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치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신페인당의 준(準)군사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IRA) 요원이 스토몬트에서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경찰이 신페인당의 스토몬트 사무실을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간부가 체포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신교파 민주연합당은 이 사건을 빌미로 자치정부에서 철수했고, 그 결과 자치정부는 붕괴됐다.
2003년 봄 총선이 예정돼 있지만, 날짜조차 확정되지 않은 데다 선거 후 자치정부가 다시 들어선다 해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투명하다. 민주연합당, 얼스터연합당 등 영국과의 연합에 찬성하는 구(舊)제국주의자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교파 정당과 신페인당 등 구교파 아일랜드인 정당 간에 불신의 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신교파 영국인과 구교를 신봉하는 아일랜드인 사이의 민족적·종교적·역사적 갈등의 골도 깊다. 따라서 서로간의 불신을 떨쳐내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 한 ‘벨파스트의 봄’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1969년 8월 영국군이 북아일랜드에 주둔하고 이에 맞서 아일랜드공화군이 결성된 이후 1994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테러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영국인 축출과 아일랜드 통일을 목표로 하는 IRA는 영국 주둔군과 영국인에 대해 테러를 감행했고, 북아일랜드에 정착해 살아온 신교파 영국인들은 자위대를 결성, IRA 테러에 대한 보복테러 혹은 경고성 테러를 일으켰다. 지난 30여 년에 걸친 양측의 테러로 3100여 명이 사망했고, 3만6000여 명이 다쳤다.
원주민과 정복자
이같은 유혈테러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려면 800여 년에 걸친 영국과 아일랜드의 분쟁사, 그리고 20세기 들어 이뤄진 두 나라의 관계 변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30년의 유혈사태는 표면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수백년간에 걸친 뿌리깊은 민족적·종교적·역사적 갈등이 상속되면서 증오의 싹이 자라난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서 영국과 아일랜드를 살펴보자. 커다란 섬나라 영국에 인접한 또 하나의 작은 섬나라가 아일랜드다. 국토 면적은 영국이 24만㎢가 좀 넘고 아일랜드는 7만㎢ 정도로, 영국이 3배 이상 넓다. 아일랜드에서도 그 윗부분에 자리한 북아일랜드는 1만4000㎢에 불과하다.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북아일랜드는 영국 국토의 일부가 됐다. 영국의 공식 명칭인 ‘UK(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Great Britain’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의미한다). ‘커다란 섬나라에 붙은 조그만 섬나라’라는 지리적 위치는 800여 년에 걸친 두 나라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는 작은 실마리다.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공(公)이 영국을 점령했다. 그후 14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와 노르만 왕조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번갈아 영국을 통치했다. 플랜태저넷 왕조에 속하는 헨리 2세는 1170년, 현재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인근 지역을 점령했다. 당초 그는 아일랜드를 영국에 부속시키려고 점령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부 지역만 통치하게 됐다.
하지만 그후 영국은 아일랜드의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다스렸다. 그래서 1558년에서 1603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1세 때는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이 영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단지 얼스터(Ulster·현재의 북아일랜드 지역)만이 영국의 점령을 면했다. 얼스터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이 휴 오닐(Hugh O’Neill)의 지도 아래 내분을 종식하고 영국군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동맹을 결성한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