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땅 민중에게 마음의 안식처이자 기복의 대상이었던 석탑, 천년 이상 우리네 삶의 뒤안길을 지켜본 석탑은 1960년대만 해도 1000여 개에 달했으나 이젠 절반조차 남지 않았다.
- 오랫동안 전국의 석탑을 찾아다니며 보존대책을 고민해온 재야 연구가의 우리 탑 이야기.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삼층석탑 출처:http://skjun.net
‘순백의 탑’이라 불리며 경주 여덟 괴(怪 : 신자의 수도 경주에서 있었다는 아름다운 경치 여덟 곳을 이름. 전설적인 것도 포함됨) 중의 하나인 나원리 석탑에 도착한 시각이 저녁 무렵. 강 건너 경주 시내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질 무렵 노을에 비끼는 석탑의 낙조를 보기 위해 탑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불문곡직하고 나원리 석탑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나를 안내원으로 알고 당당히 요구한 것이다.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올망졸망 나의 입만 쳐다보는 80여 개의 눈동자를 차마 비켜갈 재간이 없어 승낙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전문용어까지 써가며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풀어냈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이들이 타고 온 버스로 경주시내로 들어와야 했다. 그 중 한 여학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라면하고 우동을 말씀하셨는데 혹시 지금의 라면과 우동이 탑에서 유래된 말인가요?”
곱상한 서울말씨였다. 순간 나는 이 여학생이 버스 안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좌중을 웃기려고 농담으로 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표정이 진지했다.
‘아, 이 일을 어쩔까?’
라면과 우동의 어원?
물론 나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듣기 어려웠겠지만 문화재 용어를 생전 처음 접하고 한문을 잘 모르는 젊은이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의 지붕돌에 빗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경사를 준 것을 ‘낙수면(落水面)’이라 하고 그 낙수면이 서로 만나는 경계지점을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이라 하는데 이 젊은 세대들은 그만 ‘낙수면’을 라면이라 들었고, 자연 ‘우동’은 먹는 우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라면과 우동’의 곡절 있는 어원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만 것이다.
다시 한번 버스 안에서 탑의 용어에 대해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해주었는데 이번에는 한문의 뜻을 풀어서 말해주니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고 결국 모두가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는 역사가 남긴 일기장
석탑은 천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에서 변함없이 이 땅의 영욕(榮辱)을 지켜봐 왔다. 풍상(風霜)의 격랑을 헤쳐오며 우리네 삶의 역사를 대변한 것이다. 저들은 우리가 누구의 자식이며 또 누구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를 증명해주는 찬란한 생명의 기록인 셈이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사가 수천만번 이어붙여진 뒤 다시금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 바로 역사(歷史)다. 역사라는 장구한 시간개념 속에서 내재율의 의미로 굳이 삶의 방식을 표현하면 이는 문화라 불릴 것이다. 이런 변화무쌍한 문화를 유형의 물질로 대치하는 삶의 흔적이 바로 문화재이다.
내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앞뒤를 안 가리고 살아오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나도 모르게 삶에 대한 권태와 울분이 자리했나 보다. 맞벌이 부부의 피곤함과 두 아이에게 갇혀 사는 답답함에 대한 반발심이 팽배해지면서 우리는 가족여행을 생각해냈다. 그 모티브는 우연히도 탑이었다.
탑은 몇 백년, 몇 천년을 꿈쩍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왔고 다만 우리가 삶에 휘둘려 빙빙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잿빛 아파트의 도시문화가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들려줄 동화나 고향의 이야기를 만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끼 낀 탑의 기단석에 걸터앉아 두 아들에게 내가 대신 들려줄 동화는 없을까? 그 천년의 동화를 들려주기 위해 나는 탑을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서기 7세기, 삼국시대에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는 통일을 이루고 나자, 이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으로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왕과 왕족, 평민의 신분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되어 불교를 더욱 융성하게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신라의 서라벌 곳곳에 절이 세워지고 그 마당에 탑이 자리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경주 남산에 올라가 서라벌을 내려다보며 읊은 노래가 이를 전한다.
“절들은 별처럼 자리잡고탑들은 기러기 날 듯이 솟아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이후 으레 절이 있으면 탑이 있는 당탑가람(堂塔伽藍)의 등식이 성립되어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고루 탑이 조성되는 황금기를 맞는다. 우리나라의 탑은 불교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회의를 열었다.
“부처님 살아 생전에도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 못했는데, 이제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범부를 교화하고 우리 십대 제자들은 무엇에 의지하여 정진할 것인가?”
이때 화장한 부처님의 시신에서 영롱하고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는 물질을 발견하니 바로 사리(舍利)였다. 이를 본 제자들은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저 덩이를 고이고이 간직하여 수행의 징표로 삼자”고 다짐했다.
제자들은 당시 고대 인도국의 전통적인 민간신앙에서 출발한 조형물에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탑이라 할 수 있는 산치(Sanchi) 탑이며 후대 학자들은 이를 두고 탑의 기원이라 말한다. 결국 탑은 부처님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구조물에서 시작됐다. 훗날 불교신자들이 탑을 보면 경건히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것도 탑을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동방 3국의 탑
이러한 연유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고구려의 영란사 탑이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언급돼 있는데, 이 시점을 우리나라 탑의 시작으로 보는 이가 많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불교의 여러 문물 중에 우리의 환경에 맞게 고쳐지고 보완된 것이 바로 석탑이다.
애당초 이 땅에 처음 세워진 탑은 기존의 목조건물 양식을 빌려서 만든 목탑이었다. 그러나 이 목탑은 화재 등의 이유로 장기보존에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탑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최근에 복원된 화순의 쌍봉사 대웅전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최초 형식의 목탑은 후대로 전해진 것이 얼마 없기에 일반적으로 탑이라 하면 지천에 널린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으로 인식되고 있다.
가까운 일본은 화산지대의 섬나라여서 화강암 같은 단단한 석재가 귀하기 때문에 목재를 사용한 탑을 조성했다. 지금도 일본의 오사카 성이나 기타 영주의 성지에는 탑의 형식을 본뜬 목조건물이 즐비한데, 대개 영주권력과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중국은 애초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민간신앙으로 신선사상이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 인도로부터 배워온 불사리 장치를 기존의 누각과 접목하여 진흙벽돌로 조성했다. 이를 전탑(塼塔)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애초 부처님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출발한 탑이 자연환경과 사상에 따라 나라마다 특수한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니 가히 우리는 ‘석탑의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일본은 ‘목탑’, 중국은 ‘전탑’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전국 방방곡곡의 마을 이름 중에는 탑과 관련된 것이 많다. 탑골, 탑리, 탑하, 탑상, 세탑, 내탑, 외탑…. 탑은 우리 민족의 가슴 깊이 각인되어 슬프나 기쁘나 마음의 동무이자 안식처로 한세월을 함께 살아온 것이다.
조상들은 탑의 위치를 정함에도 도참설 미륵설 길상설 등의 풍수지리사상을 활용했다. 그 마을의 가장 중심지나 지형상 돋보이는 곳에 탑을 만들어 일체의식을 고양시킨 것이다. 주민들이 융합하고 한평생의 고단한 심사를 달래고 현세의 화평과 죽어서의 극락왕생을 비는 상징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출발은 불교의 조형물이었지만 전제국가의 핍박과 신분의 한계 속에서 조상들은 탑을 울분을 토로하고 위안삼는 평안의 친구로 여겨온 것이다. 특히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구복심은 한결같아 부모의 사후에 장지로서 탑 주변은 홍역을 치르기 일쑤였다. 평민들은 몰래 탑 옆에 구덩이를 파서 매장하고 고관대작들은 당당하게 땅을 사들여 조상을 매장했다. 그래서 지금도 한적한 외곽의 탑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탑의 방향이 대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세임에도 시신을 근처에 안장한 것을 보면, 후대에 이르러 유교의 엄격한 문화 속에서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자식들의 간절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일은 왕이나 왕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정치적인 사안이나 백성을 통치하는 도구로서 탑을 조성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경주 무장사지석탑에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은 오랜 전쟁통에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아지고 나라의 민심도 흉흉해지자 이를 수습하고자 각종 병장기와 투구를 이 깊은 골짜기에 묻어버리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연출하였다.
왕 자신도 오랜 전쟁에 심신이 황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이러한 의식을 행했다. 이 나라에 더 이상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계곡의 이름을 없을 무(無) 감출 장(藏)자를 써서 무장이라 하고 훗날 삼층석탑을 세우도록 해 그 기원이 오래가도록 하였다.
이 얼마나 원대한 기원인가. 이후의 통일신라는 더 이상의 외란이나 내전도 없이 오랜 기간 태평세월을 맞이하였으니 이를 단지 하찮은 야사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감은사 석탑에 깃든 호국정신
하나 더 있다. 경주에서 동해안을 따라 난 국도를 타고 고개를 넘으면 확 트인 바닷가에 일순간 도착하는데 여기에 많은 이가 알고 있는 감은사 석탑과 대왕암이 자리하고 있다. 감은사는 아버지 문무왕이 짓다가 끝내 마치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충정을 드높이 기리고자 지은 절이다. 당시 왜구는 신라의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하루도 잦을 날이 없는 왜구의 약탈에 백성의 불평이 높아 이를 제때에 처리하지 않으면 민심이 이반될 정도였다. 이에 문무왕은 자식인 신문왕의 왕권을 더욱 다지기 위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해를 동해의 암석에 안치할 것을 유언했다. 이는 자신이 죽어 동해의 용이 되어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조국 신라를 위한 마지막 충정의 발로였던 것이다. 신문왕은 근처에 감은사를 지었는데 동해의 물이 감은사 금당의 마루 밑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동해의 용이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감은사는 효심과 정치적인 계산이 맞물리는 곳이기도 하다.
훗날, 경덕왕은 김대성으로 하여금 토함산에 석굴암을 건설토록 하여 굴 안에다 아미타불을 모시고 그 방향을 멀리 감은사 석탑과 대왕암을 직선으로 보도록 하였으니 기원의 정도가 가상할 따름이다.
현세 권력자들의 추태
몇 년 전 탑이 신문 가십란을 장식한 적이 있다. 당시 야당 총재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북 봉화의 태백산 깊숙이 있는 절 현불사를 찾은 것이다. 승용차로 서울에서 장장 4시간이 넘는 먼길을 정치인이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불교신자도 아닌 그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고 한밤에 기도법회까지 보고 다음날 10시경에 떠났으니 말이 많을 밖에 없었다. 도착한 날 밤 현불사 7층의 영령보탑은 오색영롱한 빛을 발광하였다고 하는데 오색이라 함은 불교 전통의 다섯 색인 빨강 파랑 노랑 하양 초록색을 일컫는 말.
이 빛을 본 한 신도가 이 장면을 촬영하고 현불사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지켜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탑비에 새겨 넣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탑의 효력을 입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탑비에 적은 행위는 두고두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런 점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재임하던 1996년 감은사 석탑을 해체 복원하여 그 기록을 적은 수리기(修理記)를 탑신에 안치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영수 전 문화체육부장관의 치적을 칭송한 수리기로 바꾼 일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권력에 아부하려는 이들이 벌인 일이지만 아무튼 탑에 대한 기원이 아직도 유효함을 증명하는 씁쓰레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땅에는 평화를 위해 무기와 함께 묻히고,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정으로 자신의 유해를 바다에 뿌리도록 한 왕이 있었는가 하면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하여 탑에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새기도록 한 권력자도 있었다. 이들을 비교하면 기분이 개운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1960년대에 파악한 바로는 남한 전역에 산재한 탑이 1000기가 넘었지만, 최근 문화재청의 현황 조사 결과를 보면 불과 460기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없어진 탑은 대부분 야산에 방치된 것들이었다.
문화재가 미술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면 어김없이 문화재 브로커들이 훔쳐서 이른바 ‘문화재 세탁’을 거친 후에 소장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곤 한다. 공식적인 도굴시대인 일제시대는 차치하더라도 해방 이후의 도굴은 사회가 어수선한 1950년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최고조에 달했다.
앞서 말했듯이 탑이 부처님을 대신하는 조형물로 출발하였기에 탑 속에는 고귀한 보물이 함께 안치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삼국시대의 탑이나 고려시대의 탑에서는 어김없이 탑 속 사리공에서 진귀한 보물이 사리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를 노린 도굴범들이 한밤중에 장비를 이용하여 탑을 무너뜨리고 유물을 탈취하곤 했다. 이 땅의 탑들은 모두가 한번쯤 이러한 곤욕을 치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문화재 당국은 망실된 탑들을 복원하기 위해 적잖은 수고를 해야 했다.
대표적인 현장이 경북 구미시 선산읍 가까이에 있는 주륵사지 폐탑이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깊은 골짜기에 말없이 서있던, 경주 석가탑에 버금가는 거대한 석탑. 이 석탑을 도굴꾼들이 한밤중에 무너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행여 탑 밑의 땅 속에 유물이 있을까 철저히 파헤쳐 구덩이를 만들어놓았다. 나는 이 가슴 아픈 현장을 작년 가을 답사 때 본 적이 있다.
이런 수난을 겪은 탑들은 복원하기가 어려운 지경인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 이 주륵사지 폐탑의 경우 석재의 규모가 워낙 커서 복원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도난당한 문화재가 밀매될 때는 그 문화재의 가치나 역사성이 왜곡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는 문화재 자체에도 불행한 일일 뿐 아니라 소장하는 본인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다행히 석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덕택에 일반 시민들 사이에 조사와 답사가 활성화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석탑을 답사하고 조사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안내판조차 대학의 논문에서나 사용됨직한 난해한 용어로 쓰여 있어 그 유래를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가을날 석양이 질 무렵, 탑을 등지고 어깨를 비스듬히 탑신에 기대어 지는 노을을 바라보라. 붉은 석양에 길게 늘어선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라.
탑의 지붕 끝자락 처마 끝에 달려 있는 풍탁(風鐸)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내는 맑고 청아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천년을 하루처럼 무심히 살아온 탑의 육중한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사가 허망해지기도 한다. 탑은 그 자신이 바로 역사요 산 증인이다.
둔중한 몸매에 날렵한 날개몸짓의 지붕돌, 염원을 갈구하듯 하늘을 향해 치솟은 상륜부의 찰주, 땅의 기대석부터 탑 끝 상륜부까지 4:2:1의 비율로 줄어드는 탑은 여염집 다소곳한 아낙네를 보는 듯하다.
차곡차곡 쌓아 올라간 몸돌에는 치성의 기원이 서리고 옥구슬이 흘러내려오다 마침내 처마 끝에서 위로 치켜올라 잠시 머무는 듯한 곡선의 정지감. 쉬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의 까마득한 이 적막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지 부처님을 형상화한 종교적 조형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우리 한민족의 애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험난한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온 연인의 숨결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막연히 크고 높기만 한 서양의 탑과 현란한 치장으로 요란스러운 일본 목탑의 가벼운 기교, 그리고 듬성듬성 척박하고 질박한 내음이 풍기는 저 황량한 황톳빛 진흙으로 만든 중국의 전탑에서는 이런 숨결을 느낄 수 없다. 소재의 질량감은 물론 장구한 역사의 여울 속에서 민중의 정서와 함께 호흡해온 한국의 석탑이야말로 우리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민중이 함께 어울려 탑돌이를 하며 일체감을 조성하는 전통은 이 땅에서만 찾을 수 있다. 지붕석의 처마 끝이 그냥 옆으로만 뻗어 그 끝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한국의 탑은 미묘한 맛을 간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마 끝이 위로 치켜올라감은 우리 고유의 아리랑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춤사위의 팔동작 자태와 흡사하다. 물 흐르듯이 흘러 일순간 정지하면서 살짝 위로 치켜올리는 춤꾼의 품새를 바로 이 석탑의 처마 끝에서도 볼 수 있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귀의 민족정서는 석탑의 곳곳에 배어 있다. 힘겨워 보이나 전체를 위해 묵묵히 아래에서 윗돌을 떠받들며 무욕의 교훈을 주는 기단석 아래의 돌은 천년 만년 제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오늘을 떠받들고 있다.
작년에 필자가 속한 우리얼문화유산답사회 회원과 같이 ‘창녕술정리동삼층석탑’을 답사했다. 창녕의 석가탑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약간 작을 뿐 모든 것이 석가탑의 전형이었다. 동행한 회원들과 함께 탑을 살피는데 ‘동탑지킴이’라 불리는 한 비구니 스님이 자청하여 탑에 대한 설명을 자처했다. 그 정성과 열정이 남달랐다.
원래 제주도에 살고 있던 스님인데 공부차 근처엘 들렀다가 하룻밤을 자던 중에 부처님이 꿈속에 나타나 동탑을 보호하라는 암시를 주셨다고 한다. 그 길로 곧장 이 술정리 동탑에 머물며 6년간이나 탑 주변을 청소하고 훼손을 막는 일을 해온 것이다. 그분은 이어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1965년에 출토된 사리장엄구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불과 38년 전에 출토된 것인데도 유물의 행방을 알려주는 기록은 창녕문화원 기록에 단 두 줄이 언급되었을 뿐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식으로 그 스님은 그래도 “언젠가는 찾아지겠지요. 도와주세요” 하며 웃고 있었다.
“사리함을 찾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스님의 파르스름한 머리, 환하게 웃으면서도 애처로운 목소리만 환청처럼 들려왔다. 뒤숭숭한 몸을 이끌고 서재로 나와 낮에 그 스님이 준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심봉사 헛다리 건너는 식의 수소문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탑에 대한 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60년 후반. 그러나 창녕군민조차 그러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서류를 들이대며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메일과 전화 주고받기를 수 차례. 인터넷에 ‘사리함을 찾습니다’라고 공지를 올리며 마치 집 나간 강아지를 찾듯이 그렇게 여러 날을 동분서주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지하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가히 ‘수장고에서의 발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재에 관한 최후의 보루인 국립중앙박물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 후 문화재 관련 시민단체들이 우리나라 석탑에서 출토된 각종 사리장엄구 중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59점을 찾아내라고 요구를 했으니 그 후 박물관의 고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보통 석탑에는 탑신의 가장 중간층인 몸돌에 사리공이라 하여 사각 또는 원형의 구멍을 파고 부처님의 사리와 탑을 조성하게 된 연유와 당대의 각종 희귀물을 넣어두는데, 후대로 오면서 부처님의 사리가 희소한 까닭에 덕행이 출중했던 큰스님의 사리를 대신 넣기도 하였다.
간혹 전탑에서는 도굴을 염려하여 기단석 아래의 땅을 파서 사리장치를 마련했다. 벽돌로 만든 전탑은 도굴범들이 쉽게 벽돌을 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목탑의 경우는 그 소재가 연약해 딱히 사리장치를 둘 곳이 없었으나,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 탑의 기단에 있는 심초석 안에 사리공을 마련하여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사리장치를 위치시키는 데 무수한 고민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일제는 탑 안에 사리를 안치한 사리장치구(舍利裝置具)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에 눈독을 들였다. 본격적인 문화재 수탈의 시대에 사찰은 무너지고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있는 석탑은 무너졌다. 일제는 탑신 속에 고이 모셔둔 사리함을 제 것인 양 거리낌없이 훔쳐간 것이다.
탑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대단히 힘들다. 지금도 당시에 속절없이 무너진 탑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이것을 그냥 폐사지탑이라 불렀다. 그나마 최근 각지의 뜻 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만들어 이 방치된 폐탑을 점검하고 조사를 벌이니 다행이다.
필자도 ‘한국의 탑(www.stupa.co. kr)’이라는 홈페이지를 통하여 이러한 폐탑지와 관리부재 상태의 석탑에 대한 해당 자치단체의 조치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탑을 제대로 지켜내려면 무엇보다도 개개인 스스로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깨어 있는 의식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
탑에게 배우는 속진의 허망함
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속절없이 내리던 날. 나는 담배 한 모금의 무게만큼 허망하지만 인생의 연무 같은 안개 속에서 경주행 버스를 타고 무장사 석탑을 찾았다. 그 옛날 조국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했던 신라인의 숨소리를 듣고자 무장사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겨 열두 개울을 건너며 짙게 드리운 운무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찮은 몸뚱이 하나쯤은 눈도 깜짝 않을 깊은 계곡이지만 내일을 위해 무엇 하나 묻을 것 없는 우리는 속진의 허망함을 한번쯤은 묻어버리고 싶었다.
오는 이를 마주하고 천년을 늘 그렇게 한 조각의 구름을 벗하며 껄껄 웃어 제끼는 무장사 석탑에서 무욕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놓을 것 없고 가질 것만 있는 우리 세속의 인생사야 한치 앞도 내다보지 않는 법이니 이 또한 탑에 지나친 욕심을 품은 탓일지 모른다.
그리 살지 말라그렇게 부대끼며 살지 말라.그저 흘러가는 구름 마냥 걸림이 없고청산처럼 말 없이 살라 한다.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사람에 걸리다가 이제는 세월에 걸리노라고
무장사 석탑 기단석에 걸터앉아 스쳐가는 신라의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니 고단한 육신은 탑에서 무언의 교훈을 얻는다. 그렇다. 나는 단 하루의 일상에서 천년으로 거슬러가고 그는 천년에서 내려와 단 하루의 일상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