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JP, 비서실장에게 “내각제 유보,내 말이라 말고 당에서 거론해보라”

1999년 7월12일, ‘내각제 합의 파기’ 당일

  • 글: 엄상현 gangpen@donga.com

    입력2003-02-04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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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각제 개헌 유보 신호탄은 DJ 당직 인선 발표
    • JP, “연합공천 때 이만섭과 얘기 잘 될 것”
    • JP-이동복 격론 “왜 총리가 책임을 집니까” “다 그렇게 돼 있다니까”
    • 격분한 강창희, “이 사태까지 온 것 총리도 책임져라”
    • 김용환, “그 날 이후 내각제 희망은 내 맘에서 지웠다”
    JP, 비서실장에게 “내각제 유보,내 말이라 말고 당에서 거론해보라”
    ‘삐리릭, 삐리리릭-’. 1999년 7월12일 이른 아침, 이만섭(李萬燮) 국민회의 고문의 자택 전화벨이 울렸다. 국민회의 신임 총재권한대행 후보로 꼽히던 이고문은 밤잠을 설치며 희소식을 기다리던 차였다.

    “여기 청남대입니다. 지금 올라갈 테니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었다.

    당시 김대통령은 여름 휴가차 청남대에 머물면서 하반기 정국운영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틀 전인 10일, DJ가 김영배 대행을 전격 경질하고 당직 개편을 예고하자 당내에서는 그 배경을 두고 억측이 난무했다.

    공동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당론과 내각제 개헌 문제 등을 둘러싸고 피차 무척 민감해진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더욱이 8월 말로 미뤄진 내각제 논의 재개시점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과연 DJ의 ‘청남대 구상’은 뭘까. 당 안팎에서는 신임 대행 임명과 함께 단행될 당직개편 때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민감한 시기의 인사일수록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DJ였다. DJ는 당직 인선에 고심을 거듭하며 막판까지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에게도 연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당직 인선 하루 전날인 11일 밤은 물론, 당일인 12일 오전 11시 당무·지도위원 연석회의에서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감을 잡지 못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전화를 받은 이고문은 오전 8시 경 집을 나서 청와대로 향했다. 집에서는 기자들의 확인 요청에 “산책 나가셨다”며 연막을 피웠다. 9시가 조금 넘어서 이고문은 청남대에서 방금 올라온 DJ와 40여 분간 독대를 했다.

    이만섭 의원이 전하는 당시 대화 내용.

    “DJ는 총재권한대행을 맡아달라고 했고, 나는 받아들였지. 그랬더니 사무총장, 정책위원회 의장, 총재특보단장, 총재비서실장, 원내총무 등 이미 찍어 둔 당직인선명단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묻더라고. 나는 ‘다 괜찮은데, 여기 한 사람 OOO은 곤란하다’고 반대했어. 처음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오후에 임명장 받으러 다시 들어가서 결국 내 의사대로 관철시켰지 뭐. 그 이상은 없었어. 사람들이 많이들 궁금해하는 모양인데, 그 때 내각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니까. 김종필 총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별 이야기 없었고. 그런 이야기를 할 시기가 아니었지, 그때는.”

    “내각제 한다고 나라 망하다니요”

    오전 10시 경, 이고문이 청와대를 나와 국민회의 당사로 향하던 그 시각 총리실. 이동복(李東馥) 자민련 명예총재 비서실장이 김종필(金鍾必) 총리의 공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날 JP는 방한 중인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점심을 사기로 했고, 이실장은 그 구체적인 일정을 확정하려고 총리실을 찾은 것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7월 말 제주도에서 예정돼 있던 경제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는데, 중국 공산당은 자민련과 우당관계였다.

    총리실에는 이건개 의원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JP는 “이의원은 좀 기다리고 이실장부터 들어오라”고 했다.

    JP는 이실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각제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은 이실장의 기억을 기초로 재구성한 당시 두 사람 간의 대화다.

    김종필 : “내각제 개헌을 더 이상 추진 못하겠어요. 추진했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고, (그랬다간) 그 책임을 내가 다 뒤집어쓰게 생겼습니다.”

    이동복 : “내각제 문제는 DJ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대통령이 오케이하면 왜 안됩니까. 그리고 왜 나라가 망합니까. 대통령 때문에 나라가 거덜나기에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내각제를 하자는 것 아닙니까.”

    김 : “아, 다 그렇게 돼 있어요.”

    이 : “망한다고 하더라도 왜 총리가 (책임을) 집니까. 대통령이 잘못해서 나라가 망한 거니까 당연히 대통령이 책임져야죠.”

    김 : “아 그렇게 돼 있다니까요.”

    두 사람의 실랑이는 한 시간 가량 계속됐다. 이실장이 느끼기에 JP의 머릿속에서 내각제 개헌은 이미 ‘9만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김 : “당으로 돌아가서 내 말이라고 하지 말고, 이실장 생각이라고 하면서 이야기해봐요.”

    이 :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김용환 수석에게 (JP의 의중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김수석하고 둘이 와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 : “가서 잘 이야기 해봐요. 앞으로 국민회의 이만섭씨(이날 선임된 신임 총재권한대행)하고도 이야기가 잘 될 테니까요. 내각제가 유보되면 연합공천 때 이만섭씨하고 협의해서 잘 될 겁니다.”

    JP의 이날 발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함축돼 있다. JP가 이날 오전 11시에야 공식 발표된 이만섭 대행 등 국민회의 당직 인선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연합공천’이라고 그가 언급한 대목은 최소한 2000년 4월로 예정된 총선을 ‘합당’하지 않고 ‘국민회의-자민련’ 공조체제로 치를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당시 국민회의에서 대표적인 합당론자로 알려진 김영배 대행이 이틀 전 전격 경질된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이날 아침 DJ와 JP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JP 본인의 입에서 ‘내각제 개헌 파기’ 언급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이다.

    “JP가 내각제 포기하잡니다”

    이실장은 결국 이날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의 일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JP가 이실장을 잡아끌었다. 시내 H호텔에서 점심약속이 있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는 김용환(金龍煥) 수석부총재 등 자민련 지도부급 중진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난 속으로 JP가 오늘 나한테 한 이야기를 이 사람들에게도 하려고 약속을 잡아놨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요. 마지막에 ‘이심전심이요’, 그 한 마디만 하고 말았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구석에 밀리니까 뭔가 말을 꺼내려고 소집한 모양인데, 일단 나한테 맡겨놨으니까 조금 기다려보기로 한 모양이구나….”

    점심식사 후 국회의원회관 김용환 수석부총재 사무실. 두 사람은 이실장의 요청으로 조용히 따로 만났다. 이실장은 오전에 JP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러자 김부총재는 불같이 화를 냈다.

    “총리 독대 신청을 했는데도 2주일 째 시간을 내주지 않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만.”

    김부총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이실장 첫 마디가 ‘오늘 JP가 원내 의석구도상 내각제를 무리하게 추진하기 어려우니 당에 가서 얘길 좀 보라’고 했다는 거요. 이 문제는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내가 직접 JP에게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총리실에 연락해서 저녁식사 후에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회신이 안 와. 그 무렵 강창희(姜昌熙) 총무도 내각제 추진에 열의가 많아서 전화를 했죠. ‘오늘 저녁 총리공관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오후 6시. 김부총재와 강총무는 신문로 모 음식점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 때 총리실에서 전화가 왔다. 9시 경 JP가 공관으로 돌아올 것 같다는 전갈이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8시30분, 총리공관으로 출발했다.

    차안에서 김부총재가 강총무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JP가 내각제 포기하잡니다.”

    그러자 강총무가 “이럴 수는 없다”며 격분했다. 잠시 후 김부총재와 강총무는 공관에서 JP와 마주앉았다. 김부총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JP, 비서실장에게 “내각제 유보,내 말이라 말고 당에서 거론해보라”

    1999년 7월16일 김용환 수석부총재가 JP의 내각제 유보결정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모든 당직을 사퇴한 후 당사 회의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동복 의원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물론 권력을 쥔 사람이 쉽게 내놓으려고야 하겠습니까만, 그렇다면 우리 자민련의 존립이유는 무엇입니까. 공동정권은 왜 만들었습니까. 내각제를 통해 후반기에 정권 중심부에 서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고, 총리께서도 늘 ‘내각제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서’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JP는 내각제 포기 의사를 거두지 않았다. JP는 “국력도 낭비되고, 어차피 안될 것인데 대통령에게 상처만 낼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또한 외환위기 극복 등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먼저 깨끗이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오히려 김부총재를 설득했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김부총재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부산 사람들은 ‘삼성자동차를 퇴출시키면 안 된다’며 10만명이 부산역에서 집회를 열어 얻을 것을 얻어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내각제 무산 징후가 농후해지자 충청도 사람들이 그냥 있으면 되겠느냐고들 합니다. 7월20일에 후원회를 하는데, 돈을 모아 8월15일 대전역 광장에서 ‘내각제 수호 시민궐기대회’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제가 ‘그것은 절대 JP와 연계시켜서는 안 된다’고 해서 지금 이원범 (李元範) 대전시 지부장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강총무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JP에게 거세게 대들었다.

    “오늘의 이 사태가 온 데 대해 총리께서도 책임이 있지 않으십니까.”

    김부총재가 강총무를 보아 하니 더 놓아두다간 감정을 자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김부총재는 “총리의 뜻 알았으니 그만 일어서자”면서 강총무를 데리고 총리공관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밤 11시. 이동복 비서실장 집으로 JP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 김용환한테 뭐라고 해서 강창희가 총리공관까지 와서 난리를 치게 만드느냐…다시 올 필요 없다.”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7월12일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JP, 수습나섰지만 역부족

    다음날부터 자민련 내부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부총재가 측근인 이인구(李麟求) 의원을 불러 어제 상황을 이야기해줬고, 이의원은 이를 이원범 시지부장에게 전했다. ‘JP가 내각제를 버렸다’는 이야기는 자민련 의원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에 충격과 당혹을 금하지 못했다. 결국 그 상황은 언론에 포착됐다.

    JP도 나름대로 작업에 들어갔다. 거센 내부 반발이 예상되자 적절한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JP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에게 “8월 말까지 내각제 문제를 결론 내겠다”고 선언했다. JP가 직접 내각제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릴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JP는 또 “정기국회도 있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8월말로 예정된 중남미 순방계획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JP의 이날 발언이 왜 나왔는지 그 배경을 제대로 눈치챈 기자는 없었다. 다음날 ‘동아일보’ 특종 보도가 나가기 전까지는.

    “金총리 ‘ 연내(年內) 개헌 포기’ 밝혀… 공동정권 유지돼야’”.

    14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제목이다. 기사는 12일 오후 김부총재와 강총무가 총리공관에서 JP와 나눈 대화 내용을 대부분 담고 있었다.

    이같은 보도가 나간 후 상황은 수습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자민련 내부의 반발과 대국민 약속 파기라는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JP는 15일 기자회견을 자청, 격한 어조로 “나는 내각제 개헌을 포기하겠다거나 연기하겠다고 말 한 일이 없다. 시한이 다 됐으니까 이제부터 협상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했을 뿐이다. 이제 당에서 난상토론을 할 것이다. 약속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각제를 할건지 안 할건지…. 복잡한 것은 지금부터다”라면서 내각제 개헌유보 파문의 진화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6일 김부총재가 모든 당직을 사퇴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선언하고 나섰다. 연내 내각제 개헌이 물 건너간 것에 따른 JP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다른 당직자들도 잇달아 사퇴의사를 표명하는 등 당내 반발이 거세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돼 갔다.

    결국 JP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유보’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여러 정황을 나름대로 검토하고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도 차선을 택하는 데 의미가 있다. 각계의 저항 때문에 금년에 구현하기 어려우면 다음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이제부터 추구할 문제다.”

    DJP 공동정권의 고리였던 ‘내각제 개헌’이 JP의 손으로 사실상 ‘파기(破棄)’되는 순간이었다. 평생 ‘대통령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그가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다음은 그와 관련한 이동복 당시 비서실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이실장은 2000년 총선 전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 뒤 현재 명지대 법정대학 객원교수로 있다.

    ―1999년 7월12일 JP가 왜 내각제 개헌이 어렵다고 했을까요.

    “내각제 약속시한은 8월 말이었습니다. 그때는 김종필 총리가 내각제 추진을 그만둬야겠다고 이미 마음을 굳히고 이걸 어떻게 풀어야할 것인지 오랜 기간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한테 이야기해서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리라고 예상치 못한 것 같기도 하구요. 어쩌면 곪은 게 터졌으니까 시원한 상황이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죠.

    그 날 이후 여러 가지 말들이 나왔습니다. ‘이의원에게 이야기해서 매끄럽게 처리하려고 했더니 김용환에게 이야기해서 문제가 됐다. 그리고 결국 기자들에게 흘러 들어가 터지면서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등. 그 후 JP는 의원총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총회 끝나고 밖에서 만나 항의하니까 JP가 내 두 손을 꼭 잡더니 ‘잘 됐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습니다.”

    ―궁극적으로 JP가 내각제를 포기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사실은 처음 후보 단일화를 할 때부터 김용환 수석부총재 등 몇몇 사람만 내각제에 매달렸지 JP는 별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내각제 문제를 잘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1999년 7월12일) 갑자기 그만둔 건지, 아니면 그전부터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시 상황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불발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해 전인 1998년 12월 말까지만 해도 DJ와 JP는 내각제 개헌문제를 놓고 한치 양보 없는 설전을 벌였다. 12월18일 대선 1주년 기념식에서 JP가 “개헌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도 높은 기념사를 하자 DJ는 “개헌 약속은 살아있으나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얘기가 있다”고 맞받았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1999년 1월5일 DJP 단독 회동 후 DJP 당사자들의 분위기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김용환 수석부총재는 그 때부터 JP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당에서 내각제 개헌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군불’을 때도 JP는 그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5일 DJP 독대 후 이상기류

    신년 초부터 국민회의 중진급 의원들이 국민회의-자민련 합당론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4월7일 한나라당 서상목 의원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JP는 4월9일 DJP 긴급회동을 가진 뒤 당에 ‘8월말까지 내각제 개헌논의 함구령’을 내렸다.

    다음은 1998년 말부터 1999년 7월12일까지의 상황에 대한 김용환 당시 수석부총재와의 일문일답이다. 김부총재는 1999년 12월 자민련을 탈당해 ‘희망의 한국신당’을 창당했다가 2001년 10월 한나라당과 통합한 후 국가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지난 연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며 자신의 지구당위원장(한나라당·충남 보령-서천)직을 내놓았다.

    ―내각제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98년 12월18일 DJ의 발언 이후 1999년 새해 벽두부터 김중권 비서실장과 박지원(朴智元) 대변인 등이 ‘개헌합의 유보 가능성’을 언급해 언론에 흘러나왔습니다. 직접 또는 JP를 통해 DJ에게 항의한 일이 있습니까.

    “당에다 ‘내가 JP와 무릎을 맞대고 풀어야 할 문제니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당시 당내 일각에서도 무리해서 내각제를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있었어요. 제가 항의해서 이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999년 1월5일 JP가 DJ와 처음으로 단독회동을 했습니다. 공동정부의 한 축으로 비로소 회동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 자격으로 만났기 때문에 김중권 비서실장이 꼭 배석했죠. 오히려 박태준 총재는 대통령과 단독 회동했는데….”

    ―1999년 1월5일 DJP 청와대 독대에서 JP는 DJ에게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예로 들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해 모두 실패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양당에서는 ‘선개혁, 후 내각제 개헌’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내각제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방향으로 개헌하자고 제안했다는 얘기도 나돌아 자민련 내 내각제 강경론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그 날 나는 뭔가 의미있는 대화가 있었으리라고 믿었어요. 당시 내각제추진위원장이었고 JP를 대신해 당을 지키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JP와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기로에 서 있던 나로서는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어요. 이틀 후인가 3일 후에 총리공관으로 찾아갔지요. 거기서 ‘제가 유의해야 할 뜻있는 대화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으니 JP가 ‘모처럼 두 사람이 만났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더군요. DJ가 ‘앞으로는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만나자’고 했다더군요.

    그리고는 자기가 DJ에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페레스트로이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 비해 글라스노스트는 한번 개방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두 개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다리가 벌어져 실패했다’고 했다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양반이 DJ에게 ‘내각제 개헌에 대해 무리한 요구는 않겠다’고 말했구나 하고 직감했어요. JP가 이미 마음이 흔들렸구나, 그리고 그 메시지를 DJ에게 전했구나 하는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내각제 약속을 받아내려면 나라도 강도 높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99년 말까지 내각제를 추동하기 위한 시간계획을 짜고, 내각제 개헌안을 서둘러 마무리해서 박태준 총재를 통해 JP와 DJ 주례회동에서 제기하도록 절차를 갖춰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당시 박총재도 내각제는 무리해서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 내각제추진위 차원의 의견으로 마무리해서 2월2일 공식기구인 총재단회의에 넘겼죠.”

    “DJ정부, 존재 의미 잃었다”

    ―그 날 DJ가 JP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했는지 전해들은 바 있습니까.

    “JP 본인 이야기로는 DJ가 ‘내가 국가 원수의 위치에 있는 대통령인데 이걸 발의했다가 한나라당이 반대하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 좌절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당신과 내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겠느냐’면서 양보와 유보를 요청했다는 겁니다. JP는 그런 의미에서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어요.

    합의문 정신에 따른다면(1997년 11월3일 DJP가 최종 서명한 합의문에 따르면 내각제는 대통령이 발의하도록 돼 있다) 부결됐을 경우의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대통령이 개헌안을 국회에 발의해 놓고 국민과 정치권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헌안을 내놓기는 고사하고 개헌안 논의를 위해 구성키로 한 양당 7인 위원회조차도 만들지 않았어요.

    이 정부는 도덕적으로 존재의미를 잃은 겁니다. 그래서 2002년 3월 경인가, DJ정부 마무리를 위해 협력해서 함께 하자고 제의해왔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때 총리 자리를 제안받았습니까.

    “총리라는 두 글자를 내가 들은 바는 없어요. 그래서 난 잘 몰라요. 내가 뭐 총리하고 싶어서 정치하는 것도 아니고….”

    ―1999년 4월7일 서상목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후 국민회의와 자민련엔 비상이 걸렸습니다. 자민련 내부에서 누군가 반란을 주도했고, 그 주동자로 김부총재가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4월9일 DJP 긴급회동에서 ‘내각제 개헌논의 함구령’이 떨어집니다. 그 때 상황을 들려주시죠.

    “그 때 나는 매우 난감한 오해를 받고 있었어요. 박태준 총재가 있을 때였는데, 내가 반란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내가 신라호텔에서 이인구 의원을 만나서 지령을 했다는 정보보고가 올라갔는데, 나중에 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어요. JP도 처음엔 내가 반란을 주도한 것으로 오해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당내 갈등과 맞물려서 그렇게 된 겁니다. 내가 이인구 의원과 저녁을 먹은 것은 투표가 끝난 후였어요. 그걸 투표 전에 만난 걸로 보고를 해서 소동이 난 겁니다.”

    ―1999년 7월21일 JP는 결국 내각제 개헌유보를 공식 천명했습니다. 사실상 약속 파기로 받아들여졌죠. JP가 왜 내각제를 포기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내 나름의 생각은 있지만, 그걸 내 입으로 이야기하면 실례지. JP는 국민회의와 합의해서 내각제 개헌을 유보한 게 아닙니다. JP와 나의 합의가 결렬된 것이죠.”

    DJP가 내각제 개헌에 사실상 합의한 것은 대선 직전인 1997년 11월3일 두 사람이 합의문에 공식 서명한 것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1년 전인 1996년 DJ-김용환 ‘목동담판’에서 이미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다.

    당시 JP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김용환 수석부총재(당시 사무총장)는 “그 해 11월1일 DJ의 목동 비밀장소에서 3가지 사항에 대해 전격 합의했다”고 회고했다. ‘후보 단일화를 통해 수평적으로 정권을 교체한다’ ‘국민회의가 내각제를 공식 수용한다’ ‘국민회의가 대선 전에 내각제를 공론화하고 이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워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다’는 게 그것.

    김부총재는 그때 이미 내각제 개헌을 위한 구체적인 일정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전반부 2년은 대통령제, 후반부는 2000년 2월부터 5월 사이에 총선을 치러 ‘내각제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그러나 결국 그의 꿈은 불과 반년 남짓 목전에 두고 사라졌다. 그것도 그가 믿고 따랐던 JP에 의해.

    김부총재와 함께 DJP 후보 단일화 카운터파트였던 한광옥(韓光玉) 민주당(당시 국민회의) 최고위원은 내각제 합의 파기에 대해 “개헌유보 과정을 보면 (합의를) 안 지키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개헌을 할 수 없게 돌아갔다. 그래서 유보적 상황에서 끝났다고 봐야 한다. 파기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노무현 정권 출범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는 내각제 개헌논의가 또다시 일고 있다. 김용환 의원은 ‘다시 일고 있는 내각제 개헌논의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날 이후 난 내각제에 대한 희망을 내 맘속에서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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