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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에로영화 걸작 10선

조작된 관능, 찰라의 쾌락

  • 김의찬·영화평론가

조작된 관능, 찰라의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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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의사인 빌은 아내의 고백을 듣고 황망해한다. 아내 앨리스가 한 남성에게 육체적으로 강하게 끌린 적이 있으며 가정을 포기할 의사까지 있었음을 내비친 것이다. 당황한 빌은 길거리를 헤매고, 매춘부와 잠자리를 시도하기도 하며, 혼음 파티장을 방문하는 등 일탈에 대한 몽상에 몸을 적신다.

원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에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기로 이름이 높다. “사람들에게 무슨 의도인지 말해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된다”는 철학을 지닌 인물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연출에 있어서의 완벽주의는 큐브릭 감독 연출작 전편에 흐르는 공통점이다. 그런데 ‘아이즈 와이드 샷’은 조금 다르다. 그의 다른 여느 영화보다 직설적이며 솔직한 기운을 품고 있다.

결론에 이르러 ‘아이즈 와이드 샷’은 일반적인 에로영화와는 대척점에 선다. 부부간의 애정을 중시하고, 가정 외부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도덕적인 훈계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하지만 톰 크루즈가 연기한 빌이 사창가를 헤매고 가면을 쓴 일군의 남녀가 난교 파티를 즐기는 등 충격적인 묘사가 영화 곳곳에 박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이즈 와이드 샷’에서 성적 판타지의 극단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감독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방황을 고백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아이즈 와이드 샷’은 ‘감각의 제국’이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는 또 다른 경지, 즉 인간 무의식에 잠복해 있는 성적 에너지를 스크린으로 옮겨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거장이 던지는 성에 관한, 또 다른 길고 암시적인 보고서인 셈이다.

핑크영화와 로망포르노



싸구려 에로영화에도 나름의 미학이 있긴 할까? 물론 있다. 적절한 예를 가까운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국내에선 한 영화제를 통해 흥미로운 영화들이 상영됐다. 일본의 ‘로망포르노’ 영화가 한자리에 모인 것.

로망포르노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반 극영화적인 장치, 다시 말해 드라마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남녀의 섹스장면을 포함하는 영화장르를 칭한다. 일본에서 이 장르는 1960년대 영화시장의 40%를 차지했던 적이 있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에로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일본에서 로망포르노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일본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되기도 한다.

일본에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학생운동 열풍이 불었다. 전공투를 비롯해 여러 노선을 지향하는 각 단체의 시위와 데모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런 변혁의 기운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혁명의 꿈이 사라진 것이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거나 대학을 자퇴한 학생들은 자의는 아니지만 사회 체제 속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회를 제공한 것이 싸구려 영화판, 즉 에로영화 제작사였다.

당시 닛카츠 등의 영화사에서 로망포르노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을 막 도입한 무렵이었다. 에로영화 제작사들이 연출 지망생들에게 요구한 사항은 간명했다. 다른 건 상관없으니 영화에 ‘섹스’장면만 집어넣으라는 것이었다. 출세대열에서 탈락한 젊은이들이 에로영화 제작현장으로 뛰어들었고 미처 꺼내놓지 못한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정치적 메시지를 거기에 녹여 놓았다. 당시 로망포르노 영화를 만들어 유명해진 감독으로는 와카마츠 코지, 구마시로 다츠미, 다나카 노보루 등이 있다. 대학 출신은 아니지만 와카마츠 코지는 정치적 구호를 에로영화에 섞어 넣은 대표적 감독이다.

‘범해진 백의’나 ‘태아가 밀렵할 때’ 등 당시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면 선정적인 섹스 장면도 있지만 학생들의 시위를 비롯한 정치적 내용이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흐르고 있다. 로망포르노, 즉 싸구려 에로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사회 억압에 저항하려는 감독의 연출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던 셈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 연출자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이 로망포르노 계열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의 최양일, 그리고 ‘큐어’의 구로사와 기요시에 이르기까지 최근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감독들은 이 싸구려 영화판을 출발점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흔히 에로영화를 ‘B급문화’로 칭하기도 한다. 주류문화와는 구분되는 비주류문화라는 의미다. 일본의 로망포르노에서 알 수 있듯, 에로영화는 단순히 저예산으로 만들어지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장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주류문화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동시에 사회적인 함의를 충분히 지닌 장르인 것이다.

물론 모든 에로영화가 작품성을 지니고 있고, 완성도가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B급문화, 즉 상대적으로 상업적인 면에서 부담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에로영화는 때로 정치적인 흐름과 나란히 움직이며 다른 장르의 영화가 시도할 수 없는 실험성과 과격함을 노출해왔다. 이것이 바로 에로영화를 싸구려이며 천박한 장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 에로영화의 현황은 어떨까. 연간 제작되는 에로영화는 대략 150여 편. 전체 비디오 시장의 10%를 상회한다. 국내에서 에로영화는 주로 극장용 장편이 아닌 비디오용으로 제작된다. 비디오 카메라로 작업하고 배우들도 아마추어 수준이기 때문에 완성도는 떨어진다.

국내 에로영화는 ‘패러디 전략’에 의존하는 경우가 잦다. 일반 극영화가 히트할 경우 비슷한 제목을 따와서 어감이 유사한 제목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접속’이라는 영화가 성공하자 ‘접촉’이라는 에로영화가 곧 등장한 것이 좋은 예다.

에로사극과 패러디 전략

에로영화는 시류를 타기도 한다. 시사적인 뉴스가 장안에 화제로 떠오르면 곧 비슷한 아이템의 에로영화가 제작되어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한다. 전화방이 물의를 일으키면 ‘전화휴게방’이라는 에로영화가 눈에 띄고 ‘빨간 마후라’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 ‘빨간 딱지’라는 에로물이 시중에 깔리곤 한다. 한때 몰래카메라가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자 아예 몰래카메라 기법을 빌려온 ‘모텔 성인장에서 생긴 일’이라는 영화가 등장한 적도 있다.

앞서 말했듯, 국내 에로영화는 시장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조악한 완성도나 기존영화의 제목 및 내용을 차용하는 것으로 인해 특유의 ‘독창성’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혁신적인 에로영화의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성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비로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성표현을 스크린에 조금씩 섞기 시작한 것이다. 일명 ‘호스티스 영화’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이른바 매춘여성에 대한 묘사는 이후 본격 에로영화로 넘어가면서 몇 가지 시리즈로 전승되기에 이른다.

대표적인 작품이 ‘애마부인’이다. 1982년작 ‘애마부인’은 정인엽 감독 작품으로 가정에 소홀한 남편과 육체적 갈망에 사로잡힌 한 여성의 대립을 축으로 한다. 안소영이라는 여배우를 무명에서 일약 ‘육체파’ 스타로 떠오르게 한 ‘애마부인’은 비록 내용 면에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여성의 가슴 등을 주요하게 강조하면서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침체해 있던 한국영화계에 탈출구를 마련해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1996년까지 총 13편이 제작됐다.

이장호 감독도 평가할 만하다. 그는 ‘무릎과 무릎 사이’와 ‘어우동’ 등을 만들어 흥행 면에서 에로 장르를 안정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1985년작 ‘어우동’은 에로 사극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어우동이라는 기생이 억압적인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몸을 무기로 뭇 남성을 희롱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는 줄거리다.

‘어우동’은 사극이라는 틀 안에서 농염한 에로티시즘을 성공적으로 표출해냈으며 방기환의 원작소설을 성공적으로 영상화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영화가 발표될 당시엔 한 나라의 임금이 계곡가에서 기녀의 몸을 핥는 등의 표현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어우동’외에 ‘산딸기’와 ‘뽕’ 등의 시리즈물을 낳은 에로 사극의 전통은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90년대에 한국의 에로영화는 ‘변금련’ 시리즈와 ‘성애의 여행’, 그리고 ‘젖소부인’ 시리즈 등을 낳음으로써 장르를 이어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최근 들어 비디오용 에로영화는 지나친 패러디 전략에 의존함으로써 더 이상 창조적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진짜 야한 걸 보여다오

최근 한국영화 중 성에 관한 노골적 영상으로 이목을 끈 작품이 몇 편 있다. ‘노랑머리’와 ‘거짓말’ 그리고 ‘미인’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실망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예상외로 성 표현 수위도 그리 높지 않을 뿐 아니라 에로틱함을 일종의 홍보수단으로 삼은 정도에 지나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위 영화들 중 명백하게 ‘에로영화’라 칭할 수 있는 영화가 전무함은 그러한 추측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노랑머리’와 ‘미인’의 경우엔 평범한 드라마이거나 멜로적 성격이 강한 영화임에도 간간이 에로영화식 포장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거짓말’은 작가주의와 상업영화 사이의 기묘한 지점을 잡아 만든, 일종의 예술영화 성격이 짙은 작품으로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주변에선, 에로틱함을 강조하는 영화들만 있을 뿐 진짜 ‘에로영화’는 찾아보기 힘든 아이러니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아직 등급외전용관이 없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에 원인이 있기도 하다. 성표현의 수위가 높은 영화가 제작된다 하더라도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마땅한 통로가 없다면 사장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미국에선 한때 성인영화 전용관이 800여 개가 넘는, 에로영화의 호황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그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세인들의 관심도 미국 평단이 1970년대 에로영화에 비교적 긍정적인 평을 내리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이유는 ‘비디오’라는 매체 때문이었다.

극장용 에로영화 대신 비디오로 제작한 포르노물이 시장을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싼 값에 노골적인 섹스 장면을 만날 방법이 생긴 것. 기실 에로영화의 이러한 ‘애로사항’에 관한 내용들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라는 영화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부기 나이트’는 싸구려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에 대한 영화’다. 나이트 클럽에서 포르노영화 감독 잭의 눈에 든 에디는 ‘더크 디글러’라는 예명으로 포르노 스타가 된다. 성공의 기쁨을 맛보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에디는 곧 마약 중독에 빠져들고 영화판을 떠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에로영화의 마력은 남미축제인 카니발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카니발에 참가한 사람들은 잠시의 쾌락을 위해 꼬박 1년을 준비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 동안 자신의 쾌락을 카니발의 화려한 행렬에 쏟아붓는다. 에로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마치 축제에 참석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육체와 육체가 뒤엉키고, 거기엔 성과 죽음, 때로는 진지한 메시지가 첨가되어 보는 이의 감성과 지성을 자극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의 주인공 에디는 싸구려 영화판을 전전하다가 마약과 섹스에 중독된다. 어느새 프로로서의 태도를 잃어버리고 자멸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에로영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르노그라피의 역사가 요약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좀더 극심한 쾌락을 원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는 점차 저열하고 값싼 것들로 대체되어간다. 이 와중에 누구는 타락의 길을 걷고, 누구는 돈방석 위에 올라 앉는다.

앞으로 영화는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부기 나이트’는 이러한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돌아온 탕아 에디가 다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자신의 ‘물건’을 거울 앞에 꺼내보면서 “넌 스타야”라며 중얼거리는 장면이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부기 나이트’의 마지막 장면은 뭔가 명확한 예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눈앞에 펼쳐진 쾌락을 즐기되, 이것이 작위적인 ‘쇼’임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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