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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동창회

2001년 1월 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의 자화상

  • 김지석 jk@hani.co.kr

2001년 1월 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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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77학번 가운데 상당수가 ‘따지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철학의 성격과 철학과의 풍토에 비춰볼 때 우연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한 준비작업을 한 셈이다.

그중 한 사람이 변리사로 있는 오세중이다. 그도 1학년 때인 77년 가을에 학내시위로 제적됐다가 80년에 철학과로 복학했다. 이후 ‘학교에 다니고 싶었으나’ 80년 봄 계엄철폐 문제와 관련해 학내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여했다가 수배된 뒤 광주민중항쟁 관련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구속됐다. 이후 80년 중·후반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에서 활동하던 그는 88년 다시 복학해서 77학번으로는 가장 늦은 91년에야 졸업했다. 바짝 마른 그가 한때 더 바짝 말랐던 재야 운동가 계훈제씨를 ‘모시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변리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운동권 사람들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그도 정치와 전문직을 사이에 놓고 갈등했다. 정치는 성격에 잘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변리사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합격했다. 지금은 ‘잘 나간다’는 소리도 듣는다.

변리사를 선택한 것은 논리와 분석력을 요구하는 것이 철학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남이 안 하는 분야이고 앞으로 성장할 분야라는 점도 고려됐다. 그는 지금의 직업이 지적 재산, 즉 끊임없는 창조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철학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매일 하는 일은 철학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말이다. 자기 것을 따지기보다는 남 좋은 일만 할 것 같은 허남정도 뒤늦게 변리사가 되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는 인문계열 1학년이던 77년 가을에 학내시위와 관련해 제적됐다. 다음해에 복학해 철학과에 다니다 1년 뒤인 79년 가을에 강제징집돼 입대했다. 80년에 복학해 82년 졸업한 그는 직장 근무를 거쳐 인천과 성남 등에서 여러 해 동안 노동운동을 하다가 90년대 초에 손떼고 다시 다른 대학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키가 크고 깔끔했던 이영인은 일찍부터 회계사로 일하면서 ‘숫자’와 씨름하고 있다. 그 직업이 철학과 출신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몇 년에 한 번씩 동기 모임에 나와 ‘철학적 분위기’를 관조하면서 즐긴다. 그래도 그는 대학원까지 가서 철학 공부를 한 바 있다. 그는 철학을 공부한 것이 업무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데 회계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그 경지를 알 길이 없다.

제일 먼저 소개했어야 할 ‘장형’ 이치범은 서울대 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철학과 77학번에 합류한 경우다. 자그마하고 말랐지만 속에서 뿜어내는 정열은 동생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고교 때 응원단장을 한 적이 있는 이 형의 노래 솜씨는 일품이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뒤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한국자원재생공사 이사로 일하고 있다. 먹거리에서부터 종교, 환경문제에 이르기 해박한 지식에 동기들은 늘 감탄한다.

대학생 딸에서 돌 지난 아들까지

지금 철학과 77학번을 보면 다들 웬만큼 먹고 살기는 하는 것 같은데,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업가인 친구들도 ‘돈’보다는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데 마음이 가 있다.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한 남충희가 있다. 그는 80년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뒤 얼마 있다가 오퍼상 업무에 뛰어들었는데 최근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90년대 이후에는 사업가 냄새가 풀풀 났고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동기들과 만날 때면 교수와 기자들은 뒤로 빠지고 술값을 내는 것은 그의 몫이었지만 한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자신이 워낙 검소한 생활을 하는데다가 어리석은 돈자랑은 하지 않으니 그 소문을 확인할 길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그는 최근 사업을 정리하고 강원도 시골 마을로 내려갔다. 웬 ‘조기은퇴’냐고 하자, 사업을 하면서도 그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날씨가 풀리는 대로 일종의 사회사업을 해볼 생각을 갖고 있다. 동기들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교육방송 외국어 교재를 주로 출판하는 홍익미디어 대표로 있는 유대기는 생활고 해결과 사회운동의 방편으로 출발했던 출판사업을 발전시켜, 이제 종합 미디어사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큰돈을 번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사업을 펼치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되는 듯하다. 그는 장사꾼을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사업이 돈을 버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살기 좋아지고, 그 구성원들이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70~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가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젊었을 때의 꿈을 유지·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문화센터 등에서 여러 강좌를 듣는다. 머리가 녹슬면 꿈도 사라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키도 헌칠하고 얼굴도 잘생긴 유대기는 동기들 중 가장 노숙하다. 그 배경에는 가장 먼저 결혼을 해서 붙은 사회생활의 관록도 있지만 일찍부터 출판사업에 뛰어든 경륜 탓도 있다. 동기들 중에는 연애조차 해보지 못한 ‘철부지’가 있던 학창시절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학번 위의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을 한 유대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허름한 신혼 단칸방에 놀러가서도 아직 ‘어린’ 동기들의 눈에는 그들이 겪는 생활고가 보일 리 없었다. 남편은 학생운동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우기도 하고 경찰의 감시를 받는 바람에 부인이 엄청난 고생을 했다.

유대기는 이런저런 고생 끝에 지금 큰 딸이 벌써 대학교 2학년이어서, 동기들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반면 이성백은 이제 아이가 막 돌이 됐다. 공부만 하느라 애를 만들어 키울 시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유대기 딸과는 거의 한 세대가 차이 나는 셈이다. 철학과 77학번들이 여느 사람처럼 20대 후반에 결혼했다면 첫아이가 중학교에 다니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정광필은 아이가 7살이다. 본인 말로는 노동운동·진보정당운동·통일운동 등을 하면서 자신이 두 차례, 부인이 한 차례 엇갈려 감옥 생활을 하는 바람에 ‘하늘을 보고 달을 딸’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오세중도 첫아이가 8살인데, 세상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느라 결혼이 늦었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려는 친구들

요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와 우려가 많다. 철학이 꼭 인문학이어서가 아니라, 철학과 77학번들은 대체로 인문학의 위기를 얘기하는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국토분단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라고도 한다. 사실 당시 철학과는 인문계열에서 진입할 때 성적 순으로 끊으면 항상 상위에 있었다. 인문계열 77학번 중 가장 성적이 좋았던 친구도 철학과를 선택했다.

79년 이전에 학내외 시위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가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한 20명 가량의 인문계열 77학번들에게 과를 골라잡게 했더니 대부분 1지망으로 철학과를 꼽았다는 얘기는 지금도 ‘전설’로 내려온다.

이들이 철학과를 선택한 것은 철학이 사람을, 그것도 근본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문학)·사(역사학)·철(철학)로 이뤄진 인문학은 사람에 대해 연구하고 사람을 키우는 학문이다. 이런 인문학이 괄시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사람 이외의 것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능이나 기술일 수도 있고 돈벌이 방법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경쟁에 쫓기다 보니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지고 사람들이 가벼워지다 보니 그게 바로 사람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77학번 누구나 ‘박윤배 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성백이 독일에서 귀국한 다음날 북한산에 올랐다. 중턱에서 쉬는데 한 사람이 그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흰 운동모자를 쓰고 있는, 도사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당혹해하는 이성백에게 모자를 벗어보이고 인사한 그가 바로 박윤배였다. 그 날 두 사람은 남은 일정을 동행했다. 산을 내려와서 가볍게 술 한잔을 하고 헤어졌다. 이성백이 보기에 그는 도사가 돼 있었다. 동행하는 내내 그는 미소를 띤 채 해학적 말풀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풀어보였다.

박윤배는 몇 개월 또는 몇 년씩 잠적했다가 나타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기독교·불교를 포함해 여러 종교를 연구했고 도를 닦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것은 분명하다. 철학과 77학번은 가끔씩 그를 만나 몇 마디 듣는 것으로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 그는 인간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웃음과 해학을 통해 우리를 일깨우곤 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자신의 집을 개방해서 먹을 것이 없는 동기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곤 했다. 그 배경에는 동기들을 늘 따뜻하게 맞아주던 그의 어머니가 계셨다. 그의 집은 당시 경찰의 수배를 받던 사회운동가나 학생운동가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철학교수가 될 법했던 그는 의식화 관련 서적을 내는 출판 사업도 하고 이 바람에 구속되기도 했고 한때는 노동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얼마 전 그를 만나본 친구들의 말로는 인터넷상에서 청소년들의 문제를 상담해주기도 했다는데 최근에는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할 뿐이다.

사람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사람으로서 커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학창시절에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으면서도 술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인생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함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커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학창시절의 기억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술 먹고 이야기하고 싸운 것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인문학적 사고를 키워나갔다. 우리는 이것을 ‘필로조피렌(Philo-sophieren)’이라고 부른다. 단지 철학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친구는 정부가 인문학에 매년 1조원 이상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은 정신·교육·생각 등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규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며, 말과 생각을 하고 들어줄 수 있는 체계, 즉 대화 체계를 갖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경험하면서 말하고 고뇌하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술 마시고 고민하고 논쟁하는 것을 꼭 필요한 과정으로 인정해야 한다.

철학과 77학번은 대부분 강의보다는 친구에게서 배운 게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77학번의 한 사람은, 다른 친구가 ‘변증법의 논리를 나에게 설득해봐라’고 하자 책에서 읽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설득할 수는 없었다며, 그때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자기 것이 아닌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민족주의에 대해 세미나를 하는데, 고교 때 배운 것이었지만 다른 친구가 요모조모 따지고 들자 모든 단어가 생소했고, 그래서 지나간 모든 세월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철학과에서 한 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 인간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런 배움은 술자리, 토론회, 각종 도전과 실패 등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분위기 등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이뤄진다. 이게 인문학이다. 사회가 성장·발전할수록 인문학도 발전해야 삶이 풍요로워지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철학과 77학번들은 지금도 인문학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키워나가면서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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