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의 PK(부산·경남)를 향한 구애가 절절하다.
- 청와대와 내각 등에 PK 인사들을 적극 기용하는가 하면 지방분권시대 개막을 공언함으로써 그 지역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노대통령에게 세 번이나 낙선의 아픔을 안겨 줬던 부산은 노대통령의 구애에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두 전 대통령도 개혁정권을 표방하며 정권을 출범시켰지만 노무현 정권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개혁과 갈등은 쌍생아다. 개혁의 수위가 높을수록 갈등도 심해진다. 그래서 본격적인 개혁정권을 표방한 노무현 정권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은 차라리 상식에 가깝다.
실제 노무현 정권 앞에는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 없는 민감한 개혁과제들이 놓여 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사회구성원간에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한 민감한 사안도 줄줄이 놓여 있다. 북핵문제와 경제위기, 검찰인사에 대한 현직 검사들의 반발, 곧 있을 언론개혁정책을 놓고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거대 언론사, 그리고 녹록치 않은 거대 야당까지, 당장 노무현호의 항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부 장애물은 벌써부터 해일처럼 덩치를 부풀려 노대통령을 향해 밀어닥치고 있다.
노무현호는 어디로 가는가. 그의 험한 항해를 안내해줄 등대는 없는가. 노무현 정권의 정책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좌표는 없는가.
PK 향한 유별난 애정 표현
정치권에서는 “노대통령의 눈이 부산·경남 지역을 향하고 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부산 민심을 잡기 위해 정책결정과 인사에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핵심인사들은 부산·경남이라는 지명을 빼고 “지방분권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굳이 부산이라는 특정 지역이 아닌, 30년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것이 참여정부 정책의 핵심 목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설명에도, 노무현 정권의 부산에 대한 유별난 애정표현을 숨길 수는 없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노 대통령은 두 차례 정치적 고향인 부산·경남을 찾았다. 한번은 김해 선영방문 목적으로, 또 한번은 부산에서 열린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토론회 인사말을 통해 노대통령은 “고향에 대해 마음이 남다르며 여러 가지 관심가는 것도 많다. 앞으로 지역과 고향을 위해 열심히 할테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토론회 분위기에 고무된 노대통령은 “5년간 확실하게 밀어드리겠다”는 ‘노무현다운’ 거침없는 표현도 써가며 참석자들을 즐겁게 했다.
청와대 비서관 인선에서도 노대통령은 부산 출신 측근들을 적극 기용해 요직에 앉혔다. 청와대 실세로 통하는 문재인 민정수석과 이호철 비서관은 노대통령 당선 전까지 부산을 연고로 활동해오던 토박이들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할 핵심 과제인 언론개혁의 핵심 기획라인도 부산 출신이 장악했다. 이해성 청와대 홍보수석과 조영동 국정홍보처장이 그 주인공. 여기에 대구 출신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까지 합세하면 영남 출신 3인방이 노무현 정권 언론개혁의 최선봉 역할을 맡은 셈이다.
부산·경남 출신은 내각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경남 남해 출신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의령 출신 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 마산 출신 허성관 해양수산부장관, 밀양 출신 박봉흠 기획예산처장관 등이 그들이다. 차관급에서도 외교부와 산자부 차관, 국정홍보처장 등 6개 자리가 PK 몫으로 돌아갔다. 김대중 정부에서 7.7%에 불과하던 PK 출신 장차관급 인사의 비율이 노무현 정부에서는 22.1%까지 올라갔다.
검사장급 이상 검찰인사에서도 부산·경남 출신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38명의 신임 검사장급 인사 가운데 PK 출신은 무려 12명. 이쯤 되자 설마 하며 말을 아끼던 사람들도 “이건 그야말로 PK 정권”이라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정가 주위에서는 DJ 정권은 ‘홍어회 정권’, 노무현 정권은 ‘아나고 정권’이라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하지만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를 통한 PK 지역에 대한 배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정 지역 인사를 편애한다는 느낌이 국민적 공감대로 형성될 경우, 통치권자에게는 독(毒)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민적 지지 속에 화려하게 출범했던 역대 문민정권이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빠진 것도 ‘아는 사람’만 가려 쓰는 지역편중 인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노무현 정권은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지역여론을 움직이고 통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난 2월26일 국회를 통과한 대북비밀송금사건 특검법의 거부권 행사 여부를 놓고 보름 동안 청와대가 보여온 절묘한 줄타기 처신이다. 김대중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특검법은 향후 남북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중요한 법안이다.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계승한다면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했어야 옳다. 하지만 한나라당 단독으로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부터 노대통령은 사실상 이를 방치함으로써 특검법 자체를 거부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특검을 통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자연스러운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인사는 나아가 대북송금사건 특검법은 “DJ와의 차별화를 이루면서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을 분열에 빠뜨리고, 민주당에도 변화를 몰고 와 마침내 노무현식 정계개편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대통령의 눈은 부산·경남을 향해 있으며 이곳에서 확고한 지지를 받는 데 정책의 우선순위가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차근차근 이 인사의 주장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특검법은 단순한 법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남북문제를 두고 크게 두 가지로 갈라져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간의 대북송금 자체가 불법이며 이로 인해 김정일 정권을 연명시켜 오늘날 북한 핵위기로까지 사태가 악화됐다는 시각과, 절차에 문제가 있다 해도 대북송금이 남북화해와 공존에 역할을 했던 만큼, 특검제를 통해 그 내막을 공개하고 관계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국론이 나뉠 정도인 만큼 정치권도 특검제를 두고 두 가지 의견으로 크게 대립하고 있다. 대북송금이 김대중 정권에서 이뤄진 사건이어서, 특검제에 대한 선호도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호불호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정리하자면 반(反)DJ 정서가 뿌리 깊은 영남과 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한나라당은 특검제를 선호하는 반면, 민주당은 애초부터 특검제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해서 특검제에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당론과 달리 대북송금사건은 특검으로 조사할 사안이 아니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국회에서 특검법을 통과시킬 때 반대의견을 던진 김부겸(金富謙) 의원 같은 이가 그 주인공이다. 어느 당이든 소수의견이 있을 수 있다. 첨예한 사안일수록 사소한 이견에도 조직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에 부메랑 된 특검법
특검법이 제정되고 특별검사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 한나라당 내 소수파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탈당 등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특검법은 한나라당이 제안한 법률이지만 부메랑처럼 한나라당의 분열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특검법은 민주당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구주류 의원들은 특검법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특히 호남 출신들은 지역 여론을 바탕으로 특검법에 강하게 반발해왔다.
하지만 비(非)호남 출신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특검법에 대한 반감이 약한 편이다. 중부권 출신 고위 인사는 한나라당 단독으로 특검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 “특검법 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다만 어떻게 하면 국익을 해치지 않을 것인지를 연구하는 게 더 올바른 자세”라며 “수도권과 중부권 우리 당 의원이라면 나와 생각이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 당 신주류 의원 다수는 말은 안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구주류인 정균환 총무가 당 전체 의견과 달리 구주류 자체 판단으로 한나라당과 특검제를 두고 협상을 벌여왔는데 이런 정총무의 처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여러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볼 때 특검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되기 오래전부터 특검 불가피론은 민주당 신주류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희태(朴熺太) 대표대행의 청와대 영수회담이 한창일 때, 노대통령의 386 핵심브레인 가운데 한 인사는 사석에서 “특검제를 수용하더라도 남북관계나 국내 정치문제 등에서 우리가 크게 손해볼 것은 없다”며 사실상 특검법 수용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인사는 “특검이 누구인가.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복수로 후보를 추천하지만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 아닌가.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대통령의 뜻에 반해 국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수사를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특검을 수용할 경우 민주당 내 갈등이 일겠지만 언젠가는 거쳐야 할 내부 진통 아니겠나. 이를 통해 정치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인사의 예상대로 지난 14일 노대통령은 특검법을 원안대로 수용함으로써 특검정국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정리하자면 특검법 정국은 노무현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는 위기가 아닌 기회였던 셈이다. 특검법 제정과정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당내 갈등은 노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동참할 우군세력을 선별하고 골라내는 과정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지난 2월초 미국으로 떠났던 이회창 전 총리의 돌연한 귀국도 화제였다.<br>그는 귀국 즉시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방문,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민주당의 부산지역 한 지구당 위원장은 “물론 특검법 제정으로 남북관계 훼손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의 대체적 분위기는 특검을 통해 대북송금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특검법을 원안대로 받아들인 배경에는 이런 PK정서에 사실상 편승함으로써 별다른 어려움 없이 DJ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쯤 되면 “노무현 정권의 정책 눈높이는 부산·경남에 맞춰져 있다”는 DJ측의 예민한 반응을 흘려들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이런 노력 덕분인지 실제 민주당 내부에서는 부산·경남의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어 내년 총선에서 기대할 만한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김택기(金宅起) 민주당 기조위원장은 “다음 총선에서 부산에서만 전체 17곳 가운데 6곳 이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정도는 해야 명실상부하게 부산에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위원장은 “현재 영도, 사상, 해운대 기장갑 등 3~4곳에서는 지역 여론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최인호 민주당 해운대 기장갑 지구당 위원장도 “분명히 대선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전까지도 민주당이 집권여당이었지만 우리 당을 찾아와 민원해결을 요구하는 지역구민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DJ 정권에 뭔가를 부탁한다는 게 정서상 꺼려졌던 거겠지요. 더군다나 정부 요직에 부산 출신이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선이 끝난 뒤 민원을 들고 당사를 찾아오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높아가는 기대감의 방증 아니겠습니까.”
최위원장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부산 시민은 30% 안쪽이었다. 65%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는데, 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30%는 최근 들어 중립화됐다고 본다. 오피니언 리더그룹은 요지부동이지만 밑으로 갈수록 여론은 노대통령 쪽으로 쏠리고 있는 느낌이다. 아직 표로 연결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는가 보자’며 노무현 정권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며 “이들을 적극적인 지지층으로 끌어낸다면 내년 총선 때 부산에서 3분의 1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는 게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라고 전망했다.
인물난 겪는 부산
하지만 내년 총선 때 부산·경남에서 바람을 일으키려면 현지에서 여론을 이끌 구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무현 같은 스타급 정치인이 당장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경남의 경우 지난해 도지사 출마 경험이 있는 김두관(金斗官) 행정자치부장관이 나설 경우 그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주당 지지 분위기를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부산에는 그만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약점이라는 지적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대통령도 적지않이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대통령이 부산·경남에 연고가 있는 정치인들을 찾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다.
한때 문화관광부장관 입각 예상자로 거론됐던 이철 정치사회개혁연대 대표의 경우, 노대통령 주변으로부터 끊임없이 부산 출마를 권유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표의 고향은 경남 진주. 이대표의 한 측근은 “당선자 시절 노대통령 주위에서 우회적으로 이대표처럼 전국적으로 알려진 정치인이 부산에서 나설 경우 충분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설령 낙선하더라도 노대통령이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겠느냐는 의사를 전달받았다. 자신처럼 지역감정의 벽을 깨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사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 노대통령의 기대라는 얘기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 고민을 하고 있으며 아직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인호 위원장은 “솔직히 유명한 인물은 없지만 젊고 개혁적인 부산의 인재들이 대거 나선다면 분명 반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거법 위반사건에 대한 사면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당장 노대통령과 오랜 동지인 김정길 전 의원이나 조성래 변호사 같은 분들이 나서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기서 질문 하나. 노대통령은 왜 이렇게 부산·경남에 집착하는 모습을 나타낼까. 이번 대선에서 90% 이상의 지지를 몰아준 호남의 화끈한 후원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정가 소식통들은 노대통령이 부산·경남의 지원에 사활을 걸만한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영남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해야만 민주당은 명실상부한 전국정당이 될 수 있다는 게 그 ‘공식적’인 이유다. 지역통합을 집권의 기치로 내건 노대통령 입장에서 고향에서 단 한 명의 현역의원도 얻지 못한다면 낯이 안 선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부산에 대한 집착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더욱 절실한 이유가 숨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YS와 DJ는 철저히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를 한 사람들이다. 현역 정치인 시절 이들도 무수한 실수와 잘못을 했지만 그럼에도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준 지역민들의 힘으로 버텨왔다. 그에 반해 노대통령은 지역기반이 취약하다. 20~30대라는 특정 세대의 지원은 받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는 지원을 보내주는 정치적 고향이라 할 만한 지역기반이 없는 점을 노대통령도 내심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부산·경남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민주당의 한 고위당직자도 “지난 대선 때 노대통령의 부산·경남에 대한 집착은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마신 데 대한 오기도 있었겠지만 노대통령의 집착에서 그런 오기 이상의 독기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노대통령에게 부산은 비원(悲願)의 도시다. 그를 오늘날의 정치인으로 키워준 곳도 부산이지만, 무수한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 곳도 부산이다. 노대통령은 부산에서만 세 번의 낙선을 경험했다. 1992년 13대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그리고 2000년 15대 총선이 그것이다.
14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낙선한 것까지 따지면 노대통령은 무려 네 차례 선거에서 물을 먹었다.
노대통령의 부산에 대한 집착과 오기에 가까운 도전의식을 보여준 사례는 지난 2000년 4·13총선 때 부산 북·강서 출마 강행이다.
당시 노대통령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산 출마를 선택했다. 서울 종로라는 노른자위 지역구를 내던진 초강수에는 측근들마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노대통령을 수행했던 최인호 위원장은 “출마를 앞두고 1년 가까이 수행했는데 노대통령이 쏟은 정성은 한마디로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노무현 반대파가 준 감사패
“북·강서을구는 부산에서도 가장 민감한 지역 현안이 집중된 곳이었습니다. 신항만 건설, 녹산공단 분양가 인하문제 등 굵직굵직한 현안이 6~7개나 몰려 있었습니다. 지역현안 해결을 요구하는 지역구민들의 민원의 강도도 대단했습니다. 노대통령은 반드시 이 문제들을 해결한다며 시청, 구청은 물론 관련 기관을 두루 다니고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정말 눈물겨울 만큼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낙선한 뒤 노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시민단체마저 그의 노력에 고맙다며 감사패를 전달할 정도였으니까요.”
2000년 총선에서의 패배로 그는 자발적 팬클럽인 ‘노사모’라는 소중한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부산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를 세 차례나 떨어뜨린 부산은 그 후로도 노대통령에게 몇 차례 더 정치적 부담과 고통을 안겨줬다.
2001년 11월, 노무현 후보는 사실상 대선 출정식이었던 무주 단합대회에서 “내가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어 2002년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부산·경남·울산 등 세 곳 가운데 한 곳에서라도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 후보를 반납하고 다시 경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번번이 그를 외면한 부산이지만 노무현은 다시 한번 PK의 선택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일종의 배수진(背水陣)이었던 셈인데, 이런 불퇴(不退)의 각오로 싸운 결과 국민경선으로 치러진 민주당 경선에서 노대통령은 노풍(盧風)이라는 거대한 바람을 앞세워 예상 밖으로 ‘간단하게’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6월 지방선거에서 부산은 다시 노무현을 외면했다. 부산·경남· 울산 세 곳 가운데 단 한 군데서도 광역단체장을 배출하지 못하면서 노대통령은 커다란 시련을 맞는다. 당 안팎에서 후보사퇴 요구가 거세게 일었고 지지율도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 1월30일, 부산을 방문한 노대통령이 현지 인사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정식으로 검토한 적은 없지만 노대통령 진영에서는 이 무렵, 노후보 자신이 부산의 한 선거구에 직접 나서 바람을 일으키는 극단처방이 거론될 정도였다. 그렇게라도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선후보로서의 입지에도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노대통령 진영에서는 노골적으로 그곳 출신인 노대통령을 밀어주지 않는 부산 민심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한여름, 노대통령이 구슬땀을 흘리며 지원유세를 펼쳤지만 결과는 완패였다. 부산·경남뿐 아니라 전국 13곳 가운데 광주 북갑과 전북 군산 등 호남 2곳을 제외한 11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패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맞은 대통령선거. 부산·경남은 단일후보로 ‘업그레이드’된 노무현 후보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선거 초반,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鄭夢準) 의원과 밀고 당기는 대결 끝에 단일후보가 되자 젊은층을 중심으로 부산의 여론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PK 지역의 노무현 지지를 절박하게 원한 것은 노대통령 본인만이 아니었다. 민주당의 선거전문가 치고 PK를 최대 승부처로 진단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곳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노대통령이 후보가 된 뒤 치른 두 번의 선거에서는 비록 참패했지만 부산 출신인 노후보가 직접 나서는 대선에서는 상황이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단일화 성사를 전후해, 민주당 선거캠프에서는 PK 지역에서의 노후보 득표 가능성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산·경남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이기기 어렵다는 관측도 힘을 얻기 시작했다.
기대에 못미친 득표율
11월8일, 그러니까 아직 단일후보의 윤곽이 드러나기 전, 민주당의 일선 선거 전략부서에서 작성한 ‘노(盧)후보의 PK 득표 가능성 분석’이라는 문건에는 “부산, 경남, 울산의 전체 유권자는 서울, 경기 다음으로 많은 570만명이다. 이곳에서 승리할 경우 선거 전체의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 최대의 승부처임이 분명하므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처럼 애타게 PK 공략을 외쳤지만 성과는 기대에 못미쳤다. 부산에서 노대통령이 얻은 표는 58만7000여 표, 29.9%의 지지율이었다. 경남에서는 43만4000여 표로 지지율은 27%, 울산에서는 앞서 두 곳보다 높은 17만8000여 표에 지지율은 35.3%였다. 세 곳을 합쳐 PK 지역에서 노대통령 지지율은 대략 28%였다.
인근 대구·경북의 지지율(대구 18.7%, 경북 21.7%)보다는 높았지만 노대통령과 민주당이 부산·경남에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DJ당의 후보로 출마했던 앞선 세 차례 선거에서 30%대 중반의 지지율을 얻은 것과 비교해도 이번 대선에서 PK는 분명 노대통령의 연고지다운 표를 몰아주지 못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지 않을까. 1988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원을 입어 13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후 한번도 영광의 월계관을 선사하지 않은 부산에 대통령이 된 지금 새삼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건 과욕 아닐까. 현행 대통령제 하에서 노대통령이 다시 부산에서 선거에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신에게 표를 주지 않은 부산에 대한 짝사랑을 거둬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대통령 당선증을 거머쥐자마자 노대통령은 다시 부산으로 눈을 돌렸다. 부산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여러 차례 나타냈고, 부산·경남 출신 인사들을 가까이 두고 요직에 앉히는 등 인사에서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관심을 끄는 것은 부산·경남에 대한 배려나 관심과 달리 대구·경북에서는 눈에 띌 정도로 노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새 정부 출범 직전에 터진 대구지하철 참사도 한 원인이었지만 대구·경북이 여전히 노무현 정권에 대해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게 결정적 이유라는 게 여권 인사들의 분석이다.
대구·경북의 ‘굳은 민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역설적으로 이회창(李會昌) 전 한나라당총재의 귀국과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 방문이다.
지난 2월7일 미국으로 출국한 이회창 전 총재가 3월5일 돌연 귀국했다. 이 전 총재는 도착하자마 곧장 대구로 달려가 분향소를 찾아 참배하고 참사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전 총재는 이날의 공식행사를 끝으로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켰다. 당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 중진들은 이 전 총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느닷없는 ‘창심논쟁’에 한나라당은 물론 정치권 전체가 뒤숭숭했다.
이 전 총재의 귀국 이유는 2개월짜리 단기비자를 장기로 갱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더라도 왜 하필 전당대회를 앞둔 지금 돌아왔느냐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액면 그대로 봐달라. 정말 비자 갱신을 위해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대구를 가장 먼저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 전 총재는 지난 대선 때 가장 열렬히 도와준 대구·경북에 대해 마음속으로 강한 부채감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사고 소식을 듣고 며칠을 안타까워하며 잠도 못 잤을 정도였다고 한다. 비자 연장도 급했지만 한시라도 늦기 전에 대구를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귀국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귀국 일정을 앞당겨 달려올 만큼 이 전 총재가 강한 애정과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곧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그만큼 난공불락의 지대였다는 얘기도 된다. 아무튼 이 전 총재가 분향소에 나타나자 그를 반기는 사람들로 분향소는 한동안 술렁였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이상하게 같은 영남이지만 대구·경북에 진출하기가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부산·경남처럼 노대통령의 직접적인 출신지역이 아니라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TK의 두터운 벽은 난공불락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앞서 DJ정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DJ정권도 집권 초부터 이른바 ‘동진(東進)정책’이라는 것을 실행했습니다. 동진의 방향은 대구·경북지역이었습니다. 김중권(金重權)씨를 비서실장에 기용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집권 초반 그렇게 공을 들였지만 TK는 DJ를 외면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TK 출신 인사에게 이력을 만들어주고 공천을 줘 내려보낸다고 해서 당선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겁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지역에 뿌리박고 사는 현지인을 적극 발굴해 요직에 기용했다면 사정이 달랐을 겁니다.”
이 인사는 노무현 정권은 DJ 정권의 실패한 동진정책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 수석과 이호철 비서관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노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이들은 순수한 부산사람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주위사람들과 더불어 DJ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랏일을 걱정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산 시민 입장에서 이웃사람이 요직에 기용돼 TV에 얼굴이 나오니까 ‘이게 우리 정권이구나’하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겁니다. 진정한 동진정책은 이런 것인데 DJ 정권은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망향가는 언제 끝날까
노무현 정권의 PK 민심 공략은 이제 막 시작됐다. 1차적 노력의 결과는 내년 4월 총선에서 나타날 것이다. 과연 노대통령과 민주당은 부산·경남에 확고한 정치적 뿌리를 내릴 것인가. 현재까지는 순조롭다는 게 중앙과 현지 민주당 인사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하지만 DJ 정권 5년 동안 막혀 있던 PK 민심을 민주당으로 돌리려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최인호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는 게 지역의 정서입니다. 부산·경남에 개혁적이고 참신한 인사를 공천하면 될 것이라는 주장에도 찬성할 수 없습니다. 호남은 그대로인데 PK만 변한다고 우리에게 표를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민주당의 구태의연한 호남 인사들에 대한 물갈이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산 사람들은 진심으로 민주당을 신뢰하고 표를 줄 것입니다.”
청와대 입성을 앞둔 지난 1월말 노대통령은 명륜동 자택을 매각했다. 노대통령 부부가 청와대로 들어가는데다 장남 건호씨는 전셋집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고 딸 정연씨도 2월초 결혼하는 마당에 덩그러니 빈집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는 게 매각의 이유. 그 무렵 노대통령은 공사석에서 “퇴임하면 고향인 경남이나 부산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퇴임 후 지방으로 가 살겠다는 대통령도 노대통령이 처음이다. 목적지도 부산이다. 퇴임 후 실제 부산·경남 어딘가로 내려가 산다면 이 역시 새로운 전례가 될 것이다. 과연 부산을 향한 노무현 대통령의 애타는 망향가(望鄕歌)는 언제 끝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