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권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 참여연대. 9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해온
- 이들의 원동력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인권변호사와 진보적 사회학자,
- 학생운동 출신 상근자들이 모여 시너지 효과와 긴장관계를
- 유지해온 ‘파워그룹’ 참여연대의 실체를 알아본다.
열흘 뒤인 3월4일 두산은 “3월21일 열릴 주주총회에서 자사 출신을 사외이사진에서 완전 배제하고 대신 외부 전문가 5명을 후보로 상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참여연대가 성명서를 통해 총수 일가와 계열사 임원 출신이 대부분인 현 이사진을 유지하겠다는 두산의 주총 안건에 대해 비판하고 나선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SK그룹에 대해 급작스런 수사에 나선 검찰이 “이번 수사는 지난 1월 참여연대의 고발조치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한 이후 ‘참여연대의 힘’에 새삼 세간의 눈이 쏠리고 있다. 이어 2월24일 “SK수사가 끝나는 대로 참여연대가 분식회계 혐의로 고발한 바 있는 한화그룹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겠다”는 검찰 발표가 잇따르자 삼성, LG 등 참여연대가 이미 고소했거나 민사소송을 제기한 바 있는 재벌기업 정보팀의 안테나는 온통 참여연대를 향해 치솟았다. 올해로 창립 9주년을 맞는 참여연대가 ‘신(新)권력’의 자리에 올랐음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총선연대활동,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성장한 참여연대. 그러나 참여연대를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모였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참여연대의 사업과 활동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제부터 그 궁금증을 하나씩 해결해보기로 하자.
갈 곳 모르던 풋내기 직장인들
1993년 봄, 대학을 갓 졸업한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던 386세대 직장인 120여 명이 모였다. 광고회사, 증권회사, 언론사 등에 몸담고 있던 이들을 움직인 것은 ‘변화된 시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의무감’이었다. 대학 재학중에 학내 서클과 학생운동조직 등을 통해 알음알이로 연결돼 있었던 82학번에서 86학번 사이의 이 젊은 사회인들은 서울 연남동에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 연합(이하 참사연)’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을 열었다. 이후 이들은 문화예술, 과학기술민주화, 경제문제연구 등 다섯 개의 분과를 두고 매주 세미나를 열었다.
김기식, 이태호, 김민영 등 당시 참사연을 주도했던 멤버들 중 상당수는 서울대 문과대와 학내 운동조직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특정학교, 특정서클과 연결짓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말했지만, 초기 참사연 멤버 중 한 사람은 “이들이 참사연 분위기를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총학생회 임원 등 학생운동으로 대학시절을 보낸 후 세상에 나온 이들에게 1990년대 초반은 혼돈의 시기였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이념적 혼란은 가중됐고 기존 민중운동이나 경실련으로 대표되는 시민운동 또한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은 당시 약관 스물일곱 살이었던 김기식 사무국장. 재학중에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1987년부터 인천의 한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91년 무렵부터 ‘대안적 시민운동’을 고민하고 있던 그가 포섭(?) 대상으로 염두에 두었던 인물은 당시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근태씨.
1993년 5월 김기식씨는 20페이지짜리 제안서를 들고 서너 차례 김근태 위원장을 만났지만 “이제는 정치인의 길을 가겠다”는 김위원장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이후 김위원장은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상임지도위원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자리를 잡았고, 김기식 처장은 동료·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운동단체를 만들기 위한 과도기 조직으로 참사연을 결성한다. 참사연이 세미나를 위주로 하는 연구모임에 가까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함께 새 시민운동조직을 만들 사람을 찾고 있던 이들 참사연 멤버들은 1993년 11월 ‘역사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던 김동춘 현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를 통해 두 명의 인물을 소개받는다. 한 사람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다른 한 사람은 박원순 변호사였다. 장차 참여연대를 구성하는 세 축이 처음 만나게 된 시점이었다.
1980년대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변혁론 논쟁을 주도했던 조희연 교수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와 학술단체협의회 등에서 진보적 학자그룹과 함께 새로운 지식인 운동의 방향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김호기, 김대환, 박호성, 유팔무 등 장차 참여연대 학자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논의에 동참했다.
한편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 연구’ 등을 저술한 박원순 변호사는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해외에서 살펴본 시민운동의 형태를 한국에서도 적용해보고 싶다는 의욕에, 변호사가 단지 법률적 자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운동가가 되어 활동하는 적극적인 사회참여방식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안경환, 박은정, 한인섭 등 비판적 법학자 그룹이 함께했다.
마지막으로 초기 논의과정에 참여했던 이들로 김중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을 비롯한 언론인 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논의과정에서 김중배 전 사장을 제외한 이들 그룹은 새 단체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고 있던 세 그룹은 급속히 의기투합했다. 이듬해인 1994년 1월부터 5월까지 수십 차례의 회의와 토론을 거쳐 새로운 단체 결성을 논의하던 세 그룹 구성원 20여 명은 그해 봄 불암산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밤샘워크숍에서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확정한다. 참여연대 구성원들은 이 워크숍을 ‘참여연대 출발의 결정적 계기’로 회고하곤 한다. 이후 7월 준비위원회를 거쳐 9월 용산역 앞 홍등가 근처의 허름한 건물에서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긴 이름의 단체가 출범한다.
같이 조직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출신과 배경이 각기 다른 세 그룹의 비전과 밑그림은 조금씩 편차가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가 이른바 ‘명칭 논쟁’. 사전 논의를 거쳐 ‘참여(민주주의)’ ‘인권’ ‘시민’이라는 키워드가 남았지만 각 그룹별로 의미와 강조하고 싶은 바가 달랐다.
진보적 사회과학자 그룹은 명칭 속에 ‘참여민주사회’와 ‘시민’의 개념을 넣자고 주장했지만 인권변호사 그룹은 ‘시민’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신 ‘인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섰다. 학자 그룹은 ‘인권’이 고문이나 의문사 같은 말을 연상시켜 운동의 범위를 좁힐 거라는 우려를, 변호사들은 ‘시민’이란 단어가 기존의 다른 단체나 반사이익을 노리는 집단에 의해 남용되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아무도 기억 못하는 긴 이름
의견이 팽팽히 맞서다 보니 모두가 만족하는 명칭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논란의 결정판은 1994년 7월 종로성당에서의 밤샘토론. 긴 밤을 꼬박 새우고 나온 결론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복잡한 이름이었다. “만든 이들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 긴 명칭은 이후 ‘참여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참여민주사회 시민연대’로 변경되었다가 1999년 5차 총회에서 당초에는 약칭이었던 ‘참여연대’로 확정됐다.
단체의 정체성을 둘러싼 세 그룹의 고민은 ‘인권운동사랑방’을 둘러싼 진통에서도 드러났다. 당초 참여연대는 이미 창립 2년을 넘긴 인권단체 인권운동사랑방과 통합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실제로 인권운동사랑방은 참여연대 창립 당시 다섯 개 전문센터 가운데 하나로 편성됐다가 3개월 만에 독립단체로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참여연대가 ‘권력감시’ 차원에서 인권을 생각했다면, 인권운동사랑방은 ‘피해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인권을 바라보는 데 따른 괴리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참사연 내부에서도 교수 및 법률가들과 함께 단체를 만드는 데 이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참사연 회원 중 상당수는 참여연대 창립 이후 시민위원회 회원으로 참여했지만 3분의 1 가량은 동참하지 않았다. “기존의 시민단체처럼 젊은 상근자들이 전문가 그룹의 손발 역할밖에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초기 참여연대의 구성을 살펴보면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몇 가지 장치를 확인할 수 있다. 세 그룹의 편차를 고려하면서도 어느 한 그룹이 완전히 의사결정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여러 측면을 고려했던 것. 제1기 참여연대 집행부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언론인 그룹에서 유일하게 참여한 김중배 전 사장이 공동대표를 맡았고 사회과학자 그룹의 리더였던 조희연 교수가 비상근 사무처장을, 박원순 변호사가 집행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기획부장이 된 김기식씨를 비롯해 참사연 주도 멤버들은 상근자로 자리를 잡았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학자 그룹은 주로 정책위원회 등의 위원으로, 변호사 그룹은 사법감시센터와 공익소송센터에서, 상근자들은 사무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상근자들은 사무처에서의 직책 이외에 각 위원회 및 센터의 간사도 함께 맡았다. 이를 통해 이들은 ‘사무’에 매몰되는 대신 일주일에 1~2일 출근하는 비상근 임원과 똑같은 권한을 갖고 각 센터별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했다. 당시 의정감시센터 간사를 맡고 있던 박원석씨(현재 휴직 중)는 초창기 참여연대 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서울시 의회 의정평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업 자체를 결정한 것 역시 상근자와 임원의 토론에 따른 것이었고 이후 사업방향이나 방식 또한 철저히 회의를 거쳐 결정했습니다. 당시 참여연대에는 누군가 혼자 결정을 내리거나 먼저 치고 나가는 것에 대해 경계의 분위기가 강했거든요. 임원이든 상근자든 그런 조짐이 보이면 다른 구성원들의 지적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 장윤선 편집장은 “이는 참여연대 내부에 ‘기존 시민운동 조직에서 흔히 나타나곤 했던 임원들의 독선과 상근자의 소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묵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의사결정방식에 있어 이렇듯 ‘엄격한 평등’을 추구한 것은 참여연대라는 조직 자체가 한두 명 명망가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세 그룹의 ‘연대’로 만들어진 까닭이라는 것이다. 당시 만들어진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참여연대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초창기 참여연대의 슬로건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우선 보수·중산층적 시민운동에 대립하는 진보적 시민운동, 대안이 있는 정책적 시민운동, 법적 절차를 이용한 시민운동, 정권의 성격에 상관없는 종합적 권력감시운동, 인권운동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사법감시와 공익소송, 입법청원 등 법률과 관계된 분야였다. ‘집회와 항의 대신 법적으로 보장된 절차를 활용한다’는 운동방식은 일종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미 경실련이 선보인 기법이었지만 참여연대의 방식은 보다 적극적이었다.
여기에는 본업인 변호사 업무를 접고 1995년부터 상근 사무처장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를 비롯한 인권변호사 그룹의 역할이 컸다. 이들의 활동으로 법률을 활용한 여러 가지 운동방식이 다양하게 선보였고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5년 8월 논란이 거세던 5·18 관련 전직 대통령 처벌문제에 대해 단순한 항의시위나 집회에 그치지 않고 ‘5·18 관련 특별검사제 도입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 그 한 예다.
이후 참여연대라는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남긴 계기가 된 소액주주운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여연대 연구팀의 홍일표 팀장은 “재벌개혁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소액주주의 권리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주식투자자의 법적권리를 이용하면 재벌의 문제점을 상당부분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법률적 지식과 경영학 지식, 여기에 젊은 간사들의 실행력이 결합한 시너지 효과였다는 분석이다.
소액주주운동을 이끈 장하성 고려대 교수 등 경영·경제학자 그룹은 1995년 6월 무렵부터 참여연대에 합류했다. 1997년 가을 열린 ‘삼성그룹 주식 변칙증여에 관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찾아온 기자들이 거의 없어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던 장교수(당시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는 불과 수개월 후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같은 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하면서 ‘주총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여러 그룹의 결합이 항상 긍정적 효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경제민주화위원회의 주축을 이룬 장하성, 김상조 등 경영·경제학자 그룹과 비판적 사회과학자 그룹 사이의 논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몇몇 사회과학자들은 “결국 ‘건전한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인 소액주주운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할 참여연대 운동과 맞지 않는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경영·경제학자 그룹은 “IMF 경제위기를 야기한 한국 경제의 문제는 건전한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를 개혁하자는 운동이 어떻게 개량이냐”고 맞받았다. 논란은 참여연대를 벗어나 외부 사회과학 계간지와 학계에까지 번져나갔고, 결국 정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김대환 인하대 교수 등이 참여연대를 떠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후 2000년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한국시민운동 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는 등 ‘믿기지 않는 상승곡선’을 그리던 참여연대는 그해 가을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또 한차례 내부격론을 벌인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의사폐업 사태에 대한 이 논란은 참여연대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 사례다.
당초 참여연대는 1999년 3월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의약분업제도의 도입을 주장해왔고, 같은 해 6월에는 보건복지부가 만든 ‘의약분업실행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의약분업 시행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0년 7월 이후 제도실행과정에서 ‘의사 집단폐업’이라는 돌발변수가 튀어나와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더욱이 시민단체들 중 일부가 홍보비 명목으로 보건복지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민단체는 정권의 홍위병’이라는 의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시행 이후에도 ‘개혁통신’을 발행하며 의약분업 지지 의사를 강도 높게 표출해왔던 참여연대 집행부의 생각도 엇갈렸다.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박원순 당시 사무처장을 비롯한 전문가 그룹과 김기식 당시 정책실장 및 사회복지위원회. 김기식 실장이 “애초의 의약분업안은 의사들의 이기주의와 이에 굴복한 정부에 의해 왜곡됐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은 그 부작용인 만큼 더욱 강도 높게 개입해 의사들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박원순 사무처장은 “사회적 반발이 심하고 부작용이 발생한 만큼 운동방향을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매일 열리다시피 한 간부회의에서도 의견 차이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당시 회의과정에 참여했던 한 간사는 “총선연대 활동을 통해 참여연대의 얼굴로 떠오른 두 사람이 그렇듯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은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실장의 ‘직선적 성격’과 박처장의 ‘현실감각’이 맞부딪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만큼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고 전한다. 결국 참여연대는 의사들과의 맞대결 대신 정부의 수가인상 등에 대한 비판으로 방향을 잡는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기식 현 사무처장은 “배경과 지식, 걸어온 길이 다른 그룹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어떻게 이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꼭 의약분업이 아니더라도 내부적으로 많은 이견이 있었고 그 조정과정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은 토론을 통해 합일된 의견을 만들어왔다”고 회고했다.
공중전과 지상전
한편 지난 9년 동안 유지돼온 세 그룹간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3월 열린 8차 총회에서 7년 동안 사무처장을 맡아 명실상부한 ‘리더’역할을 해온 박원순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상근자 그룹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김기식, 박영선씨가 공동사무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두 처장은 각각 사업분야와 운영분야를 나누어 담당하고 있다.
이로써 참여연대 초기부터 활동해온 ‘10년차 상근자 그룹’이 전면에 부상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전략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고육책에 가까웠다고 내부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는 사무처장 교체 과정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사무처장 교체의 계기는 박원순 변호사의 ‘공중전 지상전’론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고 토로해왔지만 “대안이 없다”는 구성원들의 의견에 밀려 사무처장 자리를 유지해오던 박원순 변호사는 2000년 9월부터 3개월간 일본 시민단체들을 둘러보고 온다. 이를 통해 ‘풀뿌리 지역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 박변호사는 “이제까지 한국의 시민운동이 정치, 경제 등 대형이슈만 상대하는 공중전이었다면, 이제는 시민생활에 뿌리박은 지상전이 필요하다”는 논지로 새로운 운동방식을 제안한다.
참여연대 대안사업팀과 재단법인 ‘아름다운 가게’를 중심으로 기부 및 자원봉사 활성화를 추구하겠다는 박변호사의 구상은 그러나 상근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참여연대의 내부역량이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부에서는 ‘사업추진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박변호사의 독선’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고 한 간사는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계속되는 토론에도 상근자들의 의견이 달라지지 않자 박변호사는 “그렇다면 밖에 나가서 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참여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박변호사의 퇴진 결심이 알려지자 “그렇다면 나도 회원을 탈퇴하겠다”는 전화가 줄을 이었다. 상근자들 또한 “2년 뒤인 10주년까지만 남아달라”며 붙잡자, 박변호사는 결국 완전퇴진 대신 ‘상임집행위원장’ 자리를 새로 만들어 2선에서 대외적으로 참여연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박원순 변호사의 강력한 리더십을 대체할 인물이 총회를 20여 일 앞둔 지난해 2월 중순까지 선뜻 떠오르지 않자 고심 끝에 선택한 카드가 김기식-박영선으로 대표되는 10년차 그룹의 ‘조기 부상’이었다. 외형상 처장은 두 사람이 맡지만 실제로는 박원순 변호사가 감당하던 책임을 10년차 그룹이 골고루 떠맡는 방식이었다. 당시 김처장은 1월부터 안식휴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었고 박영선 처장은 잠시 휴직한 채 영국에서 머물던 참이었다.
이미 초기부터 함께해온 사회과학자 그룹은 정책실무보다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 역할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결국 참여연대 출범 당시의 구성원들 가운데 제자리에 그대로 남은 것은 10년차 그룹뿐. 그러나 김기식 처장은 “상근자 그룹이 모든 것을 다하는 것처럼 보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변호사 그룹이나 학자 그룹이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반면 상근자 그룹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외견상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협동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하승수·장유식 변호사, 경제개혁센터의 김주영·김선웅 변호사,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사법감시센터 소장), 김우찬 한국개발연구원 교수(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 등이 변호사 및 학자 그룹의 대표적인 2세대들이다. 예전에는 10~20년씩 차이가 나던 전문가 그룹과 상근자 그룹의 연령차는 최근 가속화된 세대교체로 인해 거의 사라졌다. 최근 참여연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참여연대 사무처에는 모두 9개의 국·팀이 있고, 활동기구에도 9개의 센터와 위원회, 본부가 있다(표 1 참조). 임원단과 부설기구, 회원모임 등을 포함하면 창립 당시의 조직(표 2 참조)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출범 당시 13명이었던 상근 활동가는 ‘참여연대의 도약기’라 불리는 1997년 이후 엄청나게 늘어 현재는 51명이다.
회의도 상당히 많다. 출범 당시 함께 일했던 인권운동사랑방의 한 간사가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적응이 안 됐다”고 회고할 정도다.
정관상 참여연대의 최고 의결기구인 총회와 상설 의결기구인 운영위원회, 조직구성·인사운영·예산편성 및 집행 등 핵심적인 기능을 맡는다고 돼 있는 집행위원회는 사실상 형식적인 기구에 가깝다. 실제로 사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인사를 담당하는 최고권력기구는 공동대표, 운영위원장단, 사무처장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임집행위원회다. 박원순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상당한 결정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회의, 회의, 또 회의
그러나 실제로 참여연대의 사업과 활동에 관한 대부분의 권한은 위원회와 센터 등 각 활동기구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고 예산도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이는 각 활동기구가 임원단의 하부조직 역할에 그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초기부터 고안된 제도. 사무처장 교체로 10년차 상근자들의 ‘공동책임’이 커짐에 따라 활동기구별 자율성은 더 강화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에 따라 기본적인 사업 구상은 대개 사무처 소속인 동시에 각 활동기구를 담당하고 있는 상근 활동가들에게서 나온다. 다음해에 추진할 사업계획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 역시 이들 상근자 그룹의 몫이다. 10년차 그룹이 맡고 있는 역할이 바로 이 부분. 물론 이를 위해 상근자들은 교수나 변호사 그룹이 맡고 있는 각 활동기구의 대표나 실행위원들과 충분한 토의를 거친다. 이 사업계획은 상임집행위원회와 운영위원회, 총회를 거쳐 수정·보완되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활동기구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매일 숨가쁘게 상황이 바뀌는 현장에서 사업계획서만 갖고 실무를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특히 참여연대 사업의 상당수는 단기간에 결정되고 시행되는 ‘게릴라식 사업’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각 활동기구의 위원장과 실행위원, 상근활동가가 갖는 정기회의가 현안에 대한 대응방안을 결정한다. 주요하거나 긴급한 현안일 경우에는 정책실장과 사무처장이 활동기구의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참여연대 간사들이 가장 중요한 회의로 손꼽는 것은 각 실·국장들과 사무처장단이 수시로 개최하는 간부회의다. 참여연대의 야전사령부 격인 이 회의를 통해 각 활동기구별 현안을 점검하고 겹치거나 충돌하는 사업이 없는지 확인한다. 사회복지위원회의 ‘복지세 신설운동’ 아이디어가 ‘간접세 최소화’를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납세자운동본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 한 사례. 회의에 참석하는 10년차 그룹들은 대학시절처럼 직함 대신 ‘XXX형’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한다.
이외에도 2000년 총선연대 준비과정에서 정례화된 평간사회의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간부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평간사들이 한 달에 한 번 가량 모두 모여 주요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필요한 경우에는 간부회의에 참석하는 실·국장과 사무처장들까지 함께하는 전체간사회의로 확대되기도 한다. 참여연대 사업의 큰 방향이나 정치적인 문제, 혹은 조직 자체에 이슈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간사들의 생각과 견해를 모으는 구실을 한다.조직 비대화, 해결책은 ‘해체(?)’뿐
참여연대는 각 활동기구 명의로 발표되는 성명서 한 장을 작성하는 경우에도 소속 운영위원들에게 문구 하나까지 확인받는 절차를 거친다. 복잡다단한 회의체계와 함께 이 또한 상근자 그룹과 전문가 그룹 중 어느 한쪽에 힘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한 시스템이다. 이렇듯 지겨울 정도로 관계자 전원을 의사결정에 참여시키는 복잡한 시스템임에도, 조직이 방대해짐에 따라 예전에 없던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일부 간사들은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보의 유통’ 문제. 어느 팀이 무슨 일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 참여연대 전체의 사업내역을 구석구석 알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사무처장뿐이다. 각 팀에 주어진 자율적인 결정권과 사업권은 정보 공유를 막는 부작용도 갖고 있다는 것.
한 간사는 “1997년 이른바 ‘경실련 비디오테이프 사건’도 관련된 정보를 몇몇 인사들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터져나온 문제였다. 지금의 참여연대가 그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정보의 흐름은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도 그만큼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기식 사무처장 또한 본질적으로 “늘 시간에 쫓기다 보니 간부회의의 경우에도 각 활동기구의 모든 사안을 논의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과연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태호 정책실장의 설명이다.
“참여연대의 초기목표 가운데 하나는 역설적으로 ‘발전적 해체’였습니다. 당분간은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하며 모든 주요 이슈에 대해 ‘백화점식 운동’을 펼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상황이 무르익으면 각 활동기구별로 분리 독립해야 할 것이라는 아이디어였죠.”
실제로 외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의 부당행위를 감시하던 ‘해외진출기업문제 특별위원회’는 국제인권센터를 거쳐 1999년 ‘국제민주연대’라는 별도의 단체로 떨어져나갔다. 이태호 정책실장은 “아직 완전한 ‘해체’를 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뒷받침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도 역량을 갖춘 활동기구는 계속 독립시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참여사회’ 장윤선 편집장은 “조직의 비대화에 따른 문제는 각 기구가 독립해나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참여연대 초기부터 활동하고 있는 10년차 상근자는 대략 10여 명. 김기식(서울대 인류학과 85학번), 박영선(숙명여대 영문학과 84학번) 두 사무처장을 비롯해 이태호 정책실장(서울대 서양사학과 86학번), 이승희 기획실장(서울대 언어학과 87학번), 박원석 전 시민권리국장(휴직 중·동국대 사회학과 88학번), 김민영 시민감시국장(서울대 인류학과 86학번), 문혜진 사회인권팀장(연세대 생물학과 89학번), 장윤선 컨텐츠팀장(청주대 사회학과 89학번), 이샛별 사이버운영팀장(상명여대 사학과 88학번) 등이다. 이들 중 김기식 처장과 문혜진 팀장은 지난 1997년, 이태호 실장과 이승희 실장은 2001년 결혼했다.
20대의 나이에 시민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9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전화 한 통화로 재벌 기업들을 떨게 만드는’ 30대 중후반의 국장급 활동가가 되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참여연대의 성장사는 이들 10년차 그룹의 성장과 그대로 맞물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참여연대의 활동과 사업을 이끌어온 김기식 체제의 리더십을 전임자인 박원순 변호사의 그것과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한 운영위원은 “박변호사는 친하지 않은 한나라당 사람들과도 만나 청원한 법안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김기식 처장에게는 아직 그런 ‘정치력’이 없다. 물론 박변호사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0년차 그룹도 앞으로 많이 자랄 것”이라고 평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됐다는 부담. 이는 10년차 그룹 전체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상이다. 김기식 사무처장은 지난해 2월 처장직을 맡으라고 설득하기 위해 박상증 공동대표와 평간사들이 찾아왔을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속에 이들이 안고 있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솔직히 맡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박대표님에게 ‘저보고 죽으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되물었어요. 이제 제 나이 서른일곱입니다. 박변호사님만큼 사무처장직에 오래 머문다 해도 40대 중반이면 끝납니다. 그 뒤에 뭘 하겠습니까.
박대표님이 단도직입적으로 ‘죽으라는 말 맞다’고 하시더군요. 조직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다면 만든 사람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이셨죠. 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김호기 교수는 “그들 개인뿐 아니라 참여연대라는 조직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 고민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열심히 달려왔고 ‘운때’가 맞아 비약적인 성장을 거뒀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기대 이상의 것을 달성하고 보니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고민이 부족했다는 이야기였다. 박원순 변호사로 대표되는 ‘1기 참여연대’가 그랬던 것처럼 10년차 그룹이 주축을 이루는 ‘2기 참여연대’도 계속 오르막길만 걸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지금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10년차 그룹 다음을 맡아줄 상근자들을 키워내야 하고, 부패방지법, 기초생활보장법처럼 이미 정부가 수용한 개혁과제를 넘어서는 정책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 항상 받아온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지적을 극복할 수 있도록 상향식 조직구조도 만들어야 하고요. 앞으로 1~2년간 이 과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참여연대 미래의 관건입니다. 그 열쇠를 10년차 그룹이 쥐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