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는 정치자금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긴 했으나, 용두사미가 되었다. 개혁입법으로 추진된 돈세탁방지법을 보자. 2001년 6월 여야협상에서 정치자금은 이 법의 대상에서 제외키로 방향을 잡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3개월 뒤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는 정치자금을 다시 포함시켰다. 하지만 국내에서 거래되는 불법자금에 대한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계좌추적을 금지하고 선관위에 사전 통보토록 해 정치자금의 숨통을 터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2002년 2월엔 전경련이 “부당한 정치자금을 거부하겠다”고 공개선언, 주춤거리는 정치권을 다시 압박하고 나섰다. 별도로 진념 경제부총리는 “법인세 1%(연간 1700억원 규모)를 정치자금으로 쓰자”고 제안, 공론화에 나섰지만, 기업들의 반발과 실효성 논란으로 무위로 돌아간 상태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야심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하지만 선거 공약에 거품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권 후 재검토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1998년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선거 공약을 검토하여 IMF외환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야 할 과제 100개를 선정했다. 이를 토대로 ‘국민의 정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선거 당시 김대통령이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내세웠던 정치 관련 공약 가운데 앞서 언급한 내각제 실시와 정치자금법 개정 이외에도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정부조직과 기능을 근본적으로 개혁한다. ▲중앙인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인사청문회를 도입한다. ▲검찰·경찰 등 국가권력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한다. ▲지방자치제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고 지방재정제도를 전면 개선한다. ▲부패방지법을 제정하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한다.
주목할 점은 이들 공약 가운데 상당 부분이 100대 국정과제 선정 때 슬그머니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선거 당시의 공약이나 집권 이후의 100대 국정과제를 보면 행정부 중심의 정책적 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축소나 정치자금법 개정 등 정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주안점이 있는 정치 분야의 개혁 과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지만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정부조직을 축소했지만 각 부처의 반발로 정부 조직과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몇 개 부처를 개편하고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신설하는 등 ‘큰 정부’로 회귀하고 말았다.
의지조차 없었던 검찰 개혁
둘째, 중앙인사위원회를 신설했지만 관례가 된 연공서열 중심 인사풍토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또한 가신그룹의 인사관여도 여전했다. 개방형 임용제를 도입했지만 민간 전문가 충원에 실패했고, 공무원이 신분을 바꿔 개방형 자리까지 차지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인사청문회를 도입해 국무총리와 헌법재판관, 대법관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한 것은 과거에 비해 획기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청문회 대상을 국회의 인준을 받거나 추천을 받도록 헌법에 규정된 대상자로 한정함으로써 유명무실한 인사검증제도가 되었다. 즉 국무위원과 장관급 공직자는 물론, 권력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등은 청문회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 결과 임기 내내 DJ는 편파인사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인사파동이 자주 일어났다.
셋째, 검찰과 경찰의 민주화와 정치적 중립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전 법조비리, 옷 로비 사건, 파업유도 사건 등 절박한 계기가 주어졌음에도 김대중 정부는 검찰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아니 추진할 의지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1998년 대통령 취임 직후 법무부의 첫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DJ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강조했지만, 검찰은 여전히 대통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검찰’의 멍에를 벗지 못했다. 검찰총장의 임기제가 법제화됐지만,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검찰총장이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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