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는 책 혹은 독서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 문화유산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여행에서 문화가 있는 여행, 이른바 테마가 있는 여행으로의 변화를 이끈 것이다. 유교수가 크게 유행시킨,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은 그런 변화를 대변했고, 이후 답사여행이나 문학기행류의 책들이 봇물을 이뤘다.
사실 여행도서라고 하면 여행안내 도서, 그러니까 교통, 숙박, 식당 등에 관한 실용정보를 담은 안내서와 여행자의 개인적 느낌과 단상이 주를 이루는 여행에세이부터 떠올리기 쉽다. 그런 책들은 생활실용서나 문학서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는 사실상 교양도서 성격이 짙은 여행도서들이 많이 나왔다. 문학, 사상, 사회, 역사 등이 자연스레 녹아든, 여행의 과정도 과정이지만 오히려 여행지의 문화·사회·역사적 배경이 내용의 주조를 이루는 책들이다.
테마 있는 여행서 뜬다
최근 출간된 책으로 김현종의 ‘유럽인물열전’(전 2권, 마음산책)이 있다. 저자가 ‘마피아의 고향’인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서 겪은 에피소드 하나. 나폴리의 작은 호텔 사장으로부터 친절한 도움을 받은 저자가 고마움을 표하며 “당신이 보스냐”고 묻자 그 사장은, “유일한 보스는 알뿐이다!”고 답한다. 여기서 사장이 말한 ‘알’은 다름 아니라 나폴리 이주민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다. 저자에 따르면 마피아의 행동양식은 고대 로마군단에서부터 유래한 가부장적 시스템의 미국판 폭력 버전이다.
베니스에서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과 착한 상인 안토니오를 불러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들려준다. 당시는 대금업이 무척 발달했지만 금융소득이 정당한 이자소득으로 취급받지 못해 샤일록이 도둑 같은 불로소득자로 묘사됐다는 것, 재판에서 이긴 안토니오가 판사에게 거액의 현금을 주려 한 것도 당시 횡행한 금권재판의 한 단면이라는 것, 동방세계가 묘사되지 않은 것은 베니스가 동방무역에 실패,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것, 그래서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베니스에 도착했을 때 베니스는 저항 한번 못한 채 손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1895년 루이 뤼미에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는 촬영기 개발에 착수했다. 아버지 앙투안은 그림을 그리다 사진작가로 전업한 케이스. 아버지는 정지된 사진을 찍고 아들들은 활동사진을 찍었다. 부자는 사진 건판 생산공장을 세워 유럽에서 가장 큰 사진판 공장을 운영했다. 아들들이 사업 기반을 닦은 바로 그 해에 아버지는 파리에서 열린 토머스 에디슨의 활동사진 영사기 전시회에 초청받아 영화의 원리를 처음 접하게 됐다. 사진가였던 그는 리옹으로 돌아와 이 신기한 기계를 아들들에게 설명했다.”
영화사를 다룬 책의 일부처럼 보이는 위 인용문은 저자 김현종씨가 리옹에서 영화의 역사와 만난 결과다. 영화 카메라 겸 영사기 발명가로서 영화의 시조로 불리는 뤼미에르 형제에 관한 저자의 지식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무척 다양한 분야의 역사 지식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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