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정권이 민심의 외면을 당한 것은 ‘인사 정책의 실패’와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임기 말 DJ 곁에 남은 건 ‘예스맨’ 뿐. 민주화 운동, 원칙과 소신이 강한 지도자라는 점에서 DJ와 노무현 대통령은 비슷한 측면이 많다. 일각에서는 노대통령이 DJ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비방 마세요.” 2002년 11월12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민주당 한화갑 대표 초청 의원 오찬 도중, 한대표가 노무현후보를 비방하자 김경재 의원이 반발하며 자리를 뜨고 있다.
민주당 선대위 홍보본부장을 맡았던 김경재(金景梓·61) 의원은 ‘특1등 공신’으로 분류됐다. 한나라당과의 대선 홍보전에서 완승을 거둔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지금 민주당 신주류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기자는 2001년 10월25일부터 민주당을 출입하면서 김의원과 같은 동네(여의도)에 산다는 이유로 그를 담당하게 됐다. 정당 출입기자는 대개 주요 당직자나 중진을 전담 취재한다. 이를 흔히 ‘마크맨’이라고 부른다.
민주당 경선 기간에는 지금은 대통령이 된 노무현 후보가 내 담당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난 1년여간 김의원의 눈을 통해 노대통령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선 그 얘기를 소개할까 한다. 물론 이것은 16대 대선이란 큰 그림의 한 편린에 불과할 것이다.
노대통령의 ‘386 측근들’ 중에는 “민주당 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를 돕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10년 이상 노대통령을 모신 자신들의 경력과 은근히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의 뒤편에도 적지 않은 땀방울이 맺혀 있다는 것을 김의원을 취재하며 알게 됐다.
”노무현 후보가 호남 표를 얻을 수 있을까”
김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10월28일 오후 11시경 그의 여의도 K아파트 자택에서였다. 민주당이 ‘10·25 재·보선’에서 참패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민주당은 초상집이었다.
그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한탄과 아쉬움을 2시간 이상 토로했다. 그는 1980년대 DJ의 미국 망명 시절을 같이 보냈고, DJ 관련 저서도 여러권 펴낸 ‘DJ맨’이다. ‘DJ의 독서일기’란 저서 서문에 “나는 ‘후광(後光·DJ의 호) 연구가’이다”고 적혀 있을 정도다.
“DJ는 분명 천재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을 쑤고 있으니 참….”
미국 망명 시절 DJ는 외로웠다고 한다. 서슬 퍼런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눈이 무서워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때 DJ는 자신을 위로하는 김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맨 밑바닥에 있을 때 긍지와 위엄이 있어야 하네. 그들이 날 필요로 하지 않으니 날 만나러 오지 않는 걸세. 요즘 난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네.”
김의원은 그때 DJ가 그토록 위대하게 보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DJ가 이끄는 정부와 민주당이 국민으로부터 싸늘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김의원은 그 이유를 ‘인사 정책의 실패’와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 DJ의 고집’에서 찾았다. DJ는 자신의 사고와 논리를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기 싫어했고, 그래서 청와대에는 온통 ‘예스 맨’으로만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을 오래 모셔 그를 너무 잘 안다. 그 점 때문에 대통령은 나를 곁에 두려 하지 않았다. 내가 대통령에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조언하면, 대통령은 늘 ‘당신이 날 이해해야지, 그런 소리 하면 되나’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어떻게 이 난국을 극복할 것인가’로 이어졌다. 김의원은 “국정을 쇄신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히 늦은 때라는 것은 없는 법이다. 새 정부를 구성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해하는 심정으로 국정을 쇄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권 재창출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비교적 성공한 정부로 마무리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그 방법 중 하나로 “대선후보 경선이 멋진 승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선 후보자들 중 누가 선출돼도 그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는 ‘이인제(李仁濟) 대세론’이 지배할 때였다.
“노무현 후보에겐 쉽지 않은 승부다. 영남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민주당 대선후보의 영남 지지율이 크게 오르지 않는 게 엄연한 정치현실이다. 노후보가 호남에서 DJ의 지지표를 얼마나 흡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지금 상황이면 이인제 후보는 DJ 지지표의 90% 이상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해를 넘겨 2002년 2월27일 오후 10시경 김의원의 K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TV에선 노무현 정동영(鄭東泳) 유종근(柳鍾根) 경선 후보의 3자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김의원은 당시 한국 정치사상 처음 도입된 국민 참여 경선의 사회자인 대회진행분과위원장을 맡아, 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TV를 보며 “노무현이 참 토론을 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선을 관리하는 당내 중앙선관위 위원 중 ‘친(親) 이인제’ 성향의 의원들이 많아 공정 선거가 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당시 노후보는 ‘이인제 대세론’을 꺾기 위해 “이인제 후보는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했고, 5년 전엔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했다”며 맹공을 퍼붓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선관위의 ‘친 이인제’ 의원들은 ‘경고’를 줘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김의원은 며칠 전 선관위 회의에서 “어차피 이후보의 그런 문제들은 대선 본선에 가더라도 다뤄질 문제 아니냐. 그 정도로 ‘경고’를 주면 선관위의 권위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다음에도 비판하면 또 경고 줘서 결국 후보자격 을 박탈할 작정이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해찬(李海瓚) 의원 등이 이에 동조해 ‘경고’는 ‘문서상 주의’로 하향 조정됐다.
김의원은 3월9일 첫 제주 경선을 열흘 앞둔 이날 “선관위 위원 때문에 지지활동을 못하지만, 내 마음속으론 노무현을 지지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인제 후보 쪽에서 나에게 ‘도와달라’며 수십 차례 제의가 왔다. 노후보측 염동연(廉東淵) 전 연청 사무총장은 나를 찾아와 ‘김선배, 노후보에게 크게 배팅 한번 하십시오’하며 경선 선대본부의 중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호남에서 ‘이인제 대세론’이 흔들리고 있다. 민주당의 법통과 정체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현재 광주에선 노무현이 1등이고 전남에선 이인제 1등, 노무현 2등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3월16일 광주 경선에 벌어질 ‘노풍(盧風)’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후보는 대선 선대위 총괄본부장으로 김원길 의원을 원했다
9월14일 오후 11시경 김의원의 여의도 S아파트를 찾았다. 그는 K아파트 전셋값이 너무 올라 약 한달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했다. 당시엔 선대위 간부 인선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는 선대위 홍보본부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필자의 관심은 선대위 실무를 총지휘하는 총괄본부장(또는 선거대책본부장)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김의원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노후보와 선대위 사람들은 김원길(金元吉·대선 직전 민주당을 탈당해 한나라당 입당) 의원을 원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짓(통합신당 추진)’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물 건너갔다.”
선대위 사람들이 김의원을 원한 이유는 그의 자금 모집 능력 때문이었다. 김의원은 서울 상대와 대한전선 부사장 출신의 경제통이다. 당시 노후보측의 최대 고민은 ‘돈’이었다.
노후보의 참모들 사이에선 “당 후원금이 바닥났고 민주당의 법정 후원회 개최 횟수도 이미 다 찼다. 선거자금 모금을 위한 후원회를 열기 위해서라면 당명이라도 바꾸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 한화갑(韓和甲) 대표가 선대위원장직을 맡지 않아 ‘노무현-한화갑 갈등설’이 불거졌는데, 김의원은 당과 선대위의 이같은 이원체제의 원인을 다르게 해석했다.
“당의 재정 상태가 불투명하고 엉망이었다. 선대위와 당이 일원화되면, 선대위가 당의 골치 아픈 재정 문제를 모두 떠안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노후보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한편 노후보가 김원길 의원을 선대위에 중용하려 했던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노후보는 “적당한 규모의 돈은 나도 (모아오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김원길 의원은 대표적인 서울의 주류 인물 아니냐.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비주류 소수파인 노후보에 대한 주류 사회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는 인물로 김원길 의원을 꼽았던 것이다.
결국 당시 김원길 의원의 ‘대타’로 정대철(鄭大哲·현 대표) 최고위원이 나섰다. 김원길 의원이 당시 ‘다른 짓’을 하지 않고 노후보를 도왔다면 지금쯤 그의 정치적 위상은 어땠을까.
11월5일 오후 11시 반경 김의원의 S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이틀 전인 3일 노후보가 국민통합 21 정몽준(鄭夢準) 후보에게 ‘후보단일화 협상’을 공식 제의했다. 하루 전인 4일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소속 의원 11명이 탈당을 선언했고, 이해찬 선대위 기획본부장은 이 사태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한화갑 대표의 사퇴를 요구했다. 당내에서 “이게 정당이냐”는 말이 나오던 때였다.
김의원은 같은 전남 출신에 서울대 문리대 선배인 한대표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선배는 의원들 탈당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곧바로 사퇴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정치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데….”
당시 선대위 간부 대부분은 노후보와 정몽준 후보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하는 듯한 한대표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김원기(金元基) 고문은 며칠 전 선대위 회의 때 “최근 한대표가 나에게 ‘형님 술 한잔 합시다’고 해서 만났더니, ‘형님, 제가 두 번이나 탈당하려다가 안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더라. 세상에 당 대표가 탈당 안한 것을 자랑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며 노여워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당시 상황은 당 대표조차 노후보의 승리 가능성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빴다.
김의원에게 “만일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되면, 노후보가 승복할까요”하고 물었다.
“노후보가 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는 반드시 승복할 사람이다. ‘8·8 재·보선’ 참패 이후 노후보가 정후보와의 재경선을 주장했을 때 내가 노후보에게 ‘만일 간발의 차이로라도 지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노후보는 ‘그러면 내가 정후보의 선대위원장으로 뛰고, 집권하면 국무총리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것으로도 대만족이다’고 말하더라.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말 듣고 놀랐다. 노후보는 그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당시 김의원은 단일화 실패에 대비해 정후보의 신상 관련 각종 의혹 자료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정후보가 대학 시절 시험 도중 부정행위를 했던 전력을 상기시키며 “정후보는 노후보를 커닝해 대통령이 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제발 쓴 소리에 귀 열어라”
다시 해가 바뀌어 2003년 2월11일 밤 김의원 집을 찾았을 때 언론의 관심은 신 정부의 조각(組閣) 작업에 집중돼 있었다.
김의원을 포함해 ‘특 1등 공신’에 분류됐던 선대위 간부 출신 의원들은 ‘현역 지역구 의원 입각 배제’라는 노대통령의 조각 원칙에 막혀 ‘내각 참여’의 꿈을 접은 상태였다.
반면 노대통령은 자신의 ‘386 참모’들에 대해 “나한테만 충성한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에 충성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며 청와대 비서진으로 대거 포진시켰다.
김의원은 대화 말미에 최근 만난 재야의 저명 원로인사 K씨 얘기를 꺼냈다.
“K선생님은 ‘노무현 정부만큼은 꼭 성공한 정부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시더군.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다고 하셨어. DJ가 ‘쓴 소리’하는 사람들을 하나둘 내치면서 눈과 귀가 가려졌고 그래서 국정 운영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는데, 노대통령도 그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하시더군. DJ와 노대통령처럼 역경 속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켜온 지도자들은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하셨어. 나도 그게 제일 걱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