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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수’ 정수일 박사의 이슬람 문명 산책 ②

알라의 빛,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퍼지다

  • 정수일 박사

알라의 빛,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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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학자들은 이슬람이 알려지기 이전 시대를 ‘자힐리야(al-Jahiliyah)시대’, 즉 ‘무지(몽매)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대를 학자에 따라서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로 이해한다. 넓은 의미로는 태고로부터 성천(聖遷, 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천거, 서기 622년)까지의 시대이고, 좁은 의미로서는 성천 이전의 150~ 200년간을 말한다. 보통은 좁은 의미의 시대를 말하는데, 이 시대에 아랍부족 간에 전례없이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영웅호걸들이 난립했다고 하여 이 시대를 일명 ‘아랍시대’, 혹은 ‘영웅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무려 1700여 차례의 부족간 전쟁이 발생했으니, 실로 이 시대는 이슬람의 여명을 앞두고 아랍사회 전체가 혼란과 상잔에 휘말려 있던 이슬람의 회임과 산고(産苦)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부터 아라비아반도는 사막의 유목민(베두인, Bedouin)과 오아시스 정착민으로 구성된 이중적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부장적 혈연관계로 얽혀 있는 유목사회는 느슨한 정치구조와 집단주의 의식으로 유지되었다. 가족장이나 씨족 대표로 구성된 장로회(長老會)에서 선출된 부족장(샤이흐)의 기능은 중개자이지 결코 지휘자의 권능은 아니었다. 그 밖에 부족사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축제나 제사 등을 관장하는 카힌과 구성원 간의 분쟁을 중재하는 하킴, 타부족과의 전쟁을 지휘하는 까뒤 등 직책이 따로 있었다. 이들의 관할하에 부족사회 성원들은 나름의 사회생활규범을 지켜나갔다. 황막한 사막환경에서 개별적인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므로 자연히 집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방목지나 수원지 등 사회적 부에 대해서 공유관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부족사회적인 행동과 의식은 후일 이슬람교 교리와 이슬람문명에 잠재적으로 반영되었다.

유목사회와는 달리 오아시스의 정착민들 속에서는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혁이 일어났다. 특히 동쪽의 사산조(朝) 페르시아와 서쪽의 비잔틴제국 간의 장기적인 대결로 말미암아 페르시아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경유해 지중해로 통하는 동서 통상로가 차단되면서부터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연안지방이 주요한 교역통로로 떠올랐다.

이러한 통상의 요로에 위치한 메카나 메디나에는 교역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져 부의 축적과 더불어 사회적 분업도 생기고 유목민과의 유대도 강화됐다. 그리하여 전래의 이중적 사회구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 빈부의 차가 생기고, 사유(私有)에 기초한 경제권을 추구하면서 쟁탈이 불가피해졌다.

간혹 생존 차원에서나 이웃과 마찰을 빚던 유목민들도 변혁의 와중에 정착민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경쟁의 역군에 편입되었다. 무역권이나 대상로(隊商路)의 확보를 위한 쟁탈전은 비일비재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유년시절에 해당하는 575년부터 590년 사이에 메카지방의 맹주들인 꾸라이쉬 부족과 하와진 부족 간에 발생한 네 차례의 유혈적 상권 쟁탈전은 그 일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혈연에 기초한 씨족제도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고, 종래의 씨족적 평화나 평등, 선린관계에 바탕을 두고 수평적으로 결성된 사회조직은 원추형(圓錐形)의 계층적 사회구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생존과 영리를 위한 경쟁과 보복 등 대립의식이 점차 자라났다.

기껏해야 15~20개의 천막에 분산하여 수백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있는 소규모 씨족집단으로서는 날로 심해지는 상쟁국면(相爭局面)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큰 조직으로 뭉쳐야 했으니, 그 조직이 바로 부족들간의 연맹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메카를 중심으로 20개 씨족이 연합한 꾸라이쉬 부족연맹이다. 부족연맹의 형성은 미래에 있을 범지역적인 국가 출범의 기틀로서 주변의 위협세력인 사산조 페르시아나 비잔틴과의 대결을 위해서는 더욱더 절박한 과제로 다가왔다.

이슬람교 출현 배경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내부변화는 의식구조의 개변을 필연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사막의 유목민은 더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오아시스의 정착민들 속에서 원시적인 물신신앙(物神信仰)을 비롯해 각종 우상숭배가 구태의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큰 바위나 나무, 샘물 등에 신령이 살고 있으며, 진(Jinn, 정령)이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인간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부족마다 고유의 신이 있었다.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그 인근 부족들은 라트와 웃자, 마나트라는 세 여신을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카아바라는 육면체 운석(隕石)과 그 주변에 산재한 수백개의 돌도 아울러 숭배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시대의 변천을 반영하듯, 아라비아반도 주위에 뿌리 내린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선진 종교의 영향은 구습의 종교를 극복하고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 촉매제 구실을 했다. 기원 1세기부터 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예멘에는 유대교가 서서히 전파되어 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히미리아조의 자누와스왕이 유대교로 개종할 정도로 번성했다. 북쪽의 메디나(야스리브)에는 일찍이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피란 온 유대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4세기 말 아나톨리아에 비잔틴제국이 건립되면서부터 기독교도 반도의 북부와 중부지역으로 뻗어갔다. 특히 기독교의 단성론자(單性論者, Monophysites)와 네스토리아파(Nestorians) 선교사들은 갓산과 라흐미 등 ‘비옥한 초승달지역’과 반도 북부의 여러 아랍 부족 속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확보했다.

이러한 때에 대상(隊商)을 따라 남북으로 쉼 없이 오가는 아랍인 가운데서는 세태에 민감한 구도인(求道人)들이 끼어 있었다. 세칭 ‘하니프(Hanif, ‘진실한 자’라는 뜻)’라고 하는 이들은 일신교(一神敎)인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 같은 낡은 종교이념에서 탈피하고 생매장 같은 폐습을 없애려는 일종의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아라비아반도는 정치·경제·사회·종교 전반에 걸쳐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상태는 극에 달했는데, 반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메카는 이 모든 양상의 축소판이었다. 씨족이나 부족을 단위로 우상숭배를 위주로 하는 낡은 종교관념으로는 변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에 적절한 신앙적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족연맹이나 범지역적 사회체제가 요청하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은 역사의 필연으로 제기되었다. 이제 어떤 출중한 인물, ‘사건 창조적인’ 위인이 나타나 이 역사적인 과제를 앞장서 수행해 나가는가 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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