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정월 삭풍이 몰아치던 어느날 밤. 이웃들도 지나길 꺼리는 재야정치인 김대중씨의 동교동 집 앞 골목으로 지친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있었다. 김씨의 아내 이희호 여사와 비서 김형국씨였다. 두 사람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3·1구국선언문’ 사건 관련자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투옥된 인사 중에는 김대중씨도 있었다. 1년 가까운 석방투쟁과 정치 활동, 가장으로서의 책무와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짓눌린 55세의 이여사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키 172㎝에 몸무게 43㎏.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도지는 관절염은 꼬챙이처럼 마른 다리를 쉬 펴지도 굽히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기도회는 무섭도록 추운 날씨 때문에 일찍 끝났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들어선 집에 온기라곤 없었다. 1950년대 말 미국 국제개발처(AID) 자금으로 수재민을 위해 급조한 집은 바람만 세게 불어도 흔들릴 정도로 부실했다. 그러나 이여사는 “홍걸이 아빠가 온기 하나 없는 감방에서 고생하는데 나만 편할 수 있냐”며 한사코 불 때기를 거부했다.
집에는 따뜻한 물 한 잔 끓여줄 손이 없었다. 집안일을 돕던 혜숙이 모녀는 월급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집을 나간 지 오래였다. 저녁을 굶을 참인 듯한 이씨를 대신해 김비서가 쌀을 씻고 안쳤다. 소반에 밥 한 공기와 젓갈, 생멸치, 고추장과 더운 물 한 사발을 얹어 방으로 가져갔다.
“형국씨도 같이 먹어요.”
이여사의 말에 김비서도 밥 한 그릇을 가져와 마주앉았다. 이여사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그 뿐. 이여사는 수저를 손에 쥔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김비서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이여사는 서둘러 감정을 수습했다. 눈물을 닦고 뜨거운 물에 밥 한 술을 꾹꾹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밥맛이… 좋네요.”
칼바람이 뼛속을 헤집는, 지독히도 추운 겨울밤이었다.
“이 정권 지분 40%는 영부인 것”
그리고 2002년 5월. 그 겨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 영부인이 된 81세의 이희호 여사는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다시 눈물 섞인 밥을 먹고 있다. 몰아치는 북풍 때문도, 생활고나 독재정권에 대한 뿌리깊은 분노 때문도 아니다.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목숨처럼 아끼며 보듬어 온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뿐인가. ‘자식 잘못 가르친 죄’는 너무도 크고 무거워, 대통령 부처를 향한 여론과 야당의 호통은 추상같기만 하다. 이제 이여사 본인마저 ‘비리의 배후’ 혹은 ‘협력자’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팔십 평생 이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는가.
표면적으로 볼 때 이여사의 청와대 생활은 역대 영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용히 물러앉아 사회봉사에 힘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여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보통 안방마님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여사는 그 스스로 뛰어난 정치인이자, 역량 있는 사회운동가이며, 타협을 모르는 민주 투사였다. ‘평생동지’ 김대중 대통령 곁에서 쓴소리도 마다 않는 최측근 역할을 해왔다.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대통령은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이여사의 인맥과 조언, 격려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교동 구파가 쇠락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긴 요즘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동교동계 인사나 재야 원로들은 김대통령의 집권에 이여사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여사의 정치적 역량과 집념 어린 노력이 오늘의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었다. 김대통령의 ‘정치적 방학’이 15년 이상이나 됨에도 일선에 복귀할 때마다 큰 단절 없이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여사 덕분”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만 해도 DJ 연설문의 최종 검토자는 이여사였다는 게 측근들의 이야기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 정권 지분의 40%는 이여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오히려 낮은 평가여서, 동교동계 모 인사는 “60%는 족히 될 것”이라며 다소 과장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여사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케 하는 발언들이다.
또한 이여사는 오랜 감옥생활과 정치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던 남편을 대신해 집안 대소사 처리와 세 아들 양육을 도맡다시피 했다. 이것은 끊임없는 인고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장남 홍일(54·민주당 의원)과 차남 홍업(52·아태재단 부이사장)은 김대통령의 사별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 소생이다. 이여사는 이들이 자신의 친자인 홍걸(40)의 존재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했다.
첫째, 둘째 아들에 대한 이여사의 관심과 사랑은 대단했다. 1970년대를 동교동에서 보낸 한 인사는 “(이여사가) 장남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애썼다. 오히려 막내가 안됐다 싶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사정으로 인해 숫기 없고 맘 여린 막내에 대한 어미로서의 애틋함 또한 더욱 깊어갔던 듯하다.
이희호 여사의 삶과 김대통령가(家)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의 ‘총체적 친인척 비리 사태’를 이해하는 열쇠다. ‘권노갑(이인제)은 지고 한화갑(노무현)은 뜨는’ 여당의 복잡한 권력투쟁 상황을 가늠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취재중 만난 한 동교동 인사에게 “이희호 여사의 삶에는 ‘소리없이 강한 힘’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한마디 덧붙여달라”고 했다. ‘희생과 봉사로 살아온 DJ 지킴이’.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김대통령도, 권노갑 전 고문도, 김홍걸씨도 아닌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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