서는 쿠르스크를 앞서지 못한다. 랴친 대령은 만약 적이 둘이라면 두 녀석 모두에게 똑같이 모욕을 줄 생각인 것 같았다.

    8월 12일 21:20 세베로모르스크 (Severomorsk), 러시아 북해함대사령부

    “참모장, 무슨 일인가?”

    집무실로 들어선 비아체슬라프 포포프 대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포포프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비디아예보에서 긴급 연락입니다. 작전중인 잠수함 한 척으로부터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만약 10분 이내에 응답이 없으면….”

    참모장 미하일 모차크 중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모차크 중장이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제기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단 말인가!”

    포포프 대장이 힘없이 모자를 벗으며 중얼거린 다음 참모장에게 확인했다.

    “쿠르스크(Kursk)함이겠지?”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쿠르스크입니다.”

    모차크 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북해함대는 러시아 최고의 주력함대다. 구소련의 전성기 때는 핵추진 잠수함만 70여 척, 디젤잠수함 10여 척을 보유했고 그중 15퍼센트에 이르는 잠수함들이 항상 대양으로 출동해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북해함대 소속 잠수함 숫자는 1/3 가깝게 줄어들었고 그중 작전중인 잠수함은 그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이제 공격형 원잠은 기껏해야 한두 척이 바다에 나가 있을 뿐이었다. 북해함대 사령관 포포프 제독은 이제 바다에서 작전중인 잠수함을 직접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쿠르스크가 마지막으로 통신을 보내온 위치는 어디인가?”

    포포프 대장이 집무실 벽에 걸린 커다란 해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고도 훤하게 해저지형을 짚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북위 69도 40분, 동경 37도 35분입니다. 오늘 오전, 그 해역에서 어뢰사격훈련을 실시하겠다는 마지막 보고가 있었습니다.”

    “으음…”

    해도를 확인한 포포프 대장 입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났다. 수심이 100여 미터에 불과한 해역이어서 잠수함의 통신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면 초장파(ELF)를 수신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곳이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 함정을 출동시킨다.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헬리콥터가 대기중입니다. 하지만 세베로도빈스크(Severodovinsk) 기지에 정박중인 구조선박이 출항 준비를 갖추려면 한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됩니다.”

    “이런 망할! 모든 게 느리군.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고개를 홱 돌리며 포포프 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모차크 중장을 질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참모장을 탓할 문제도 아니었다. 바로 그것이 현재 러시아 해군의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게 현재의 러시아 해군이었다.

    모차크 중장이 예하 부대로 이어지는 직통전화를 집어들고 소리를 질러가며 명령을 내리는 동안 포포프 제독의 시선이 다시 해도로 옮겨졌다. 차라리 사고라면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다른 경우라면? 잠수함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할 경우에는 통신체계 외에도 여러 가지 비상송신체계를 이용해서 사고 사실을 기지에 통보할 수 있다. 구조송신 부표(Buoy)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잠수함은 수중에 머무를 경우 통신전파를 물 밖으로 발신할 수가 없다. 이 경우 전파가 물 속에서 산란이나 난반사를 일으키며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수함은 통신용 부표를 탑재하고 있는데, 이 부표에는 잠수함의 현재 위치와 사고 직전의 최종상황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잠수함에서 이 부표가 사출되면 스스로 물 위로 떠오른 다음 자동으로 구난 신호를 사령부로 보내게 된다.

    ‘구조신호도 없었다면 혹시 선상반란? 망명?’

    포포프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양키들의 베스트셀러 중에 소련 핵잠수함이 미국으로 망명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소설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시대배경이 그때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쿠르스크에 탑승한 부하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이 그렇게 쉽게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포포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서 사고해역으로 날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포포프가 다시 참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모장! 표트르 벨리키 전단의 준비상태는? 별도로 프리깃 전대 1개를 추가 편성하라.”

    “사령관님, 현 상황에서는 전투함정보다 구조함이 우선입니다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구축함 전대는 이곳에 배치한다.”

    참모장 모차크 중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령관이 가리킨 해점을 확인했다. 예상 실종위치의 외곽해역이었다. 순간 놀란 모차크 중장이 사령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령관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 사령실, 소나실입니다. 표적 3은 방위 0-1-0으로 이동중입니다. 가속중입니다.

    “놈이 꽁무니를 빼고 있습니다.”

    소나실의 보고에 두드코 중령이 만면에 희색을 띠며 소리쳤다. 미국 잠수함 한 척이 깜짝 놀라 황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이쪽에 위치가 발각된 상태에서 계속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미국 잠수함에 불리했다. 만약 쿠르스크가 사령부로 통신만 보내면 육상기지에서 대잠초계기를 출격시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액티브 음파였다. 그러나 쿠르스크는 표적 3을 상대로 최대출력의 음파를 쏘아보냈던 것이다. 만약 교전중이었다면 음파 대신 어뢰를 먹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격침을 의미했다.

    “하지만 뜻밖이오. 이 해역에 미국 잠수함 두 척에 영국 잠수함 한 척까지 몰려올 줄은 몰랐소. 앞으로 초계활동을 더욱 강화하도록 보고해야겠소.”

    “맞습니다. 전대장님. 우리 공격원잠들이 먼바다로 나갈 때까지 수상전투함 호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놈들의 초계구역을 바깥쪽으로 밀어내야만 합니다.”

    랴친 대령도 이제는 분개할 수 있었다. 그는 어쨌든 불만만 늘어놓는 함장이 아님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미 해군의 로스앤젤레스급 한 척은 매복지역으로 끌어들여 쫓아냈지만 또다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나실, 표적 1과 2는 재탐지하지 못했는가?”

    - 탐지하지 못했습니다. 최종위치에서 더 이상 음향을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표적 2는 영국 해군의 트라팔가급 잠수함이었다. 만약 두 시간 전에 쿠르스크가 속도를 줄인 채 표류하며 뒤쪽을 체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계속 꽁무니에 붙어서 따라왔을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쪽 위치를 발견하고 트라팔가급이 혼비백산해서 침로를 바꾸지 않았으면 자칫 충돌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양키들은 크레이지 이반이라고 부른다지?’

    두드코 중령이 미소를 지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잠수함 침로를 바꾸다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비상정지를 하고 침묵에 들어가면 종종 서방측 잠수함들은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는 함정에 빠지곤 했다. 충돌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양키들은 이런 행동을 하는 러시아 잠수함들을 미친 이반이라고 부른다. 이반은 엉클 샘과 같이 러시아인을 지칭하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함장, 좋은 전술이었소. 하지만 잠수함 지휘소에 직접 안전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자칫 문책받을 수도 있소.”

    제7 전대장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미국 잠수함과 공방전을 벌이는 과정에 랴친 대령은 잠망경 심도로 부상해야 하는 직접교신 대신 통신부이를 사용해서 응급보고만 했던 것이다. 통신 부이가 간혹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감안하면 랴친 대령은 무모한 행동을 한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전대장님. 만약 문책이 있다면 달갑게 받겠습니다.”

    랴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상황을 옆에서 계속 지켜본 전대장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전시상황이라고 가정할 때는 충분히 유효한 조처였기 때문이다. 상부에서 아무리 강요하더라도 적 잠수함을 옆에 두고 부상해서 직접 교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함장. 계획된 어뢰발사 훈련은 어떻게 하겠소?”

    “지금 실시하겠습니다. 이곳은 계획된 훈련구역입니다.”

    전대장은 랴친 대령의 의견이 뜻밖이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주저했다. 구소련 시절, 만약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북해함대는 망설임 없이 훈련을 실시했을 것이다. 소련이 선포한 작전해역에 미국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미국의 잘못이라고 여겨졌다. 심지어 방공군은 영공을 침범한 외국 민항기도 주저 없이 격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추락한 그 민항기는 대한항공 소속이었고, 또 다른 KAL기는 러시아 상공에서 구 소련 전투기로부터 기관포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표적 1과 2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오. 우리가 어뢰 사격을 실탄으로 한다면 자칫 교전상황으로 비화할지도 모르니 신중해야 합니다.”

    전대장은 함장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하지는 않았다. 다만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어뢰 발사가 미국과 영국 해군에게 강력한 경고를 의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함장도 전대장의 뜻을 깨달았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뢰발사훈련을 계획대로 실시하겠습니다.”

    “허가합니다.”

    전대장 바그리안체프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장이 곧 두드코 중령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제부터 부함장 두드코 중령은 공격사관으로서 어뢰공격을 맡은 것이다. 두드코가 어뢰실과 연결된 인터폰을 집어들었다.

    “어뢰실! 사령실이다. 지금부터 어뢰 실탄 사격훈련에 들어간다. 1번과 2번 발사관을 할당한다. 1번 발사관은 가상표적 A, 2번 발사관은 가상표적 B에 할당한다.”

    - 어뢰실입니다. 명령 확인합니다. 1번 발사관 가상표적 A! 2번 발사관 가상표적 B에 할당!

    “발사관 외부해치를 개방한다!”

    - 1번, 2번 발사관 외부해치 개방!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드코 중령이 마지막 순간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제 발사는 사령실에서 직접 할 수 있었다. 케이블이 발사관에 연결된 UGST 신형 어뢰는 목표지점까지 유선유도로 제어된다. 그리고 최종 순간에 액티브 탐색모드로 전환되어 표적으로 돌진한다. 사령실의 주공격시스템에 어뢰 두 발이 링크돼 있음을 알려주는 녹색등이 깜빡였다.

    “발사준비 완료됐습니다, 함장님.”

    두드코 중령이 가슴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보고했다.

    “좋아! 발사한다! 발사는 1번, 2번 순서로!”

    공격 아퍼레이터가 버튼을 누르고 압축공기가 분출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어뢰가 쿠르스크를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센 충격이 사령실을 뒤흔들었다.

    눈앞에서 푸른빛이 번쩍하는 느낌이었다. 사령실에 서 있던 함장과 부함장, 그리고 7전대장과 예하 참모들이 일제히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엄청난 굉음이 잠수함을 뒤덮은 것 같기도 했다.

    “하강한다! 하강한다! 전방 밸러스트 배수하라!”

    두드코 중령이 고개를 흔들며 일어서는데 함장은 어느새 일어서서 잠항관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선체가 앞쪽으로 급격히 기울면서 두드코 중령이 다시 앞으로 넘어졌다.

    “전방 밸러스트 탱크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트림탱크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좌현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겁에 질린 잠항관이 잠수함의 부력을 조정하는 밸러스트 탱크를 이리저리 조작하려 했지만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전방 밸러스트 탱크가 손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부함장! 안 되겠다. 원자로를 비상정지한다. 직접 지휘하라! 서둘러. 시간이 없어!”

    함장 랴친 대령이 소리질렀다. 어뢰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두드코 중령은 사령실 뒤쪽 통로를 통해서 원자로와 터빈실이 있는 후방구획으로 허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선체가 앞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마치 언덕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후방 구획의 승무원들은 난데없는 충격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원자로실에 뛰어든 두드코 중령이 비상정지를 지시하려는 순간 다시 강한 충격이 쿠르스크를 진동시켰다. 이번 충격은 아까보다 훨씬 강력했다.

    “부함장님! 부함장님!”

    두드코 중령이 눈을 뜨자 원자로실 부서장 무라체프 소령이 그를 흔들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원자로를 비상정지시켜야…”

    두드코 중령이 헐떡였다.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어서 후방구역으로 피하십시오!”

    선체 위쪽으로 복잡하게 얽힌 배관 파이프 곳곳이 찢기며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원자로를 비상정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2차 회로인 보일러와 스팀 터빈으로 유입되는 고압 증기를 어떻게 해야만 했다. 내압 선체도 손상받은 상태였다. 군데군데 찢긴 틈에서 거센 물줄기가 솟구쳤다.

    “시간이 없습니다. 모두 이곳에 남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서!”

    무라체프 소령이 손짓하자 젊은 수병 하나가 달려왔다. 그리고 두드코 중령을 어깨로 일으켜 세워 7구획을 빠져나갔다. 잠수함의 진동은 계속됐고, 어쩐지 복도가 옆으로 기울어진 듯했다.

    “안돼! 원자로를!”

    두드코가 고개를 돌려 무라체프를 부르는 순간 그가 빠져나온 7격실 해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해치 잠금용 회전바퀴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원자로가 위치한 곳은 5구획이지만 무라체프 소령은 7구획까지 침수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잠근 것이다. 고압터빈이 6구역과 7구역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드코 중령이 정신을 차리고서 8구역에 몰려 있는 승무원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얼이 빠진 채로 7구역으로 이어진 방수해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과 책임감으로 7구역과 그 안쪽에 남은 승무원들은 이제 고압증기와 불어나는 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남은 승무원들과 원자로를 정지시키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두드코 중령이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8월 13일 04:35 러시아 해군 순양함 표트르 벨리키(Pyotr Belikiy)

    - 피잉!

    날카로운 고주파음이 해저면을 훑었다. 초속 1,500미터의 빠른 속도로 바닥에 부딪힌 후 되돌아온 음파는 순양함 표트르 벨리키의 소나로 되돌아왔고 소나 담당자는 그 데이터를 해저지형과 비교했다.

    이곳 해역의 해저지형은 모래와 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류와 조수에 따라 자주 변한다. 잠수함 쿠르스크는 길이가 155미터에 이르고 배수량도 1만 8000톤이나 되는 거함이지만 이런 바닷 속에서 그 존재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소나 오퍼레이터는 열심히 헤드폰으로 잠수함 내에서 발생하는 내부음향을 추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아주 급박한 상황이지만 작업은 무척 단순하고 지루할 정도였다.

    표트르 벨리키, 피터 대제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전제군주의 이름이 붙은 이 순양함 역시 핵추진 함정이다. 함대함 미사일 20발, 그리고 함대공 미사일을 200여 발 넘게 탑재한 표트르 벨리키는 러시아 해군 최대의 순양함이다. 만재배수량 2만 4,300톤으로, 항공모함을 제외하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수상전투함이기도 했다.

    표트르 벨리키를 비롯해서 우달로이(Udaloy)급 구축함, 그리고 크리박(Krivak)급 프리깃들이 계속 해저면을 향해 음파를 쏘아가며 잠수함 쿠르스크를 찾고 있었다. 이 전투함들은 적 잠수함을 탐색하고 공격하는 것이 주임무인 함정들이다. 도합 20여 척이 넘는 구조선과 전투함들이 이번 수색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포포프 대장과 모차크 중장, 그리고 비디아예보 잠수함 기지 사령관인 쿠즈네소프 소장과 참모진은 함교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바람이 계속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천후는 잠수함 찾는 작업을 어렵게 만든다. 해면에 일고 있는 거친 풍랑이 서로 부딪히며 잡음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거함 표트르 벨리키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초속 20미터를 넘나드는 강풍에 구조선들은 몹시 흔들리는 것이 낮게 뜬 희미한 태양을 배경으로 보였다. 구조잠수정이 활동하는 데도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 분명했다.

    - 사령실, 소나실입니다. 쿠르스크를 찾은 것 같습니다. 곧 다른 함정에서 교차 확인에 들어갑니다.

    포포프 대장이 눈을 치떴다.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이크를 쥐는 함장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위치가 확인되는 대로 구조선들에 통보하라.”

    - 알겠습니다. 함장님.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소나 담당자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 패시브 탐색반에서 구난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선체를 두들기는 것 같은 신호입니다. 내부에 생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야? 어떤 신호인가?”

    함장이 큰 소리로 반색하는 동안 옆자리에서 통신 내용에 귀기울이고 있던 포포프 제독과 일행도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패시브 탐색반이 신호를 해석중입니다. 모스(Morse) 신호인 것 같습니다. 아! 신호를 해석했습니다. 신호는 S-O-S 신호입니다.

    “사령관님! 승무원들이 생존해 있습니다!”

    함장이 북해함대 사령관 포포프에게 잔뜩 쉰 목소리로 보고했다. 쿠르스크가 침몰했다는 것이 확인됐지만 그래도 승무원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들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들려온 소나실 장교의 말은 무척 다급했다.

    - 사령실! 계속 반복되는 신호내용입니다. S-O-S, B-O-D-A입니다.

    “맙소사!”

    포포프 제독의 시선이 함장과 마주쳤다. 러시아어로 Boda는 영어로 Water를 뜻한다. 쿠르스크가 지금 침수중이라는 뜻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 하강!

    신호와 함께 구조선 니콜라이 치커 호의 선체 하단에 열려 있는 통로로 잠수종(Diving Bell)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윈치가 풀리며 강철 케이블에 연결된 잠수종이 어두운 바닷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구조선에 탑재된 잠수함 구조장비는 크게 볼 때 두 가지로 나뉜다. 니콜라이 치커 호에 탑재된 것과 같은 잠수종 방식은 비교적 간단한 구조장비로 모선에 케이블로 연결된 상태에서 작동한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모선에서 잠수종의 움직임을 직접 조정한다.

    반면에 특수하게 제작된 심해잠수정(DSRV)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잠수함처럼 자체동력으로 움직이며 비교적 소형이다. 작기 때문에 선체는 더욱 견고하게 제작되었고 일반 군용 잠수함보다 훨씬 깊이 잠수하는 것이 가능하다.

    러시아 해군은 세 종류의 심해잠수정을 보유하고 있는데 서방측이 프리즈(PRIZ)라는 별명을 붙인 Project 1837급 잠수정과 베스터(Bester)라는 별명이 붙은 Project 1855(MIR) 잠수정이 대표적인 심해잠수정이다. 프리즈는 2,000미터를 잠수할 수 있고 핀란드 라우마 레폴라사에서 제작된 베스터는 6,100미터까지 잠항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 잠수정을 탑재한 구조선 미하일 루드니츠키호와 알타이호는 14일이 돼야 구조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지금은 급한 대로 구조선 니콜라이 치커에 탑재된 잠수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잠항지휘자는 내려가는 심도를 계속 확인하며 아래쪽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강력한 조명이 켜졌으나 시야는 무척 나빴다. 조류가 워낙 거세 해저에 가라앉아 있던 미세한 모래와 뻘 입자들이 흩뜨려져서 물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수중카메라에 비친 해저면의 영상은 케이블을 통해 구조선 니콜라이 치커호의 사령실로 연결되었고, 함장은 그에 따라 잠수종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잠수종 아래쪽에는 여압장치가 달려 있어서 쿠르스크의 탈출 해치에 정확히 도킹할 수만 있다면 그쪽 승무원들이 잠수종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다만 잠수종에는 한 번에 10여 명밖에 탑승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어둠 속에서, 언뜻 보기에도 해저지형과는 명확히 다른,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잠수지휘관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수지휘관은 갑판이 널찍한 잠수함 쿠르스크의 특징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시 그 위에 낮고 도톰하게 솟은 사령탑을 찾은 잠수지휘관은 뱃머리 방향을 확인한 다음, 니콜라이 치커 호에 연락해서 위치를 조정해주도록 보고했다.

    다시 잠수종이 서서히 움직이고 조명라이트가 이곳저곳을 비추며 카메라로 쿠르스크의 상태를 담아내는 중이었다. 쿠르스크와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선체가 심하게 기울어 있는 것을 확인한 잠수지휘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쿠르스크는 선체 중심축을 기준으로 거의 60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선체의 3분의 1 가까이가 뻘과 모래바닥에 파묻혀 있었다. 잠수종은 자체동력 없이 위쪽에서 내려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쿠르스크가 심하게 기울어진 상태에서는 이 잠수종을 잠수함 해치에 결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윽고 쿠르스크의 전방 해치에 접근한 잠수종이 해치를 확인하기 위해 조명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였다. 검은 선체를 더듬던 카메라가 함수 부분에 커다랗게 뚫린진 파공을 발견했다. 엄청난 크기의 구멍이었다.

    쿠르스크의 선체는 두 겹의 외판으로 이루어진 이중선체, 이른바 복각(復殼)구조이다. 그런데 그 파공은 견고한 안쪽 압력판까지 뻥 뚫려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선체 전방 구역은 보나마나 완전히 침수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선체 앞쪽의 탈출용 해치 주위도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참담하군.”

    잠수지휘관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령탑 바로 아래에 위치한 사령실도 그 구멍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침수를 확인한 잠수지휘관이 전방해치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하고 간단한 보고와 함께 다시 위치이동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사령탑 쪽에서도 폭발 흔적이 있었다. 사령탑 바로 아래쪽에서 구멍을 확인한 잠수지휘관이 고개를 흔들며 관찰결과를 구조선의 지휘실로 보고했다.

    “선체 앞부분에 커다란 파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3격실까지 완전 침수를 확인했음. 사령탑의 손상 정도로 미루어 제4격실과 5격실도 동시에 침수된 것으로 추정됨. 전방 1격실부터 4격실까지에 어뢰실과 사령실, 그리고 승무원 거주구역 등이 밀집돼 있으므로 승무원의 80퍼센트 정도가 폭발과 함께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됨. 생존 승무원은 후방구역에 있을 것으로 판단됨.”

    선체의 손상정도는 절망적이었다. 쿠르스크의 사령탑 바로 위에는 승무원들이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는 탈출용 캡슐(Escape Capsule)이 붙어 있는데 아마 그것을 사용할 시간조차 없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열음에 잠수지휘관이 몸을 흠칫거렸다.

    - 깡깡깡! 까앙~ 까앙~ 까앙~ 깡깡깡!

    무언가 단단한 물체로 쇳덩어리를 두들기는 것 같은 요란한 파열음이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든 잠수지휘관은 이내 그것이 쿠르스크에서 들려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확실히 모스 신호였다. 짧은 연속음(dot) 세 번은 ‘S’를, 긴 연속음(dash) 세 번은 ‘O’를 뜻한다. 소리는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너무나도 명확하게 들렸다. 물 속에서 소리는 공기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된다. 음파탐지기를 쓰지 않고도 잠수지휘관은 긴박하게 울려 퍼지는 S-O-S 신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절망적인 무력감으로 잠수지휘관이 송신기를 집어들었다. 수중마이크로 응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바로 옆에 구조대가 와 있음을 알려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잠수종으로는 구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잠수지휘관이 몸을 떨었다. 구조 경험이 있는 요원들은 그 구조요청 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구해달라고 발버둥치는 생존자를 당장 도와줄 수 없는 구조요원의 안타까움과 고통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는 승무원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8월 15일 01:42 러시아 해군 잠수함, K-141 쿠르스크(Kursk)

    “부함장님, 구조대로부터 신호가 다시 끊어졌습니다.”

    벽에 귀를 대고 있던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D. R. Kolesnikov) 대위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허탈하게 보고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던 승무원들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부함장 두드코 중령 역시 실망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가 이곳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조차 행운인지 불운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낡은 인디아(India)급 구조잠수함에 탑승해본 적이 있는 두드코 중령은 누구보다 이곳 해역에서의 구조작업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구조잠수함이 탑재한 프리즈 심해잠수정도 이 정도 조류라면 해치로 도킹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두드코 중령이 외부출입용 해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천장에 붙어 있어야 할 해치는 고개를 약간만 들어도 보이는 위치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수심 100미터, 저 해치를 열고 거친 바렌츠해의 수면까지 떠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9격실의 해치는 엄밀히 말해서 탈출용 해치가 아니었다. 굳이 이 해치를 통해서 나가려면 일단 9격실의 내부압력을 바깥 수압과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 높은 수압 때문에 해치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압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9격실까지 물을 강제로 침수시키는 방법뿐이었다. 게다가 탈출에 꼭 필요한 탈출복은 이곳 9격실에는 없었다.

    ‘차라리 사령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두드코 중령이 중얼거렸다. 첫번째 폭발이 있을 때도 쿠르스크함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원자로의 비상정지를 명하고 후방구역 승무원들의 탈출을 지휘하려고 사령실을 빠져 나온 직후 훨씬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고, 걷잡을 수 없는 침수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쿠르스크에 안전하게 남은 구역이라고는 선체 맨 뒤쪽 제9격실뿐이었다. 이곳에는 잠수함 쿠르스크에 직접 동력을 전달하는 기계실이고 전기추진장치인 대형 전동모터가 탑재되어 있었다. 다른 격실에 비해 가뜩이나 좁은데다가 선체가 기울어진 까닭에 남은 요원들이 자리잡고 앉기도 곤란한 지경이었다.

    “부함장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콜레스니코프 대위가 부함장만 들으라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두드코 중령이 눈을 부릅뜨자 대위는 힘없이 입을 닫았다. 누구나 극한 상황에서는 마음이 약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자로실과 터빈실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진 승무원들을 모독하는 발언이었다.

    예비전력만 있었더라면. 쿠르스크도 다른 잠수함과 마찬가지로 예비동력에 사용되는 발전기와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그러나 배터리실은 선체 중앙에서 앞쪽의 맨 아래층에 탑재돼 있기 때문에 이미 침수된 상태였다. 전력을 사용하려면 오직 원자로를 가동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기계실 뒤쪽에 있는 산소발생장치, 이 장치는 물을 전기분해해서 산소와 수소를 공급한다. 전력만 있다면 쿠르스크는 무제한으로 산소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그리고 압축펌프를 사용해서 내부에 들어찬 물을 밖으로 빼내는 것도 가능하다. 사고 이후에 침수된 7격실과 8격실은 만약 전력만 있었다면 고압공기로 물을 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원자로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은 절대 명령이었다. 원자력 잠수함에 탑승하는 승무원들은 이런 경우에는 승무원들의 생존 가능성과 관계없이 원자로를 비상정지시키도록 훈련받는다.

    물론 원자로는 잠수함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면 센서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이 정지된다. 그러나 그 후에 원자로를 재가동할 수 있는 선택권은 인간인 승무원들에게 있다. 하지만 쿠르스크의 승무원들은 결국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을 그들 목숨보다 우선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두드코 중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폐가 약한 승무원들은 벌써부터 천식환자처럼 쇳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면서 옳은 행동이라고 믿었던 결정들이 그를 힘겹게 만들었다. 두드코 중령은 원자로를 다시 재가동하지 않은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그런 생각들을 떨쳐내며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군인이었다. 죽음에 맞선 상황에서도 기꺼이 죽어야 한다면 죽도록 훈련받았다. 그것이 임무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함장 랴친 대령은 이미 죽었지만 아마도 이 사고 때문에 앞으로도 두고두고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함장이었다. 소련 시절 잠수함 지휘관들의 명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VVMUPP(고등해군수중항해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한 랴친 대령은 두드코에게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오랜 친구였다. 하긴 지금까지 잠수함 함장으로 남아 있는 사람 중에 무능한 자가 있을 리 없었다.

    9격실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계속 높아지면서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는 가슴이 무척 답답해졌다. 두드코 중령은 출항하는 순간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출항한 쿠르스크. 그로서도 잠수함을 타고 바다로 나오는 것이 지옥 같은 러시아의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축복이었다.

    바다에서는 2년 넘게 신던 군화를 시장에 팔러 나오는 현역 대령을 보며 조국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통감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장교들한테 나눠주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숨어 몰래 담배를 피우며 눈물지을 필요도 없었다. 바다에서는 강력한 핵무기를 싣고 당당히 항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물론 자주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쿠르스크는 좋은 잠수함이었다. 750kg짜리 고폭약이나 500kt(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20kt) 위력의 핵탄두를 장착한 SS-N-19 대함미사일, 그것은 550km나 떨어져 항해하는 항공모함 같은 거함이나 심지어 막강한 미국의 수상함대조차 일격에 모조리 격침시킬 수 있는 강력한 대함미사일이다. 쿠르스크는 그런 미사일을 24발이나 적재했고, 고성능 어뢰도 24발이나 적재했다.

    공격력에서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원잠이나 영국의 트라팔가(Trafalgar)급 공격원잠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 오스카급 원잠인 쿠르스크이다. 그 자부심이 이제 상처받은 것이다.

    수병 하나가 망치를 집어들고 구조신호를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강철벽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날카롭던 소리가 이제는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간격도 점점 늘어졌다. 어느새 그 소리마저 멈춘 것 같았다.

    두드코는 가족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다시 더듬어보려고 애썼다. 만신창이가 된 조국에서의 힘겨운 삶이었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이 계속 혼미해져 아내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졸렸다. 숨이 가빴다.

    “부함장님, 구조대로부터 신호가 다시 끊어졌습니다.”

    벽에 귀를 대고 있던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D. R. Kolesnikov) 대위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허탈하게 보고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던 승무원들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부함장 두드코 중령 역시 실망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가 이곳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조차 행운인지 불운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낡은 인디아(India)급 구조잠수함에 탑승해본 적이 있는 두드코 중령은 누구보다 이곳 해역에서의 구조작업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구조잠수함이 탑재한 프리즈 심해잠수정도 이 정도 조류라면 해치로 도킹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두드코 중령이 외부출입용 해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천장에 붙어 있어야 할 해치는 고개를 약간만 들어도 보이는 위치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수심 100미터, 저 해치를 열고 거친 바렌츠해의 수면까지 떠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9격실의 해치는 엄밀히 말해서 탈출용 해치가 아니었다. 굳이 이 해치를 통해서 나가려면 일단 9격실의 내부압력을 바깥 수압과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 높은 수압 때문에 해치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압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9격실까지 물을 강제로 침수시키는 방법뿐이었다. 게다가 탈출에 꼭 필요한 탈출복은 이곳 9격실에는 없었다.

    ‘차라리 사령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두드코 중령이 중얼거렸다. 첫번째 폭발이 있을 때도 쿠르스크함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원자로의 비상정지를 명하고 후방구역 승무원들의 탈출을 지휘하려고 사령실을 빠져 나온 직후 훨씬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고, 걷잡을 수 없는 침수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쿠르스크에 안전하게 남은 구역이라고는 선체 맨 뒤쪽 제9격실뿐이었다. 이곳에는 잠수함 쿠르스크에 직접 동력을 전달하는 기계실이고 전기추진장치인 대형 전동모터가 탑재되어 있었다. 다른 격실에 비해 가뜩이나 좁은데다가 선체가 기울어진 까닭에 남은 요원들이 자리잡고 앉기도 곤란한 지경이었다.

    “부함장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콜레스니코프 대위가 부함장만 들으라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두드코 중령이 눈을 부릅뜨자 대위는 힘없이 입을 닫았다. 누구나 극한 상황에서는 마음이 약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자로실과 터빈실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진 승무원들을 모독하는 발언이었다.

    예비전력만 있었더라면. 쿠르스크도 다른 잠수함과 마찬가지로 예비동력에 사용되는 발전기와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그러나 배터리실은 선체 중앙에서 앞쪽의 맨 아래층에 탑재돼 있기 때문에 이미 침수된 상태였다. 전력을 사용하려면 오직 원자로를 가동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기계실 뒤쪽에 있는 산소발생장치, 이 장치는 물을 전기분해해서 산소와 수소를 공급한다. 전력만 있다면 쿠르스크는 무제한으로 산소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그리고 압축펌프를 사용해서 내부에 들어찬 물을 밖으로 빼내는 것도 가능하다. 사고 이후에 침수된 7격실과 8격실은 만약 전력만 있었다면 고압공기로 물을 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 원자로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은 절대 명령이었다. 원자력 잠수함에 탑승하는 승무원들은 이런 경우에는 승무원들의 생존 가능성과 관계없이 원자로를 비상정지시키도록 훈련받는다.

    물론 원자로는 잠수함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면 센서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이 정지된다. 그러나 그 후에 원자로를 재가동할 수 있는 선택권은 인간인 승무원들에게 있다. 하지만 쿠르스크의 승무원들은 결국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을 그들 목숨보다 우선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두드코 중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폐가 약한 승무원들은 벌써부터 천식환자처럼 쇳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면서 옳은 행동이라고 믿었던 결정들이 그를 힘겹게 만들었다. 두드코 중령은 원자로를 다시 재가동하지 않은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그런 생각들을 떨쳐내며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군인이었다. 죽음에 맞선 상황에서도 기꺼이 죽어야 한다면 죽도록 훈련받았다. 그것이 임무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함장 랴친 대령은 이미 죽었지만 아마도 이 사고 때문에 앞으로도 두고두고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함장이었다. 소련 시절 잠수함 지휘관들의 명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VVMUPP(고등해군수중항해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한 랴친 대령은 두드코에게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오랜 친구였다. 하긴 지금까지 잠수함 함장으로 남아 있는 사람 중에 무능한 자가 있을 리 없었다.

    9격실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계속 높아지면서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는 가슴이 무척 답답해졌다. 두드코 중령은 출항하는 순간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출항한 쿠르스크. 그로서도 잠수함을 타고 바다로 나오는 것이 지옥 같은 러시아의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축복이었다.

    바다에서는 2년 넘게 신던 군화를 시장에 팔러 나오는 현역 대령을 보며 조국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통감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장교들한테 나눠주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숨어 몰래 담배를 피우며 눈물지을 필요도 없었다. 바다에서는 강력한 핵무기를 싣고 당당히 항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물론 자주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쿠르스크는 좋은 잠수함이었다. 750kg짜리 고폭약이나 500kt(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20kt) 위력의 핵탄두를 장착한 SS-N-19 대함미사일, 그것은 550km나 떨어져 항해하는 항공모함 같은 거함이나 심지어 막강한 미국의 수상함대조차 일격에 모조리 격침시킬 수 있는 강력한 대함미사일이다. 쿠르스크는 그런 미사일을 24발이나 적재했고, 고성능 어뢰도 24발이나 적재했다.

    공격력에서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원잠이나 영국의 트라팔가(Trafalgar)급 공격원잠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 오스카급 원잠인 쿠르스크이다. 그 자부심이 이제 상처받은 것이다.

    수병 하나가 망치를 집어들고 구조신호를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강철벽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날카롭던 소리가 이제는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간격도 점점 늘어졌다. 어느새 그 소리마저 멈춘 것 같았다.

    두드코는 가족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다시 더듬어보려고 애썼다. 만신창이가 된 조국에서의 힘겨운 삶이었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이 계속 혼미해져 아내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졸렸다. 숨이 가빴다.

    8월 15일 23:20 러시아 해군 순양함 표트르 벨리키(Pyotr Belikiy)

    함교의 현측 난간에 기대 선 포포프 중장은 불붙인 궐련을 깊숙이 빨아 넘겼다. 차가운 북극의 바람에 담배 연기가 춤추듯 휘날렸다. 제독이 누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치마저 이제는 접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거친 바람은 아직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표트르 벨리키의 좌현 쪽에 머물러 있는 구조선 미하일 루드니츠키호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상갑판에는 방금 막 물에서 나온 베스터(BESTER)형 구조잠수정이 크레인으로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잠수정 투입은 없었다. 러시아 해군이 자랑하는 베스터형, 프리즈형 구조잠수정 모두 거친 바렌츠 해의 조류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어렵게 도킹을 시도했던 잠수정 한 척이 조류에 밀려 쿠르스크에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고, 자칫 잠수정을 또 한 척 침몰시킬 뻔했다. 지금 올려진 구조잠수정이 그랬다. 참모장 모차크 중장이 외투깃을 세우며 다가왔다.

    “사령관님. 쿠로도예프 대장이 내일 영국과 노르웨이에 구조를 요청할 계획이랍니다.”

    “그래. 승무원들은 다 죽었는데 말이지. 하하하!”

    포포프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몇 시간 전에 쿠르스크의 생존 승무원들이 보낸 구난신호도 끊긴 상태였다. 이제 와서 외국 구조대에게 협조를 요청한다고 무엇을 되돌리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참모총장의 거짓말은 보답을 받을 걸세.”

    포포프가 모차크 중장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쿠로도예프가 너무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정치적이지 않으면 참모총장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북해함대 사령관도.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령관님.”

    “18일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포포프는 모차크 중장의 의견을 묵살했다. 쿠로도예프 대장은 오전의 기자회견에서 쿠르스크의 승무원들이 18일까지 생존할 수 있는 산소가 함내에 남아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거짓말이었다. 아마 그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을 막으려면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할 것이다.

    구조작업은 러시아 해군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심해 잠수정과 많은 장비가 투입됐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이렇게 거친 바다에서 구조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러시아 해군은 이 일로 두고두고 비웃음을 살 것이다.

    쿠르스크는 소련이 붕괴하고 경제가 그토록 휘청거릴 때도 건조를 계속했던 러시아 해군의 최신형 잠수함이었다. 건조한 지 5년도 안 된 새 잠수함이 이제 바렌츠 해의 바닥에 고철로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엔 어떤 잠수함을, 어떤 군함을 마음놓고 출격시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조국 러시아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지. 안 그런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배들, 잠수함들, 모든 것을 말하는 거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모차크 중장은 머뭇거리고 두툼한 외투를 입은 포포프 사령관은 검은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하를 118명이나 집어삼킨 차가운 바렌츠 해는 여전히 난폭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이 글은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 참사를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배경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충돌했는가?

    쿠르스크 참사는 사고 원인이 러시아가 주장하듯 외국 잠수함과의 충돌이든 혹은 서방측이 주장하는 기기 결함이든 간에 직접적인 침몰원인은 어뢰실에 적재된 어뢰의 폭발이다. 선체 앞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총 9개의 격실 중, 앞부분 격실들이 집중적으로 파괴된 점, 그리고 사고 시간대에 노르웨이 지진연구소(NOSAR)에서 TNT 100kg과 TNT 1~2톤에 이르는 두 차례의 폭발을 감지한 점 모두 어뢰 폭발을 뒷받침한다. 동일한 충격파를 캐나다, 알래스카 소재 지진연구소도 관측했으며 사고해역 근처에 투입된 미국 잠수함도 폭발음 탐지를 시인했다.

    결국 어뢰실 폭발이 미국, 혹은 영국 잠수함과 충돌 끝에 이어졌다는 러시아측 주장은 일단 미국과 영국이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는데다 러시아 해군의 독자적인 증거수집 부족으로 입증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다만 러시아가 충돌설을 강하게 주장한 시점이 8월 20일 이후라는 점, 그리고 이 시기는 이미 러시아 구조대가 구조작업에 실패하고 서방측 구조대에 구조작업을 인계했을 시점이어서 러시아 해군의 구조실패에 대한 여론의 책임추궁이 심했을 때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쿠르스크가 왜 구난신호도 없이 침몰했는가 하는 점이다. 러시아 해군이 구조활동을 개시한 것은 쿠르스크호가 정기안전보고시간에 사령부와 통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부 발표에 따르면 쿠르스크의 최종 교신예정시간이 12일 18시였다고 하는데(일부 보도에서는 이 시간이 잠수함 실종 선포시간이었다고도 한다) 이 경우 침몰로 추정되는 23시 32분까지 왜 사령부와 교신하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시간 동안에는 폭발과 같은 치명적인 사고가 일어났다고 보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 잠수함은 항공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블랙박스와 비슷한 구조신호 자동 송신체계를 탑재하고 있으며 심각한 상황에도 이 장치들은 다중 안전장치에 의해 작동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쿠르스크가 구난 신호 없이 침몰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쿠르스크 침몰 직후, 미국은 이미 사고해역에 미국 잠수함 2척이 작전중이었음을 시인했다는 점, 그리고 영국 잠수함 역시 투입되었으나 영국은 부인하고 있다는 점도 단순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특히 구소련과 미국은 Cat and Mouse Game이라 부르는, 상대방의 잠수함을 추적하고 위협을 가하는 사례가 빈번했다는 점도 참고되어야 할 것이다.

    1968년 태평양 일본 북방해역에서 구소련의 공격원잠 K-129함이 미국 잠수함 Swordfish와 충돌 후 침몰했다는 주장과 1986년 대서양 버뮤다 해역에서 탑재한 미사일이 폭발하여 침몰했던 구소련의 양키급 전략원잠 K-219도 사고 직전 미국 잠수함 Augusta와 충돌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그 동안 미국 잠수함과의 충돌설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던 문제들이다. 넓은 바다에서 어떻게 잠수함이 충돌하느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추적중인 양측 잠수함이 접근전을 시도하면 충돌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구조작업의 문제점, 그리고 방사능 누출

    쿠르스크의 승무원들은 왜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었을까. 사고 해역의 수심은 100여 미터로 일반적으로 자력탈출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 수심 180미터에서도 탈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 경우 생존율은 매우 희박하다. 수압이 높은 곳에서 갑자기 수면으로 솟구칠 경우, 허파의 공기가 급격히 팽창하기 때문에(수심 100미터에서 올라온 경우 허파 내의 공기는 10배로 팽창한다) 허파의 손상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사고해역의 수온이 낮은 점도 문제가 된다. 0~1℃의 해수에 사람이 노출되면 대략 1~ 2시간이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이번 쿠르스크 침몰에서 러시아 해군이 구조작업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크게 비난받는 부분이다. 하지만 몇 가지 사례에서 서방 언론의 비난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잠수함구조선이 외국에 매각되고 해군은 그것을 사고 직후까지 몰랐다는 보도나, 구조잠수정이 없어서 영국의 구조잠수정(LR5)에 의존해야만 했다는 보도는 사실 오보나 다름없다.

    쿠르스크 구조작전에 러시아가 투입한 구조함은 미하일 루드니츠키(Mikhail Rudnitskiy: 배수량 7,960톤), 알타이(Altay: 배수량 4,040톤), 니콜라이 치커(Nikolai Chicker: 배수량 5,300톤) 외에 3척이 투입됐고 심해잠수정 역시 두 가지 타입에 4척 이상이 투입됐다. 적어도 장비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러시아 구조대가 집중적으로 활동했던 14~16일까지는 사고해역의 기상이 최악이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러시아 해군이 심해잠수부를 투입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실수이다. 질소중독을 막기 위해 혼합기체를 흡입하고 특수잠수복을 사용하는 심해잠수부는 이른바 포화잠수법을 사용하는데 수심 300미터까지도 잠수가 가능하다. 그러나 장기간의 숙련이 필요한 고난도의 잠수기술이며 고도의 잠수훈련 지원체계를 운용하고 잠수부를 육성하는 데 많은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러시아가 과거에 보유했던 해군 소속 심해잠수부는 모두 민간회사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다. 사실 쿠르스크의 9구획 해치를 개방했던 심해잠수부들도 군인이 아닌 북해유전 소속의 민간인 잠수부들인데 어찌됐든 러시아 해군이 자체적으로 구조전문인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점은 비판받을 것이다(참고로 한국 해군은 SSU라는 심해구조 전문부대를 육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쿠르스크의 비극은 잊혀가지만 앞으로의 문제점은 방사능 누출일 것이다. 일단 구조작업을 맡은 노르웨이와 영국 구조팀이 방사능 누출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선체가 계속 방치되면 해수에 의해 선체 내부가 빠른 속도로 부식되고 손상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사능 누출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 이 때문에 선체 인양이 고려되고 있으나 쉬운 일은 아니다.

    대형 잠수함인 쿠르스크의 수중 배수량은 1만 8,000톤, 내부가 침수됐기 때문에 침몰상태의 무게는 2만 5,000톤 정도로 예상되고 있다. 인양작업에 소요될 경비가 1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러시아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체를 인양하는 대신 원자로 구획을 중심으로 부식방지처리를 하여 사고잠수함을 완전히 밀봉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또한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무엇이든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서는 빠른 대처가 필요하나 이미 구조 작업에서 무능함을 드러낸 러시아 정부와 해군에게 현명한 조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한국 해군도 현재 장보고급이라 명명된 잠수함 9척을 보유하고 있다. 잠수함은 사고에 극히 취약한 함정이라는 점으로 볼 때, 우리도 언제든 잠수함 사고를 당할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번 쿠르스크함 참사로 평상시에 잠수함에 대한 안전관리는 물론이고 잠수함 구조체계에도 각별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冬

    쿠르스크 사건 시간별 상황 일지

    ● 8월 10일 10:00

    잠수함 쿠르스크 비디아예보 기지를 출항

    ● 8월 12일 오전(?)

    잠수함 쿠르스크, 작전해역에서 어뢰발사훈련을 통보

    ● 8월 12일 18:00

    잠수함 쿠르스크 정기 안전보고 시간(쿠르스크는 보고하지 않음)

    ● 8월 12일 23:30

    노르웨이지진연구소(NOSAR) 리히터 진도 1.5도의 충격파 감지

    2분 후(23:32) 진도 3.5의 충격파 감지(TNT 2톤 상당의 폭발위력)

    ● 8월 13일 04:35

    러시아 순양함 표트르 벨리키, 침몰된 쿠르스크 발견

    ● 8월 13일 18:30

    러시아 구조함 니콜라이 치커호, 잠수종에 의한 구조작업 2차례 실패

    ● 8월 14일 10:45

    러시아 해군 공보국, 쿠르스크 침몰을 공표

    ● 8월 14일

    러시아 구조함, 미하일 루드니치키, 알타이호 투입. 프리즈형 심해잠수정을 이용하여 구조재개, 모두 실패함

    ● 8월 15일

    쿠르스크 승무원으로부터 구조신호가 끊어짐

    같은날, 러시아 해군 참모총장 V.N.쿠로도예프 대장, 쿠르스크함의 남은 산소가 18일까지 승무원을 생존시킬 수 있다고 발표

    프리즈형 심해잠수정, 강풍과 빠른 조류로 구조작업 4~5회 중단

    ● 8월 16일

    베스터형 심해잠수정 투입, 평균 풍속 15m/sec, 파고 2~3미터로 구조작업 수차례 중단, 잠수정 중 한 척이 쿠르스크에 접근중 강한 조류로 충돌사고를 일으킴

    같은날 푸틴 대통령, 외국에 구조 지원을 요청

    ● 8월 17일 12:00

    노르웨이 구조함 노먼 파이어니어호, 영국 심해잠수정 LR5를 탑재하고 노르웨이 트론헤임항을 출항

    ● 8월 19일 19:30

    노르웨이 구조함 노먼 파이어니어호 사고해역 도착

    같은날 23:00, 노르웨이 구조함 시웨이 이글호, 사고해역 도착(심해잠수부 탑승 노르웨이인 4명, 영국인 8명)

    ● 8월 20일 13:15

    노르웨이 잠수부 3명, 제9격실 해치에 접근. 쿠르스크함 내부가 완전히 침수된 것을 확인. 생존자 없음. 구조작업 종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