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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갈등 지도 (2)│북아일랜드

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북아일랜드

  • 글: 안병억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유럽통합 전공 anpye@hanmail.net

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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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종교·역사 ‘복합 갈등’이 낳은 30년 유혈사태
그러나 결국은 얼스터도 영국의 위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영국의 본격적인 식민이 시작된 것은 스튜어트 왕조 초기인 제임스 1세 때부터. 특히 1609년부터 얼스터에 대한 대규모 식민이 시작됐다.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에 살던 주민들에게 북아일랜드에 정착할 경우 넓은 땅을 유리한 조건에 주겠다며 끌어들여 대대적인 식민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703년에는 전체 토지의 5%만이 구교를 믿는 아일랜드 원주민의 소유로 남았고, 나머지는 신교를 신봉하는 영국인이 차지하게 됐다. 아일랜드인 원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지녀온 옥토를 빼앗기고 야산과 변두리로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은 언어(영어와 아일랜드어)와 종교(신교와 구교)는 물론 거주지역도 서로 달랐다. 피맺힌 한을 품은 아일랜드인은 점령군이자 제국주의자인 영국인들에게 거세게 저항했고, 영국인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시기에 굳어진 갈등구조가 3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일랜드는 1801년 공식적으로 영국의 일부가 됐다(Act of Union).

독립 후에도 사실상 식민지

19세기 들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합법적, 불법적인 운동이 이어졌다. 1840년대의 ‘Act of Union’ 철폐운동, 의회를 통해 자치권을 회복하자는 1870년대의 ‘홈룰 (Home Rule)’운동 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됐다. 반면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이나 페니어 회원(Fenians·아일랜드 독립쟁취를 위한 비밀결사로 미국 거주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됐다)들은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싸웠다. 홈룰 법안은 하원에서 두 차례나 통과됐으나, 대지주이자 아일랜드에 상당한 이권을 소유한 상원의 반대로 좌절됐다.



1835년 더블린에서 일어난 신교도 영국인과 구교도 아일랜드인 간의 대규모 충돌 이후 10년에 한번 꼴로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빚어지면서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부활절을 기해 더블린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대규모 무장투쟁이 전개됐다. 당시 1차대전에 정규군 병력을 대거 투입한 영국은 죄수들을 주축으로 구성한 임시군을 아일랜드에 파견했는데, 카키색과 흑색 제복(Black and Tans)을 입은 이들은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해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1차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에도 반란이 발생하자 결국 영국은 1920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반란 당시 신페인당의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결성된 것이 아일랜드공화군이다.

북아일랜드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홈룰과 무장투쟁을 거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그래서 독립을 묵인하는 대신 북아일랜드는 계속 영국의 지배하에 두기로 영국 정부와 밀약을 맺었다. 당시 북아일랜드 주민의 70%가 영국인이었다. 아일랜드의 경우 영국인의 비율은 10% 남짓했다.

영국에서 독립한 아일랜드에선 무장투쟁을 통해 북아일랜드도 아일랜드로 통합해야 한다는 정파와 이를 반대하는 정파 간에 충돌이 빚어졌다. 그 결과 아일랜드인들끼리 파가 갈려 1923년까지 내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됐다. 물론 IRA는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IRA는 1950년대에 아일랜드 정부에 의해 불법단체로 규정됐고 그후 지하로 숨어들었다.

영국에 잔류한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정복자 영국인이 원주민 아일랜드인을 사실상 지배하는 사회였다. 아일랜드인의 처지에서 보면 독립을 하고서도 현대판 식민지가 된 셈이다. 여당인 얼스터연합당이 경찰, 교육, 사회복지 부문 등에서 자치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대개 영국인으로만 충원됐고, 비상법안이 도입돼 아일랜드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아일랜드인은 ‘2류 국민’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 초의 식민지 시절과 마찬가지로 거주지역도 철저하게 양분됐다. 이처럼 차별되고 격리된 사회에서도 교육을 받은 아일랜드인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1960년대 들어 미국식의 평등권(Civil Rights) 운동이 전개됐다. 이 운동을 벌인 아일랜드인은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로 통일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를 인정할 테니 대신 아일랜드인도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해달라”고 요구했다.

1967년에는 북아일랜드 평등권운동연합이 결성됐다. 이들은 직업과 주택 할당에서의 차별과 비상법안, 그리고 영국인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들은 그 무렵 미국에서 열기를 더해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평등권 운동을 모델로 시위와 연좌농성, 언론매체를 통한 의견개시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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