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5가지의 문명사적 변화가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첫째 변화는 세계화(globalization)다. 정보통신혁명, 냉전 종식, 바꿔 말하면 구 사회주의권의 시장경제 편입, 경제의 무국경화, 특히 국제금융의 세계화 등을 계기로 나타나는, 말 그대로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둘째 변화는 민주화(democratization)다. 일찍이 사무엘 헌팅턴 교수가 지적했듯이,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 규모의 ‘제3차 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들이 붕괴되고 선거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셋째 변화는 민족주의(nationalism)의 재등장이다. 세계적으로 인종주의, 종족주의 그리고 종교적 근본주의 등의 보편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넷째 변화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등장이다. 냉전시대의 이극체제가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등장했다. 미국은 지금 군사적·경제적으로 세계 최강국이다.
다섯째 변화는 신정신주의(new spiritualism)의 대두다. 산업화·정보화가 가져온 배금사상, 극단적 이기주의, 환경(자연환경과 역사환경) 파괴, 공동체(시간적·공간적 공동체) 상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정신주의 운동, 새로운 문화운동이 다양한 형태(환경생태주의, 공동체운동, 각종 주민운동, 명상운동, new age movement 등등)로 나타나고 있다.
두 가지 모순구조
그런데 위와 같은 5가지 큰 변화의 물결 속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모순 내지 갈등구조가 존재한다.
첫째, 자유와 평등 간의 모순이다.
세계화의 흐름과 미국 중심인 일극체제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자유·창의·효율·성장·개인주의·대외개방(초국가주의) 쪽으로 이끄는 힘이 되고 있다. 반면에 민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신정신주의는 세계를 평등·전통·정의·분배·공동체주의·대내지향(국가주의) 쪽으로 움직여가는 힘이다.
전자는 시장(market) 영역을 확대하고 그 시장의 힘을 강화하는 대신에 국가(state)의 역할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반면에 후자는 시장의 영역을 축소하고 제한하는 대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확대시키려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서로 긴장하고 갈등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세계화와 시장의 승리는 오늘날 세계 최고 부자 200명의 자산 합계가 세계인구의 3분의 1에 속하는 저소득층 20억 명 전체의 1년 소득보다 크다는 불평등구조를 만들어냈다. 또한 10년 이상 호황을 누리는 미국에서도 최하위 20%의 가구소득은 지난 25년간 실질 가치로 15% 감소해왔다고 한다.
이렇게 심화되는 불평등 구조를 평등·정의·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민족주의, 신정신주의의 흐름이 용납하고 수용하기는 도저히 어렵다. 따라서 불평등 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 시장에 대한 통제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여기서 자유와 평등, 시장과 국가간의 긴장과 갈등구조가 등장하게 된다.
둘째, 정치와 경제 간의 모순이다.
한 마디로 경제(세계경제)는 다국적기업, 초국적 국제금융 등을 중심으로 세계화, 무국경화하는 데 반해서 정치(국제정치)는 아직도 국민국가가 중심이 돼 세계이익이 아닌 국가이익의 추구를 목표로 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구조는 경제적으로는 세계적 통합, 상호의존의 연결구조(interlocking system) 속으로 편입돼가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독립된 개별 국민국가 단위로 분열돼 있다. 따라서 단일화돼가는 세계경제가 야기하는 문제를 분열돼 있는 국제정치가 해결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IMF 자료를 보면 1975~97년간 세계적으로 158건의 외환위기와 54건의 금융위기가 있었고, 양자가 결합된 형태의 위기는 32건 있었다. 이중 12건의 위기는 GDP의 10%를 사용하고 나서 극복이 가능했다.
이렇게 주기적·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국제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세계화·정보화로 인해 그 규모가 급속히 커졌고, 움직임이 대단히 빨라졌으며, 동시에 시장의 불안정성·불확실성이 구조적으로 크게 증대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제도적·정책적 대응이 범세계적 차원에서 시급하고 긴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개별 국가이익 중심의 국제정치구조로는 이 문제를 제대로 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경제적 통합과 정치적 분열 간의 모순과 갈등이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대안은 시민사회 뿐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가치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화시키려면 제3의 가치 내지는 덕목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박애(fraternity)다. 그리고 이 박애를 대변할 세력이 시민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장이 자유를 대변하고 국가가 평등을 대변한다면, 시민사회는 박애를 대변해야 한다. 그렇게 자유와 평등, 시장과 국가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조화시켜 나가는 일을 해낼 세력이 시민사회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다음의 세 가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첫째는 앞에서 본 신정신주의(환경운동·공동체운동 등)의 담당자 구실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이기적인 개인으로 파편화되어가는 현대사회 속에 자연이나 이웃과의 공간적 공동체(자연보호·이웃사랑)와 역사나 전통과의 시간적 공동체(민족·선조·후손)를 다시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둘째는 인간의 상품화가 아니라 시장의 인간화를 위해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종래에는 국가가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담당해왔으나 세계화 과정에 이러한 국가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기능을 시민사회가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장을 가능한 한 문명화(civil economy)해야 한다. 예컨대 소비자보호·소액주주운동·환경운동·여성 및 연소근로자 보호운동 등은 물론이고 시장과 별도의 시민적 교환의 장(소비협동조합·지역화폐·work collective 등)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셋째는 민주주의의 형식화 내지 형해화(形骸化)를 막기 위해서 시민사회가 시민참여, 주민감시의 강화에 노력해야 한다. 많은 나라들이 소위 선거 민주주의는 달성했다고 하지만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요원하고 대단히 험난하다. 민주주의의 내실화와 정착을 위한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관심과 감시가 필요하다.
국가의 국정운영 파트너로서 시민사회의 비중과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관 주도보다는 민관합작이어야 더욱 공정하고 능률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회·경제 문제(예컨대 공적부조·환경정책·산재정책 등)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실패(government failure)를 줄이기 위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협조노력도 점차 중요해질 것이다. 요컨대 이제는 시민사회의 성숙 없이는 공동체의 유지도 어렵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공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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