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386 참모들, ‘盧心’이용하면 곧 비판 받게 될 것”

노무현 대통령 향한 김근태 의원의 쓴소리

  • 글: 엄상현 gangpen@donga.com

    입력2003-03-26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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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노갑 정계 복귀는 바람직하지 않아
    • 노무현에게 협력하는 것이 유리해 부당한 비난과 비판도 참는다
    • 신주류 개혁파 ‘당 개혁안’은 미완성품, “한 발 더 나아갔어야”
    • 한화갑 탈당설, 노무현 신당설의 진실
    “386 참모들, ‘盧心’이용하면 곧 비판 받게 될 것”
    영원한 동지는 없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다시 내일의 동지가 된다. ‘선거’라는 권력투쟁의 장이 벌어질 때마다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배신하고 다시 화해하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대표적인 재야출신 정치인이자 영원한 정치적 동지로 남을 것 같았던 김근태(金槿泰)와 노무현(盧武鉉). 비록 ‘적’이 되진 않았으나 어느 샌가 두 사람 사이엔 ‘감정의 골’이 깊게 패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대선까지, 치열했던 선거가 남긴 상처다.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 다른 한 사람은 유력한 차기 원내대표로 거론되고 있지만 과거 두 사람간의 끈끈한 ‘동지애’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노대통령과 김의원이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지적 관계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두 정치인의 홈페이지가 서로 링크돼 있었고, 서로의 후원회에 참석해 다른 정치인보다 훨씬 깊은 애정을 표현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 관계였다.

    하지만 지난해 12월19일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두 사람은 만난 적은 물론 전화통화조차 없을 정도로 소원한 상태다. 노대통령의 한 측근은 “김근태 의원이 당에서 ‘홀로서기’를 하지 않는 한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말로 김의원에 대한 노대통령의 서운함을 전하기도 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서운함은 김의원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선을 치르기까지 두 사람간에 얼마만큼의 상처와 실망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3월10일 오후 김의원을 만나 솔직한 심경을 들어보았다. 인터뷰에 앞서 기자는 김의원에게 솔직한 답변을 요청했고, 김의원도 “이제는 말할 때가 됐다”며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김의원은 “이미 대통령이 된 노무현과 ‘각’을 세울 이유가 있느냐. 노대통령을 자극하는 발언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주변의 만류 때문이었는지 다소 조심스러운, 그리고 원론적인 답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의원은 노대통령 취임 이후 그의 개혁의지와 발언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적극적인 지지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가슴속에 담아둔 자신의 고뇌와 노대통령에 대한 감정을 모두 숨기지는 못했다.

    인터뷰는 노무현 정권의 조각(組閣)과 사상 초유의 ‘평검사와의 대화’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사회갈등 해소 방법은 대화·타협뿐

    ―노대통령의 첫 인사가 매우 파격적입니다. ‘평검사와의 대화’ 등 과거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형식탈피’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모습입니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우려의 시각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노대통령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대체로 나와 생각이 비슷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불안해하면서 안정적이지 않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동안 권력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국가운영을 위한 의사결정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서 국가와 사회의 용량 자체가 확대된 측면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토론하고 타협하는 규칙이 지켜지고 발전돼야 한다고 봅니다.”

    ―노대통령의 시도는 바람직하지만 아직까지 ‘대화와 토론의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자칫 대화가 갈등을 조장하지는 않을까요.

    “(우리 사회에) 갈등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갈등의 요인이 뭔지 드러나야 타협이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노무현 방식은 ‘이미 존재하는 갈등의 이유가 뭐냐, 그걸 드러내놓자. 그리고 토론하자’는 것이고, 토론을 진행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타협도 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토론과 타협의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아 논쟁이 충돌로 확대되면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요.”

    질문은 지난 2002년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의원은 당내 경선후보에 도전했다가 정치자금 양심고백 후 그 ‘후폭풍’으로 중도사퇴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양심고백은 권노갑(權魯甲) 전 고문에게 불똥이 튀었다. 당내 인적쇄신 바람에 밀려 정계를 떠나 있던 권 전 고문은 김은성-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되는 과정에서 김의원의 양심고백으로 드러난 정치자금 제공혐의까지 추가로 기소당했다.

    ―최근 권 전 고문이 다시 정치일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정계복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고문(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이 아직도 권고문이라고 부른다)의 정치 복귀 여부는 본인의 판단과 결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교동은 더 이상 정치적 실세그룹이 아닙니다. 실세라는 힘을 활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복귀 자체를 막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권고문 자신이 ‘김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본인도 현실정치를 그만하겠다. 김대통령의 대화의 상대자로 남겠다’고 말한 사실을 많은 국민이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권고문으로서는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억울한 일도 많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세대의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정계 원로로서 국민에게 기억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권 전 고문에게는 빚을 진 기분일텐데요. 권 전 고문은 ‘신동아’와의 인터뷰(2003년 3월호)에서 김의원께서 양심고백 후 직접 찾아와 사과를 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말씀해주시죠.

    “권고문이 구속됐다가 시내 모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갔었습니다. 가서 미안하다고 했죠. ‘양심고백한 것이 권고문에게 부담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도움은 내가 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권고문에게 부담이 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만일 그 돈을 영수증 처리했다면 권고문이 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의원께서는 양심고백 직후(2002년 3월12일) 후보에서 사퇴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당 안팎에서 굉장한 역풍이 불었습니다. ‘왜 한나라당에 빌미를 주느냐’ ‘안 받았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는 비판이 거셌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제주도 대선후보경선 토론방송에서 ‘김근태가 양심고백한 이후를 보니 자기는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제주 울산에서 꼴찌를 했는데 정말 쓰라렸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광주에서의 경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인들로부터 후보단일화 요구를 강하게 받았습니다. 노무현·김근태가 후보 단일화해야 이인제를 꺾을 수 있다는 이유였죠. 나도 그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소 서운하기도 했고 기회를 더 갖고도 싶었지만 그것이 대의였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민주당은 성공적인 국민경선을 치르고도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빌미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당내 흔들기가 시작됐습니다. 반면 노후보와 쇄신파 의원들은 ‘노무현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당시 김의원께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는데요. 노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후보와 가까운 정치인들이 노무현당을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던 것은 부패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쇄신파는 DJ당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노무현당으로 하자는 주장이었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습니다. 노무현당의 결과는 뻔했습니다. 당도 노후보의 위상도 소수로 전락할 게 불을 보듯 뻔했던 겁니다. 만일 그때 당이 분당사태로까지 이어졌다면 노무현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분당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 상식적인 정치인은 모두 동의했고, 저 역시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 비겁자라는 말은 못 들어”

    ―김의원께서는 8·8 재보선 당시 선거 특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습니다. 당시 재보선 후보 인선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재보선 참패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후보 인선과정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나요.

    “무엇보다 민심이 떠나 있었습니다. 지자체 선거에서도 부패정권 심판론이 먹혔는데 그게 계속되고 있었던 거죠. 나도 정치인인데 성과 없는 선거를 맡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노후보가 처음 요청했을 때 고사했고, 한대표가 다시 부탁했을 때도 거절했었습니다. 그래서 정대철(鄭大哲) 의원이 맡는 것으로 거의 결정됐다가, 한대표와 정의원이 나에게 ‘혼자만 살려고 그러느냐’고 하더군요. 난 ‘비겁자’라는 말은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그렇다면 같이 죽자’고 그러면서 결국 맡게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에 이길 수 있는 방안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어요. 내부적으로 누구를 공천할 것이냐를 두고 견해 차이가 무척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후보교체론을 주장하는 의원들과 노무현당을 주장하는 측간의 대립이었죠.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오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분당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지자체 선거패배에 이어 8·8 재보선에서도 참패하면서 9월 말까지 극에 달했습니다.”

    ―한 두 차례 한화갑(韓和甲) 대표도 당 대표직을 내놓고 탈당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김의원께서 가장 적극적으로 만류했고, 결국 주저앉혔다고 하던데요.

    “그런 설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대선 이후에도 그런 뒷이야기가 나돌았고요. 하지만 한대표의 탈당설은 논의차원에서 그친 것으로 압니다. 한대표도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이회창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다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탈당 논의는 그런 고민과정에서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노캠프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탈당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개혁당으로 가자는 것이었죠.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정 안되면 ‘헤쳐 모이자’는 내부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김의원께서는 8·8 재보선을 앞두고 개혁신당론을 주장했고, 재보선 참패 이후에는 민주세력이 중심이 되는 개혁적 국민정당론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분당을 막으려는 시도였죠. 민주당이 중심이 돼서 반(反)이회창 세력을 한데 묶자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야만 반(反)DJ 분위기, 반(反)부패정권 심판론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그때부터 노후보와 갈등이 시작된 것 아닌가요.

    “선거기간 동안 일부의 이탈은 굉장히 큰 타격을 가져옵니다.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개혁만 주장하면 극소수만 남게 됩니다. 노무현은 개혁연대를 주장했는데 그걸 통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인 힘을 가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난 열린연대를 주장한 것이죠. 범개혁세력과 국민적 개혁세력이 통합한다면 냉전세력은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의원께서는 그 연장선상에서 후보단일화를 주장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봤을 때 그 시점에서의 후보단일화는 정몽준 후보측에 유리하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정몽준 후보로 단일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오해를 살 소지가 많았던 것 같은데요.

    “그건 상식이죠. 누가 되기를 바랐겠습니까. 그동안 나의 정치역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인 평화입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냉전세력이 승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런 역사적인 흐름을 보지 않고 지지율이 높은 정몽준을 위해 단일화를 요구했다는 생각은 잘못 본 것입니다.”

    ―김민석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통합21에 입당한 것은 노후보에게 큰 타격을 입힌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의원께서 그 직전에 김민석, 김영환 의원과 회동해 함께 탈당하기로 약속했는데 지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세 사람이 만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에서 김민석 의원은 나에게 ‘위기다. 이회창 후보가 승리할 것 같다. DJ가 민주당에서 국민회의를 창당해 나온 것처럼 그렇게 창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나는 DJ가 민주당에서 국민회의를 창당해 나오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사람이다. 마지막에 정치 하는 것을 포기하는 셈치고 참여했다. 민주당이 죽으면 내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길이 없다. DJ는 호남과 수도권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없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 또 명분도 없다’라고 말입니다.

    김영환 의원은 물론 김민석 의원도 (내 뜻을) 충분히 이해했었습니다. 김민석 의원의 선택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각에서는 김의원께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측으로부터 당 대표 또는 선대본부장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비슷한 제안이라도 받았던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정몽준 의원은 딱 한번 만났어요. 그것도 내가 보자고 해서 만난 것입니다. 8·8 재보선 직후였는데, 조찬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한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냉전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에 위기가 온다. 후보단일화는 국민경선을 통해서가 아니면 아무런 대안이 없다.’

    그때 정몽준 의원은 단호한 어조로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지지율이 높고 이길 가능성도 높으니까 경선 없이 자신으로 후보단일화를 해달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김의원과 노대통령이 소원해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당시 노후보는 ‘노무현을 중심으로 가자. 동교동과 구주류가 떨어져나가면 나가는 것이다. 대선에서 못이기면 야당 하자. 그리고 총선에서 다시 일어서자’는 입장이었습니다. 8·8 보선에도 이런 기조로 공천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난 ‘이회창 후보가 되면 큰일난다. 한반도에 위기가 오고, 해외투자가들이 다 빠져나가서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 온다. 그래서 후보단일화를 해야 하고 국민경선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노무현과 정몽준 두 사람의 결단에 달렸다. 가능성은 반반이다.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무현은 우리끼리 가자는 거였고, 나는 노후보가 한번 더 위험을 감수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고…. 아마도 여기서 갈라진 것 같습니다.

    ―대선 이후 노대통령과 만나거나 전화통화조차 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사실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나에게 전화 한번 준 적 없었고,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전화하자니 바쁜 사람에게 사소한 일로 연락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그렇고….”

    ―서운하지 않습니까.

    “대선 이후에는 좀 서운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 운영주체로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노대통령이 잘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당한 비판과 비난이 와도 참았죠.”

    노 측근 당내 영향력 커진 건 사실

    ―386세대 노무현 대통령 핵심측근들이 당내 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중앙당직자 감원 등 당 개혁이 진행되는 것에 대한 당내 반발이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그러지 않아야 되겠죠. 중앙당 당직자들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본인들이 원하는 지구당에 상근자로 내려보내고, 그들의 활동료를 중앙당에서 지급하는 방향으로 방법이 모색돼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노대통령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때부터 함께했던 386세대 젊은 참모들이 귀중할 것입니다. 역량이 있어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의 권력과 후광을 활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한다면 곧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도 않아야 하고요.”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다고 보십니까.

    “그런 (일이 있다는) 말은 있는데….”

    ―당정분리가 어느 한순간 곧바로 현실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아무래도 그(노대통령 핵심측근)들 발언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라고 해서 관철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과거 ‘김심(金心)’ 논란처럼 ‘노심(盧心)’ 논란이 있지 않을까요.

    “좀 있겠지만 그 전보다는 훨씬 약화되고 완화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라도 노대통령이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으면 응할 생각입니까.

    “그건 내년 총선 이후에나 생각할 일입니다. 총선에서 제1당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변화와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노무현 정권은 정치적으로 소수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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