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 글: 김언수

    입력2003-02-03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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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시월 이일 아침.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이제는 시일이 지나 업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서류 파일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업무상 다소 가치가 있어 보이는 서류 파일들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주 많은 것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책상 서랍 속에는 여전히 파일철, 모나미 볼펜, 호치키스, 클립 같은 잡다한 사무 용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놓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그에게는 이제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있는 미스 김에게 혹시 이 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미스 김은 그의 책상 위를 힐끔 보고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맙지만 자신에게도 그 정도의 사무 용품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잡다한 사무 용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느닷없는 그의 대청소를 보고 사무실 동료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동료들이 던진 질문은 그의 난데없는 행동에 대한 형식적인 관심에 불과했으므로 그가 말한 프라이데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더 옳다. 동료들은 프라이데이는 또 뭐야? 하고 중얼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돌아가자 그는 다시 오른쪽 상단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 속에는 업무용 일기장과 명함첩 그리고 가족 사진이 끼워진 액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우선 명함첩을 꺼내서 그 중 몇 장을 뒤적거렸다. 대부분의 명함들은 이름을 읽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 참 웃기는 일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 명함첩은 사진 앨범처럼 얇은 비닐로 덮여 있어 칸마다 명함을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텔레비전에서 무려 7만장이나 되는 명함을 모은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 받아 산 것이었다. 그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은 수백 권의 명함첩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자신은 명함 속의 사람들(7만여 명의 사람들)과 지난 40년간 지속적인 신뢰와 우정을 쌓아왔으며 그 두터운 신뢰와 우정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자 성공의 발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의 말에 지나치게 감동을 받았다. 7만여 명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우정과 신뢰를 나눌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후로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이 들고 있던 것과 비슷한 명함첩을 사서 정성 들여 명함을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도 7만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몇천 명 정도와는 지속적인 우정과 신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고작 몇백 명도 안 되는 명함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도 지속적인 우정과 신뢰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라이데이가 누구지?”

    그러나 그는 이제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명함첩에서 일일이 명함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한진 유통 영업부 과장 김말두’, ‘찌라시, 홍보물, 스티커 전문. 완당 마스터. 대표 구준엽’, ‘신속 배달. 현진 택배. 한기동’ 같은 명함들을 그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문득 명함첩에서 일일이 명함을 꺼내는 것이 무척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명함이 필요 없다면 명함첩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명함첩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업무용 일기장 속에는 아직 깨끗한 속지가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가족 사진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가족 사진을 꺼냈다. 가족 사진이 왜 서랍 속에 들어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가족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나이가 들면서 지방과 외국으로 흩어지거나 급환과 교통사고로 죽은 그의 가족들이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듯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손을 꼭 붙잡고 있었을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그의 입사 동기지만 직급은 한 끗발 높은 K가 다가와서 열시 반에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다. K가 난데없이 책상 정리는 왜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프라이데이? 프라이데이가 누구지? 하고 물었다. 그는 K에게 프라이데이가 누군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머리 속에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는 이리저리 머리 속을 굴려보다가 문득 프라이데이는 내 친구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는, 하지만 어쩌면 프라이데이는 내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말했다. K가 뭐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장난하는 것은 아닌데 프라이데이에 대해 잘 설명을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프라이데이가 누군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더구나 불충분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었으므로 그는 딴청 피듯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약간 머쓱해진 K는 덩달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한 사내가 앞 건물의 유리창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17층에 있었으므로 사내도 17층이나 16층쯤에서 유리창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사내는 손으로 조절하는 밧줄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사내의 장비는 다소 위험하고 원시적으로 보였다. 더구나 밖에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사내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앞 건물에 매달려 있는 유리창 청소부는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내는 이 근처의 빌딩 유리창 청소를 전문적으로 하는 용역업체 직원으로 예전에 그의 회사에 유리창을 닦으러 왔을 때 그와 몇 마디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높은 빌딩에 매달려 유리창 청소를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늙은 사내였다. 그 늙은 사내는 빌딩 창문에 매달린 채로 유리창에 노크를 해서, 죄송하지만 물 한 컵만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고 그에게 매우 공손하게 물었었다. 그는 흔쾌하게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환풍창을 통해 건네주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늙은 사내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가 가져다준 컵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므로 늙은 사내는 물을 마시고는 조금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컵을 받으면서 물을 더 드릴까요? 하고 묻자 늙은 사내는 그렇지만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정수기에는 물이 많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면서 두 번이나 더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늙은 사내에게 컵을 건네면서 자신은 높은 곳을 무서워해서 빌딩 유리창 닦는 일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이어 그는 나이도 많으신 분이 이렇게 높은 곳에 매달려 일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늙은 사내가 손사래를 치면서 익숙해지면 무섭지도 않고 그리 힘들지도 않으니 대단할 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오래 했냐고 물었다. 늙은 사내는 한 30년 정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늙은 사내는 그에게 컵을 건네주고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줄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었다.

    그가 늙은 사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빗방울 몇 개가 예리한 각도로 유리창에 부딪혔다. 비가 오는군. 그가 말했다. 그럴 리가, 오늘은 날씨가 화창할 거라고 일기예보에서 말했는데? K가 옆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빗방울 몇 개가 떨어졌는걸. 그가 다시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빗방울은 좀더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신봉자인 K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자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앞 건물에 매달려 있는 늙은 사내는 비가 내리자 옥상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옥상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17층에 매달려 있던 늙은 사내는 자신이 앉아 있던 발판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늙은 사내의 허리춤에 있던 안전 벨트가 밧줄과 엉켜서 늙은 사내의 허리를 붙잡았다. 늙은 사내는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안전 벨트를 풀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늙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안전 벨트를 잘랐다. 늙은 사내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발판이 기우뚱했다. 순간, 늙은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늙은 사내가 급히 밧줄을 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늙은 사내가 잡은 밧줄은 이미 자신이 잘랐던 안전 벨트의 밧줄이었다.

    늙은 사내는 안전 벨트와 함께 17층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놀라서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도 모르게 1초, 2초, 3초 하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늙은 사내가 17층에서 떨어져 지면에 다다를 때까지의 시간을 쟀다. 사내가 떨어지는 시간은 딱 3초였다. 늙은 사내는 그의 삶에 남아 있는 마지막 시간을 공중에서 허둥대다 보냈다. 늙은 사내의 몸은 아스팔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찰흙처럼 퍽! 하고 일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그는 참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고무공처럼 몇 번 튕겨 오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한 인간의 죽음을, 그것도 자신과 조금이나마 안면이 있던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고작 떨어지는 시간이나 재고 있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배반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늙은 사내가 죽는 광경을 보고 애도하는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왜 고무공처럼 튕겨 오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자신이 아주 나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악마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K가 갑자기 아주 큰 소리로 “이봐! 이봐! 저기 사람 떨어졌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무실 직원들은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진짜? 어디? 어디? 하고 소리지르면서 창가로 모여들었다. K가 유리창 청소부가 떨어져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직원들이 창가에 모여서 웅성거리거나 탄성을 지르면서 죽음을 구경하는 저마다의 놀라움을 표현했다. 눈이 나쁜 여직원 한 명이 저기 까만 쓰레기 재활용 봉투처럼 보이는 것이 그 시체냐고 K에게 물었다. 그러자 K가 “내가 처음부터 지켜봤는데 말이야 떨어지는 데 딱 3초 걸리더만, 죽는다는 게 그렇게 싱거운 일이야” 하고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는 K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K도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계속 K를 쳐다보자 K는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는 K에게 “저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야” 하고 말했다. K는 저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늙은 사내가 회사 유리창을 청소하러 왔을 때 자신이 물을 가져다주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K는 피식 웃으면서 “여기 4천만의 친구가 나타나셨군” 하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K가 몹시 미워졌으므로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고 현장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찰흙처럼 일그러진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직원들은 “정말 신기하다” “나는 사람 죽은 거 처음 봤어” 같은 말들을 떠들어대면서 모두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회사에서 멀어지다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금세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다시 열어보았다. 이제 책상 서랍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으므로 더 이상 사무실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가방을 들었다. 가족 사진 액자 때문에 가방의 지퍼가 닫히지 않았으므로 그는 가방에서 가족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가족 사진을 다시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파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은 그가 버린 업무상 가치가 있거나 혹은 가치가 없는 서류 파일들과, 그가 이름을 보아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명함들로 이미 가득했으므로 그는 가족 사진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 안을 발로 꾹꾹 밟아야 했다. 그가 쓰레기통 안을 발로 꾹꾹 밟고 있을 때 다시 K가 다가와서 부장님도 참석하고 더구나 상무님까지 참석하니 열시 반에 있을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에 늦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했다.

    그는 사무실을 나와서 잠시 휴게실에 들렀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고 담배를 피웠다. 몇 번이나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빌딩 유리창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고개를 내밀어 늙은 사내가 떨어진 지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늙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득 아까 K가 말한 일기 예보를 떠올렸다. K가 들은 일기 예보에 따르면 오늘 날씨는 화창해야 했다. 그렇다면 유리창 청소부의 죽음에 기상청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비가 오는 줄 알았다면 늙은 사내는 유리창을 닦기 위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은 사내의 죽음과 상관없이 오늘 저녁 뉴스에도 여전히 예쁘장한 리포터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일의 비 올 확률이 20%라든가 혹은 비 안 올 확률이 20%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자 그는 조금 화가 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열시 반에 그는 회사문을 나섰다. 물론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 회의에 참석한다고 해도 공격, 전략, 마케팅에 대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격이니 전략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나 그를 두렵게 만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장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장이 생각하기에 상무님이 참석하는데 나머지 부하 직원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부장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합리적인 이유를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 어쩌면 프라이데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퍽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그는 프라이데이가 누구인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회사 빌딩의 회전문을 밀치고 나왔을 때 회사 앞은 119 구조대와 경찰들이 몰고 온 구급차와 경찰차 그리고 소방차로 혼잡했다. 거기다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노란 테이프로 선을 쳐두었기 때문에 거리는 마치 폭탄 테러를 당한 도시처럼 삼엄하고 부산스러웠다. 그는 사내가 살아 있을 때는 알량한 밧줄 하나만을 내려주던 이 사회가 죽은 시체를 위해서 저렇게 막강한 장비와 인원을 보낸다는 것이 다소 의아했다.

    그는 늙은 사내의 마지막 모습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사고 현장은 너무나 복잡했고 또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는 안내판을 붙이고 경찰들이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는 늙은 사내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빌딩 유리창에 30년 동안이나 매달려 살았고, 죽어서는 저렇게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노란 테이프 속에 갇혀 있으니 늙은 사내의 인생은 무척 외로웠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은 이제 내리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한방 쏟아질 듯한 두껍고 무거운 구름들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일기 예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우선 회사 근처에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으므로 종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업무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빌딩의 옥상 위에는 왕관을 쓴 것처럼 저마다 거대한 광고판이 올려져 있었고 그 광고 속에 들어 있는 예쁜 여자들은 맥주나 샴푸 같은 것을 손에 하나씩 들고 이런 상품을 가지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그가 걷는 보도 위에 엽서 같은 낙엽들을 노랗게 떨구었다. 그것을 보니 그는 가을이 왔다는 것을, 그가 좋아하는 시월이 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가스가 없어서 라면을 끓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안성탕면을 부숴서 과자처럼 먹었다. 맛이 너무 싱거웠다. 그는 분말 스프를 약간씩 쳐서 먹었다. 분말 스프를 쳐서 먹으니까 훨씬 맛이 있었다. 가스가 끊겨서 기분이 우울했지만 분말 스프 때문에 그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안성탕면은 끓여 먹어야 제 맛이지만 분말 스프만 있다면 그냥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형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주인집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안성탕면의 분말 스프를 들고 있었다. 그는 제발 분말 스프만은 뺏어가지 말아달라고 할머니에게 사정했다. 할머니는 그러면 방세를 내라고 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기 때문에 지금은 돈이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프라이데이란 놈이 그렇게 무섭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는 친절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프라이데이라는 놈이 그렇게 친절하다면 왜 회사는 안 나가고 지랄이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는 정말 친절하지만 입 속에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잔뜩 숨기고 있어 프라이데이와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진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잡소리냐며 분말 스프를 들고 사라졌다. 그는 네거리에 서 있었다. 할머니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동쪽으로 갔는지, 서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스도 안 나오고 물도 없는데 분말 스프까지 가져가시다니 정말 너무하세요, 하고 말하며 네거리에 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 한 신사가 다가와서 그에게 손수건을 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주인집 할머니가 분말 스프를 가져갔기 때문에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사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런 일이라면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주면서 이것을 품속에 간직하고만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살 거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신사의 친절에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친절한 신사는 이것이 자신의 일이니 크게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절한 신사는 곧 사라졌다. 그는 신사가 동쪽으로 사라졌는지 서쪽으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프라이데이는 다니엘 데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로빈슨의 친구였던, 혹은 종이었던 원주민의 이름, 금요일에 만났다고 해서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라고 지어준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회사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는 조금씩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종로 쪽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건널목을 건너야 했으므로 그는 회사에서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빨간 신호가 파란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래, 이제 뭘 하지?’ 하고 자신에게 조용히 물었다.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럼 너는 무엇을 하고 싶지?’ 하고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여전히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토록 회사를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회사를 박차고 나오자 이제 와서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사를 박차고 나온 지는 아직 10분도 채 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조금 걷다보면 ‘무엇을 할 것인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곧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도 블록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조금씩 더 가벼워졌다. 사실은 그의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져 그는 뜀박질이라도 해서 한참 동안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걷고 있는 거리의 보도 블록들과 가로수들이 “좋아! 잘했다구!” 하면서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땅히 달려가야 할 곳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다.

    무교동의 L화재 건물 앞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껌이나 신문 같은 것을 판매하는 가판대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샀다. 그 우유는 그가 어릴 때 목욕탕에 가면 아버지가 사주던, 레미콘 탱크를 바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 그대로였다. 아직도 레미콘 탱크 모양의 바나나 우유가 나오는군. 그는 신기해하며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가판대 앞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서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섹스는 두 번밖에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항문 섹스를 해줬다는 기사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부인하는 스포츠 신문의 일면 기사를 읽었다. 스포츠 신문 일면에는 큰 글씨체로 ‘연예인 B양 항문 섹스 적극 부인!’ 이라는 머리글을 달고, 그 아래 수많은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예인 B양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는 저렇게 예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항문 섹스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항문 섹스를 했건 안 했건 그런 것이 어떻게 신문 일면 기사로 나올 수 있는지 조금 의아했다. 신문은 반으로 접혀져 판매대에 꽂혀 있었으므로 ‘국회의원 J의 요청에 못 이겨 호텔에서 두 번 만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항문’까지만 읽을 수 있고 나머지 기사는 다른 편에 접혀져 있었다. 그는 나머지 기사가 궁금했으므로 스포츠 신문을 판매대에서 살짝 꺼냈다. 그러자 가판대 안에 있던 뚱뚱한 여자가 “신문 사실 거예요?”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 기사만 조금 더 보면 되므로 살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뚱뚱한 여자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신문은 왜 뽑아요?” 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뚱뚱한 여자가 너무나 우악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는 재빠르게 신문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연예인 B양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기왕에 보던 것이었으므로 반으로 접혀져 있어 보이지 않는 기사가 궁금했다. 그는 뚱뚱한 여자에게 일면 기사를 조금만 더 보면 되는데 잠시만 신문을 꺼내서 보면 안되겠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뚱뚱한 여자는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요? 보고 싶으면 돈 주고 봐요”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문말고 바나나 우유 하나 더 주세요”

    신문 판매대 위에는 ‘일반 신문 400원. 스포츠 신문 500원’ 이라고 가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속에는 바나나 우유를 사고 받은 잔돈 500원이 있었다. 하지만 곧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항문 섹스를 정말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기 위해 돈을 500원이나 주고 신문을 산다는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사가 바나나 우유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바나나 우유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포츠 신문 일면 기사에 나온, 수많은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예인 B양 사진도 슬쩍 바라봤다. 연예인 B양은 큰 심리적 고충을 겪고 있는지 화장기 없이 초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만큼 예뻤다. 연예인 B양의 사진을 보자 그는 국회의원 J가 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섹스를 해야 했는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가판대 안에 있는 신경질적이고 뚱뚱한 여자에게 500원을 줬다. 뚱뚱한 여자가 “신문 사시게요?” 하고 훨씬 상냥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신문말고 바나나 우유 하나 더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빨대도 같이 달라고 덧붙여 말했다.

    20분쯤 후에 그는 종로 3가에 도착했다. 막상 종로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이 왜 종로에 왔는지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가 종로에 와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종로에 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이 종로에 오지 말아야 할 이유 또한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로 3가의 금강제화 앞에서 종로 1가 방향과 종로 5가 방향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종로 1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5분쯤 걷다가 국세청 신축 건물 앞에 도착했다. 국세청 건물은 아주 웅장하면서도 특이했다. 국세청 건물은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깨끗하기도 했거니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저런 곳에서 세금을 거둔다면 정말 공정하고 투명하게 걷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국세청 건물 앞의 광장에 서서 그 웅장한 건물을 천천히 바라봤다. ‘내가 낸 세금이 모두 저곳으로 흘러 들어갔구나’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국세청 건물로 걸어가서 유리로 된 벽면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국세청 신축 건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그의 얼굴은 까칠까칠했다. 그는 입을 벌려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 낀 것이 없는지 찾아보았다. 고춧가루는 없었다.

    그는 국세청 앞의 광장에서 이제 뭘 해야 할지 혹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니 참 이상하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종로 5가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라고 쓰여진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서 “심판이 가까워왔습니다. 제발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라고 말하며 그에게 천국 가는 전단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 전단지를 받았다. 전단지에는 하늘로 재림하는 예수의 그림이 담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사탕 두 개가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그는 천국 가는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탕 두 개를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빨아먹었다.

    그는 10분 뒤에 종로 5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제 뭘 할 것인가, 혹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종로 1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종로 1가에서 종로 5가를 다섯 차례나 왕복했다. 어쩌면 더 많이 걸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국세청 앞에 도착할 때마다 거대한 통유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뭘 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가를 자신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종로 1가에서 종로 5가까지 다섯 차례나 걸어다니면서 생각을 해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또한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너무나 바빠서 갈 곳이 없었고, 너무나 바빠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했으며, 또 너무나 바빠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시간을 내지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동안 너무나 바빴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비로소 시간이라는 게 주어졌는데 왜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그는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다시 종로 5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을 지나고 금강제화를 지나고 탑골공원 앞을 지나가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탑골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탑골공원에는 땅바닥을 쪼고 있는 비둘기와 몇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노인들이었다. 노인들 중 몇은 등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냥 있었다. 노인들은 늙은 코끼리처럼 천천히 눈을 껌벅거리면서 정말로 그냥 서 있거나 그냥 앉아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특별히 무엇을 하지도 않은 채 단지 지팡이를 짚고 그냥 앉아 있거나 지팡이를 짚고 그냥 서 있었다. 그는 모두가 “죄송해요. 요즘은 너무도 바빠서 말이죠”라고 말하는 이 속도감 넘치는 시대에 이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곳이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노인들은 담배도 아주 천천히 피웠는데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내뿜는 데 거의 10초도 넘게 걸리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을 보자 그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는 하루에 한 갑 정도의 담배를 피우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회사 휴게실에서 담배를 태우고 난 다음 여지껏 단 한 대의 담배도 피우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여전히 라이터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회사 휴게실에 라이터를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하나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새로 사는 것은 어쩐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집에는 족히 백 개도 넘는 라이터가 있었다. 부장은 업무가 일찍 끝나는 날마다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레벤 호프와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 갔다. 그때마다 레벤 호프 사장은 그가 분명히 라이터가 많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리. 우리 가겐 이대리 없으면 쓰러져. 그런데 이깟 라이터가 문제야. 그리고 단체 손님이나 접대 예약할 때 필요하잖아. 전화해주면 서로 좋지” 하고 말하면서 그의 양복 주머니에다가 라이터를 넣어주었다.

    비비안 룸 단란주점의 마담은 “이대리님은 재미없게 부장님하고만 같이 오더라. 그러지 말고 젊은 분들끼리도 모여서 오고 그러세요. 서로 나이가 맞아야 애들이 스페셜로 서비스를 들어가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 뇌쇄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안주머니 깊숙이 개인 전화번호가 들어 있는 은밀한 라이터를 넣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접대 예약용 라이터와 은밀한 라이터가 무려 백 개나 있었다. 잘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어쩌면 백 개가 넘을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갈비집, 대리운전, 일식집 등등에서 받은 수많은 라이터가 있었으므로 사실 그는 평생 쓰고도 남을, 어쩌면 웬만한 사무실 하나정도는 폭파시킬 수도 있을 만큼 많은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라이터가 그렇게 많은데 고작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다시 라이터를 사는 것은 건전한 소비 행위가 아니며 또한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물품이 공급되어야 하는 효율적인 유통 경제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이제 실업자 신세가 되었으므로 작은 것이라도 절약해야 했다. 그는 라이터를 하나 사는 것보다 담뱃불을 잠시 빌리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탑골공원에는 그가 담뱃불을 빌릴 만한 사람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공원에는 노인들과 비둘기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젊은 사람이 노인에게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어쩐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노인들 외에는 비둘기밖에 없었는데 불행히도 비둘기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라이터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젊은 사람이 나이 드신 분에게 담뱃불을 빌리는 행위가 분명 예의 바른 행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노인들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고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그렇게까지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수대 옆 벤치에 한 노인이 흡사 독립운동 시절의 김구 선생이 입었을 법한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너무나 근엄해 보여 정말 아직도 어디선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가 노인 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는 약간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비둘기들이 점령하고 있는 식수대로 가서 손을 살짝 저어 새들을 쫓아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비둘기들은 잠시 날아올랐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노인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이석만이라고 합니다” 하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연이어 그는 “죄송하지만 제가 어르신께 무례한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난데없이 “일 없어. 나는 물건 안 사” 하고 말했다. 그는 노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예?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물었다. 노인은 “지금 나에게 물건 팔려고 그러는 게지?” 하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시 “자네 건강 식품이니, 물리 치료 기구니 그런 거 팔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그럼 뭐야?” 하고 물었다. 그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제가 할아버님께 담뱃불을 좀 빌리자고 하면 크게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그의 말을 잘라서 “나는 라이터 있어! 좋은 라이터야. 우리 아들놈이 선물해준 거” 하고 말했다. 그는 다시 “예?” 하고 물었다. 노인은 “나는 라이터 있다고. 지금 나한테 라이터 팔려고 하는 게지?”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럼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면 어르신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정말 물건 팔려는 게 아니야?” 하고 재차 물었다. 그는 자신은 정말 물건을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물건을 팔려는 게 아니면 끝까지 들어줄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노인과 라이터

    그는 자신이 어르신에게 담뱃불을 빌리려고 했는데 그것은 큰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먼저 말했다. 왜냐하면 어르신처럼 연세가 지긋하신 분에게 제가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립군 스타일의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연세가 많으신 분에게, 특히 어르신처럼 인품이 고매해 보이는 분께는 절대 담뱃불을 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어서 자신이 할아버지의 인품을 고매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노인은 여전히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얼마나 라이터가 많은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많은 라이터들은 자기가 원한 바가 아니며 그가 분명히 싫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벤 호프 사장과 비비안 룸 단란주점의 마담이 막무가내로 자신의 양복 상의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라이터가 무려 백 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게 라이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에게는 담배는 있지만 라이터가 없으며, 그래서 고작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하나 더 산다는 것은 건전한 소비 생활과 효율적인 유통 경제의 측면에서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론 자신처럼 젊은 사람이 어르신에게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그것은 순전히 지금 탑골공원에 노인들과 비둘기밖에 없는데다, 비둘기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 자신이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네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투철하다 뭐 이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좀 답답하고 한편으로 짜증스러웠다. 그는 간단하게 말하면 어르신에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담뱃불을 좀 빌리고자 함이었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한 3초 정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그냥 라이터만 빌려주면 되는 거야?” 하고 말했다. 그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자신이 했던 긴 이야기는 라이터를 빌리기 위함이었으므로 “예”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인이 그에게 라이터를 빌려주면서 “이 사람아, 그러면 와서 불 좀 빌려주십시오 하고 간단히 말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하나?” 하고 말했다.

    그는 얼떨결에 라이터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곧장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이야기한 그가 노인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에게 저쪽에 가서 불을 붙이고 오겠노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냥 여기서 피면 되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는 식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도 노인이 보였으므로 그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한 대를 더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연속해서 두 대의 담배를 피우자 그는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속에서 구토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갑자기 어지러워졌으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담뱃불을 발로 비벼 껐다. 그는 한참 동안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탑골공원 위를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문화적인 비둘기들을 구경했다. 그는 비둘기는 저리도 자유로운데 왜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둘기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는 이제 구토도 현기증도 사라진 것 같았다.

    그가 라이터를 돌려주기 위해 노인을 만났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어쩐 일인지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이 잠시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노인이 준 라이터는 흔히 쓰는 일회용 라이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노인은 아들에게 선물 받은 좋은 라이터라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노인이 준 라이터는 선물용 고급 라이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일회용 라이터를 아버지에게 선물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좋은 라이터라고 여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인의 자유이므로 그것까지 그가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라이터가 아니라 노인의 라이터이므로 그는 노인을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는 담배를 세 대나 피우면서 한 시간이나 노인을 기다렸지만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아주 가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탑골공원에 있던 많은 노인들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곧장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옷을 벗고 침대 위에 누웠다. 탑골공원에서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몹시 떨렸다. 그리고 머리도 아팠다. 그는 머리를 만져보았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목도 아프고 편도선도 부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상관없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감기에 걸렸다.

    그것은 통유리로 막혀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어떤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입 속에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사무실의 공간 속으로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흉측한 균이 마구 떠다니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 입 속에 숨겨온 그 균은 미스 김의 재채기를 통해 사무실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과장의 폐를 한 바퀴 돌았다가, 결재 서류를 놓고 부장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침과 함께 날아다닌다.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균은 악수를 할 때마다 손에서 손으로 전염되고 술잔을 돌릴 때마다 입에서 입으로 전염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감기보다 더 심각한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때때로 이유도 없이 머리에 열이 나고 구토와 설사가 나곤 했었다. 출근길에 지하철 안에서나 회사 계단을 오를 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기도 했었다.

    그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점령군처럼 돌아다니며 건강한 세포들을 감금하고 마구 고문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몸 속의 기관들이 점점 부패되고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이 결국에는 끔찍한 괴물로 변하게 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하자 그는 갑자기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끔찍한 일이군. 그러자 그가 지금 머리에 열이 있는 것은 미스 김의 재채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보신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김과장이 구더기나 뱀 같은 것을 먹을 때 기생충의 털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걸려왔던 그냥 일상적인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감기에 걸렸으면 양치질을 하고 자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양치를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치약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다.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방은 반지하였지만 실제로는 반지하보다 더 내려간 3/4 지하였고 그나마 있는 작은 창문은 옆집의 LPG 가스통 덮개에 가려 있어 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몇 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명종 시계를 바라봤다. 그의 자명종 시계는 며칠 전부터 건전지가 다 되어 정지해 있었다. 굳이 시간을 알고자 한다면 116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는 이제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꼭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무엇이든 배달을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손잡이 옆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광고 스티커들을 읽어내려갔다. ‘황제 보쌈. 334-9420’, ‘한 판 시키면 한 판 더! 와우 피자 335-6789’, ‘스피드 중화반점 334-8282’. 그는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삼삼사에 팔이팔이, 삼삼사에 팔이팔이” 하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전화를 걸었다. 40대 중반의 사내가 “예,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입니다” 하고 말했다. 중국집 주인의 목소리는, 가판대에서 만난 뚱뚱한 여자의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는 다르게, 정말 너무나 친절하고 맑게 들려와서 그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자장면 한 그릇도 배달이 되느냐고 물었다. 전화기 속의 사내가 “그럼요. 걱정 붙들어 두세요. 저의 스피드 중화반점은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언제나 친절과 고객 감동으로 배달해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스피드 중화반점 주인의 말에 감동을 받아 자장면 대신에 좀더 비싼 짬뽕을 시켰다. 짬뽕은 정말 금방 배달되었다. 하지만 별로 고객을 감동하게 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짬뽕을 허겁지겁 먹고 짬뽕 그릇을 문 밖에 내놓았다. 짬뽕 그릇은 먹다 남은 국물 때문에 아주 지저분해 보였다. 그는 저렇게 지저분하게 그릇을 돌려주는 것은 짬봉 한 그릇이라도 정성 들여 배달해주는 스피드 중화반점의 친절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짬뽕 그릇을 들고 들어와 찌꺼기를 싱크대에 버리고 물로 대충 씻어서 다시 문 밖에 내놓았다. 훨씬 보기가 좋았다. 배달원이 깨끗한 그릇을 가지고 돌아갈 걸 생각하니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담배를 한 대 물고 그의 집에 백 개도 넘게 있는 라이터 중에서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머리에는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편도선도 부어 있고 구토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현기증이 나고 머리에 열이 있는 것은 나쁜 병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스 김에게 옮아온 바이러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뱀이나 너구리 같은 것을 좋아하는 김과장의 몸 속에서 생긴 기생충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하청을 따기 위해 그에게 접대를 했던 중소 기업의 사장들이 괘씸한 마음에 음식이나 술에 나쁜 병균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은 그냥 그가 한 달에 한 번씩 걸렸던 일상적인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감기에 걸렸으면 양치질을 하고 자야 하는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양치질을 하지 않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몇 시인지 모두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이제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방문을 열고 문에 붙어 있는 스피드 중화반점 스티커를 보고 “삼삼사 팔이팔이 삼삼사 팔이팔이” 하고 중얼거리며 스피드 중화반점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은 친절과 고객 감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짬뽕을 시켰다. 짬뽕은 정말 빨리 배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을 감동시킬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짬뽕을 국물까지 다 비우고 싱크대에서 그릇을 씻은 뒤 문 밖에 내놓았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머리에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편도선은 더 부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또 한 대를 더 피웠다.

    그는 머리에 열이 나는 것은 감기 때문이고 감기에 걸리면 양치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기에 걸리면 입 속에 병균이 우글거리고 그 병균은 양치질을 해야만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입 속의 병균은 몸 속으로 들어가 그의 몸을 마구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입 속의 병균들을 깨끗이 씻어내지 않으면 조그만 사무실에서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병균들이 공기 중에 날아올라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상하는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감염시키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가 지금 머리가 아픈 것은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감기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양치를 하지 않아서,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매일 단정하게 면도를 하고, 깨끗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무실의 남자 직원들과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보기에도 멋있고 청결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직원들 중에 누가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입 속에 숨겨두고 있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에게 너무나 친절하게 대했으므로 누가 입 속에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입 속에 숨어사는 창을 든 나쁜 병균과 감기와 현기증과 구토와 잔뜩 부어오른 편도선과 친절에 대해 계속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므로 처음에 눈을 떴을 때는 한동안 목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회사를 며칠이나 무단 결근했는지, 또 오늘은 며칠이고 지금 몇 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런 것은 이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문을 열고 중국집 전화번호를 읽은 다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늘 들려오는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이라는 멘트는 그 날 따라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거기가 중국집이냐고 물었다. 주인은 여기는 중국집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가 중국집이 맞다면 짬뽕을 하나 배달해달라고 말했다. 주인은 화가 나지만 최대한 억제하는 목소리로 지금은 새벽 세 시고 우리 집은 스물네 시간 하는 집이 아니라서 지금은 배달을 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언제나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이라면 짬뽕 한 그릇쯤은 배달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중국집 주인은 “이 새끼야, 감동이고 지랄이고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알아? 새벽 세 시야. 새벽 세 시. 새벽 세 시에 자장면 배달시키는 미친놈이 어디 있나.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쳐자” 하고 말하고 전화를 딸깍 끊었다. 그는 중국집 주인의 성난 목소리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는 중국집 주인의 말대로 그냥 잠이나 쳐잘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고 또 며칠인지 모르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내내 잠만 잤기 때문에 다시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오늘이 며칠인지 모르지만 중국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새벽 세 시고, 새벽 세 시에는 지극한 친절과 고객 감동도 쉬어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배달이라는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선 약간 실망감이 들었다. 그는 지금이 새벽 세 시라면 회사에 무단 결근을 한 지 이틀째 되는 새벽 세 시일까 아니면 사흘째 되는 새벽 세 시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의 무단 결근에 대해, 특히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에 빠진 것에 대해 회사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을 것이다. 부장은 이 사실에 대해 대단히 분노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부장과 같은 합리주의자가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프라이데이와 헤어지고 싶었다는 그의 상황을 이해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부장은 프라이데이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가 이런 해괴한 일을 벌이는지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부장은 곧 그의 이런 행동들이 업무상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무님께 보고해야 할 통계 서류들을 회사를 빠져나오면서 쓰레기통에 꾹꾹 발로 밟아버렸기 때문에 부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합리적인 형식으로 상무님께 아무것도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회사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부장이 아무리 화가 났다 하더라도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핸드폰을 회사에 두고 나왔다. 또 육 개월 전에 이사를 오면서 인사과에 주소 변경 사항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반지하 방의 위치를 회사 사람들은 모른다. 또 회사 사람들은 그의 핸드폰 번호만 알 뿐 집 전화번호는 알지 못한다. 부장이 이런 사실을 두고 상사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를 약간 기분 좋게 했다. 상무님께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부장의 모습을 상상하자 약간 고소한 기분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프라이데이와 부장은 어쩐지 닮은 곳이 한두 군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지금 그는 새벽 세 시에 일어났고 배가 몹시 고팠다. 그러나 새벽 세 시는 친절과 고객 감동도 잠을 자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도 배가 고팠으므로 24시간 편의점에서 라면이라도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거리로 나왔다.

    새벽 세 시의 거리는 한산했지만 반대편 인도에서는 양복을 입은 취객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어 다소 시끄러웠다. 그들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들처럼 보였는데 두 명은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벼룩시장’이나 ‘가로수’ 같은 정보지를 놓아두는 보급대를 발로 차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두 명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급대를 발로 차는 사내와 다른 사내를 한 사내가 중간에서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질이라도 벌어지면 재미있는 구경이 될 것 같아 한참동안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주먹질을 할 것처럼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해댔지만 정작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욕설만 할 뿐이었다. 그는 에이 시시하군, 하고 중얼거리며 계속 길을 걸어갔다. 이따금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지나갔다. 상점은 대부분 푸른 셔터를 내린 채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백 미터 정도를 걸어갔지만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퇴근하는 길에 어디선가 24시간 편의점을 본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백 미터를 걸어갔다.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서쪽으로 사백 미터를 걸어갔다.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이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24시간 편의점이 보이지 않아서 다시 네거리로 돌아왔다. 그는 약간 허탈해진 마음에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선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유통과 물품의 천국에서 24시간 편의점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 건너편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여전히 주먹질은 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해대고 있었고 이따금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비틀비틀거리며 아스팔트를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서 싸움을, 아니 욕설을 하고 있는 사내들에게 24시간 편의점의 위치를 묻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오토바이 폭주족들이라면 여기저기를 뽈뽈거리며 잘도 돌아다니니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잘 알겠지만 그들을 세워서 길을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는 다시 담배 한 대를 더 물었다. 그때 투피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길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고 사무원처럼 단정해 보였다. 여자는 거리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양복 입은 사내들 때문에 겁을 먹은 듯 몹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는 사무원 복장을 한 여자라면 편의점의 위치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건너편의 사내가 “그래 때릴 테면 어디 한번 때려봐! 이 개새끼야” 하고 악을 썼다. 여자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사내들과 여자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건널목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걸음은 대단히 빨랐으므로 그는 여자에게 편의점의 위치를 묻기 위해 재빠르게 다가가야 했다. 그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다가가자 여자는 깜짝 놀라서 “어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여자를 놀라게 할 맘은 없었다는 뜻으로 손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저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요” 하고 말을 건넸다. 여자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했으므로 여자에게 다시 “저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나란히 걸으면서 혹시 이 근처에 사시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욱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여자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은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데 혹시 이 근처에 살고 있다면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알지 않겠나 싶어서 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으므로 그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여자의 옷을 잡으며 “저 아가씨”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괴성을 지르면서 핸드백으로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여자의 핸드백 속엔 무슨 묵직한 것이 들어 있었는지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고 건물 옆에 있는 화단으로 쓰러졌다. 여자는 그를 때린 후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가 어느 정도 충격에서 깨어나 다시 일어서 보니 여자는 20미터 정도 앞에 있는 가로수 옆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앞도 안 보고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가로수 받침대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곧 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여자는 가로수 받침대에 심하게 부딪힌 모양으로 이를 꼭 다물고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여자는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당황스러웠으므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여자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의 안면을 강타했던 핸드백을 가슴에 꼭 안았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여자에게 자신을 왜 때렸냐고 물었다. 여전히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곧 여자를 향해서 팔을 내밀며 다친 것 같은데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여자의 팔목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 보라고 말했다. 그때 그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져서 여자의 스커트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자가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손등으로 코피를 훔치고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코피가 멈추지 않고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코를 강하게 눌렀다. 입 속으로 피가 한 움큼 고여서 그는 꿀꺽 하고 피를 마셨다. 그때 여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그를 세차게 밀쳤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여자의 옷을 재빨리 잡았다. 여자의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여자가 눈물을 터뜨렸다. “잘못 했어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여자가 말했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는 몹시 난처해져서 자신은 아가씨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근처에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몸을 해바라기 씨처럼 더욱 오므리고 이제는 덜덜 떨기까지 하면서 “원하시면 돈을 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그는 여자의 이런 모습에 당황스러움과 함께 화가 나기까지 하였다. 그는 여자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그런 심정이 들었다는 것일 뿐 정말로 그가 여자를 때릴 생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코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으므로 그는 소매로 피를 닦고 고개를 젖혔다.

    그는 고개를 젖힌 채로 여자에게 자신은 어디까지나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연이어 그는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여자가 서쪽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백 미터쯤 가다가 좌측으로 꺾으면 된다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가리킨 방향은 그의 뒤쪽에 있었으므로 그는 몸을 돌려 그 방향을 바라봤다. 그가 신라제과점에서 꺾으면 되느냐고 물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다시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도망을 갔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맹렬히 도망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쓰러져 있던 가로수 옆에는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 구두 한 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뭐야. 자기가 신데렐라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여자의 말대로 24시간 편의점은 서쪽으로 백 미터쯤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이백 미터쯤 가니 나왔다. 그는 24시간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는 인사를 했다. 그는 여기는 새벽 세 시에도 친절과 고객 감동이 잠을 자지 않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는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봤다. 편의점의 즉석 식품 코너에는 라면뿐만 아니라 잣죽이며 단팥죽, 자장면, 쇠고기국밥, 스파게티같이 뜨거운 물만 넣거나 전자 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삼 분 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그것도 편리하게 삼 분 만에 요리가 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음식들은 스피드 중화반점처럼 지극한 정성과 고객 감동으로 배달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식당들은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쇠고기국밥, 우거지국밥, 신라면, 왕뚜껑같이 즐비하게 있는 즉석 음식들 속에서 어떤 것을 먹으면 좋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음식이 있었으므로 선뜻 어떤 것을 먹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는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다. 계산대에는 파란색 조끼를 입고 왼쪽 가슴에 ‘아르바이트 최무이’라는 명찰을 단 20대 초반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최무이씨?” 하고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바이트생은 그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은 “죄송합니다. 손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고 친절하게 다시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아르바이트생의 명찰을 가리키며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의 조끼 왼쪽에 붙어 있는 명찰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후 그러나 최무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면 왜 명찰을 달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최무이는 그만둔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인데 자신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명찰이 없고 그러나 명찰을 꼭 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본사의 규정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달고 있는 것이라고 다소 멋쩍어하면서 말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자신은 지금 라면을 살 생각인데 어떤 라면이 가장 맛있냐고 물었다. 최무이라는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은 그것은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쉽게 권해줄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 최무이씨는 어떤 라면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은 안성탕면을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무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우선 최무이씨라고 불러서 죄송하다고 말한 다음 안성탕면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편의점의 한쪽 끝을 가리키며 왼쪽 두 번째 칸에 있다고 말했다. 왼쪽 두 번째 칸에는 과연 안성탕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컵라면처럼 용기에 들어 있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아니라 냄비 같은 것에서 끓여 먹어야 하는 봉지에 든 라면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매일 벌어진다

    그는 다시 계산대로 돌아와서 컵라면으로 되어 있는 안성탕면은 없느냐고 물었다. 안성탕면은 원래 컵라면 용기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그는 그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아서 쇠고기국밥도, 우거지국밥도, 심지어 단팥죽이며 잣죽, 하다못해 떡볶이 같은 것도 즉석 용기로 나오는데 안성탕면이 컵라면 용기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직 자신의 명찰이 나오지 않았지만 본사의 지시 때문에 부득이하게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대신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피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오다가 코피가 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솜을 좀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제 코피는 멎은 것 같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은 물에 젖은 티슈를 그에게 건네면서 그래도 피는 닦으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냉장고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피를 닦았다. 안성탕면은 용기에 든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그는 그냥 봉지로 되어 있는 안성탕면을 열 개 사서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편의점 앞에는 경찰 두 명과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멱살을 잡고 그의 목을 흔들면서 “너를 찝쩍댔다는 놈이 바로 이 놈이야?” 하고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까 네거리에서 만난 여자가 경찰 뒤에 숨어 있었다. 여자는 경찰 뒤에 숨어서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잔뜩 흥분한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그를 향해 “이 새끼 눈깔을 파버린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다가와서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를 다독거리며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선생님은 진정하시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더욱 힘을 줘서 그의 멱살을 잡고는 길거리에서 연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이런 놈은 감옥에 집어넣어서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에게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우선 놓아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여전히 멱살을 놓지 않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도 폭행죄로 잡혀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서야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다가와서 잠시 파출소에 같이 가주셔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선생님은 폭행과 강제 추행범으로 지금 체포됐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는 무슨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 여자에게 물어보면 오해가 금방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사소한 오해는 일단 파출소에 가서 풀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뭐 사소한 오해? 저 개새끼 뻔뻔하게 말하는 거 좀 봐! 확 죽여버릴까보다” 하고 그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의경처럼 보이는 젊은 경찰이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사내를 말렸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파출소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그를 떠밀었다. 그는 떠밀리다시피 경찰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다가와서 저런 놈과는 같은 차에 타고 싶지 않으니 자기는 여동생이랑 택시를 타고 파출소에 가겠다고 말했다.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여자의 오빠쯤 되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의 오빠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벽 네 시의 파출소 안은 난장판이었다. 몇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50대 중반의 아저씨는 파출소 소장을 잡고 계속 큰 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음주 운전 측정기를 40대 아줌마에게 들이대면서 계속 측정을 거부하시면 아줌마만 더욱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40대 아줌마는 더욱 불리해질 텐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출소 소장은 아주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가 경찰의 손에 끌려 들어왔을 때 “그 분은 왜?” 하고 ‘그 분’이라는 경어를 사용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거리에서 젊은 여자를 강제 추행하다가 잡혀왔다고 말했다. 파출소 소장은 그 정도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파출소 소장이 “피해자는?” 하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약간 놀란 것 외에 별다른 상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은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니 피해자는 어디 있냐고?”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지금 택시 타고 오고 있다고 말했다. 파출소 소장이 “빨리 조서 꾸며”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자기 자리로 그를 안내하더니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노트북에 파워를 넣었다. 그때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파출소의 중앙으로 걸어나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었을 때는 우리도 꿈과 희망이 있었어. 국민의 정부?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너희들이 뭐야? 경찰이야? 경찰이 경찰다워야지 말이야. 도대체 민주 경찰도 경찰이야? 한국놈들한테 민주라는 게 말이 돼?” 하고 떠들었다. 파출소 안에 50대 아저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김의경 담배 하나만” 하고 말했다. 김의경이 다가와서 담배 한 대를 건네며 박경장님은 담배 끊는다는 핑계로 계속 그렇게 얻어 피우실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웃으면서 “너는 새끼야 나라에서 담배가 나오잖아. 그리고 정말 이것만 피우고 끊는다니까. 맛도 없는 군용 담배 가지고 생색내기는” 하고 말했다. 연이어 안경을 낀 경찰이 50대 중반의 아저씨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한동안 뜸하더니 또 나타나셨네”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그에게 혹시 신분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은 신분증이 없으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이보세요 선생님. 그러니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면 우리가 선생님이 왜 여기에 오시게 되었는지 납득시켜드릴 테니 어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나 대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댔다. 안경을 낀 경찰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노트북에 치고 다시 작은 메모지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더니 김의경에게 “이거 조회해봐!” 하고 말했다. 곧이어 안경을 낀 경찰은 “아까 그 여자분 오빠 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이 그 여자분에게 접근해서 강간을, 아니 강간은 아니구나, 강제로 추행을 하려 했다는데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 여자와 여자의 오빠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오빠는 아까 그의 멱살을 잡던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겸손하게 파출소 안에 들어오더니 점잖게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앞에 있던 파출소 소장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파출소 안을 한번 돌아보더니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파출소 소장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빠는 여자를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파출소 안을 반쯤 지났을 때 술이 취한 50대 아저씨가 큰 소리로 울면서 “아이고. 박정희 대통령님. 박정희 대통령님. 우리들의 박정희 대통령님. 정말 그리웁습니다. 그때가 그리웁습니다” 하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50대 아저씨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여자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강제 추행으로 연행되는 거 알아요?” 하고 물었다. 그는 여자 몸에 손을 대면 강제 추행이 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여자에게 물어보면 알 거라고 또 말했다. 그는 여자 쪽을 바라봤다.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여자의 오빠가 안경을 낀 경찰에게 다가와서 다시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의 오빠에게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는데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가 저 개새끼 죽여버린다고 말하면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오빠는 그를 향해 말하지 않고 경찰을 향해 고함을 치면서 “애가 옷이 찢어지고, 신발도 없고, 피를 질질 흘리면서 집으로 왔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하고 말했다. 이제 스물을 갓 넘은 듯한 젊은 의경 두 명이 와서 여자의 오빠를 말렸다. 그는 자신은 여자에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었던 것뿐이고 여자가 핸드백으로 얼굴을 때려서 피를 흘린 것은 오히려 자기라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다시 경찰들을 향해 “저게 말이 돼요? 저 말이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냐구요?” 하고 고함을 질렀다. 옆에서 여전히 음주운전 측정을 거부하고 있던 여자가 놀란 눈으로 여자의 오빠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일어나서 선생님은 잠시 저쪽으로 가서 앉아계시라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가 여자 쪽으로 가고 나자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선생님은 단지 편의점 위치를 물으려 했을 뿐인데 여자분이 난데없이 핸드백으로 선생님 얼굴을 때렸다 이거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여자분 옷은 왜 찢었냐고 안경을 낀 경찰이 다시 물었다. 그는 그것은 자신이 찢은 것이 아니라 찢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피식 웃으면서 찢었건 찢어졌건 그것이 왜 찢어지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을 때리고 도망가다가 가로수 받침대에 걸려 넘어졌는데 그가 다가가서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또다시 자신을 힘껏 밀치고 도망가려 해서 자신이 여자의 옷을 잡았는데 아마 그때 찢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면서 자신이 왜 여기까지 끌려와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 김의경이 다가와서 “이분 깨끗한데요. 전과는 없어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에게 담배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으므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면서 담배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하지만 아까 담배를 피우면서 이제 담배를 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웃으면서 한 대만 더 피우고 끊겠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안경을 낀 경찰에게 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고는 군용 담배는 영 맛이 없어서 하고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한 대 피우시라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안경을 낀 경찰과 같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반쯤 피우자 안경을 낀 경찰이 선생님은 자신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같은 경찰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과 밤마다 씨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소리지르고 있는 저 아저씨는 멀쩡한 회사의 중역인데 술만 취하면 우리 파출소로 쳐들어와서 저렇게 박정희 찬양을 한다고 말했다. 저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고 물었다. 연이어 안경을 낀 경찰은 세상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애당초 이해 같은 것은 포기하고 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건 안 되건 이런 사건은 밤마다 쉴새없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과중한 업무에 지쳐 있는 우리 경찰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서로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파출소 안이 밤마다 이런 분위기라면 경찰들은 정말 업무에 지칠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럼 자신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자신이 묻는 말에 성의껏 대답만 잘 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다.

    “S전자에 다니시는 분이 왜?”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안경을 낀 경찰은 담배를 끄고 직장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현재로선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직장을 다녔냐고 물었다. 그는 며칠 동안 몸이 아파서 계속 잠을 잤기 때문에 언제부터 직장에 나가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일주일 전까지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의 말하는 방식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는지 인상을 찌푸리고는 직장을 다녔다면 어떤 직장에 다녔냐고 물었다. 그는 S전자 본사 영업부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안경을 낀 경찰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S전자라고 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 대기업 S전자냐고 물었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럼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S전자지 우리가 보통 잘 모르고 있는 S전자는 어떤 회사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S전자라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기업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꼭 반드시 최고의 기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은 S전자에 다니시는 분이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자신은 24시간 편의점을 여자에게 물었을 뿐인데 여자가 난데없이 핸드백으로 얼굴을 쳤으며 이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지겹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하지만 선생님 말씀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를 불러다가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와 여자의 오빠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저 남자 말로는 자신을 때린 것은 오히려 여자분 쪽이고 자신은 단지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고 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은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찰은 다시 남자가 여자분의 몸을 가격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할 만한 어떤 행위를 하였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정확히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자신은 너무나 무서웠고 그래서 그랬노라고 모기 소리처럼 작게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뭘 그래서 그랬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면서 자신은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의 오빠가 안경을 낀 경찰에게 피해자는 우린데 지금 누굴 다그치는 것이냐고 강력하게 따졌다. 안경을 낀 경찰은 오빠의 말에 조금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누굴 다그치는 게 아니라 저분은 S전자 본사에 근무하시는 분인데 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분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사건의 정황을 정확히 알고 싶어 그런다고 했다.

    안경을 낀 경찰의 입에서 S전자라는 말이 나오자 여자의 오빠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네가 먼저 핸드백으로 저 남자를 때렸느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옷은 왜 찢어졌냐고 다시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중간에 나서서 저 분은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인데 여성분은 저 신사분을 치한으로 오해해서 생겨난 일 같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를 지칭할 때 저 분, 저 남자, 선생님, 신사분 같은 말을 마구 혼용해서 썼으므로 그는 안경을 낀 경찰이 사건 정황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호칭이 정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지 가끔씩 헷갈렸다. 안경을 낀 경찰은 연이어 우리가 조회를 해보니 저 분은 전과도 전혀 없이 깨끗하고, 또 직장이나 신분을 보니 이런 일을 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그를 다시 한번 힐끔 보더니 경찰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저 분이 아가씨를 위해하려 하거나 성적 추행을 한 일은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렇긴 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무서웠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가 민망하다는 듯이 파출소의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계속 불리해질 것이 분명한데도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있던 40대 여자가 내가 들어보니 여자가 나빴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이 웃으면서 다가와서는 40대 여자에게 아주머니는 음주 측정이나 빨리 하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여자의 오빠에게 이 사건은 사소한 오해에서 발생한 일인 것 같으니 이쯤에서 서로 좋게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그는 여자의 오빠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그의 눈을 피해 딴청 피우듯 창 밖을 바라봤다. 파출소 소장이 그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툭툭 치면서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이니 선생님이 너그럽게 이해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파출소 소장은 이제 울음을 그친 여자에게 “그러기에 젊은 여자 분이 밤늦은 시간에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무서운 일 당하시기 전에 미리미리 조심하셔야지요. 다음부터는 일찍일찍 다니세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예” 하고 공손히 대답을 했다. 파출소 소장은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그만 가보셔도 좋다고 말했다.

    여자와 여자의 오빠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도망치듯 황급히 파출소를 빠져나갔다. 여자와 여자의 오빠가 그렇게 황급히 사라지자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파출소 소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다 오해에서 생긴 일이니 선생님이 이해하세요, 하고 한번 더 말했다. 그때 한 쪽 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50대의 술 취한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박정희 대통령님. 우리들의 박정희 대통령님. 참으로 그리웁습니다. 나라꼴이 엉망입니다. 어서어서 돌아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은 “이보세요. 안상무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안상무님처럼 이렇게 파출소에 와서 술 먹고 행패 부렸으면 벌써 삼청교육대 같은 곳에 끌려갔어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안경을 낀 경찰을 노려보면서 “이제 가도 좋다니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의 도발적인 눈빛을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이제 가셔도 된다구요” 하고 다시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파출소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파출소 밖으로 막 나왔을 때 그의 주민등록번호로 전과를 조회했던 김의경이 달려나와 “선생님, 이거 두고 가셨는데요” 하면서 안성탕면이 든 비닐 봉지를 건넸다. 그는 비닐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밝아 있었다. 오랫동안 밥도 먹지 않고 잠이 들어 있었고, 거리로 나갔다가 여자에게, 여자의 오빠에게, 그리고 경찰들에게 이유도 없이 시달렸으므로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그는 파김치가 되었다. 비닐 봉지 속의 안성탕면은 여자의 오빠와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몇 개가 바스러져 있었고 비닐 봉지는 찢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제 집에 왔으니 라면이나 끓여 먹자, 하고 자신을 달래듯 중얼거렸다. 그는 라면을 끓이기 위해 냄비를 가스 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냄비 속을 들여다보았다. 오 분쯤 있으니 냄비 속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기포가 솟아올랐다. 그는 자신이 지금 라면을 정말 먹고 싶은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배가 몹시 고팠지만 라면을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사람이 기분에 따라서 밥을 먹거나 안 먹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맹렬히 끓고 있는 냄비 속의 물을 바라보다가 가스 밸브를 잠그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어쩌다가 편의점 위치도 하나 똑똑하게 물어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었다. 그는 회사를 나온 이후로 점점 더 깊게, 점점 더 오래 잠이 드는 것 같았다. 한번 잠이 들면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계속 잠이 들어 어쩔 때는 이틀 동안 내내 잠만 자기도 했다. 마치 깊은 해저 속에 잠수해 있는 것처럼, 잠이 들어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날카로운 소리들이 어느새 두루뭉실해져 부드럽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떤 어렵고 힘든 일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는 종종 몸을 뒤척이며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 하고 잠꼬대를 했다. 그는 영원히 이 안락한 해저 속에 머물고 싶었다. 폭풍 치는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 않는 한 사람이 계속 잘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는 다시 깨어났다. 그가 일어났을 때 그는 오늘이 며칠인지 그리고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점점 더 세상의 시간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으므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도 오래 굶었기 때문에 라면 한 그릇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다. 그는 다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안성탕면을 하나 더 끓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두 번째 라면을 먹으면서 그는 안성탕면이 그다지 맛있는 라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표를 단 아르바이트생이 그에게 혹시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자신에게 피를 닦으라며 물에 젖은 티슈까지 준 친절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함을 조금 자책했다. 그는 라면이 맛이 없는 것은 지금이 두 그릇째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늘 김치와 함께 라면을 먹어왔는데 지금은 김치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을 단 아르바이트생에게는 너무 맛있는 라면이지만 첫사랑의 경험이나 실연의 상처, 섹스의 횟수, 고향과 출신 학교같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취향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그는 경험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취향의 차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와 아르바이트생이 사사로운 음식 맛에 대해서도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은 다소 슬픈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라면을 다 먹고 나자 그는 이제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이상했다. 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까? 그는 잠도 푹 잤고 배도 부르며 몸도 나은 것 같으니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뭘 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먹고 잠만 자는 것은 동물들이나 할 짓이지 그와 같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반지하 방으로 이사를 온 후 육 개월 동안 이 방에서 자신이 뭘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육 개월 동안 이 방에서 한 일이라곤 잠자기, 세수하기, 양치하기, 양복 입고 출근하기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의 구조 조정으로 업무 인원이 반으로 줄어들면서 그는 지난 육 개월 동안 매일 여덟 시까지 출근을 해서 밤 열한 시에 퇴근을 했다. 어쩌다 업무가 일찍 마치는 날에는 부장과 함께 회사 지하에 있는 레벤 호프에서 골뱅이와 맥주를 먹었다. 사실 그것은 사무실에서 하는 업무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부장은 늘 이제 마케팅은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소리치곤 했다. 그러면 옆에 있던 과장이 전투적이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면 부장은 지금은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술자리이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천재적인 샐러리맨이자 완벽한 사무원이면서 그와 입사 동기지만 직급은 한 끗발 높은 K가 정말로 허심탄회한 의견을 내놓았다. 과장과 부장은 참 허심탄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일 밤 열한 시에 퇴근을 해서 지하철 막차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양치질도 하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다.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그는 자명종을 끄고 10분 더 잠이 들었다가 놀란 듯이 일어나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전날 입은 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다. 그는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어쩌다 일찍 퇴근을 하는 날이면 부장과 과장과 함께 레벤 호프에서 술을 마셨다. 여직원들이 돌아가면 남은 남자 직원들끼리 회사 옆 골목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그 다음에는 부장이 좋아하는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가씨들의 엉덩이를 때리다가 시간이 되면 택시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양치질도 안 하고 곧장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자명종을 끄고 10분 더 자다가 놀란 듯이 일어나 세수와 양치를 하고 양복 입고 출근을 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해본 일이 고작 잠자기, 후닥닥 양치하고 세수하기, 그리고 양복 입고 출근하기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무척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편의점 위치를 묻다가 여자에게 따귀를 맞는다거나 똑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해도 경찰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오래도록 똑같은 동작만 반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그는 뭘 할까?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별달리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문득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발견했다. 그는 이사를 온 이후 단 한 번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알다시피 그는 잠을 자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리모컨의 전원을 눌렀다. 텔레비전에서는 지직거리는 화면이 나왔다. 그는 이리저리 다른 채널로 바꾸어보았지만 어떤 화면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불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텔레비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 고장났다 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텔레비전 앞에 있는 몇 가지 버튼을 눌러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텔레비전의 색상이나 떨림을 조절하는 것이었지 텔레비전 화면이 나오게 만드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K가 여자와 한국 가전 제품은 주기적으로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한 우스갯소리가 기억났으므로 텔레비전 상단부를 두 번 쾅쾅 때렸다. 화면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다. 여전히 화면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랍에서 십자 드라이버를 꺼내 텔레비전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케이스를 뜯어내자 그 안에는 매우 복잡해 보이는 부품들과 수없이 많은 전선들 그리고 갖가지 회로가 들어 있는 기판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불문학을 전공했으므로 그 부품 이름도 모르거니와 그것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는 수건을 들고 와서 텔레비전 부품에 잔뜩 끼여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한참동안 텔레비전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먼지를 털어내자 기판 위에 있는 부품들은 더더욱 복잡해 보였다. 그는 곧 이 기기의 구조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그가 열심히 본다고 해서 기계의 작동 원리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무력감이 들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한 일은 나사 여섯 개를 드라이버로 풀어서 케이스를 뜯어낸 것뿐이었으므로 조립이라고 말할 만큼 거창하고 복잡한 일을 그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텔레비전을 켜보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지직거리는 화면이 나올 뿐이었다. 실망한 그가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위해 방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찾고 있을 때 장롱 아래에 전선이 하나 삐져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장롱에 있는 전선을 끌어냈다. 그것은 유선 방송 케이블이었다. 그는 혹시 안테나 선을 꽂지 않아서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뒤로 가서 보니 안테나 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유선 방송 케이블을 텔레비전에 연결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텔레비전에서 깨끗한 화상이 나왔다.

    그는 신기한 듯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4번 채널에서는 한국말로 더빙된 외국 영화를 하고 있었고, 5번 채널에서는 낚시 방송이, 12번 채널에서는 연속극이, 15번 채널에서는 내셔널 지오그래피사가 보여주는 동물 다큐멘터리가, 16번 17번에서는 일본 방송이, 25번 채널에서는 뮤직 비디오만 전문적으로 보여주는 MTV가 나왔다. 그밖에도 서른 개도 넘는 채널에서 요리와 축구와 메이저리그 야구와 미국 NBA 농구 같은 것들이 나왔다. 이건 정말 굉장하군. 없는 것이 없어, 하고 그는 탄성을 질렀다.

    그는 우선 4번 채널에서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에서 나온 적 있는 더빙된 외국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둔 가족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들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 없다. 영화 속의 직장 상사는 매우 무지막지하다.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마다 술을 마신다. 그러다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아버지를 알코올 중독자 요양원에 보낸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술을 끊겠다며 요양원에 들어간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과 아버지는 헤어짐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술을 끊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왔지만 가족이 그립다. 아버지는 아내와 딸들과 아들이 보고 싶지만 술을 끊어야 하므로 가족을 만날 수 없다. 아버지는 가족이 너무나 그립고, 그 그리움 때문에 너무나 외롭다. 아버지는 외로움 때문에 다시 술을 마신다. 술을 끊지 못하고 요양원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가족들은 집에서 내쫓는다. 그는 영화를 다 보고 영화 속의 아버지가 조금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시 채널을 돌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원숭이와 고양이가 교미를 하다가 임신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남의 나라 야구를 보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신기한 뉴스를 보았다. 미세한 먼지 하나가 날아오르는 것조차 큰 사건이 되는 그의 골방과는 달리 세상 밖에는 무궁무진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그는 몹시 신기했다. 그는 가스 레인지에 불을 켜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몇 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방은 반지하보다 더 내려간 3/4 지하인 데다가 옆집의 빌어먹을 LPG 가스통 덮개가 그의 작은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배가 너무 고팠으므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라면을 다 먹고 나자 그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뭘 할까 생각하다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그는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하룻밤이 지나자 텔레비전 속에는 또다시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나 있었다. 팔레스타인 동네에서 이스라엘 동네에 폭탄 테러를 했다. 이스라엘은 곧 팔레스타인에 미사일로 보복 사격을 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는 미국에게 우리 전사들의 목숨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복수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 증표로 미국의 유수한 컴퓨터 회사와 항공사에 폭탄 테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후에는 뉴욕의 다우 지수가 소폭 떨어졌고 뉴욕보다 몇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동경 증권이 소폭 떨어졌고 동경 증권보다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국 증시가 대폭 떨어졌다. 그리고 증시와 중동의 유가 불안 때문에 어쩌면 생필품의 물가 상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뉴스는 전했다. 그는 여기서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사막 동네에서 폭탄이 하나 떨어졌다고 당장 동네 슈퍼에서 라면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채널을 돌려 지난번에 임신에 실패했던 원숭이와 고양이가 교미를 시도하는 것을 보고 이미 그가 어릴 때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에서 봤던 외국 영화를 보고 안성탕면을 먹고 양치도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는 일 주일인지 이 주일인지 혹은 한 달인지 모르는 시간 동안 도무지 시간을 알 수 없을 때 일어나서 배가 고프면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안성탕면을 다 먹고 나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하고 중얼거리며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서 계속되는 임신 실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교미를 하고 있는 원숭이와 고양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폭탄 테러를 했다는 뉴스를 보고 다음날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미사일로 보복 사격을 했다는 것을 보았다. 뉴스가 지루해지면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에 이미 했던, 한국말로 더빙된 외국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안성탕면이 떨어지면 예전에 사무원처럼 단정한 여자를 만났던 네거리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서쪽으로 백 미터 걸은 후 왼쪽으로 꺾어서 다시 이백 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본사의 지시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의 이름으로 된 가짜 명찰을 달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돈을 주고 안성탕면을 사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다시 남의 나라 야구나 농구를 보다가 안성탕면을 먹고 잠이 들었다. 가끔 그는 자신의 삶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무엇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머리 속에서 청동으로 된 거대한 종이 계속해서 울려대는 것 같았다.

    그가 모은 것은 라이터뿐

    어느 날 그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이사를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울려본 적이 없는 전화였으므로 그는 약간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지 않고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전화벨은 스물세 번을 울리고 그쳤다.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일곱 번까지 전화벨을 세다가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L 카드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여자 목소리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여자는 귀하의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11월23일까지 연체 대금이 납부되지 않을 시에는 석 달 연체로 인해 신용 불량자로 등록된다고 말했다. 이석만씨는 신용 등급도 상당히 높으신 분이신데 무슨 일로 연체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의 신용등급이 어떻게 상당히 높을 수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저희 회사는 고객의 정보를 수집한 뒤 회사가 설정한 합리적 기준에 의해 신용 등급을 설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용 불량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신용 불량자가 되면 신용이 생명인 이 사회에서 어떠한 신용 거래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연이어 11월23일까지 연체금을 납부하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은 안성탕면을 사기에도 빠듯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S전자에 다니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기 때문에 요즘에는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는 하여간 11월23일까지 연체금이 납부되지 않으면 신용 불량자 명단에 오르니 잘 생각하셔서 판단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도 결별한 마당에 그까짓 신용이 무슨 대수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는 몇 년 간 계속 일을 했지만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회사의 구조 조정 때문에 일은 많아지고 월급은 줄었기 때문이다. 또한 업무가 일찍 마치는 날마다 일본처럼 모든 음식값을 각자 나누어서 내는 것이 부담도 적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부장과 함께 레벤 호프에서 골뱅이와 맥주를 먹고 술값을 인원수만큼 나누어서 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 직원들이 돌아가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술값을, 아주 가끔 부장이 냈지만, 대부분은 나누어서 내야 했기 때문이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나면 K와 과장과 몇몇 직원들은 내일 아침 상무님께 보고해야 할 긴급 보고서 때문이라든지, 혹은 회장에게 보여줄 그룹의 21세기 새 비전에 관한 준비같이 문득 들어보면 아주 거창하고 긴급하며 중요한 이유를 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21세기 그룹의 청사진 같은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었으므로 부장이 좋아하는 비비안 룸 단란주점으로 가서 탬버린을 흔들고 폭탄주를 마시고 아가씨 엉덩이를 만진 다음 술값을 각자 나누어서 냈다. 부장이 술에 너무 취하면 부장을 빼고 나머지 직원들이 술값을 나누어서 냈다. 왜냐하면 부장의 말대로라면 나누어서 내는 것이 훨씬 한 개인에게 부담이 적고 또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 간 계속 일했지만 레벤 호프와 포장마차와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 술값을 나누어 내느라고 돈을 모으지 못했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그는 카드 빚만 잔뜩 지게 되었다. 그가 모은 것은 라이터뿐이었다.

    배가 고파지자 그는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캥거루와 치타가 달리기 시합하는 것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그는 문 밖에서 “총각 나 좀 봐” 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의 고요한 방에 왜 요즘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올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성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과 ‘한 판 시키면 한 판 더! 와우 피자집’ 같은 각종 스티커가 붙어 있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주인집 할머니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안녕하세요. 할머니.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하고 쾌활하게 물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안녕이구 나발이구, 방세 안 낼껴?” 하고 말했다. 그는 죄송하지만 지금은 안성탕면을 사기에도 빠듯한 형편이므로 방세를 낼 수 없노라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안성탕면은 무슨 자빠질 소리여. 그니까 머시여? 지금 방세를 못 내겠으니 배 째라 이것이여?” 하고 말했다. 그는 나누어서 술값을 내느라고 지금은 돈이 없으니 보증금에서 좀 빼면 안되겠냐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그깟 보증금 삼백 만원 다 까먹고 백 만원 남짓 남았는데 그것까지 다 까먹고 내 집에서 안 나가고 퍼지면 나처럼 힘없는 늙은이가 어찌할껴. 나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지” 하고 말했다. 그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증금을 반이나 까먹었다니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말이 안되기는 머시 말이 안돼. 여기 계산이 다 나와 있는디. 그라고 몸도 성한 젊은 놈이 무엇이 부족해 일도 않고 집에서 빈둥빈둥거리는겨, 하늘 보기 부끄럽지도 않어? 아! 그래 이제 일도 않고 밤낮으로 텔레비전만 보면서 방바닥이나 긁을 생각이여? 나 참 한심스러워서” 하고 말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기 때문에 이제 회사에는 안 나갈 거라고 말했다. 또 회사에 나가게 되면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그를 공격하기 때문에 더욱이 회사에는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창을 든 나쁜 병균은 또 머시여?” 하고 주인집 할머니는 물었다. 그는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있지만 입 속에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숨기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무서운 균이므로 할머니도 조심하셔야 된다고 오히려 할머니를 걱정했다. 할머니는 그의 말을 뜬금뜬금 듣고 있다가 “말도 안 되는 잡소린 집어치우고 어떻게든 방세나 빨리 내, 만약에 계속 이렇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면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구먼” 하며 말하고 돌아갔다. 주인집 할머니가 돌아가자 그는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고 텔레비전에서 건기가 되어 물을 찾아 떠나가는 사바나의 들소 떼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5

    주인집 할머니가 돌아간 다음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났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무런 화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바꿔봤지만 지직거리는 화면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뒤로 가서 유선 방송 케이블이 제대로 연결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유선 방송 케이블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약간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는 케이블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가 조금 고팠으므로 우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은 다음 왜 텔레비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냄비에 물을 받기 위해 수도꼭지를 돌리자 웬일인지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역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 그는 어제 주인 할머니가 ‘이렇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면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구먼’ 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반지하 방을 나와서 주인집에 노크를 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문 옆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누구여?” 하고 물었다. 그는 아래 지하에 사는 총각인데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방세 가지고 왔어?” 하고 물었다. 그는 방세는 아직 못 가지고 왔지만 유선 방송도 나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아서 그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방세도 안 가지고 와선 무슨 잡소리여” 하고 말했다. 그는 유선 방송은 그렇다 치더라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안성탕면을 끓여 먹을 수 없으니 이것은 너무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너무하기는 머시 너무해? 그니까 방세 가져와”라는 말만 계속했다. 그는 지금은 돈도 없고 신용도 불량해졌기 때문에 조금만 사정을 봐달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그니까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은 왜 때려치워서 이렇게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다냐?” 하고 물었다. 그는 어제도 말씀 드렸다시피 직장에 나가면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지. 뭐 같이 일하는 사람들 입에서 병균이 좀 나온다고 일을 안하면 세상은 어찌 돌아갈껴.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좀 봐. 그 사람들 폐는 석탄 찌꺼기로 꽉 차 있는겨. 그런 무서운 것을 들이마시면서도 자식새끼들 먹여살리겠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데, 뭐 창을 든 병균인지 뭔지 때문에 젊은 놈이 일을 안한다니. 아무려면 창을 든 병균인지 머신지가 시커먼 석탄 가루보다 더 무서울까. 젊은 놈이 약해빠져서 방바닥을 뒹굴뒹굴 돌면서 놀고 먹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겨?” 하고 말했다. 그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은 석탄 찌꺼기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방세 안 가져오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말했다.

    그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방세를 내지 않은 것은 그의 잘못이므로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리모컨으로 전원을 눌렀다. 텔레비전에는 아무런 화면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돌리고 다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역시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집 앞의 골목으로 나가 재활용 쓰레기 더미 속에서 1.5리터 페트 병 두 개를 주웠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시민 공원 식수대에서 물을 받아 왔다. 그는 시민 공원에서 받아 온 물로 안성탕면을 끓여 먹었다.

    안성탕면을 먹고 나자 그는 할 일이 없었다. 할머니가 유선 방송 케이블을 끊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심가의 빵집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에 대해 이스라엘 당국이 팔레스타인에 보복 공격을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동물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아마존에 사는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또 치타와 캥거루의 달리기 시합에서 누가 이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아마존에 사는 동물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유산을 나눠주면 좋겠는데…

    문득 그는 보스턴에 가 있는 형이라면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와 형에게 반반씩 남겨준 유산을 형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의 형은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고 비자 발급과 정착을 위해서 돈이 많이 필요했었다. 그의 형은 미국으로 떠나면서 지금은 자금 사정이 급해서 그의 몫이었던 유산을 가져가지만 일단 미국에 정착을 하고 기반이 잡히면 언제든지 이자까지 계산해서 돌려준다고 했던 것이다. 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지 이미 5년이 넘었으므로 지금쯤은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수첩에서 형의 전화번호를 찾아낸 다음 미국의 형 집에 전화를 걸었다.

    형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이것은 국제 전화라서 많은 말을 할 순 없고 본론만 말하자면 저번에 형이 미국에 정착하면 주기로 한 아버지 유산을 지금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형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하면 자기 몫의 아버지 유산을 돌려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형은 그거야 당연히 이자까지 쳐서 돌려줘야 하지만 우선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는지 형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신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형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며, 그래서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자까지 쳐서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그러니 이자까지는 필요 없고 조금만이라도 보내준다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형은 형수와 상의를 한 뒤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형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한참동안 형의 전화를 기다렸다. 형에게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한국통신이라고 소개한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와서 “귀하의 9월, 10월, 11월 전화 요금이 납입되지 않았으니 가까운 은행이나 우체국의 지로를 통해 납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1월15일까지 연체 대금이 납부되지 않을 시에는 전화 사용이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하고 말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전화 속의 여자는 그냥 9월, 10월, 11월 전화 요금이 납입되지 않았고 11월15일까지 대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전화 사용이 중단된다는 이야기를 세 번 되풀이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음날 그는 안성탕면을 끓이기 위해 시민 공원으로 가서 1.5리터 페트 병에 물을 담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스 레인지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주인집 할머니를 찾아가 가스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방세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그는 확실하진 않지만 미국의 보스턴에 있는 형이 돈을 보내준다면 방세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미국에 가 있는 형이 돈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는 형은 그렇게 부자가 아니며 그래서 어쩌면 돈을 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집 할머니는 팔까지 내저으면서 “아녀 아녀, 미국이 어떤 나란데 미국에서 살면 다 부자지. 암 그렇고말고” 하고 말했다. 그는 물은 시민 공원에서 가져오면 되지만 가스가 나오지 않으면 안성탕면을 끓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니 그에게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도시 가스면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 쓰는 LPG 가스는 각자 내는 것이니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의 말에 수긍을 하고 할머니가 가스를 끊으신 게 아니라면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물이 필요하면 부엌에서 몇 바가지 퍼가라고 말했다. 그는 고맙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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