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정밀분석

2세대 변호사·소장파 학자·10년차 386이 핵심

‘新권력’ 참여연대의 속살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2세대 변호사·소장파 학자·10년차 386이 핵심

2/7
함께 새 시민운동조직을 만들 사람을 찾고 있던 이들 참사연 멤버들은 1993년 11월 ‘역사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던 김동춘 현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를 통해 두 명의 인물을 소개받는다. 한 사람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다른 한 사람은 박원순 변호사였다. 장차 참여연대를 구성하는 세 축이 처음 만나게 된 시점이었다.

1980년대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변혁론 논쟁을 주도했던 조희연 교수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와 학술단체협의회 등에서 진보적 학자그룹과 함께 새로운 지식인 운동의 방향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김호기, 김대환, 박호성, 유팔무 등 장차 참여연대 학자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논의에 동참했다.

한편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 연구’ 등을 저술한 박원순 변호사는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해외에서 살펴본 시민운동의 형태를 한국에서도 적용해보고 싶다는 의욕에, 변호사가 단지 법률적 자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운동가가 되어 활동하는 적극적인 사회참여방식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안경환, 박은정, 한인섭 등 비판적 법학자 그룹이 함께했다.

마지막으로 초기 논의과정에 참여했던 이들로 김중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을 비롯한 언론인 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논의과정에서 김중배 전 사장을 제외한 이들 그룹은 새 단체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고 있던 세 그룹은 급속히 의기투합했다. 이듬해인 1994년 1월부터 5월까지 수십 차례의 회의와 토론을 거쳐 새로운 단체 결성을 논의하던 세 그룹 구성원 20여 명은 그해 봄 불암산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밤샘워크숍에서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확정한다. 참여연대 구성원들은 이 워크숍을 ‘참여연대 출발의 결정적 계기’로 회고하곤 한다. 이후 7월 준비위원회를 거쳐 9월 용산역 앞 홍등가 근처의 허름한 건물에서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긴 이름의 단체가 출범한다.



같이 조직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출신과 배경이 각기 다른 세 그룹의 비전과 밑그림은 조금씩 편차가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가 이른바 ‘명칭 논쟁’. 사전 논의를 거쳐 ‘참여(민주주의)’ ‘인권’ ‘시민’이라는 키워드가 남았지만 각 그룹별로 의미와 강조하고 싶은 바가 달랐다.

진보적 사회과학자 그룹은 명칭 속에 ‘참여민주사회’와 ‘시민’의 개념을 넣자고 주장했지만 인권변호사 그룹은 ‘시민’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신 ‘인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섰다. 학자 그룹은 ‘인권’이 고문이나 의문사 같은 말을 연상시켜 운동의 범위를 좁힐 거라는 우려를, 변호사들은 ‘시민’이란 단어가 기존의 다른 단체나 반사이익을 노리는 집단에 의해 남용되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아무도 기억 못하는 긴 이름

의견이 팽팽히 맞서다 보니 모두가 만족하는 명칭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논란의 결정판은 1994년 7월 종로성당에서의 밤샘토론. 긴 밤을 꼬박 새우고 나온 결론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복잡한 이름이었다. “만든 이들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 긴 명칭은 이후 ‘참여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참여민주사회 시민연대’로 변경되었다가 1999년 5차 총회에서 당초에는 약칭이었던 ‘참여연대’로 확정됐다.

단체의 정체성을 둘러싼 세 그룹의 고민은 ‘인권운동사랑방’을 둘러싼 진통에서도 드러났다. 당초 참여연대는 이미 창립 2년을 넘긴 인권단체 인권운동사랑방과 통합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실제로 인권운동사랑방은 참여연대 창립 당시 다섯 개 전문센터 가운데 하나로 편성됐다가 3개월 만에 독립단체로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참여연대가 ‘권력감시’ 차원에서 인권을 생각했다면, 인권운동사랑방은 ‘피해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인권을 바라보는 데 따른 괴리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참사연 내부에서도 교수 및 법률가들과 함께 단체를 만드는 데 이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참사연 회원 중 상당수는 참여연대 창립 이후 시민위원회 회원으로 참여했지만 3분의 1 가량은 동참하지 않았다. “기존의 시민단체처럼 젊은 상근자들이 전문가 그룹의 손발 역할밖에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2/7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목록 닫기

2세대 변호사·소장파 학자·10년차 386이 핵심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