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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 최완수

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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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성덕왕은 그 6대조 진흥왕이 꿈꾸던 불국토의 건설을 실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조부 문무왕이 일찍이 통일 왕국의 주도이념으로 수용했던 의상(義湘, 625~702년) 대사의 신라화엄종(新羅華嚴宗, 海東華嚴宗이라고도 한다) 이념에 따라 불국토 건설을 실현해 나가려 한다.

우선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신라 국토 안에 여러 보살의 진신(眞身; 육신을 벗어난 참모습, 각종 육신을 빌려 나타나 보이기도 함) 상주처(常住處; 항상 머무는 곳)를 설정하였다. 동해안 양양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의 진신상주처라 하고 평창 오대산(五台山, 淸凉山)은 문수보살의 진신상주처이며 회양 금강산(金剛山)은 법기(法起)보살의 진신상주처라 한 것이다.

이는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년)가 측천무후(則天武后) 증성(證聖) 1년(695)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성력(聖曆) 2년(699)에 번역을 끝낸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에서 말한 내용을 신라 국토에 적용한 것이다.

‘신역화엄경’ 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북방에 머무는 곳이 있으니 청량산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여러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러 살았는데 현재 있는 보살의 이름은 문수사리(文殊師利)다. 그 권속인 여러 보살 1만 인과 더불어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 바다 가운데 머무는 곳이 있으니 금강산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여러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러 살았는데 현재 있는 보살의 이름은 법기(法起)보살이다. 그 권속인 여러 보살 1200인(‘구역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에서는 1만 2000인이라 하였다)과 더불어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



또 ‘신역화엄경’ 권68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남방에 산이 있으니 보달락가(補洛迦)라 하고 저곳에 보살이 있으니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한다.”

이렇게 ‘신역화엄경’에서 말한 여러 보살의 진신 상주처를 이미 자장율사(慈藏, 590~658년)나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확정한 것처럼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 및 낙산이대성관음정취(洛山二大聖觀音正趣) 조에서 말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진신상주처가 청량산이라는 것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의희(義熙) 14년(418)에 번역한 60권본 ‘구역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에도 나오는 말이니 모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제보살 진신의 신라국 상주설이 일반에 널리 보급된 것은 성덕왕(702~737년) 치세 시대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가 신라화엄종 이념을 바탕으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며 신라 불국토의 자존심을 확보해 가는 것이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의상대사는 신라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면서 금당(金堂)의 주불(主佛)을 (제14회 도판 8)으로 모셨다고 한다. 통일 전쟁 과정에 무수하게 죽어간 망령(亡靈)들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당시의 신앙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서 화엄종에 정토(淨土)사상을 녹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의상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스승 지엄이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일승(一乘)의 아미타는 열반에 들지 않아서 시방정토(十方淨土)로 몸을 삼으니 나고 죽는 모습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이르기를, 간혹 아미타와 관세음보살이 관정수기(灌頂授記)한 자들이 법계(法界)에 가득 찬 것을 본다고 하였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은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온다)의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게 녹아들어 거칠 것이 없음)한 종지(宗旨)로 일체 불교를 융회(融會; 녹여서 한데 모음)하려는 신라화엄종의 통합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다. 그래서 종래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왕을 출현시켰던 사실이나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망령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야 했던 사실들을 모두 만법귀일의 신라화엄종지로 수용해 신라불국토 건설의 풍부한 제반 요소로 재현하게 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구득한 김지성

성덕왕 5년(706)에 성덕왕이 돌아간 모후(母后)인 신목태후(神穆太后, 655~700년)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해 (제15회 도판 6) 제2층 옥개석 위에 사리 4과(顆)와 높이 6치(寸)짜리 순금제 아미타불상 1구(軀), 즉 (제15회 도판 10)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추가 봉안한 것이 바로 그런 일의 첫걸음이었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19세(643)에 출가한 절이라 하니 의상대사의 출가 본사로 화엄종 사찰이 분명한데 신문왕이 돌아가자 그 미망인인 신목태후가 장자인 효조왕(孝照王, 692~702년 재위)과 함께 신문왕의 추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고 신문왕의 초상조각이자 미륵불이라고 생각되는 순금 불상인 (제15회 도판 7)을 만들어 탑 안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화엄종사찰에 미륵여래를 모신 3층 석탑이 세워지고 다시 거기에 황금아미타불좌상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이 추가 봉안된 것이다.

이로써 황복사가 점점 복합적인 성격을 띠어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측천무후 말년인 장안(長安) 4년(704)에 밀교승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한 것으로 번역되자마자 그 다음해인 성덕왕 4년(705)에 김지성(金志誠, 652~720년)이 사신으로 가서 구득해 온 것이었다. 성덕왕은 갓 번역된 이 밀교 경전을 보고 그 경설(經說)에 심취하여 바로 그 내용대로 황복사 3층 석탑 안에 77소탑 그림과 이 경전을 봉안하면서 아울러 순금제 아미타좌상 1구도 함께 조성 봉안했던 것이다. 신라 화엄종 이념을 근간으로 하며 미륵신앙과 밀교 신앙을 모두 융회했다고 볼 수 있다.

성덕왕 18년(719)에 전대등(典大等)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사(甘山寺)에 (제16회 도판 1)과 (제16회 도판 2)을 거대한 규모로 조성해 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김지성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최초로 구득해 온 바로 그 김지성일 것이다.

의 광배 뒤에 새겨진 명문에서는 조상 공덕주인 김지성이 법상종(法相宗) 근본 경전의 하나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연구했다 했으니 현장(玄, 602~664년)이 문호를 세운 법상종 이념까지 혼효(混淆; 마구 뒤섞임)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유가사지론’ 100권은 미륵보살이 설(說)한 것을 무착(無着)이 편집하고 현장이 정관(貞觀) 22년(648)에 처음 번역해 낸 신역 경전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배경

통일신라 왕국을 그 문화 절정기인 불국시대로 이끌어간 성덕왕은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다. 3세경에 부왕인 신문왕이 돌아가고 11세경에 모후인 신목태후가 돌아가서 어린 시절을 고아로 보내야 했으며 형인 효조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때는 13세쯤의 소년이었다.

다만 태종무열왕의 적장손(嫡長孫)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태종무열왕의 내외 혈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그들의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되었을 뿐이니, 초기에는 저들의 세력다툼 틈바구니에 끼어 말못할 고통을 겪었다. 15세에 결혼하여 태자까지 생산한 첫 왕비 성정왕후(成貞王后)와는 27세 때(716)에 강제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뒤이어 외사촌 누이동생인 소덕왕후(炤德王后, 700년경~724년)를 계비로 맞이하여 두 왕자를 낳았으나 그 역시 25세쯤의 젊은 나이에 어린 왕자 형제를 남겨 놓고 타계하고 만다.

35세의 한창 나이에 상배(喪配)한 성덕왕은 어린 왕자 형제를 위해 재혼을 하지 않고 13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 돌아간다. 이때 남겨진 어린 왕자들이 효성왕(孝成王, 721년경~742년)과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 형제였으니 효성왕은 4세, 경덕왕은 2세쯤의 젖먹이였다. 자신이 고아로 자라난 성덕왕이 다시 30대 중반에 상처하여 어미 잃은 젖먹이 아들 형제를 보게 되었으니 그 참담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재혼을 거부하고 어린 왕자들의 양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 결과 외척들에게 세력다툼을 벌일 명분을 주지 않게 되니 이후 성덕왕의 치세 시에는 정국이 안정되어 신라가 곧 불국토임을 실감할 수 있는 극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런 상황을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덕대왕은 덕(德)이 산하(山河)와 같아서 그와 같이 높고 이름은 해와 달과 가지런할 만큼 높이 걸려 있다.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시속(時俗)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습을 바로잡으니,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는 넘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풍속은 금과 옥을 싫어했고 대대로 문재(文才, 글 잘하는 재주)를 숭상했다.

내 자신이 신령스럽다 생각지 않았고 마음에는 노인의 경계함이 있었다. 40여 년 나라에 임하여 정치에 힘썼으나 한번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고 어지럽게 한 적이 없으니 그런 까닭으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만리 밖에서 손님으로 찾아와 오직 교화를 흠모하여 바라다보았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리려고 엿보지는 않았다.

연(燕)나라(昭王)와 진(秦)나라(穆公)가 사람을 쓴 것이나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패권을 번갈아 차지한 것과 어찌 바퀴를 나란히 하고 고삐를 쌍으로 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정치적 안정은 성덕왕이 돌아가면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여 17세에 등극한 효성왕의 여자 관계가 도화선이 되어 척족들간 세력다툼이 반란 형태로 드러난다. 이를 제압하지 못한 효성왕은 결국 재위 5년 만에 척족들의 손에 비명 횡사한 듯하다.

이를 뒤이은 경덕왕(景德王, 723~765년)은 자못 현명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던 듯 이런 외척 전횡의 고리를 차단하려고 20세에 등극하자마자 자식 못 낳는 것을 트집잡아 김순정의 딸인 왕비 삼모부인(三毛夫人)을 출궁시킨다. 폐립(廢立)을 자행할 만큼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처가이자 외가인 김순정(金順貞) 집안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조카딸 뻘인 서불한 김의충(金義忠, 670년경~739년)의 따님 만월부인(滿月夫人)을 맞아들인다. 경덕왕 2년(743) 4월에 결행한 일이다. 자신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비를 내쳐서 외척 전횡의 싹을 자른 다음 다시 그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은 이 막강한 외척세력이 결사적으로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한 현명한 처사였다. 경덕왕이 등극 초에 자신을 옹립한 외척 집권가문의 기세를 이렇게 가차없이 눌러놓자 효성왕 때 일시 흔들리던 신라의 정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경덕왕은 성덕왕이 다져 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군림하여 절대왕권을 행사하며 불국시대(佛國時代) 문화의 황금기(黃金期)를 이루어낸다.

우선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전륜성왕의 자격이 충분했던 부왕 성덕왕을 전륜성왕답게 대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왕릉을 스투파 형식으로 꾸미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護石) 주변에 돌려가며 세우고 난간석과 요도(繞道)를 상징하는 지면석(地面石)을 추가 설치하여 전륜성왕이나 불타의 탑묘와 같은 형식으로 (제18회 도판 1)을 치장함으로써 새로운 스투파형 능묘제도를 창안해낸 것이다.

그리고는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추복(追福)을 위해 두 가지 큰 불사를 일으켜 불국시대의 최고 문화역량을 과시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봉덕사(奉德寺)에 봉안할 (제17회 도판 10) 주조(鑄造)이고, 둘째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의 조영(造營)이었다. 3세 때 돌아가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어머니 소덕왕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자식들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홀아비로 살면서 고독한 여생을 보낸 불쌍한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경덕왕은 이 분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불사(佛事)를 일으켜 그 복을 빌어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선왕을 위해 추복사찰을 짓고 그 초상조각을 주불로 봉안하는 것은 북위 운강석굴로부터 용문석굴의 빈양중동(賓陽中洞)으로 이어지고 최근에는 당 고종과 측천무후에 의해 (도판 1)이 굴착되어 고종과 측천무후 및 왕황후가 형태로 조성되고 있음에랴!

경덕왕은 이제 자신이 전륜성왕이며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천하에 과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부모를 위한 추복사찰을 짓되 화엄불국세계(華嚴佛國世界)를 신라 땅에 구현(具顯)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투파 형식이 장엄한 부모의 능인 이 있는 경주 동남쪽 양장곡(楊長谷) 주변의 길지(吉地)를 찾아 토함산(吐含山)에 불국사를 조영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 경덕왕의 심회는 ‘성덕대왕신종명’에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사라쌍수에 누운 시기(석가모니불은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는 헤아릴 수 없고 천추(千秋)의 밤은 길어지기 쉬운지라 (성덕대왕이) 돌아가신 이래 이미 34년이 되었다. 그 전에 아드님인 경덕대왕이 살아 있던 날 대업(大業)을 이어 지키며 모든 일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런데 (경덕대왕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해가 지날수록 그리움이 일어났고 뒤이어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대궐의 전각에 임하면 슬픔이 더했다. 추모하는 정(情)이 더욱 처절해지고 혼령을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이 다시 간절해져서 삼가 동 12만근을 시주하여 한 길쯤 되는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세워 성취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라는 것은 용문 봉선사동에서 부분적으로 시도되어 ‘구역화엄경’ 권2에서 말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부분적으로 구현해 낸 적이 있다. 주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오존상(五尊像) 형태로 표현되어 문수와 보현 양대 보살이 보살을 대표하고 가섭과 아난 양대 제자가 10대 제자를 대표하여 좌우에 시립해 있다.

그리고 여러 털 구멍에서 나오는 화신운(化身雲)을 상징하듯 화불(化佛) 입상이 각 벽면의 감실마다 가득 새겨져 있다. 입구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 중 남북 양대 천왕이 한 쌍씩 문을 지키고 있으니 사천왕도 대표로 넷 중 둘만 표현한 것이다.

경덕왕은 불국사 조영을 계획하면서 이 용문 봉선사동의 조형기반이 된 화엄 정신을 가장 면밀하게 관찰해 오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화엄경’ 내용만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체 경전에서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 일체의 불국세계를 종합적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 진정한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이는 바로 신라화엄종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종지에 따라 일체 불교를 융회하려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엄 불국토의 건설이라는 근본 원칙만 ‘화엄경’으로부터 취하고 구체적인 불국세계의 모습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각 경전에서 따다가 조화롭게 배치하는 설계를 하게 되었다. 정녕 ‘화엄경’에서 얘기하는 제망중중(帝網重重, 제석천의 보배구슬망은 서로 아름다움을 반사하여 아름다움을 몇 제곱으로 배가시킨다는 말)의 효과를 이루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틀어 하나의 화엄불국세계로 설정하고 일관된 기획 아래 그 조영을 일사불란하게 이루어 갔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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