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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현주소

비정한 세상살이에 고개숙인 국민영웅들

벤처사업 실패한 김재엽, 시간강사 전병관, 보증섰다 2억날린 김원기

  • 이영미·스포츠라이터

비정한 세상살이에 고개숙인 국민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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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메치기의 1인자로 유도를 인기 종목으로 올려놓았던 84년 LA올림픽 하프헤비급 금메달리스트 하형주(40)는 현재 동아대 스포츠심리학 교수다. 역대 금메달리스트중 교수가 된 사람은 하형주가 유일한 케이스. 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뒤 비교적 성공가도를 달려온 하형주는 교수 외에도 부산시의회 의원과 대한유도협회 이사를 맡는 등 대외적인 활동도 꾸준히 펼쳤다.

그러나 그의 생활 뒷면에는 내색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동아대에 엄연히 유도부가 있는데도 지도자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김재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계획대로였다면 동아대 유도부를 맡아 제자들을 키우고 있겠지만 선수 시절부터 잦은 충돌을 빚었던 사람들이 하형주한테 지도자 자리를 맡길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매트가 아닌 강단에서 교양체육을 맡게 된 하형주는 1학기에 13시간이나 되는 수업시간을 채우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배운 게 유도밖에 없는 사람이 교양 체육을 맡았으니 가르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6시간밖에 채울 수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한 데 대한 경위서를 쓰는 일이 제일 바빴죠. 제 연구실에 책상과 컴퓨터, 팩스가 그럴 듯하게 놓여 있는데도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밥값을 제대로 못한데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죠.”

도피하다시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년간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서울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응시했다가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 다음 성균관대에서 어렵게 박사 과정을 마쳤다. 하형주는 동아대에서 스포츠심리학을 맡게 된 것도 실력 반, 투쟁 반이라고 설명한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우여곡절 끝에 연구실을 확보한 하형주는 요즘 다른 교수들처럼 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누군가의 ‘장난’으로 연구실을 빼앗길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선수 시절부터 대학 교수가 꿈이라고 주문처럼 말하던 전병관(31)은 평택 경문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후 교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역도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전성기를 보내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실격패하고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동안 운동을 쉬다가 다시 바벨을 잡았지만 결국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해 7월 쓸쓸히 은퇴했다.



“금메달은 빛좋은 개살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에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 드물다. 오랜 선수생활로 인해 사회 물정에 어둡고 남을 쉽게 믿는 순진함이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38)은 현재 체육관을 운영중이다. 처음 체육관을 개관할 때만 해도 침체된 한국 복싱의 부흥을 위해 직접 후배 양성에 나서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난에 부딪히자 복싱 에어로빅을 개발, 복싱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91년 세계타이틀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94년 은퇴하자마자 시작한 일이 즉석 탕수육체인점. 유명한 복싱 선수라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사각의 링처럼 진실만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탕수육 체인점을 처분하고 할 일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솔잎은 송충이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체육관을 내게 된 것이다.

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82kg급의 한명우(44)는 불교미술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사찰 개보수 작업 때 단청을 그려주는 대행사를 운영중인데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사찰이 대부분이라 사무실을 운영하기도 벅찰 정도다. 한명우는 선수 시절보다 은퇴 후의 생활이 파란만장했다. 은퇴 후 대표팀 코치로 2년간 활동하다 일본으로 건너갔고 다시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으로 초청돼 말레이시아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도착해보니 레슬링팀이 없었다. 말레이시아 국왕의 양아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말레이시아 레슬링을 부흥시켜달라고 간청했지만 생활비조차 제대로 못받는 실정이었다.

결국 레슬링을 포기하고 국왕의 배려로 250만달러를 융자받아 한국을 주공급처로 삼은 숯불 공장을 차렸다가 IMF가 터지는 바람에 빚만 떠안게 됐다. 5년 동안 말레이시아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가며 고생했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귀국한 한명우는 1년 전부터 그림 그리는 후배들과 인연을 맺고 불교미술 사업에 손을 댔다. 지금 한명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레슬링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금메달리스트는 빚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집니다. 메달리스트라고 사회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거나 명예를 얻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젊은 청춘을 온통 운동에만 바쳤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증섰다가 2억 날린 김원기

“영업소장은 종합 예술인입니다. 전문 지식과 행동으로 고객과 직원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힘듭니다.”

삼성생명 광명지점 교육 차장으로 일하는, 84년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39). 그는 89년 보험회사 직원으로 새출발한 뒤 전국 각지의 영업소장을 거쳐 올해부터는 교육 관리자로 나섰다. 금메달로 받은 상금을 형제들 집 장만하는데 고스란히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다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2억원이란 엄청난 액수의 빚을 떠맡게 됐다. 써보지도 못한 남의 빚을 갚는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4년 동안 눈물겨운 노력 끝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절치부심, 사회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더욱 더 보험 일에 매달리게 됐다는 김원기. 금메달리스트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사업을 시작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다양한 사회현상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과감히 직장 생활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험 영업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전문 지식과 어려운 용어들을 알기 쉽고 간략하게 설명해내는 입심이 부족해 초반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운동을 통해 얻었던 명예는 이미 과거일 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사회에서 더 대우받는 게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금메달을 버리고 나왔다는 김원기는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공부했고 말솜씨를 늘리기 위해 사람 만나는 일도 꾸준히 했다. 김원기의 꿈은 소박하지만 거창하다. 삼성생명 이사까지 오른 후 양로원을 차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에게 편한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74kg급의 김영남(41)은 현재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다. 그가 이역만리 카자흐스탄까지 건너가게 된 것은 서울올림픽 당시 결승전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카자흐스탄의 다울렛 때문. 올림픽 출전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다울렛은 김영남에게 사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김영남은 2년 전 서울에 (주)코앤카란 무역회사를 차려 창업 1년 만에 카자흐스탄에 국산 자동차와 의약품을 수출, 400만 달러(약 5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금은 가족 모두가 카자흐스탄으로 이민, 한국 식당을 경영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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