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미국 여대생이 이태원의
- 모텔방에서 끔찍한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 그녀가 맞아죽고 있던
- 방에서는 또 다른 여학생이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 FBI가 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한 사람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던
- 또 다른 미국 여대생. 그런데 이 용의자는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
- 콜린 파월이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희생양으로 체포해 한국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태원 미 여대생 살인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지난해 12월23일 도하 언론은 1999년 12월 한국과 미국 간에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된 후 처음으로 미국 정부가 한국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미국으로 간 미국인을 한국 수사기관에 인도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최초로 한국에 인도된 범죄인이 바로 카렌이었다. 카렌은 2년 전, 그러니까 만 19세이던 2001년 3월17일 새벽 서울 이태원의 K모텔에서 미국 여대생 제시카(가명)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녀를 체포해 한국에 넘긴 것은 미국의 FBI였다.
제시카 피살 사건은 한미간에 외교 현안이 되기도 했다.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부모의 심정 때문이었다. 딸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는데도 범인이 잡히지 않자 제시카의 부모는 각계 각층에 탄원을 했다. 백악관에도 했고 의회에도 했으며 국무부도에도 했다.
그리하여 한국을 방문하게 된 미국 의원들 중 일부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시카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해 범인을 잡아달라고 청탁하기도 했다.
법정에 선 카렌은 또렷한 영어로 범행을 부인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카렌이 2002년 2월4일부터 6일 사이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 헌팅턴시에 있는 R호텔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FBI와 CID(미 육군 범죄수사대) 요원을 만나 조사에 응하던 중 제시카 살해 사실을 자백했다는 점이다. FBI와 CID측에 따르면 카렌은 “11개월 만에 모든 것을 털어놓으니 속이 후련하다”고까지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인도된 카렌은 “콜린 파월이 주한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한국에 보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말은 제시카를 죽인 것은 주한미군인데, 이 사실이 밝혀지면 비록 피살자가 미국 여대생이긴 하지만, 미군 범죄의 잔혹상이 알려지기 때문에 대신 자기를 범인으로 붙잡아 한국에 보냈다는 뜻이다. 카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FBI까지 개입된 대단한 ‘음모’가 아닐 수 없다. 카렌의 주장은 사실일까.
관련자의 진술 중에 공통된 것과 부검 자료 등 객관성 있는 자료를 근거로 이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재구성해보기로 하자.
카렌은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 헌팅턴시에 있는 M대학교 초등학생교육과에 입학해 다니다가 2001년 3월1일 대구에 있는 K대학교 2학년에 교환학생으로 오게 되었다. 1학기 동안만 수업받고 방학이 되면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 예정 체한(滯韓) 기간은 6월 중순까지의 3개월 남짓이었다.
카렌보다 두 살이 많았던 제시카는 미국 P대학 아시아지역학과를 다니다 2001년 3월3일 역시 교환학생으로 K대 2학년에 오게 되었다. 두 여학생은 이웃한 주에 살았지만, 한국에 오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K대학에는 카렌과 제시카 외에도 여러 나라에서 온 교환학생들이 있었다. 체한 기간이 3개월 남짓이었으므로 이들은 K대 기숙사에서 한국인 룸메이트와 2인 1실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더 잘 모이는 법. 개강 직후 얼굴을 익힌 교환학생들은 서울 구경을 해보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서울 구경에 동의한 학생은 모두 일곱 명으로 미국인인 카렌(여)과 제시카(여), 핀란드에서 온 A(남·당시 22세)와 B(여·당시 22세), 네덜란드 출신인 C(남·당시 22세)와 D(여·당시 23세),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F(여·당시 25세)였다.
국적은 넷이지만 성별로는 남자 두 명에 여자 다섯 명인 이들이 서울 구경을 가기로 한 것은 3월16일 금요일이었다. 그런데 러시아 여학생 F는 수업이 있어서 하루 늦게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다. 3월16일 오후 F를 제외하고 서울역에 도착한 여섯 명은 이태원으로 이동해 방 하나에 3만원씩 주기로 하고 K모텔에 방 세 개를 얻었다.
K모텔은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사고가 난 후 경찰이 조사했을 때도 대부분의 방에는 미국인·나이지리아인 등 여러 나라 사람이 묵고 있었다. 사람은 여섯인데 방은 세 개이니 한 방에 두 사람씩 들어가야 한다. 세 나라의, 남자 둘에 여자 넷인 이들은 어떻게 방을 배정했을까.
핀란드 출신의 남녀 학생 A와 B는 스스럼없이 102호에 함께 들어가겠다고 했다. 이어 제시카는 그새 네덜란드 출신의 여학생 D와 친해졌는지 같이 한 방을 쓰자며 103호를 선택했다. 그래서 카렌은 네덜란드 출신의 남학생 C와 104호에 들어가게 되었다. 102호에는 핀란드인 남녀 학생, 103호에는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온 여학생 두 명, 그리고 104호에는 미국인 여학생과 네덜란드인 남학생이 투숙하게 된 것이다.
다음날인 3월17일(토) 이들은 남대문 시장과 서울 타워·남산 한옥마을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관광 도중 서울역에서 러시아 여학생 F를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일곱 명으로 불어난 다국적 학생 여행단은 서울 관광을 계속하다 오후 4시30분쯤 K모텔로 돌아왔다. 러시아 여학생은 101호를 빌려 혼자 투숙하게 되었다.
聖 패트릭 데이
오후 5시쯤 이들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한 핀란드 여학생을 남기고 모텔을 나와 부근의 인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비는 한 친구가 신용카드로 계산한 후, 다른 친구들이 이 친구에게 각자의 식비를 내는 ‘더치 페이’로 해결했다. 3월17일은 한국인에게는 그저 그런 주말에 불과하겠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성인인 패트릭(385~461년)을 기리는 ‘성(聖) 패트릭 데이’로, 서양에서는 이 날을 축일로 여긴다.
K모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이들은 성 패트릭 데이를 즐기기 위해 저녁 9시쯤 다시 모텔 밖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때 103호의 열쇠를 갖고 나온 것은 제시카였다고 한다(한 방을 쓴 네덜란드 여학생 진술 근거). 그런데 102호에 있던 핀란드 출신의 남녀 학생은 피곤하다며 빠졌다(그러나 이들도 9시35분쯤 모텔 밖으로 나와 둘이서 피자를 사먹고 진저 바와 디스코 테크에서 맥주 한 병씩을 마시고 밤 12시쯤 모텔로 돌아왔다).
다섯 명의 교환학생들은 이태원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 ‘N’자로 시작되는 간판을 단 바(이하 N바)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N바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에 있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기분이 좋으면 플로어에서 춤도 추는 전형적인 서양식 선술집이다. 미 8군이 인접해 있었기에 당연히 미국인과 미국 군인들이 많이 와 있었다. 두 미국 여학생은 이곳에서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남자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이들에 둘러싸여 춤을 추기도 하였다.
성 패트릭 데이가 지나고 3월18일 새벽 1시45분이 되었을 때쯤 두 미국 여학생을 제외한 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시카와 한 방을 쓰는 네덜란드인 여학생, 카렌과 한 방에서 지내는 네덜란드인 남학생,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러시아 여학생이 피곤하다며 숙소로 돌아간 것이다. 이들이 떠난 후에도 카렌과 제시카는 바에서 만난 손님들과 어울려 놀았다.
사건 현장인 모텔방 103호 내부
에서 보듯이 2인용 침대가 하나 있고, 침대가 차지하는 넓이보다 약간 더 큰 공간에 경대와 TV 수신기가 있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현관 옆에 있는 화장실도 매우 작았다. 벽도 얇아서 옆방에서 섹스를 하면 그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 눈길을 돌리던 네덜란드 여학생은 침대에서 불과 1m도 떨어지지 않은 방바닥에 팬티조차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여자가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나신(裸身)의 여자는 머리를 방 쪽으로, 다리는 103호의 문을 향한 채 현관과 방을 나누는 문턱에 허벅지께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스카프인지 옷가지인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네덜란드 여학생은 이 나신의 여인에게 일어나라고 할 생각으로 다가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다 이 여인이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해 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방인 104호 문을 두들겼다.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카렌을 보고 “제시카가 보이지 않는다. 내 방에 웬 시체가 있다”며 울부짖었다. 이 말을 들은 즉시 카렌과 네덜란드인 남학생은 즉각 103호로 가보았다. 벌거벗은 여성이 온 얼굴에 피투성이를 한 채 옷가지 같은 것으로 얼굴을 덮고 바로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네덜란드인 남학생은 101호와 102호를 두들겨 안에 있던 러시아 여학생과 핀란드인 남녀 학생을 나오게 했다. 그리고 모텔의 프런트로 달려가 전화로 경찰에 사건 발생을 신고하였다.
잔혹히 살해된 제시카
이 변사체가 바로 제시카였다. 잠시 후 인근 파출소에서 직원이 달려오고 용산경찰서 강력반이 달려왔다. 이어 서울경찰청 감식반이 나와 제시카의 시신과 제시카의 시신이 있던 103호를 샅샅이 살피게 되었다.
제시카는 눈을 뜬 채 숨져 있었는데 눈 주위를 포함한 얼굴은 수많은 가격으로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윗니가 부러져 있었고 오른쪽 귀는 2∼3cm 정도 찢어져 있었다. 살인자가 제시카의 안면부를 가격할 때 튄 피로 103호 벽과 방바닥엔 수많은 핏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봐서 제시카는 나체인 상태로 103호에서 무수한 가격을 당해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수사는 과학이다. 강력사건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변사체부터 샅샅이 조사하여야 한다. 제시카의 시신을 최초로 검안한 의사는 ○○정형외과의 이아무개씨였다. 이씨는 제시카가 타살된 것으로 보았는데, 직접 사인(死因)은 뇌 손상과 경부압박상(頸部壓迫傷)일 것으로 추정했다. 경부(頸部)는 ‘목’이다. 즉, 누군가가 목을 강하게 눌러 상처를 입히고 숨을 쉬지 못하게 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경부압박상에 의한 사망이다.
경부압박질식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 교살(絞殺)이다. 교살은 끈 같은 것으로 목을 감고 조여서 죽인 것을 말한다. 교살된 시체의 목에는 끈이 감고 돌아간 ‘색흔(索痕)’이라고 하는 흔적이 남는다. 그러나 경부압박질식사를 당한 시신에는 색흔이 없고, 대신 목뼈 등이 골절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이씨는 제시카의 목뼈가 골절된 것을 발견하고 경부압박상에 의한 사망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제시카를 숨지게 한 중간 선행 사인은 머리와 안면을 무수하게 때린 ‘두부(頭部) 및 안면부의 다발성 손상’일 것으로 추정했다(의사들은 항상 ‘추정’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판단을 밝힌다). 제시카의 아래턱은 부러져 있었는데 이씨는 이를 근거로 제시카의 안면부가 다발성 손상을 입었다고 적었다.
이어 제시카를 숨지게 한 선행 사인은 둔기에 의한 타격일 것으로 추정했다. 윗니가 부러지고 귀가 찢어지고 벽까지 피가 튀고 얼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놓으려면 둔기에 의한 가격이 아니고선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최초 검안의사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는 부검 등을 통해 보다 정교하게 제시카의 사인을 추정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3월19일 제시카의 시신을 부검한 국과수 법의학과팀은 경부압박질식사 혹은 액사(扼死)로 숨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다. 경부압박질식사 중에서도 손 같은 것으로 목이 졸려 죽는 것을 액사라고 한다.
제시카의 목 안에 있는 설골(舌骨)과 목젖 부근에 있는 윤상연골 등 작은 뼈들은 부서져 있었다. 혀 근육과 기도(氣道)와 식도 등 제시카의 목에 있는 장기(臟器)에서는 응혈(凝血)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응혈은 목이 무언가에 강하게 눌렸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이다. 그리고 제시카의 아래 턱뼈는 두 군데나 금이 가 있었다.
제시카의 얼굴과 목 전체에 멍이 있었고 여러 군데 표피가 벗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두피(頭皮) 밑에도 출혈 흔적이 있었고 두개골 안쪽에 뇌를 싸고 있는 얇은 막에서도 출혈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얼굴을 집중적으로 얻어맞다 보면 코와 입이 막혀 숨을 거두는 ‘비구폐색질식사(鼻口閉塞窒息死)’를 당할 수도 있다. 집중적으로 얻어맞는 것을 법의학에서는 ‘기계적’이라고 표현한다. 국과수는 제시카가 얼굴을 많이 맞아 기계적 비구폐색질식사로 사망했을 가능성을 두 번째로 거론했다.
살인자가 발이나 손, 혹은 둔기를 세게 휘두르면 이를 맞은 사람의 몸에는 큰 상처와 함께 때린 물체의 흔적이 찍히는데, 이를 때린 물체의 형태가 찍힌 손상이라고 하여 ‘정형손상(patterned injury)’이라고 한다. 국과수 법의학과 팀은 제시카의 오른쪽 광대뼈와 귀 사이에서 제시카를 강하게 때린 정형손상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제시카의 왼쪽 어깨와 가슴 사이에서도 정형손상과 유사한 멍을 찾았다. 이 정형손상은 현장 감식을 했던 경찰이 신발 자국이라고 보았던 것들이다.
사람이 맞아 죽는데도 잠만 잤다?
여성이 나신으로 살해되었다면 일단은 범인을 남성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섹스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다. 더구나 이 남자가 변태성욕자라면 여성의 아랫배를 훼손하거나 심지어 시간(屍姦)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제시카의 하복부는 가격을 받은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과수에서 검사한 바에 따르면 제시카의 몸과 화장실에 떨어져 있던 제시카의 팬티에서는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다. 이는 제시카가 남자와 성교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정액이 살인자의 것인지 아니면 사건이 있기 전 다른 남자와 성교한 흔적인지는 알 수가 없다.
목이 졸리거나 심하게 얻어맞을 경우 사람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그러나 제시카의 시신에서는 반항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손이나 다리는 결박을 당한 흔적이 없는데도 무방비로 맞은 것이다. 마약 같은 약물이나 독극물을 먹어 중독된 상태였다면 무방비로 얻어맞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과수의 검사 결과 제시카의 몸에서는 독물이나 약물 양성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국과수는 제시카의 혈액 알콜 농도는 0.11%였던 것으로 측정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알콜 농도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기분이 좋아지며 침착성이 없어지고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해 있었던 제시카는 살인자가 휘두른 첫 번째 가격에 급소를 맞고 바로 가사(假死)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이후 무방비로 얻어맞다 숨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현장 감식을 한 서울경찰청 감식반은 제시카의 다리가 놓여 있던 현관 구석에서 핏자국과 함께 제시카의 것으로 보이는 부러진 이빨을 발견했다. 다른 혈흔은 제시카가 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에서 얻어맞을 때 튀겨나갔거나 흘러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시카의 다리가 있던 현관에서 발견된 핏자국과 이빨은 제시카가 숨진 상태에서는 도저히 흘릴 수 없는 것이었다. 감식반은 이 혈흔과 부러진 이빨을 특이사항으로 기록했다.
이 사건을 접수한 용산경찰서는 통역을 구해 제시카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네덜란드인 여학생을 상대로 조사에 들어갔다. 이 여학생은 “3월17일 저녁 9시쯤 성 패트릭 데이를 즐기기 위해 103호를 나올 때 문을 잠근 것은 제시카였고 열쇠를 갖고 있었던 것도 제시카였다”며 이렇게 진술했다.
“N바에 갔을 때 테이블이 없어 기다리다 자리에 앉았고 맥주 피처를 세 개 시켜 마셨다. 카렌과 제시카는 바에 있던 다른 좌석의 남녀와 어울려 즐겁게 춤을 추었다. 그러다 나는 18일 새벽 1시45분쯤 피곤하여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바를 빠져나왔다. 바에서 나올 때 기분이 좋을 정도로 약간 취해 있었다.
그리고 공중전화로 네덜란드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새벽 2시쯤 제시카에게 받아온 열쇠로 103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 샤워도 하지 않고 바로 잠들었다. 그러나 제시카가 돌아오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은 잠그지 않았다. 나는 제시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방바닥에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쿵쿵 소리도 듣지 못했으며 신음소리 같은 것도 듣지 못했다.”
이에 대해 수사관이 “103호에서 제시카가 목뼈와 턱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얻어맞았는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여학생은 “자는 사이 누군가가 방문을 열었다 즉시 닫은 것만 기억난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을 잤다”고 말했다.
이어 바에도 가지 않고 103호 바로 옆방인 102호에서 먼저 휴식을 취한 핀란드 남녀 학생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핀란드인 여학생의 진술은 이러했다.
“새벽 4시쯤 ‘But you are here now (그렇지만 너는 지금 여기에 있잖아)’라는 말을 들었다. 화가 난 미국인 발음으로 기억된다. 이어 누군가가 아프게 할 때 작은 소리로 ‘아-아’ 소리를 내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들었으며, 이어 바닥을 구르는 것 같은 ‘쿵-쿵’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Let’s go(이제 가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미국인 남자의 억양인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이러한 소리들은 약 5분 동안 들려왔다.
이러한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깬 나는 옆에 자고 있던 핀란드 남학생을 깨웠는데 남학생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소리가 작아졌다. 모텔에서는 전날 밤에도 위층이나 옆방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나는 별것 아닐 것이다, 어떤 여자가 남자한테 두들겨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Let’s go’ 다음에는 ‘음음’ 하는 신음소리만 약하게 났는데 그후로는 바로 잠이 들어 모르겠다.”
이에 대해 수사관이 “렛츠 고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범인은 한 명인 것으로 생각했는가”라고 묻자, 핀란드 여학생은 “자기 자신에게 ‘렛츠 고’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 명인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핀란드 남학생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뤄졌다. 이 남학생은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이 깨우기에 시계를 보니 3시45분에서 4시15분경이었다.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정도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는데, 모텔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학생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계속 잤다”고 말했다.
바에서 만나 춤춘 남자들
카렌과 한 방을 쓰게 된 네덜란드 남학생도 조사를 받았다. 그는 “바에서 돌아온 후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었다. 모텔에 투숙한 첫날은 아프리카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다른 방의 손님들이 시끄럽게 해서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이날은 조용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제시카와 함께 바에 남았던 카렌이 104호에 들어왔을 때 잠결에 눈만 떠보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카렌이 제시카와 함께 모텔로 돌아온 것은 3시에서 3시30분 사이였다고 말을 해, 그 시간쯤에 잠을 깼다가 다시 잠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시카와 늦게까지 함께 있었던 카렌에 대해서는 가장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다. 카렌은 다음과 같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N바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을 만나 가볍게 대화하다, 이 여성의 소개로 군인처럼 짧은 머리를 한 미국 남자 J와 어울려 춤을 추었다. 같이 바에 왔던 동료 교환학생 셋이 모텔로 돌아갈 때쯤 제시카는 J와 플로어에서 키스를 나누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J의 친구로 보이는 남미계 남자 N과도 춤을 추었다. 또 나는 군인처럼 보이는 V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V는 나에게 제주도에 함께 놀러가자며 키스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하고 모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제시카는 N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N은 나와 제시카에게 다른 클럽으로 가자고 말했으나 거절했다. 제시카가 J 등에게 모텔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제시카와 나는 새벽 3시15분쯤 N바를 나와 모텔로 갔는데 길모퉁이에서 나에게 제주도로 가자고 한 V와 마주쳐 ‘하이’하고 인사를 했다. 당시 제시카는 많이 취한 상태여서 부축을 하고 모텔에 돌아왔는데 그때 시간은 3시30분쯤이었다.
제시카를 103호로 데리고 들어가자 제시카는 샤워를 하고 싶다고 했다. 103호에는 잘 때 켜놓는 붉은 전구가 켜져 있었고 네덜란드 여학생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제시카를 위해 목욕탕에 불을 켜주고 제시카가 옷을 벗는 동안 샤워기를 틀어 주고 ‘Are you OK(괜찮아?)’라고 물었다. 그리고 제시카로부터 ‘I’m OK(괜찮아)’라는 대답을 듣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103호를 나올 때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104호에서 룸메이트인 네덜란드 남학생이 자고 있는 침대에 누웠으나 제시카가 걱정돼 다시 103호로 가 노크를 하고 방 밖에서 ‘아 유 오케이?’라고 묻자, 제시카가 방안에서 ‘아임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이때도 문을 열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103호 방문이 잠겨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침 8시쯤 103호에 있던 네덜란드 여학생이 ‘자기 방에 웬 시체가 있다’며 울부짖으며 달려와 제시카가 죽은 것을 알았다. 그런데 102호에 있었던 핀란드 여학생이 103호 쪽에서 ‘벗 유 아 나우 히어’라고 말하고 잠시 후 ‘렛츠 고’라는 남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용산서 강력반은 강력한 힘으로 제시카를 죽인 것은 남자일 것으로 추정했다. 바에서 제시카 등과 춤추고 놀았던 미군 중에서 누군가가 모텔로 돌아가는 이들을 따라가 범행을 저질렀거나, 모텔 투숙객이나 모텔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제시카를 죽였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고 이쪽으로 수사력을 집중했다.
한국군에서도 군인 범죄는 경찰이나 검찰이 아닌 헌병이나 중앙수사단이 수사한다. 마찬가지로 미군 범죄는 미군 헌병이나 CID가 수사해야 한다. 이것은 한미 SOFA(행정협정) 합의사항이기도 하다. N바에서 제시카와 어울렸던 미군으로 보이는 남자에 대한 수사는 CID가 담당했다. CID는 용케도 N바에서 제시카와 키스하며 춤췄던 J 등 미군을 찾아내 조사했으나 이들로부터는 살인과 관계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용산서는 모텔 주인과 모텔에 묵었던 손님들을 주로 조사했다. 그런데 모텔의 주인 남자가 “16일 이들이 왔을 때는 남자 셋에 여자 셋이었다. 이들은 남녀 한 쌍씩 방에 들어갔으며 다음날 젊은 여성이 와서 따로 한 방을 사용했다. 그런데 사고가 난 날 새벽 3시에서 3시30분 사이 170cm 정도의 키에 상의는 어두운 색, 하의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백인 남자가 모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의 바지 오른쪽 장딴지 부위에 피로 보이는 빨간색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날 아침 사고를 확인한 다음에 보니 세 명이던 남자가 두 명으로 줄어 있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주인 남자는 그후의 진술에서 “사실 나는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다 새벽 5시쯤 돌아왔다. ‘그때 처가 왜 안들어 오느냐’고 전화를 여러 번 걸어왔다. 3시쯤 피 묻은 바지 차림으로 모텔 밖으로 나간 백인 남자를 봤다고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였다. 아내는 15, 6년 전부터 심하게 놀라면 정신이 왔다갔다 하고 별소리를 다 하기 때문에 내가 보았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로 인해 모텔 여자 주인도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여주인은 아래와 같은 진술을 했다.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103호에서 백인 남자가 슬그머니 문을 닫고 나와 모텔 밖으로 나갔다. 103호에서 백인 남자가 나오는 것은 모텔에 있는 대형 거울을 통해 보았는데 나는 그 거울 앞으로 나갔다가 그 사람과 마주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바지에 뻘건 것이 묻어 있어, 나 혼자서 ‘바지에 피가 묻어 있나?’라고 중얼거렸었다.
이 남자의 키는 170∼175cm 정도로 외국인치고는 작았다. 몸매는 약간 통통했으며 안경은 쓰지 않았다. 윗옷은 엷은 색(밝은 색) 계통의 잠바를 입고 안에 체크 무늬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의는 베이지색 계통의 면바지였으며 신발은 황토색 랜드로버였다. 이 남자는 당일 우리 모텔에 투숙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CID 새 수사관의 추리
용산서의 조사결과 모텔 여주인이 새벽 3, 4시 사이 남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주인남자가 이 시간에 모텔에 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모텔 여주인이 말한 170∼175cm 키에 약간 통통한 백인 남자가 103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진술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용산서는 비슷한 체형의 백인 남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모텔의 다른 방에 투숙했던 남자와 이 모텔을 잘 아는 남자 등을 찾아 거짓말 탐지기 조사와 최면 검사까지 시도했으나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용산서와 CID가 제시카 살인범을 찾아 헤매는 동안 카렌을 포함해 모텔에 있던 학생들은 부모들이 날아와 본국으로 데려갔다. 수사는 갈피를 잡지 못해 영구미제 사건으로 묻혀가는 듯했다. 그해 8월쯤 CID의 담당 수사관이 교체되었다. 새로 온 CID의 마크 맨스필드 수사관은 2001년 11월쯤 카렌의 진술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카렌이 제시카를 103호의 욕실에 넣어 샤워를 하도록 해주고 104호로 갔다가, 제시카가 걱정돼 다시 103호 앞 복도에서 노크를 하고 문은 열지 않은 상태에서 ‘아 유 오케이?’라고 묻자, 욕실에 있던 제시카가 ‘아임 오케이’라고 했다는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103호 문이 닫힌 상태에서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사람과 문 밖의 복도에 있는 사람이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실험해보니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 카렌은 제시카가 목욕을 하도록 샤워기를 틀어주었다고 했는데, 샤워 물줄기를 맞았을 가능성이 높은 제시카의 옷이 젖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심스러웠다. 이어 그는 용산서에서 조사를 받고 K대 기숙사로 돌아갔던 카렌이 어머니가 와서 데려갈 때까지 3일 밤낮을 서럽게 울고 지새다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카렌을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2002년 2월초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FBI의 지원을 받아 2월4일 웨스트 버지니아주 헌팅턴시에 있는 R호텔에서 FBI 요원(한 명은 한국 지부장, 또 한 명은 거짓말 탐지기 수사관)과 함께 카렌을 불러내 사건 경위를 다시 물어보았다. 첫날은 카렌을 가볍게 조사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호텔로 나온 카렌을 상대로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사람과 방문 밖에 있는 사람은 대화하기 어렵다. 한국 경찰감식반의 조사에 따르면 욕실에서는 샤워기를 튼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이냐”고 캐묻고 현장을 찍은 비디오를 보여주었다고 한다(CID 수사관이 용산서에서 쓴 조서 근거. 이하 동일).
그러자 카렌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제시카를 죽였다는 말이죠”라고 소리치며 호텔방을 나갔다가 10여 초 만에 되돌아와 “어제 나와 이야기할 때부터 당신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죠”라고 한 후,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털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렌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다가 수사관들이 질문을 하면 조금씩 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카렌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위 조서에 CID 수사관 등이 받은 카렌의 진술서와 조서 종합).
“103호에 들어간 제시카는 네덜란드 여학생이 자고 있는지 확인한 후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윗도리를 벗어 브래지어 차림이 된 상태에서 내 손을 잡고 욕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옷을 벗고 나를 끌어당겨 키스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한 제시카를 위에서부터 애무해 내려왔다. 그러한 나를 제시카가 일으켜 내 바지를 벗기려고 하였다. 이때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손으로 제시카의 뺨을 때려 쓰러뜨렸다.
네 살 때 내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이 내 바지를 강제로 벗긴 적이 있는데 나는 그 기억을 아주 끔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오기 3개월 전인 2000년 12월 아버지가 ‘나는 동성애자다. 네 엄마를 떠나 남자 애인과 같이 살기로 했다’며 내게 말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때문에 나는 제시카와 동성애를 나누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동성애자라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화가 나 제시카를 쳤다. 나는 그녀가 내 아랫배에 손을 대지 않기를 바랐었다.
나는 쓰러진 제시카를 들고 욕실 밖으로 나오다 욕실 문턱에 걸려 제시카를 현관에 떨어뜨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제시카의 머리가 현관 바닥에 부딪친 것 같았다(제시카의 이빨이 발견된 곳인 듯). 나는 계속 화가 난 상태에서 제시카의 상체를 들어 방 쪽으로 조금 옮겨놓았다. 그런데 제시카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싫어 발을 들어 제시카가 더 이상 바라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밟고 찼다.
내 발이 무거웠다. 어둡고 깜깜하다…. 그리고 방바닥에 있던 제시카의 자켓으로 제시카의 얼굴을 덮고 나왔다. 네덜란드 여학생은 그때까지도 계속 자고 있었다.”
사건 후 네덜란드 여학생 찾아가
카렌은 사건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이 자기 집에 있으며, 사건 당시 그녀가 신었던 신발은 황동제 금속장구와 둥근 레이스가 달린 하이킹 스타일의 고동색 부츠 종류였다고 밝혔다. 수사관은 카렌의 동의하에 카렌의 집에서 격자 무늬의 짧은 소매 버튼업 셔츠와 흰색의 긴 소매 셔츠, 그리고 녹색의 작업복 스타일 바지를 찾아냈으나 부츠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이 옷에서는 혈흔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어 카렌은 “그후 나는 제시카와 함께 103호에 있었던 네덜란드 여학생 집을 찾아가 3주 정도 같이 생활하다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카렌은 민간인이기 때문에 CID는 수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카렌의 이야기를 함께 들은 FBI측이 이후 수사를 맡게 되었다. 제시카 사건은 한국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수사권은 사건 발생지인 한국에 있다. 때문에 카렌을 한국에 보낼 것인지를 놓고 재판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평결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으로 인도돼 용산서의 조사를 받게 된 카렌은 “나는 최면이 걸린 상태에서 유도신문에 걸려들었다”며 강력히 범행을 부인했다. 이때 경찰은 카렌의 신체에 대해 물었는데 카렌은 “키는 170cm, (현재) 몸무게는 91kg 정도이고 신발 사이즈는 260mm 정도”라고 대답했다. 피살된 제시카는 국과수 조사에서 키 167cm, 몸무게 54kg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범행을 부인한 카렌은 “주한미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미 국무성은 나를 범인으로 몰아 한국에 보냈다”는 이야기도 반복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밝혀진 제시카 사건에 관한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카렌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서부지청은 상해치사혐의로 카렌을 기소해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변호인이 미국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 다른 교환학생을 증인으로 신청하거나, 모텔 여주인이 본 170∼175cm의 키에 통통한 백인 남성에 관해 물고 늘어진다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카렌 사건 재판은 두 가지 관점에 유의해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카렌이 “최면상태에서 유도신문에 걸려든 것 같다. 나는 미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콜린 파월이 대신 보낸 희생양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과연 누가 제시카를 죽였는지를 분명히 가리는 부분이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사건을 맡았던 용산경찰서의 수사에 대해서는 적잖은 아쉬움이 남는다. 카렌이 진범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CID의 수사관이 한 것만큼의 날카로운 추리와 끈질김을 보여줬어야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동안 경찰 수사팀은 ‘미군 범죄는 제대로 수사가 되지 않는다’며 지레짐작을 하고 핵심을 짚어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외국인에 대한 수사를 잘못하면 외교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고 집요함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용산서는 FBI의 의견을 받아들여 카렌을 진범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카렌을 진범으로 보았다면 지금이라도 용산서는 제시카가 격렬한 타격을 받아자는 동안 과연 네덜란드 여학생이 쿨쿨 잠을 잘 수 있는지, 카렌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는 있는지, 카렌이 네덜란드 여학생 집을 찾아가 3주간 머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리고 다른 공범은 없었는지 등에 대해 끈기를 가지고 추적해야 한다.
두번째 관점은 법리적인 다툼이다. 카렌이 CID와 FBI 수사관 앞에서 한때 범행을 자백했다고 하나 지금은 이를 번복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법부는 피의자가 검찰에서 한 진술은 증거로 인정하나, 경찰에서 한 진술은 증거로 인정치 않아왔다. 따라서 다른 나라 수사기관원 앞에서 한 진술이나 자백을 과연 증거로 채택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은 카렌이 CID와 FBI 수사관 앞에서 한 진술을 빼고는 아무런 물증이 없는 상태다. 카렌이 범행시 입고 있었다는 옷에서는 혈흔이 나오지 않았고 신고 있었던 신발은 찾아내지도 못했다. 이렇게 직접증거가 없는데 과연 유죄가 선고될 것인가.
지난 2월26일 한국 대법원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치과의사 모녀 피살 혐의로 기소된 이모씨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미국 법원의 배심원들도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O. J. 심슨에 대해 비슷한 이유로 무죄를 평결한 바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카렌 재판은 직접증거가 약해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서부지원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그리고 제시카를 죽인 범인은 과연 카렌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