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1,2학년 무렵부터 콩트 비슷한 걸 끼적댔어요. 소설 꼴 갖춘 글은 경복고 입학 후부터 쓰기 시작했고. 1학년 때 교내 문학상 탄 소설을 누군가 베껴 부산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일도 있어요. 그게 당선이 됐죠. 마침 부산 사는 친구놈이 알려줘 취소를 시켰지만.”
같은 해 단편 ‘팔자령’이 학원문학상에 당선됐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학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경복고 2학년 1학기 때 처음 긴 가출을 했다. 1년 뒤 복귀했지만 3~4개월 다니다 또 그만뒀다. 주먹깨나 쓰는 녀석 하나를 뼈가 나가도록 ‘폭격’한 탓이었다. 경복고 퇴학, 서라벌고교 편입, 1주일 후 자퇴, 남도 방랑, 동양공고 야간부 편입, 다시 자퇴. 그렇게 험한 10대 시절을 마감할 즈음,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탔다. 1962년이었다.
2년 후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그 사이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한번은 동백, 한번은 세코나였다. 실존의 고통이 살을 째듯 아팠다. 한일회담 반대시위 중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건설노동자를 따라 남도로 갔다. 신탄진, 청주, 진주, 마산 등지를 떠돌다 칠북 장춘사에 들어갔다. 동래 범어사를 거쳐 금강원에서 행자 노릇을 했다.
-어찌어찌 찾아온 어머니의 손에 끌려 상경을 했다던데, 왜 그리 쉽게 포기했나요.
“그 대단한 양반이 절 보더니 무너지듯 주저앉아 웁디다. 그런 걸 내 처음 봤거든.”
1966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이듬해 청룡부대 2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닌게아니라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미국이 뭔지, 민족이 뭔지, 마약과 고문과 전쟁이 뭔지 몸으로 알게 됐다. 랭보를 사랑한 탐미적 문학소년은 포연 속에서 숨을 다했다. 1969년 5월 제대. 이후 6개월은 관 속 시신처럼 폐쇄된 나날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펜팔 여자친구가 생명끈이 됐다. 그렇게 겨울을 나면서 쓴 단편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비로소 대면한 여자친구는 그의 첫 아내가 됐다. ‘깃발(1988)’을 쓴 소설가 홍희담씨다. 이들은 십수년의 결혼생활 끝에 1986년 헤어졌다.
-왜 헤어져야 했을까요.
“글쎄…, 저는 ‘사회봉사’하느라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 다 과도한 사회봉사를 했으니까. 공교롭게도 제가 광주를 잠시 비운 사이 5월 항쟁이 났어요. 아내는 그 불길 속에 있었고. 항쟁 당시에는 도청 여성부를 맡은 송백회 회장이었고 이후에도 오송회며 이런저런 일에 깊이 관여했어요. 저는 뭐 더했지요. 그때쯤엔 아예 전국 문화운동 조직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1974년부터 10년간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한 덕분에 경제 형편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은 두서가 없었다. 가족을 이끌고 남도 땅을 떠돌아다닌 때문이다. 전남 해주에서 해남, 다시 광주로. 1981년에는 제주도로까지 흘러들어야 했다. 공안당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삶은 소설가보다 ‘운동꾼’에 더 가까웠다.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현장문화운동, 지하 선전선동. 가족의 해체는 광주항쟁 르포집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 발간으로 가속화됐다. 글과 편집을 책임진 그는 안기부에 의해 1년간 외유 아닌 외유를 해야 했다. 이때 두 번째 부인인 무용가 김명수씨를 만났다.
“귀국해 보니 벌써 소문이 났더군요. 전 이혼하기 싫었어요. 하지만 호준엄마(홍희담) 뜻이 워낙 강경해서…. 아이들(1남1녀)과 장길산 인세를 맡겼지요. 그때 마당극 안무 때문에 입국한 김명수씨와 재회했어요. 내 집 가서 함께 살자 그랬죠.”
방북과 망명, 감옥살이로 이들 부부가 함께한 날은 4년6개월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현재 이혼 소송중이며, 지금 황석영의 곁에는 방송작가인 20세 연하의 새 동반자가 있다.
지루함 못 참아 떠난 모험들
-작가에게는 결혼 자체가 부담일 수 있을 텐데, 왜 자꾸 그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한국 사회가 혼자 사는 여자를 불신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남자를 더 불신해. 나이 들어 사회적으로 이름은 있는데 남자가 혼자 살죠? 유럽은 덜한데 미국은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해요. 제가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니까 몇 번씩 이렇게…. 그런데도 그게 굉장한 핸디캡이야. 제가 감옥에서 나와 1년간 혼자 살았잖아요. 아유, 대단히 불편하고. 저 새끼 지금 뭐하지? 바람 피는 거 아니야? 애인 있을 거야…. 뭐 이런 게 아주 굉장해요.”
-두 번 결혼에서 세 자녀를 뒀는데, 그런 상황이 가슴 아프거나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그런데 말예요, 첨에 한번 허물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부턴 가정의 중요성을 별반 느끼지 못하게 돼버렸어요. 지금도 제게 가정은 호준엄마랑 애들 있는 그곳이에요.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꾸 그 쪽에 전화해서 의논하게 되고. 호준엄마 좋은 사람이에요. 진짜 어머니 대역이라고. (제대 후)가장 힘들 때 정신적으로 날 구원해줬고, 또 감옥 생활 5년 동안 뒷바라지해줬고. 요즘 제가 안정 찾고 맹렬하게 작품 써가는 걸 보고 호준엄마가 그래요, 이제 안심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