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란 늘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바뀐다. 대중가요가 표현하는 정서는 시공을 초월해 유사한 반면 시대마다 유행하는 색채와 분위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과거에 세련된 노래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퇴색하는 법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우연히 옛 노래를 들으면 ‘저 시절이었으니까 저런 노래가 유행했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있다. 대중가요는 한 시대의 소리감각, 어법, 사랑을 비롯한 세인들의 관심사 그리고 시대정신과 사회적 상황까지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사운드와 화성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각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사회사’다.
먼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을 보자. 사람들은 이 곡을 단순히 평화의 찬가로 해석하지만, 사실 이 노래에는 당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녹아 있다. 이 곡은 나중에 존 레논이 미국의 닉슨 정부로부터 ‘문화게릴라’로 낙인 찍혀 비자 연장신청이 기각되는(다시 말해서 미국 땅에서 나가라!) 빌미가 됐다.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 보라.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렇게 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서양 사람들은 지금도 존 레논이 닉슨 정부에 대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존 레논보다 대중음악의 사회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노래의 사회적 성격이 자주 발견되지만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오랜 군사독재로 인해 아티스트의 자유로운 의식표출이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에도 이따금씩 사회구조에 저항한 아티스트가 있었다.
김민기가 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아침이슬’은 제3공화국과 유신의 억압적 사회상황에 대한 소묘로 볼 수 있다. ‘아침이슬’은 금지곡이었다. 당국은 이 노래의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부분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아니 왜 하필 묘지 위에서 해가 뜬다는 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적 사고와 거기에 반(反)하는 저항의 사고가 있기 마련이다. 존 레논이나 김민기의 음악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역이었다. 하지만 시대에 순응하는 경우라도 시대상황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일종의 ‘역(逆)반영’이라고 할까.
특정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제1의 통치자’, 즉 대통령으로 대변된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은 각 시대와 통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정치적·사회적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그 시대의 대중음악을 주도했던 가수를 비교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그들의 직접 또는 간접 관계를 통해 당시 대중음악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와 송창식
박정희 정권을 압축하는 대중가수를 한 명 꼽으라면 누가 될 것인가. 저항성으로 본다면 당연히 포크의 김민기와 록의 신중현이 먼저 떠오른다. 박정희 정권의 대중문화 억압과 린치의 대표적 희생자였던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시대정신을 견인한 인물로 높은 위상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박정희 대 김민기’, ‘박정희 대 신중현’은 너무도 익숙한 구도다. 이렇게 대립시킬 경우 당시 대중가요의 주류질서가 배제되는 약점이 있다.
70년대의 음악 풍토와 대중의 인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인물은 송창식일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그 시대의 빛과 그림자, 광채와 잿더미를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1960년대 말 윤형주와 함께 결성한 듀엣 ‘트윈 폴리오’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한국 최초의 포크 가수라는 영예를 얻었다. 그럼에도 데뷔 당시에는 자작곡 없이 주로 외국 팝송만 번안해 불렀다. 하지만 이후 한대수의 영향으로 곡을 직접 쓰면서 ‘작곡의 귀재’로 비상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시대에 그는 1973년 김민기가 노랫말을 쓴 ‘내나라 내겨레’를 부르며 시대에 맞서는 측면을 보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는 대중가수가 일차적으로 열망하는 ‘대중스타’에 가깝다.
1975년 서슬 퍼런 대마초 사건에서 ‘한잔의 추억’의 이장희, ‘너‘의 이종용, ‘비와 나’의 윤형주, ‘사랑하는 마음’의 김세환, ‘노을’의 석찬 그리고 ‘벽오동’의 김도향(투 코리안스) 등 당대의 포크 스타들이 모조리 쓰러져 갔을 때도 송창식은 유일하게 그 소나기를 피했다. 요즘 말로 하면 ‘서바이벌 게임’의 생존자라고 할까?
동료 통기타 가수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는 상황에 그는 포크 가수로는 최초로 1975년 MBC 최고가수상, 즉 ‘가수왕’이라는 영광마저 안았다. ‘박정희 시대의 가수’로 우뚝 솟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성공은 그가 쓴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왜 불러’ 등 놀라운 감성이 드리워진 곡들 덕분이었다. 이 곡들은 뒷날 금지 조치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고래사냥’과 더불어 그 시대 음악의 감수성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노래는 박정희 시대의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송창식이 로커의 이미지가 강한 신중현이나 저항적 색깔이 물씬 풍기는 김민기보다 사회성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서 암울한 시대가 주는 무게에 짓눌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최선의 ‘공격력’은 무엇이었을까.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에 관련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김민기를 도와준 송창식
당시 김민기는 1977년 군에서 제대해 경기도 부평 근처의 완구공장에 창고 관리직으로 취직했지만, 곧 해고당하고 세칭 ‘노가다’로 연명하던 중에 ‘공장의 불빛’을 녹음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에 ‘위험인물’로 찍힌 김민기가 음반작업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 상황에 그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 용산 원효로에 있던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김민기 곁에만 있어도 공범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 그에게 작업실을 내주었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다. 만약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도 피바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무덤을 딛고 ‘살아남은 자’가 갖는 인간적 죄의식을 해소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창식은 김민기가 당시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노래굿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도 있다(만약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지만 당시 최고 가수인 송창식이 기꺼이 스튜디오를 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장의 불빛’을 주조해낸 김민기도 위대하지만 그것을 만들 기회를 마련해준 송창식도 똑같이 위대하지 않을까.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조원익의 세션으로 녹음하고 이대 라디오방송국에서 노래녹음과 믹싱을 마친 ‘공장의 불빛’은 열악한 기자재로 인해 음질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공장의 불빛’은 한국교회선교사협회 후원으로 제작돼 일부 테이프가 배포되면서 관계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관계기관 대책회의까지 열렸으나 당국은 제2의 김지하 사태가 일어날까 우려해 아예 무시하고 덮어버리게 된다.
김민기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원본과 두 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모처에 숨기고, 고문을 받더라도 실토하지 않기 위해 그 장소를 잠재의식 속에서도 잊어버리도록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잊어라 아주 잊어버려라!). 하지만 그 최면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정말 원본을 어디다 감추었는지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이 어인 일? 누구 말대로 지하에서 뿜어 올린 저항성의 불꽃이 다시 지하에 생매장된 셈이었다.
1990년 김민기가 주관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송창식은 다시 ‘공장의 불빛’의 마지막 부분인 ‘이 세상 어딘가에’를 불러 역사적 음반의 오리지널 스태프(?)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했다. 피리를 부는 신비한 이 사나이야말로 1970년대를 살아간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한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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