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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고혹미, 감산사 석조불보살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한국 최고의 고혹미, 감산사 석조불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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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지성(652∼720년)은 55세에 접어들어 노성한 시기였으니 아 마 현재 총무처에 해당하는 집사부(執事部)의 차관 자리인 전대등 (典大等)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사실 김개원은 성덕왕 5년(706) 1 월에 상대등 자리를 김인품(金仁品)에게 넘기는데 이미 성덕왕이 17 세가 되어 어느 정도 사리 판단을 할 수 있고 왕비 책봉이 이루어져 왕권이 반석 위에 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해에 성덕왕은 원자(元子)인 효상(孝)태자 중경(重慶, 706∼717 년)을 얻고 11년(712) 8월에는 김유신 처인 대고모 지소부인을 왕비 의 칭호에 해당하는 부인(夫人)에 봉하며 김유신 집안과 밀착되어간 다. 성덕왕이 이렇게 처가인 김유신 집안과 밀착되어가자 성덕왕의 외가인 요석공주 집안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김순원이 김개원을 움직 여 김원태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게 하는 듯하니 이것이 성덕왕 15년(716) 3월의 일이다.

이 일이 벌어질 때 집사부의 중시(中侍, 장관)를 맡고 있던 사람은 이찬 김효정(金孝貞)이었는데, 그는 김순원계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에 사실상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전대등은 김지성이었다. 그러니 김지성은 자신이 책봉사로 당나라에 가서 책봉을 받아냈던 왕비를 자신의 손으로 출궁시키는 악역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실상 섭정의 지위에 있던 김개원의 허락이 없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성덕왕은 이미 27세의 장년이 되었는데도 종조부 김개원과 외숙부 김순원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성정왕후를 궁 밖으로 내보내면서 비단 500 필, 밭 200 결, 벼 1만 석, 대저택 한 채를 하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6년(717) 6월에는 12세밖에 안 된 태자 중경 (重慶)을 시해하는 듯하다.

이런 대사건에 성덕왕은 격노하였을 것이고 그 책임을 물어 집사부 수뇌들을 파면했을 터이니 성덕왕 17년(718) 정월에 중시 김효정(金 孝貞)이 사퇴했다는 ‘삼국사기’ 권8 성덕왕 본기 17년 정월의 기 사가 이를 말해준다. 이때 전대등 김지성도 함께 문책, 파면당하는 듯하니 “시속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하였 다”는 내용이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 은 성정왕후의 친정 집안이 성덕왕의 총애를 믿고 지나치게 발호하 여 여러 가지 불법을 자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서 이런 표현을 했을 것 같다.



어떻든 이래서 김지성은 67세에 벼슬을 내놓고 그의 별장인 감산장 에 내려와 ‘노자’와 ‘장자’ ‘유가사지론’을 읽으며 유유자적 (悠悠自適)하려 한다. 이때 이미 김지성은 권세의 허망함과 인생무 상을 절감하고 장차 이 감산장으로 절을 삼기로 결심하고 그 준비를 진행했던 듯한데, 이 일을 미처 마무리짓기 전인 성덕왕 18년(719) 에 왕명으로 다시 전대등으로 입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감산장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감산사로 하고 이 미 조성이 끝나가던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각기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에 봉안하면서 개원 7년(719) 기미, 즉 성 덕왕 18년 2월15일 석가여래 열반재일을 기해 봉불식(奉佛式)을 겸 한 개산재(開山齋; 절을 창건하고 처음 올리는 재)를 크게 베풀었던 듯하다.

이 소식을 들은 성덕왕은 당대 최고학자인 설총(薛聰)을 시켜 조상 기(造像記)를 짓게 하고 승려인 석경융(釋京融)과 대사인 김취원에 게 각각 미륵보살입상의 조상기와 아미타불입상의 조상기를 써 새기 게 하였다. 김지성이 이렇게 자신의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는 것을 본 성덕왕은 어느 자리에서 김지성의 이름을 김지전(金志全)으로 하 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던 것 같다.

이제까지는 뜻이 정성스러웠는데 이제부터는 뜻이 온전하게 되었다 고 칭찬한 말로부터 비롯되었을 듯하다. 그래서 아직 각자(刻字, 글 자를 새김)에 들어가지 않았던 아미타불조상기에서는 김지전으로 이 름자를 바꿔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름자의 뜻대로 이렇게 자신 의 일생을 온전하게 마무리짓고 나서 김지전은 바로 다음 해인 성덕 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돌아가게 되었고 이 사실은 아미타불 입상조상기 말미에 추가로 새겨지게 되었다.

관능적 비만성 드러낸 초당 불교조각 양식

서진(西晉)의 멸망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나뉜 다음부터 수(隋)나라 가 진(陳)을 멸망시켜(589년) 남북조를 통일하기까지 273년의 세월 은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려 한 시대의 주도이념으로 군림하면서 그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워 내던 시기였다. 불교의 모든 경전을 한 문으로 번역하고 이를 토대로 불교를 중국화시켜 나아가게 되니 불 상 양식도 중국화하여 석조(石趙) (제3회 도판 8)에서는 용모가 중국화하고, 북위(北魏) 헌문 제(獻文帝) 황흥(皇興) 4년(470) 경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제5회 도판 10)에서는 의복까 지 중국 황제의 곤룡포 형식으로 바뀌어 중국화가 완성된다.

이후 불교가 전 중국대륙을 휩쓸면서 한량없는 불보살상을 만들게 되는데, 불교가 황제권의 보호와 견제 속에서 건실하게 발전하던 5 세기 후반을 지나면 극성기의 난만한 발전을 거치면서 맹목적인 계 승과 무분별한 확산에 따른 문화말기적 타락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불보살상이라는 조형예술 쪽에서만 드러나는 일이 아니었다. 불교 사상과 교단에 먼저 나타난 현상이었다. 중국식 종파 불교의 출현과 교단의 분열 현상이 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주(北周) 무제(武帝)는 건덕(建德) 3년(574) 5월17일 불교 와 도교를 함께 폐지하는데, 이때 경전과 불상을 모두 불태우고 깨 뜨렸으며 도사와 승려 200만 명을 환속시켰다 한다. 그리고 건덕 6 년(577) 봄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6월에 북제 지역에 폐 불령을 내리고 역시 승니(僧尼, 비구승과 비구니) 300만 명을 환속 시키고 경전과 불상을 불지르고 파괴했다고 한다. 말폐 현상이 극에 다다랐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제는 이런 악업 으로 다음 해(578년) 6월에 악창(惡瘡, 피부암)에 걸려 모진 고생을 하다 죽었다 한다. 어떻든 환속시킨 승려가 북중국에서 줄잡아 400 만 명이었다 하니, 그 타락상을 짐작할 만하다.

이 결과 당제국이 천하통일을 계승하여 새로운 기틀을 잡아가게 되 자 불교교단에서도 어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그 지위 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현장법사(玄, 602∼ 664년)는 당태종 정관(貞觀) 3년(629)에 서역(西域)으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났다. 이때 나이 28세였는데 17년 동안 인도대륙 내의 130 여 국을 여행하며 대소승 경(經), 율(律), 논(論) 3장(三藏) 520질 657부를 구해 가지고 정관 19년(645) 장안으로 돌아온다. 이때 불상 8구(軀)와 불사리 150알도 함께 모셔왔다 한다.

그런데 이때 인도 사정은 더욱 심각하여 다만 난해한 논소(論疏)가 학승(學僧)들의 연구과제로 제시될 뿐 쉽고 친근한 경전으로 일반 민중을 건전하게 이끄는 교단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 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주술적 민간신앙과 결합된 밀교에 기울게 되니 이는 힌두교의 강한 영향 탓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불상도 힌두신상의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조각 양식을 닮아 퇴폐의 극치를 보이게 되었는데(도판 3) 현장법사는 이런 불상을 8 구나 모시고 왔던 모양이다. 현장법사가 새로 구해온 삼장의 내용도 불교의 근간을 전해주는 중심 경전보다는 지엽 말단을 다투는 논장 (論藏) 중심이었다.

그래서 현장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것도 김지성이 읽었다는 ‘유 가사지론’ 100권 같은 논장이 위주가 되었으니, 그가 번역해낸 75 부 1335권을 세상에서는 신역(新譯)경전이라 하였다. 구마라습(鳩摩 羅什, 344∼413년) 등이 남북조 불교 극성기에 번역한 경전과 구별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당연히 구마라습 등이 번역한 경전은 구 역(舊譯)이라 하였다.

그런데 구역은 불교의 근간을 전하기 위해 그 중심 경전들을 서역 출신 승려들이 한문을 배워 번역한 것이므로 표현이 정확하고 내용 이 간결하다. 그에 반해 신역은 쭉정이를 주워온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에다가 현장이 서역어를 배워 번역한 것이어서 표현이 부정확하 고 내용이 지루하고 산만하다.

그 결과 중국불교는 이후 극도의 논리적 혼란에 빠져들어 결국 불립 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종(禪宗)의 출현을 재촉하게 된다. 이 런 상황이었으므로 불상 양식에도 현장이 봉안해 온 8구의 불상 양 식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그 8구의 불상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 당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관능적 퇴폐성으로 미루어 보면 이런 요소들이 현장이 모셔 온 8구의 불상이 가졌던 양식적 특성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조 시대 말기부터 둔중(鈍重)과 비만(肥滿)이라 는 문화 말기적 퇴영현상이 나타나서 초창기의 경쾌(輕快)하고 수려 (秀麗)하던 조각기법이 소멸해 가고 있었는데, 이런 퇴폐적인 관능 성이 영향을 끼치자 관능적 비만성이 이 시대 불교 조각양식에 주류 를 이루게 되었다.

고혹미 보여주는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이 도 근본적으로 이런 초당(初唐, 618∼ 712년) 양식에 영향받은 보살 입상이다. 한 눈으로 보아 관능성과 비만성이 모두 나타나 있다. 터질 듯이 팽팽한 살집에서 육감적인 관능미를 느낄 수 있는데, 가슴을 가로지르는 천의(天衣)도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비사실적인 기이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자못 고혹(蠱惑)적이다.

두 팔뚝을 휘감은 천의도 그렇고, 치마말을 허리에서 뒤집어 내리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맨 것도 퇴폐성이 농후하며, 두 다리를 따라 층급 을 이루며 반타원 형태로 중첩되어 내려간 옷주름도 관능을 자극한 다. 사타구니를 타고 내린 치마끈이 톱니바퀴 모양으로 허벅지 안쪽 을 따라 내려온다든지 천의 자락이 양쪽 바깥 허벅지를 따라 내려오 며 톱니 모양 굴곡을 보이는 것도 매우 자극적인 요소다.

구슬꿰미로 이루어진 두 벌의 목걸이가 화려하게 목둘레와 가슴을 장식한 것이나 손목과 위팔뚝의 관절 부근을 탄탄하게 휘감고 있는 팔찌들에서도 짜릿한 관능미를 느낄 수 있고, 왼쪽 가슴에서 나와 늘어져 있다가 오른쪽 무릎 근처를 휘돌아 허벅지를 타고 오른쪽 엉 덩이 뒤로 사라진 긴 구슬걸이도 매혹적이다.

오른손을 늘어뜨려 천의 자락을 살짝 쥐고 있으며 왼손은 젖가슴 근 처까지 들어올려 손짓해 부르는 형상을 짓고 있다. 정녕 뇌쇄(惱殺, 여자가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애타게 하여 괴롭힘)성 짙은 표현기법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귀는 귓밥이 길게 늘어지고 살집 좋은 얼 굴에는 만면에 엷은 미소가 은은히 퍼져 있다. 그러니 눈은 가늘게 뜨고 눈썹은 활짝 펴져서 눈두덩이 넓어져 있다. 눈웃음을 유도해내 는 표현 기법이다.

꽃장식이 화려한 보관 위로는 크고 높은 상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상투 정면에는 화불(化佛) 좌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만약 미륵보살상이라는 조상기가 없었으면 틀림없이 관세음보살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8회에서 언급하고 나왔듯이 ‘미륵상생경’에서 상생한 미륵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있다고 하였고, 이 경설의 내용대로 북 위시대 운강석굴에는 많은 교각좌(交脚坐)의 상생미륵보살 보관에 화불을 표현해 놓고 있다(제 5회 도판 8). 뿐만 아니라 운강 17동 남벽 2층 동측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는 (도판 4)도 있어 이 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과 짝을 이루고 있는 을 비교해 보면 자세도 같고 좌우 손의 위치도 각 각 바깥쪽을 들고 있어서 두 불·보살입상이 본래는 한 전각 안에 동서로 짝을 이루면서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은 오른손을 젖가슴 근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올려 설법인 비슷한 수인(手印, 손짓)을 지어 좌우 대칭 적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 뒤로 흘러내린 곱슬머리 형태의 머리카락은 어깨를 타고 뒤로 넘 어가 있다. 광배는 보통 주형광배(舟形光背, 배 모양의 광배)라고 부르는 연꽃잎 모양(혹은 촛불꽃 모양)의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광명) 형태인데 눈 높이 근처에서 약간 굴곡을 보여 2단 처 리를 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굵은 돋을무늬 테로 3겹을 돌려 이를 상 징했는데, 두광은 동심원이고 신광은 연꽃잎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 하다. 두광 신광 할 것 없이 가운데 테에만 각각 셋 씩 비운문(飛雲 文, 나르는 구름무늬)을 휘감아 놓았다. 테 밖의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 무늬를 어지럽게 장식하여 불꽃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게 하 였다.

대좌는 8각으로 하대에는 각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상대 에는 연화가 새겨져 있다.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위에 씨방을 두고 그 위에 보살상이 맨발로 서 있는데 씨방 둘레에도 연꽃잎이 둘려 있다. 연꽃잎 위에는 활짝 핀 모란 꽃 같은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 있다.

은 우리나라에 처음 나타난 불상 양식이 다. 옷주름이 두 다리를 따라 갈라져서 각기 타원형 호(弧)를 거듭 쌓아 나가는 형식의 불상은 아직까지 만들어 진 예가 없기 때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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