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석영은 차가운 사람이다. 객(客)은 도무지 열 수 없는 맘속 열 개의 빗장 친 문이 있다. 날 선 직관, 시퍼런 냉소. 미친 바람의 소용돌이에서도 가슴 한구석은 늘 서늘했다.
오랜 세월 그는 그 붉고 푸름으로 인해 지나치게 존경받고 지나치게 경멸당했다. 한 사람이 쉬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의 쌍봉 골에서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홀로 위대했으리라. ‘장길산’을 쓰고, 반독재투쟁을 하고, 북한 땅을 누비고, 망명생활을 하고, 감옥살이를 겪고, 이념적 사투를 벌이고. 두 번 이혼하고, 더 많이 연애하고, 더 세게 놀아보고, 그럼에도 늘 생활인이었고, 새로 발견한 일상이 참 소중해, 사람 냄새 폴폴 나게 가슴 뒤흔드는 소설 쓰마, 허나 세상사에 너무 밝은 것이 외려 눈치 뵈는 노회한 문청(文靑). ‘황석영은 이렇게 말했다.’
빠르고 강하고 두텁게
“이제는 지루한 거 잘 참아요. 내가 원래 어드벤처에는 강한데 디테일에 약했거든. 사람들이 그래요. 대한민국 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라고.”
서울 동소문동 ‘문학동네’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그는 지나치게 ‘신사’였다. 조금은 안심되고 그 두 배로 당혹스러웠다. 그는 불편한 사람이어야 했다. 거칠고 날카롭고 ‘내 것’에 물러섬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부드러웠다. 달변의 속도도 잘 조절돼 있었다. 소문 속의 그를 확인시켜주는 건 큰 목소리, 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투뿐이었다.
이튿날 오전 11시, 고양시 대화마을 그의 집 거실에서 다시 마주앉았다. 그는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사동 어딘가에서 택시 타고 귀가한다더니 그 뜻대로 되지 않았던가 보다. 하기야 그의 ‘앞마당’인 인사동이 제 주인을 고이 놓아 보내줄 리 있겠는가. 미필적 고의의 음주로 괴로운 와중에도 그는 10시간의 난타를 잘도 견뎌냈다.
황석영은 솔직했다. 소탈하고 사내다웠다. 불편한 질문도 대충 넘기지 않았다. 말은 찰지고 정확하고 확실히 재미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구라’의 현란한 입담을 누가 있어 말리겠는가. “기자들은 듣고 싶은 말을 지들이 다 가지고 온다” 했다. “원하는 말이 뻔하니 해줄 말도 그뿐”이라 했다. 그는 세상의 기대에 과히 어긋나지 않는 몇 가지 버전의 ‘자기 해설집’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제법 ‘맞춰주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슬슬 갑갑증이 나나 보았다. 세계관이 바뀐 것도 아닌데, ‘반미의 선봉, 민족작가 황석영’을 습관처럼 찾는 이들을 보면 왜 문득 씁쓸해지고 부담스레 느껴지는 걸까. 그는 “감옥 가서 생긴 내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1998년, 5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황석영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래된 정원’ ‘손님’을 잇따라 상재해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현재도 한국일보에 ‘심청, 연꽃의 길’을 연재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방북,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 등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전국 대학의 국문과·문예창작과 교수 및 평론가 109명이 선정한 ‘20세기 한국문학사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기도 했다.
깊이 들여다본 황석영은 냉정했다. 자존심 강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다 보여주는 것 같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 같고, 때로 흥분하거나 흔들리는 듯도 했지만, 그는 정작 움직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상황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었다. 실수도 있었고 깨지기도 많이 했으되 다음 순간 더 높이 내디딜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빠르고 강하고 두터운 까닭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제멋대로이고 좌충우돌하며 ‘구랏발’이 하늘을 찌르는 그이 속 또 하나의 그는, 지금 그 어느 진흙밭을 구르며 제 쌍둥이의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어느새 대화는 수 읽기가 돼버렸다. 그는 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