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열기가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다. 여성들이 주로 시청하는 아침시간대 TV 프로그램이나 여성지는 다투듯 다이어트를 소재로 다루며, 특히 여성지는 광고지면의 상당부분이 다이어트 관련 제품들로 채워진다.
다이어트에 좋다고 하면 값이 얼마든 불티나게 팔린다. 만인에게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른 다이어트는 이제 이 시대의 대표적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됐다.
반론도 만만찮다. 속을 다듬기보다는 외형적인 멋만 내려고 한다든지, 운동이나 섭생을 통한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아니라 별스런 식품이나 약품을 이용해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이어트가 추구하는 것이 몸매의 슬림(slim)화라고 한다면 그 방법이나 태도가 갖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슬림화’는 몸의 유연성을 높여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생활방식에까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운동을 위해 승용차 대신 지하철이나 버스, 자전거를 이용하고 기름진 음식보다는 자연식을 찾는 등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는 생활비를 줄이는 경제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다이어트의 시대
다이어트를 개인의 차원을 넘어 조직이나 사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덩치만 크면 살아남을 수 있고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앙 같은 것이 있었다. 기업은 외형만 키우면 은행에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기에 모두 그 길로 나섰고, 그렇게 해서 빌린 돈은 연구개발이나 인재를 키우는 데 쓰기보다는 또다시 외형 부풀리기와 덩치 키우기에 쏟아부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비대할 대로 비대해졌다.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규모의 경제’니 ‘파이낸셜 레버리지 이펙트(financial leverage effect·차입금을 지렛대로 한 경영효과)’ 같은 경제·회계이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큰 것이 좋다”며 할 짓 못할 짓 다해본 그들이 저지른 실책을, 이제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부담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한해 국가예산과 맞먹는 규모의 거금을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부을 판이다. 우리는 개인과 조직, 사회가 한꺼번에 다이어트에 들어가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마주해 있다.
지금 우리가 민간기업 공기업 금융권 노사관계 등 각 분야에서 추진하는 구조조정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이것은 명칭만 달랐지, 새로이 들어선 정권의 초기나 혁명 직후엔 반드시 등장했던 단골 메뉴다. 번잡스러운 제도와 형식을 타파하고, 그와 동시에 기득권 집단이 지닌 부의 일부를 생산계층으로 돌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엔 실질적인 것을 중시했을 뿐, 형식이나 장식은 극도로 배제했다. 개혁은 늘 그렇게 슬림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의 현실은 새삼 스스로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초심(初心)의 자세’라든가 그저 군살이나 좀 빼는 식의 미미한 조직 슬림화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모든 부문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러는 파괴의 길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던 재벌이 몰락하는 것쯤은 예사로운 일이 됐고, 관료집단과 공기업은 무능과 도덕적 해이로 마치 무너지기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과 계층, 지역은 타협의 길을 찾기보다는 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과 학교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분노한 ‘개체’들
이런 현상은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세계국가는 없다. 그들도 혼자 살기에 바쁘다. 제국(帝國)체제는 붕괴됐고, 보편성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이제는 모델로 삼을 대상마저 사라졌다. 바야흐로 다문화, 다문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아니 나 자신이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 제도와 가치, 틀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와선 그것들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 낡은 파이프를 갈지 않고 방치하면 아파트 전체를 못 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기존 제도와 틀은 국가주의, 산업사회, 조직중심, 실적주의, 남성우위, 수직적 위계 체계의 원리에 입각했다. 그래서 대중은 소수의 권력자와 가진 자들을 위해서, 개인은 집단을 위해서, 하부계층은 상부계층을 위해서 희생해야 했다. 그런데 여태껏 잘 참아오던 그들이 이제는 소수와 조직, 집단, 상부계층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조직은 구성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 개체의 손을 맞잡고 파트너가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런 상황을 이미 ‘대붕괴(Great Collapse)’란 말로 설명했고,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 따라 산업사회의 수많은 조직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공룡처럼 죽어가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렇듯 기존 조직과 제도가 파편화돼버린 상황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개체뿐이다. 무너져가는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도 그들이다. 존 스타인벡은 1930년대 고통스런 대공황시대를 살아간 미국 소시민의 삶을 그린 ‘분노의 포도’를 통해 튼실한 포도 알갱이들이 뭉쳐서 좋은 포도송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우지 않았던가. 개체는 사회의 원자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소우주다. 누구에게 종속된 것도 아니고, 무엇의 부속품도 아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삶의 주인이다. 지금 그들이 분노하며 일어선 것이다.
인류 역사는 다소 기복이 있긴 했지만 이런 개체들에게 자유와 자아실현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을 쌓아올린 절대군주, 소수 권력자의 시대도 있었지만, 결국 역사는 인터넷이 국경을 무너뜨리고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성별 나이 학력 직위의 차이를 넘어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면서 그들을 가치 창조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는 이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자 도전이다. 이제 개체가, 힘없는 다수가 진정한 의미의 다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따라서 이를 촉발한 디지털문명과 인터넷의 출현은 단순한 기술발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개체의 시대, 다수의 시대, 참다운 대중민주주의를 실현해야겠다는 대중의 결집된 열망이 사회적 동인이 되어 일어난 기술사적·문명사적 조응인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