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불상 전시실에 가보면 가장 크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석조 불입상과 석조 보살입상 한 쌍이 진열되어 있다. 이 석조 불· 보살입상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경주 일대 고적(古蹟)을 조사하면 서 월성군(月城郡)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현재 경주시 외 동읍 신계리)의 감산사(甘山寺) 터에서 발견해 당시 총독부 박물관 으로 옮겨 온 것이다. 옮겨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7월에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와서 그 해 8월29일 한일합병 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초대 총독으로 눌러앉아 가혹한 무단통치로 조선 8도를 얼어붙게 했던 사내정의(寺內正毅, 1852∼1919년)는 191 5년에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 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할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었다.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 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 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 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조선문화에 대한 깊은 배려가 깃들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정책의 확실한 증거가 제출되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경주 일대의 고적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도 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 두 불·보살입상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하자, 총독부는 물산 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새로 지은 특설 (特設)미술관에 불·보살입상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월에 옮겨와 특설미술관 전시실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좌우에 세워 놓은 후 이 해 8월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여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한 다. 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그대로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보살상은 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로써 경복궁 탈취를 기정 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년 7 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 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 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거기에 동원된 첫 희생물 이 이 두 석조 불·보살입상이었다.
이 석조 불·보살입상의 광배 뒤에는 장문(長文)의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삼국유 사(三國遺事)’ 권3 남월산(南月山) 감산사(甘山寺) 조에서도 금당 (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의 화광(火光, 광배) 후기(後記)를 인용하 여 이 양 불·보살입상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상기를 잘못 읽어 몇 군데 오자를 냈을 뿐만 아 니라 전체를 옮겨 적은 것도 아니었다. 이에 일인 학자들이 정밀하 게 그 탁본을 찍어 대조하며 바로잡는 작업을 편 결과 1919년 3월에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2권을 편찬해 내면서 그 전문(全 文)을 수록하여 처음 세상에 공개하였다. 이 양대 석조 불·보살입 상을 조성한 지 1200년이 되는 기미년에 이루어진 일이고, 또 기미 년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 3월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 참으 로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다.
이후 1920년에 발행된 ‘박물관진열품도감(博物館陳列品圖鑒)’ 제 2, 제3집에 이 조상기가 실리고, 1932년 12월에는 일본인 사학자 말 송보화(末松保和)가 ‘감산사 미륵존상 및 아미타불의 화광후기(火 光後記)’라는 논문을 써서 일반에 널리 알렸다. 뒤 이어 1935년 8 월에는 일본인 금석학자 갈성말치(葛城末治)가 ‘조선금석고(朝鮮金 石攷)’ 1책을 편찬하면서 ‘18 경주 감산사 미륵보살조상기’, ‘1 9 경주 감산사 아미타조상기’의 2개 항목으로 나눠 조상기 내용을 소개하고 금석학적인 가치를 평가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 중길공(中吉功)과 우리나라의 문명대(文明大) , 김리나(金理那) 교수 등 국내외 미술사학자들이 이에 대한 논고를 다방면으로 전개해오고 있다.
이는 이렇게 분명한 조상기를 가진 완전한 불보살상을 다른 곳에서 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그 조상기 내용이 풍부하여 신라문화의 황 금기인 성덕왕대의 사상 경향과 정치 상황 및 생활 풍습 등을 유추 (類推)할 수 있고, 서예와 문장의 수준을 확인하고, 불보살상 연구 의 양식사적 기준치를 마련할 수 있는 등 다양한 성과를 얻을 수 있 기 때문이었다.
불보살 입상 광배 뒤에 새겨진 記文
그렇다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할 터이니 우선 먼저 지어진 (도판 1)의 광배에 새겨진 기문(記文)인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부터 전문을 옮겨 보겠다.
“개원(開元) 7년(719) 기미 2월15일에 중아찬(17관등 중 제6위) 김 지성(金志誠, 652∼720년)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제7위 관등)과 돌아가신 어머니인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를 받들기 위해 삼가 감산사(甘山寺) 한 곳 에 돌 아미타상 1구와 돌 미륵상 1구를 만든다.
대체 듣자니 지극히 큰 도(道)는 아득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 며 능인(能仁, 석가모니라는 뜻)은 열반에 들어 가고오는 것이 없다 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현법(顯法;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며 설명할 수 있는 법, 즉 대·소승 경전에 의한 가르침)이 이에 응하 여 3신[三身; 비로자나불과 같이 형상 없는 이념체인 법신(法身)과 아미타불과 같이 불멸의 형상을 가지고 영구히 존재하는 보신(報身) , 석가여래와 같이 중생제도를 위해 중생의 몸으로 잠시 나타내 보 인 응신(應身)을 말한다. 법상종에서는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 用身), 변화신(變化身)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외에 법신, 응신, 화신(化身)으로 말하는 경전도 있다]으로 근기(根機, 타고난 바탕) 에 따라 (중생을) 건져내 (고해를) 건너게 하고 천사(天師, 도교의 지존)의 10호[十號; 천존(天尊)이 가지고 있는 십종 별호, 自然, 無 極, 大道, 至眞, 太上, 道君, 高皇, 天尊, 玉帝, 階下]를 드러내 소 원이 있으면 모두 이루게 한다.
제자인 지성은 성세(聖世, 좋은 세상)에 나서 영광스런 지위를 역임 하였는데 지략(智略)이 없는데도 시속(時俗)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하였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장 자(莊子)와 노자(老子)의 소요[逍遙; 자연 속을 거님. ‘장자(莊子) ’ 첫 편의 제목이 소요유(逍遙遊)다]를 좋아하고 뜻이 진종(眞宗, 참된 종교 즉 불교)을 중히 여겨 무착[無着; 4세기경 간다라 폐샤왈 에서 태어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편찬한 대승논사] 의 심오한 깨달음을 희망하였다.
나이 67세(718년)에 맑은 조정에서 임금 받드는 일을 버리고 드디어 한가한 시골 밭으로 돌아와 5천언(五千言, 노자 ‘도덕경’의 글자 수가 5000자임)의 ‘도덕경’을 펼쳐 읽으니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현도(玄道, 심오한 도)에 들어온 듯하고 17지(地)의 법문[法門; 무 착이 지은 ‘유가사지론’을 일컫는 말이다]을 연구하니 색(色; 현 상)과 공(空; 근본)이 무너져서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어서 다시 정명(旌命,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임금의 명령)이 초가 집으로 떨어져서 왕도의 바쁜 임무를 맡게 되자(717년, 기미) 비록 벼슬에 있어 세속에 물들고 있으나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버릴 수 없어 지성의 재산을 모두 기울여 감산(甘山)의 가람(伽藍) 을 건립하였다.
엎드려 원컨대 이 작은 정성으로 위로는 국주대왕(國主大王, 나라의 주인인 대왕 즉 성덕왕)이 1000년의 많은 수명을 누리고 만복(萬福) 의 큰 기쁨을 늘리는 밑천이 되며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 이찬공이 온전치 못해 시끄럽고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 으로 태어나지 않는 묘과(妙果, 신묘한 과보니 열반을 뜻함)를 얻는 밑천이 되게 하소서.
아우인 양성(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현도(玄度) 사(師) 누 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 리(阿好里) 겸해서 서형(庶兄)인 급한(及漢) 일길찬 총경(聰敬) 대 사(大舍, 제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 및 가없는 법계(法界)의 일체 중생이 함께 6진[六塵; 눈, 귀, 코, 혀, 몸과 머 리 등 6종의 인식 기관으로 느끼는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이치 등 여섯 가지 대상물]에서 벗어나 모두 10호[十號; 원래 불타가 열 가지 별호를 가지고 있으니 如來, 應供, 正遍知, 明行足, 善逝, 世 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世尊이 그것이다. 이를 본떠 도 교 천존사에게도 10호를 붙인 것이다]에 이르게 하소서(불타의 경지 에 이르게 하라는 의미).
비록 성산(城山, 성을 쌓은 산)이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원은 끝 이 없을 것이고 억겁의 돌이 사라진다 해도 존용(尊容, 존귀한 얼 굴)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구해서 성과 없는 것이 없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성취하리니 만약 이를 따라서 마음으로 원하는 이가 있 다면 모두 함께 그 선인(善因, 착한 인연)을 짓도록 합시다. 돌아가 신 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가에 이를 뿌렸다.”
김지성과 김개원의 ‘특별한‘ 관계
다음 (도판 2) 광배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도 그 내용이 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조성 발원자가 김지성이 아니라 김지 전(金志全, 652∼720년)으로 되어 있어 잠시 혼란스럽게 하지만 내 용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친족관계에서 김지성, 김지전 두 인물이 일치하므로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특히 두 인물의 전처와 후처 이름이 서로 일치하니 두 인물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김지성이란 이름을 미륵보살입상의 광배를 새기고 난 직후 에 김지전으로 바꿔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왕명에 의한 개명인데, 김지성을 김지전 으로 왜 바꿔야 했는지는 차차 밝혀보기로 하고 먼저 조상기 끝부분 에 새겨진 내용부터 옮겨 놓아야 하겠다. 이 부분은 의 조상기에는 없고 의 조상 기에만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개원 7년(719) 기미 2월15일에 내마 총(聰)이 짓고 봉교[奉敎; 교 서(敎書)를 받듦, 즉 왕명을 받음] 사문(沙門, 승려) 석경융(釋京 融)과 대사(大舍, 제12관등) 김취원(金驟源)이 교서를 받들어 쓰다.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동해 흔지 해변에 뿌렸다. 후대에 추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일에 선조(善助, 도움)함이 있었다. 김지전 중아찬(重阿, 제6관등)은 삼 가 살아 생전에 이 선업(善業)을 지었다. 나이 69세인 경신년(720) 4월22일 돌아가서 이를 쓰게 되었다.”
이로 보면 김지성은 67세 나던 해인 성덕왕 17년(718) 무오년에 벼 슬을 버리고 감산장(甘山莊)으로 와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 년(719)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가면서 감산장을 절로 만들고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불사 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69세로 돌아가 고 말았다. 그래서 그 아버지를 위해 조성했던 아미타불입상 조상기 말미에 그의 공적과 사망 기사를 간단하게 첨가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 김지성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상기 내용과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공식기록들을 연계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조상기를 제외하고 김지성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책부원귀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外臣部) 15 조공(朝貢) 3에 나오는 다음 기사뿐이다.
“신룡(神龍) 원년(705) 3월에 신라왕 김지성(金志誠)이 사신을 보 내와 조공하다. 9월에 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 지방 특산물)을 바치다.”
당 중종 신룡 원년이면 신라 성덕왕 4년이다. 그러니 신라왕은 김지 성이 아니라 김륭기(金隆基, 690∼762년)였다. 성덕왕 11년(712) 3 월에 당 현종(玄宗) 이륭기(李隆基, 685∼762년)가 등극할 준비를 끝내고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성덕왕의 이름을 고치라고 요구하여 성덕왕이 김흥광(金興光)으로 개명한 사실까지 있으니, 당 조정에서 성덕왕의 이름을 몰라서 김지성으로 기록해 놓았을 리 없 다.
따라서 일본인 학자 말송보화(末松保和)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신 라왕이 김지성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옮겨 쓰는 과정 에 글자가 빠져 신라왕 김지성으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책부원귀’는 10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북송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1005)에 왕흠약(王若)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지은 책이니, 이렇게 방대한 편찬 사업을 하다보면 이런 실수는 얼 마든지 저질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덕왕 4년 3월에 김지성이 견당사(遣唐使)의 정사(正使) 가 되어 당나라에 갔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8 성덕왕 본기 성덕왕 4년조에는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 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어 9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는 기록이 있으므로 ‘책부원귀’의 기사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준 다. 다만 사신의 이름이 빠져 있을 뿐이니 김지성이 3월에 정사로 갔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 조상기에서 김지성은 자신의 부모형제는 돌아갔거나 살아 있거나 간에 모두 거명하면서 그들의 복을 비는데, 부모 형제 부인 이외에는 오직 국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의 복 을 빌고 있을 뿐이다. 첫머리에 국왕의 복을 비는 것은 왕조 사회에 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다음에 이찬 김개원을 거명하고 있다는 사실 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김개원이란 인물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년)의 막내왕자 로 효조왕(孝照王, 687∼702년) 4년(695)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밖에 안 된 고아였던 그 아우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는 이로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었다.
전 호에서 살펴본 대로 김개원은 그 누님들인 김흠운(金運, 631∼65 5년)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 ?)와 김유신(金庾信, 595∼67 3년)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년∼712년 이후)과 함께 각각 3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었다. 3 가문 결속의 구심점은 태종무열왕의 적장손 혈통이었다. 이런 원칙 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13세밖에 안 된 고아인 성덕왕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김개원은 성덕왕의 종조부이자 상대등으로 거의 섭정 지위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개원은 세 집안의 결속을 위해, 이미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조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으므로 이제는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년(70 4)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다. 그리고 나서 다음 해인 성덕왕 4년(705) 3월에 김지성이 사신으로 갔으니 아마 왕비 책봉을 청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미타산(彌陀山)이 ‘무구정광대다 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번역했으므로 김지성이 이를 구해 돌아와서 김개원과 성덕왕에게 보여 다음 해인 신룡 2년(706), 즉 성덕왕 5년 5월30일에 (15회 도판 6)을 보수하게 하 였던 듯하다.
부모인 신문왕과 신목태후 및 형왕인 효조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 을 보수한다 했지만 국왕 부부의 복리 증진과 수명 장구 및 왕자 생 산이 그 최종 목표였다. 이런 일을 주관한 것은 사실 16세밖에 안되 는 어린 소년 성덕왕이 아니라 환갑 나이에 접어든 상대등 김개원이 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무 총책은 성덕왕의 외숙부였으리라 추정되 는 김순원(金順元)이 맡았다는 사실을 이미 앞에서 밝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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