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정여울의 책갈피 속 마음여행 - 마지막회

진정한 삶을 지키기 위한 아름다운 ‘비극’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7-08-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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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후밀 흐라발, 이창실 옮김,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2016.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에서

    어떤 책은 첫 문장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첫 문장이 써지면 그다음 문장은 자연스럽게 써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만큼 첫 문장을 잘 쓰기가 무척 어렵다. 1초도 안 되는 순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와락, 그러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은 화려한 수사학이나 현란한 꾸밈음이 전혀 없는데도,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다음 문장은 뭘까, 다음 페이지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내내 흥분되고, 내내 설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하다가, 마침내 그 일과 영원한 하나가 된 사람의 이야기. 일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어 마침내 그 일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다. 

    이 책의 주인공 한탸는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다. 무려 35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살아왔지만, 한 번도 이 일이 지루하거나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장갑도 끼지 않고, 도시락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오직 맥주와 함께 맨손으로 압축기를 만지며 책과 폐지를 압축한다. 사람들이 버린 것들, 이제는 쓸모없다고 밀쳐낸 것들이, 그의 손에서는 새로운 가치를 지닌 소중한 보물이 된다. 그는 폐지를 압축하면서 사실은 결코 압축할 수 없는 책들, 결코 버릴 수 없는 보물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폐지를 압축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은밀한 내적 도서관을 건축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지하실은 비밀 아지트처럼 내밀하고 음침하다. 폐지를 압축하는 일만 한다면 이 일이 끝나고 나서 주변이 깨끗해져야 할 텐데, 그의 지하 작업실은 늘 버리지 못한 책들, 결코 압축할 수 없는 소중한 종이들이 가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윗사람에게 항상 요주의 인물이 된다. 그가 일을 잘하고 있나 감시하기 위해 엿볼 때마다, 그는 걸핏하면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폐지 압축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은밀한 도서관’을 짓는 일에 골몰하던 것이다.



    나만의 은밀한 도서관

    천장에서는 매일같이 엄청난 분량의 책이 쏟아져 내린다. 그는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일감 속에서도 자기만의 기쁨을 찾는다. 폐지를 압축하다가 칸트나 괴테, 실러나 니체, 노자와 헤겔 등의 아름다운 책을 발견할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보물을 발견한 듯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는 좋은 책을 발견할 때마다 마치 이 세계를 뛰어넘어 저 머나먼 다른 세계, 더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진실에 가까운 어떤 세계를 발견한 듯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책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며, ‘뜻하지 않은 교양’을 쌓았다. 무려 35년이나, 그는 스스로 선생이자 학생이자 비평가이자 예술가가 되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도서관을 만들고, 관리하고, 지켜왔다. 책과 폐지 사이에 끼어 있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 때문에 자신의 온몸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나도,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피어오른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가 메고 있는 가방 속에는 ‘오늘 발견한 보물’, 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모두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보물’을 발견해내는 혜안을 지녔다. 그리고 그 폐지와 버려진 책 사이에서 인류가 밟아온 위대한 발자취를 발견해낸다. 그가 정성껏 책장을 짜서 자신의 집에 모셔놓은 책과 그림은 하나같이 인류의 역사를 대변할 만한 훌륭한 작품들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가 ‘이것이 최고’라고 추앙해주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만 보았다. 진심의 눈으로 옥석을 가려냈기에 누구의 권위도 필요 없었다. 모두가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들에게서 진귀한 보물을 발견해낼 줄 아는 그는 자기 안에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기술을 지녔던 것이다.



    꿈이 무너질 위기

    사회 통념대로라면 그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머지않아 그의 직업은 철저히 기계화될 것이고 그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직 혼자만 은밀히 간직해오던 부푼 꿈이 있었다. 그 세계에서 그는 지상에 없는 유토피아의 주인공이다. 그는 은퇴하면 자신이 매일 쓰던 압축기를 사들여 집으로 가져와, 외삼촌의 집 정원에서 폐지 압축 작업을 계속하며 그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 ‘나만의 책 꾸러미’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그 안에 나는 젊은 시절에 품었던 내 모든 환상과 지식, 지난 삼십오 년간 배운 것을 모조리 담아둘 것이다. 집에 있는 3톤의 책에서 골라 만든 꾸러미, 사전의 긴긴 명상을 거쳐 완성한 부끄럽지 않은 꾸러미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나만의 최종 컬렉션’을 만들어 삶을 완성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꿈을 실현하기엔, 세상은 너무 빨리 변했다. 그는 어느 날 도심에 나갔다가 자신의 오래된 압축기보다 수십 배는 큰 최첨단 압축기를 맞닥뜨린다. 그 압축기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콜라와 우유를 마시며 한가롭게, 그러나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압축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폐지일 뿐이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컨베이어벨트’라는 거대한 기계장치였기 때문이다. 신식 유니폼을 입은 노동자들은 모든 것을 폐지로만 보고 그 어디서도 ‘메시지’를 읽어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폐지는 그저 처리해야 할 일감일 뿐, 한탸에게처럼 어떤 보물이 감춰져 있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35년 동안 일감과 빈곤에 파묻혀 한 번도 휴가다운 휴가를 떠나보지 못한 한탸와 달리, 이제 갓 취직한 이 젊은 노동자들은 ‘우리 이번엔 그리스로 휴가를 떠나자’며 한가로이 수다를 떨었다. 그들에겐 그리스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손쉬운 휴양지였던 것이다. 한탸가 책 속에서만 너무도 간절하게 꿈꾸었던 그 아름답고 완벽한 철학과 예술의 이상향, 그리스. 한탸는 절망한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낸 그 모든 꿈이 무너져내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탸는 변하기 시작한다. 유니폼을 입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처럼, 아니 그들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책을 읽지 않고 오직 압축에만 힘을 쏟는다. 하지만 그런 미친 듯한 노동도 그의 사람 됨됨이를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자신의 일자리가 위협받자, 그 소중한 지하실에서 자신만의 은밀한 도서관 만들기 프로젝트를 더는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닫자, 한탸는 깊은 굴욕감을 느낀다. “굴욕감에 잔뜩 긴장한 나는 뼛속 깊이 퍼뜩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그때까지 삶을 지탱해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그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탸는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도, 이 뼈아픈 굴욕을 멈출 수 있는 길을 찾는다. 비록 그 길이 세상 사람들의 눈엔 ‘비극’이자 ‘추락’일지라도, 내 눈엔 그의 선택이 너무도 간절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길’로 보였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탸처럼 용감하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온전히 가슴에 안은 채 지상의 모든 안락함을 버릴 수 있을까. 나는 그 간절한 물음을 안고,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은 영원히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염원을 가슴에 담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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