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Operation은 퍽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가동·효력·조작·운영 등으로 번역되지만, 의학계 용어로 쓰일 때는 ‘수술’로 옮겨야 한다. 반면 군사 분야에서 쓰일 때는 ‘작전’으로 번역해야 하고, 첩보나 수사 세계에서 사용되면 ‘공작’으로 바꿔야 그 뜻이 통한다. 한국말 ‘공작(工作)’은 음습하고 뭔가 모략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영어 단어 Operation에서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첩보 세계 종사자들은 공작 대신 Operation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비밀스러운 공작의 세계
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것은 정치자금의 유통과 Operation일 것이다. 정치자금 유통은 한보나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벌인 공작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 공작원 출신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며, 말로만 듣던 북파 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3일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국군정보사령부 앞에 모여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왜 시위를 벌였는가. 이들의 시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선을 넘었다. 왜 박정희 대통령은 북파 공작을 강화했고 이들의 공작은 당시 남북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가장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남북 첩보 전선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1968년 10월○○일 중동부 전선 비무장 지대에서는 하루종일 남북한 군이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다. 이유는 ‘편의대’로 불리는, 남쪽에서 파견한 특수공작대원들이 북쪽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북한군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동틀 무렵 시작된 교전은 온종일 계속되다가 해질 무렵에야 잦아들었다. 이 날 한국군은, 중동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선에서 전차와 장갑차를 빼내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의 페바(FEBA:Forward Edge of the Battle Area의 약자로 ‘전투지역의 전단’이라는 뜻)에 집결시키고, 교통호에는 완전 군장한 보병들을 투입해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교전은 이 날 새벽 북방한계선 북쪽에서 일어난 두 차례 폭음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만 20세였던 김철중씨(가명·52)를 비롯한 5명의 편의대원들은 북쪽에서 북한군을 교란하는 특수공작을 마치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들에게 부여된 특수공작 임무 중 하나는 북방한계선 너머 북한 땅에 있는 한 인민군 내무반 막사에 폭약을 설치해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날 새벽 폭약 설치를 끝낸 편의대원들을 시속 13㎞라는 ‘귀신 같은 속도’로 산을 타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충분한 거리를 도주했을 무렵 폭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편의대원 중 사진 촬영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잽싸게 카메라를 꺼내 폭풍이 올라오는 장면을 찍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는 왜 북한군 내무반을 파괴했는가. 김씨의 해석이다.
“완전 심리전이다. 당시는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침투 사건(1·21사태) 벌어진 다음이었다. 인민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침입한 사실이 밝혀지자 국군 병사들은 크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인민군 특수부대원이 침입해 국군 내무반을 폭파하고 국군의 귀를 베어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우리 쪽에서도 북한군의 사기를 죽여 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군 병사들은 3년간 복무했지만 인민군은 7년씩 복무했다고 한다. 우리 병사들은 빠르게 교체되므로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4∼5년이 지나면 잊혀지지만, 북한은 병사들이 오래 복무하는 관계로 그들이 당한 사건은 더 오래 구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고려해 특수공작을 벌인 것으로 안다.”
실물모형 놓고 침투路 연구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특수공작을 벌인 북한 땅이 정확히 어디인지, 그리고 그가 사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온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심지어 그가 한국군 어느 사단이 지키고 있던 곳으로 넘어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편의대·일명 ‘돼지’로도 불렸다)를 관리하던 육군 첩보부대 소속의 공작과장(소령)이 침투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속한 편의대 5명은 강원도 춘성군(지금은 춘천시) ○면 ○○리 ○○산에서 훈련받았기에 ‘춘천대’로 불렸다. 춘천대가 있던 곳은 군부대가 아니고 화전민이 사는 산 속이었다. 이들은 일반 군부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냈기 때문에 사단 마크를 구별할 줄도, 또 사단 마크를 볼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공작과장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생필품을 전해주는 조교들조차 이들을 만나러 올 때는 계급과 명찰, 부대 마크를 떼놓고 왔다.
이렇게 산 속에서 지내다 침투 명령이 떨어지면 이들은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앰뷸런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비포장 도로를 달려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에 있는 GOP 부대에 도착한다. 춘천에서 비포장도로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김씨는 자신이 침투한 곳이 중동부 전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침투했던 북한 지역은 지금도 손금 보듯이 기억한다고 했다. 이유는 작전에 들어가기 전, 미 공군이 찍어온 항공사진을 보고 모래와 석회로 만든 ‘사판’으로, 수십 차례 침투로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사판이란 실제 지형과 똑같이 산과 계곡을 축소해서 만든 모형으로, 가로 세로가 약 4m쯤 되었다. 이 사판은 워낙 세밀해서 좌표로 삼아야 할 큰 산만 눈여겨 봐두면, 북한 땅 어디에서고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판을 보며 지형을 익히다가 공작 개시 3일 전이 되면 면도는 물론이고 비누 세수도 칫솔질도 하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인 비무장지대에서는 며칠 전에 사용한 비누와 치약 냄새가 의외로 멀리 퍼진다. 사람보다 더 예민한 짐승은 이 냄새를 맡고 부스럭거리며 도망칠 수가 있다. 짐승이 소리를 내고 도망치면 적군은 그곳을 주목하기 때문에 침투가 어려워진다(6·25전쟁 때 빨치산도 비누와 치약을 쓰지 않았다. 이들을 잡으러 가는 토벌대도 작전 며칠 전부터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남방한계선 남쪽의 GOP 연대에 도착해서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연대 특등 사수와 사격 시합을 벌이곤 했다. 김씨는 당시 어린이들이 많이 가지고 놀던 구슬을 25m 거리에서 쏴 박살내는 실력이었기에, 연대 특등 사수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으면 최전방 실습을 나온 신참 소위로 위장해 남방한계선의 통문을 열고 트럭을 타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아군 GP로 간다. 그리고 해질 무렵 GP 병사에게 이들이 입고 온 신참 소위복장을 입혀, 트럭에 태워 남방한계선 너머 GOP 부대로 보내는 것이다(야밤에는 아군은 물론이고 인민군도 긴장하기 때문에 GOP부대에서 GP소초로는 이동할 수가 없다).
“인민군을 납치하자”
비무장지대에는 지뢰가 즐비하고, 아군과 인민군 수색대가 번갈아 설치한 부비트랩(boobytrap·엉뚱한 물건으로 위장된 폭발물)이 많아 길 아닌 곳으로 가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GP소초에서 휴식을 취한 춘천대는 수색대 매복조의 길 안내를 받아 군사분계선까지 접근한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다음부터는 지뢰와 부비트랩 그리고 각종 장애물을 알아서 통과한다. 춘천대는 이렇게 군사분계선 북쪽의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 땅에 들어간 후 인민군 내무반을 박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북방한계선 북쪽 산에는 지뢰가 별로 없어 뛰어도 된다. 사진 촬영을 끝낸 춘천대는 곧 북방한계선에 도착해 잠복에 들어갔다. 춘천대가 완전 군장을 꾸렸을 때의 배낭 무게는 약 45㎏이다. 여기에는 각종 폭약과 첩보 수집장비, 비상식량 등이 들어 있다. 작전에 들어갈 때는 군말 없이 이 배낭을 지고 들어가지만 돌아 나올 때는 어떻게 해서든 배낭 무게를 줄이고 싶어진다. 북방한계선에서부터 남쪽은 남북한군이 밀집해 있는 지뢰 지대이므로 야음을 틈타 조심스럽게 전진해야 한다.
춘천대는 이 날 다섯 번째로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서 공작을 한 것이었다. 북방한계선을 넘지 않고 비무장지대 안에서 작전을 하고 나간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매번 작전에 들어갈 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에 긴장하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횟수가 많아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쯤 폭약이 터진 인민군 부대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국군 소행으로 짐작은 하겠지만 섣불리 추적대를 보냈다간 또 다른 부비트랩에 걸릴 수도 있으니 법석만 떨 뿐 구체적인 작전은 돌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벌써 북방한계선에 도착한 우리는 귀신같이 비무장지대를 빠져 나간다’ 이런 생각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데 비무장지대 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 햇살이 밝아오는 오전 7시30분쯤이었다. 고개를 빼고 살펴보니 500m 전방쯤에 있는 인민군 GP에서 병사 10여 명이 부식을 수령하려는 듯, 지뢰가 없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춘천대는 크레모어는 단 한 발도 사용하지 않은 채 짊어지고 있었다. 간이 커진 춘천대는 ‘남은 폭약을 갖고 가야 무겁기만 하니 다 쏘고 가자’고 합의하고, 앞에 오는 인민군 병사들은 크레모어로 사살하고 뒤쪽에 오는 인민군은 크레모어로 하체를 맞혀 쓰러뜨린 후 납치하기로 했다. 북방한계선 북쪽의 인민군 내무반이 박살나고 이어 비무장지대에서 크레모어가 터지고 인민군이 납치되면 휴전선의 전 인민군이 긴장해 이들의 생환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빨리 한 건 하고 돌아가 춘천 아리랑 홀(미군이 드나들던 맥주홀)에서 한잔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편의대원들은 인민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사격권에 들어오게 10m 간격으로 4대의 크레모어를 설치했다. 이어 3명은 크레모어의 인계선을 끌고 언덕에 올라가 잠복했다. 언덕 아래에는 사격 솜씨가 좋은 김씨와 홍민수씨(가명·자살)가 숨어 있다가 부상한 인민군을 납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부상한 인민군을 납치할 때 언덕에 숨은 3인조는 엄호 사격을 맡기로 했다.
잠시 후 인민군들이 사격권 안에 들어오자 엄청난 폭음이 터졌는데, 그 순간 김씨는 크레모어에서 나온 후폭풍으로 오른팔에 화상을 입었다. 폭음과 함께 김씨가 본 것은 온통 누런 세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인조는 4대의 크레모어를 차례로 누르지 않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동시에 눌렀던 것이다. 그로 인해 흙먼지가 일어 잠시 후 세상이 황톳빛으로 변한 가운데 폭풍에 밀려 하늘로 치솟았던 나뭇가지와 칡덩굴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어 낙엽들이 팔랑거리며 내려왔는데, 한쪽에서는 후폭풍의 불꽃이 낙엽에 옮겨 붙은 듯 허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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