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사랑의 연금술인가 불안의 제조업인가

양지로 걸어나온 性과학

  • 글: 정철영 자유기고가 nextbook@hitel.net

    입력2003-03-25 16: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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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性)은 과학인가. 과학이라면 한국에 성과학은 존재하는가.
    • 한국 성인들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성적 갈등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성과학자들이 말하는 우리 성인남녀의 성과 성생활, 그리고 성과학의 현재와 미래.
    사랑의 연금술인가 불안의 제조업인가
    ‘고비용 저효율’은 한국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은 성생활에서도 ‘고비용 저효율’에 시달리고 있다. 고액의 육아 교육비, 생활비를 지출하면서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성생활을 영위하지만, 그 대가로 얻는 오르가슴은 ‘섹스 선진국’들에 비해 그리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성담론 주도한 성 사건들

    한국에서 성담론의 변천은 성과학이 아니라 성사건들이 주도해왔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성담론의 변화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빨간 마후라’, 이승희, ㅇ양비디오, ㅂ양비디오, 서갑숙, 홍석천, 하리수에서 마침내 ‘죽어도 좋아’에 이르기까지 온통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들이 그 중심에 있다.

    이 사건들은 지배적 성통념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측면도 있었다. 성적 존재임이 애써 부정되었던 청소년과 70대 노인의 성욕 문제, 동성애자라는 성적 소수자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유명 여성 연예인들의 성생활에 대한 도덕적 이중잣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 등 교훈적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도덕적 개탄과 과도한 관음증적인 열기에 휩쓸리면서 그때그때 일회성 사건에 머물렀다.

    과거 비공식 성문화를 상징했던 ‘세운상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인터넷이라는 문화 유입의 통로로 인해 공식 성문화와 비공식 성문화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 순간 한국의 성과학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과연 ‘이쁜이 수술’이나 음경확대 수술에 능숙한 임상의학 외에 대한민국 땅에 성과학이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성과학(sexology)은 여러 학문 간의 ‘종합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성과학은 성문화를 연구하는 인문분야와 성에 대한 생리현상을 연구하는 자연과학 분야, 그리고 실제 성기능장애를 연구하고 이의 치료를 담당하는 성의학 분야로 나뉜다.

    성과학은 학제적 연구방법을 택하기 때문에 다른 단일 학문들과 비교해 일관된 체계와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제적 방법은 연구자에게 한 분야 전문가 이상의 자질을 요구한다. 암을 진단 치료하는 내과의사들은 의학적 처치법만 알면 된다. 그러나 남성의 발기부전을 진단, 치료하는 성의학자는 성문화와 성심리, 성행동 분야에 대한 상당한 전문 지식이 있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른 전문의들이 환부만 보면 된다면, 성의학자는 섹스할 때 사용하는 그 부분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성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인간의 성행동이라는 점에서 고유한 어려움이 있다. 성심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자인 윤가현 교수(전남대 심리학과)는 성과학자들은 우선 연구자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기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자신의 기억을 증진시키기 위해 그 연구를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동성애를 연구하는 사람에겐 틀림없이 동성애를 연구하게 된 계기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즉 성연구자는 뭔가 스스로 성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호기심 자극하는 연구는 위험

    ‘항문 섹스를 해보셨습니까? 성적 쾌감을 목적으로 파트너에게 괴로움을 준 적이 있습니까?’ 이런 문항으로 가득 찬 설문지에 답변하라고 한다면, 성생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쑥스러워하고 솔직한 답변을 하는 데 적잖이 주저할 것이다. 심지어 ‘한국 남성의 성의식 및 성생활 실태조사’를 주관했던 조성완 전문의(비뇨기과)는 자신도 설문지에 답변을 썼지만, 그 내용을 동료들이 알지 못하게 다른 답변지 묶음 속에 섞어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연구의 객체인 응답자의 태도도 성과학 연구에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또 간과해서 안되는 점은 자발적 응답자들이라도 구체적인 성교 기법 등 특정 항목에 대한 응답을 회피하는 비율이 높다는 점. 게다가 사회적으로 무엇이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인가를 염두에 두고 응답을 하는 경향도 있다.

    TV에서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어김없이 기혼남녀들의 혼외정사 경험률, 고정적으로 애인을 사귀는 주부의 비율 등에 대한 수상쩍은 여론조사가 등장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강동우 전문의(정신과)는 “성과학자들은 현재 모집단의 특성을 정확히 대변할 수 있는 표본 추출 등 통계와 연구 및 해석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도 뚜렷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성행동에 대한 조사는 그 결과가 대중의 성에 대한 가치관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으면 유해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섣불리 대중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연구는 지극히 위험합니다. 성 연구는 일반인들이 그 결과를 자신과 비교해보며 자신의 성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자각시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치료의 동기유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연구 가운데는 무책임하고 선정적이며 현실과 괴리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를 접한 일반인들은 성과학자들의 모든 연구를 불신하게 됩니다.”

    귀의 모양으로 여성의 조이는 정도를 알 수 있다, 입이 큰 여성은 음부도 크다, 처녀의 성기는 핑크빛이지만 성경험이 많아질수록 검어진다, 코가 크면 음경도 크다…. 옛날부터 성에 대한 관심은 ‘방중술’과 성기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화되었고, 특히 동양권에서는 ‘명기(名器)’와 ‘보도(寶刀)’에 대한 각종 속설을 유행시켰다.

    일본의 원로 산부인과 의사인 가사이 간지(笠井寬司)씨는 남녀의 성기, 특히 여성 성기 중에서 남성에게 강렬한 성적 극치감을 가져다준다는 ‘명기’ 연구에 평생을 바친 특이한 성과학자다. 그는 1995년에 자신이 30여 년에 걸쳐서 진료해왔던 여성 8300여 명의 외음부 사진과, 성기 형태와 인체의 다른 부위의 상관관계에 등에 관한 수십가지 항목의 생체 계측 자료를 통계처리한 ‘일본여성의 외성기’라는 연구서를 간행했다. 이 책은 출판 전부터 성기 부위에 대한 정밀한 측정 및 사진 촬영에 대한 여성환자들의 동의 여부,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출판할 수 있는 지의 여부, 사실적인 외음부 사진으로 가득찬 책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학술’ 서적인지 아니면 음란 서적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저자는 입건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성기의 모양과 크기, 신체 다른 부위나 체형과의 관계 등, 성기에 대한 계측적 자료 축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성기야말로 인종간, 나라간 성생활과 성문화의 차이를 가져오는 직접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외성기가 성문화 차이 초래

    백인 남성들이 체위에 관심이 많다면 일본 남성들은 ‘명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이런 차이는 바로 동서양 남성의 음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백인 남성의 성기는 ‘두 주먹’이라고 할 만큼 긴 대신에 발기 시에도 말랑말랑하지만, 일본 남성들은 길이는 짧지만 발기 시 훨씬 단단하다. 이 때문에 일본 남성들은 귀두 감각이 예민해 여성기에 접촉했을 때 그 감각이 민감하게 전달되므로 ‘명기’ 여부가 성생활의 만족도와 관련이 깊다.

    이와 달리 백인 남성들의 부드러운 음경은 여성기와 접촉해도 감각이 둔하기 때문에 ‘명기’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대신에 여러 가지 체위를 즐기는 데 비중을 둔다.

    이쁜이 수술과 음경확대 수술에 대한 열기를 보면 우리나라도 이런 연구가 활발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의 성의학계와 다른 점은, 여성기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으며 남성기에 대한 계측적 연구는 몇 편 축적돼 있다는 것이다.

    손환철 교수(서울대 의대)는 성과학에 관심을 가진 비뇨기과 전문의 중에서 가장 신진 세대에 속한다. 그는 군의관으로 복무중 군장병을 대상으로 한국 20대 남성들의 음경 크기와 심리상태에 대한 정밀조사를 벌였다. 그는 연구의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킨제이 보고서에서는 남성들의 성 문제에 대한 상담 가운데 음경 크기에 대한 고민이 발기문제에 이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비뇨기과에서는 음경 크기가 작다고 호소하는 환자들, 음경을 키우려 파라핀 같은 이물질을 넣은 후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환자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음경확대술이란 수술을 감내하며 음경을 크게 만들려는 환자들을 많이 접합니다. 그래서 음경 크기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과연 적절한 것이고, 또 음경을 확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군의관이었던 것이 연구 수행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면 손교수가 계측한 한국 20대 초반 남성의 음경의 상태는 어떠할까?

    “조사 대상자 156명의 이완 음경길이는 6.1± 1.3cm였으며 둘레는 8.9± 0.8cm였고, 발기 음경길이는 10.8± 1.3cm였으며 둘레는 11.3± 1.2cm였습니다. 발기시 음경길이 증가는 4.8± 1.1cm였고, 음경의 부피는 이완상태에서는 39.4± 12.6cc, 발기상태에서는 112.7± 29.4cc였습니다. 이완상태와 발기상태에서 왜소 음경의 기준은 각각 3.5cm와 8.2cm로 조사되었는데, 이완 및 발기상태 모두 왜소 음경이라 말할 수 있는 대상자는 156명 중 1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기의 크기와 발, 코, 손가락, 키 등 신체 크기와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었습니다.”

    사랑의 연금술인가 불안의 제조업인가

    성의학 발전사는 발기부전 치료술의 역사다. 사진은 남성 환자에게 비뇨기과 시술을 하는 장면.

    손교수의 조사가 정확한 것이라면 성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음경이 왜소해서 확대수술이 필요한 남성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자신의 음경 크기를 실제보다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음경확대수술은 지금도 끊임없이 시행되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형 수술 환자의 약 39%에서 정신의학적 이상소견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손교수는 음경확대술을 고려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정신의학적인 연구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에서 성과학의 전개과정에는 몇 가지 특징적 양상이 눈에 띈다.

    첫째, 한국에서의 성과학은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여성학 등의 인문학과 생리학 같은 자연과학, 그리고 의학이 학제적으로 긴밀히 작용하면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의학이 다른 학문의 도움 없이 거의 독주해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들어 전남대 의대에서 성심리학을 전공한 윤가현 교수 등 의학 외 분야 학자들과 공동으로 fMRI(functional MRI;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장비) 등을 이용, 포르노의 시청으로 유발되는 성적 흥분이 성별 연령별 등의 요인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규명하는 등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은 희소 사례에 속한다.

    둘째, 의학 분야에 한정짓는다면, 성의학은 정신의학 분야가 독주하다시피 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점차 비뇨기과 분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는 내분비학 등 기초 의학이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정신과에서 주로 다뤄온 심인성 증상들 가운데도, 신경계 심혈관계 내분비계 등의 기질성 원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그 일차적 이유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성의학을 임상 분야에서 담당해 온 것이 본질적 이유다. 임상 분야는 환자의 층이 두터울수록 연구 사례도 축적되고 진단, 치료술도 더 발전한다.

    지난 10여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임상성학회나 대한성병학회와 그 후신인 대한성의학회, 부산의 한국성의학회 등 성과학이나 성의학을 연구하는 여러 모임이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의학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뇨기과가 중심이 된 대한남성과학회뿐이다.

    이윤수 원장(이윤수비뇨기과)은 성의학에서 비뇨기과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의학의 발전사는 발기부전 치료술 발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성은 발기해야만 성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발기가 원활치 않을 때는 직접적으로 장애를 느끼게 됩니다. 성의학 클리닉의 주고객이 남성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발기부전이 남성들이 성클리닉을 찾는 유일한 이유일까. 그렇지 않다면 남성들은 무엇 때문에 성클리닉을 찾을까. 재미있는 현상은 한국 사회의 공중목욕탕 문화가 왜소 콤플렉스를 확산시켜 남성들이 성클리닉의 주고객층을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이원장의 이어지는 설명.

    “남성이 음경 크기에 민감한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별납니다. 나는 공중목욕탕 문화도 그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목욕탕에서 타인과 성기의 크기를 비교할 기회가 많은 데, 이때 일종의 착시현상이 생겨 자기 성기가 더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성기는 정면에서 바라보지만, 자신의 것은 위에서 아래로 보게 됩니다. 각도 차이로 인하여 실제 크기의 70% 정도로 평가됩니다.”

    셋째, 성과학을 구성하고 있는 각 개별 부문간의 수준 차이가 심해서 “이론과 기초는 약하고 수술은 강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성과학 중에서 적어도 남성 임상치료 분야는 세계 수준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수술은 성기능 장애 치료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수술 이전 단계인 ‘약물치료, 심리·행동치료’ 등의 임상분야나, 다른 인문학 분야, 자연과학 분야, 상담과 성교육 분야 등에서는 성과학 선진국들과 현저한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다.

    인문학적 성연구의 빈곤함을 해당 분야 연구자들의 무능이나 무관심으로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보다는 한국처럼 성에 대해 폐쇄적이고 이중적인 풍토에서는 성행동을 인문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정과, 의학 분야와는 달리 정치권력이나 ‘학문권력’으로부터 규제와 제약을 심하게 당했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성과학자들은 성해방을 선도하는 성정치학자들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구사회에서 성과학은 성행동의 본질 규명을 통해서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역으로 이렇게 시작된 성혁명은 인간의 성행동에 대한 관심을 한층 고조시키면서 성과학의 대중적 인기와 권위를 높여왔다. 성과학과 성정치학은 낡은 종교적 도덕적 성적 규제와 맞서 싸우는 동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성과학이 성의식과 성윤리 변화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는 평가다. 김원회 교수(부산대 의대)는 “성과학자 중 우리나라의 성문화를 개혁하려고 앞장선 분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아쉬움을 표명했다. 성과학자 대신 여성운동가들과, 성적 지향의 다양성 인정과 성적 소수자의 권리문제를 요구했던 동성애 운동가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윤가현 교수도 지적했듯 성과학 전문가들은 어딘가 성적으로 독특한 취향이 있거나 성적 욕구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냐는 사회적 선입관이 있다. 이는 저명한 성과학자들이나 실천가 중에서 ‘변태’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과학자하면 연상되는 킨제이는 마조히스트이자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 이후 성해방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 가운데 동성애 또는 양성애자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한국의 성과학자들은 서구 사회에 뿌리깊은 이런 선입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필자가 접촉한 성과학자들은 그런 선입관이 근거가 없다고 단언한다. 김원회 교수는 “적어도 성을 혐오하거나 이성이나 이성과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성과학자가 되기는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기와 같다”고 주장한다.

    손환철 교수는 성과학자들이야말로 오히려 성적으로 가장 건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이란 숨어서 몰래 이야기될 때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를 띠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방된 공간에서 토론하는 분위기라면 이러한 경향은 많이 감소되리라 생각합니다. 성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오히려 건강한 성적 정신과 건강을 가질 수 있는 좋은 분위기에서 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혁명은 전통윤리에 입각한 성의 통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혁명은 일반인들의 성에 대한 태도와 성행위의 변화, 성과 관련된 사회구조 특히 가족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성혁명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외형상으로는 성의 혁명이 급속도로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선에서 성을 연구하고 치료하고 교육하는 성과학자들이 보기에도 한국의 성혁명은 진행형일까.

    사랑의 연금술인가 불안의 제조업인가

    강동우 전문의,김원회 교수, 윤가현 교수, 이윤수 전문의(왼쪽부터)

    발기부전 환자 빼앗아간 비아그라

    이윤수 원장은 “클리닉을 10여 년 간 운영하면서 환자들이 확실히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과거엔 동료들끼리 몰려와 단체로 음경 확대수술을 받는 등 분위기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주관이 뚜렷해졌다”며 달라진 진료실 풍경을 전한다.

    전남대에서 14년째 성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윤가현 교수는 학생들의 의식 변화도 극적이라고 말한다.

    “제가 강의를 시작할 때는 수강생이 4학년 위주였고, 수업 내용에 부담을 느낀 여학생이 학기 중간에 수강신청을 철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수강생 중 1학년이 75%이고 남녀 비율은 4대6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수업시의 발언이나 과제물을 통해 자신의 성체험이나 관심을 당당하게 밝히는 일도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윤교수는 “20대 여성층이 지난 몇 년 동안 성적으로 가장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진단한다. 자신의 남자 친구가 성에 대해서 남성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양성간의 균형잡힌 시각을 갖기를 원하는 여학생들은 연애의 전제조건으로 남자친구에게 성심리학 강의를 받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

    앞에서 언급한 포르노의 시청으로 유발되는 성적 흥분이 성별 연령별 요인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실험한 데이터를 보면, 성 경험이 많은 40대 중년 여성보다도 20대 여성의 흥분 정도가 오히려 더 높게 나타난다. 40대 여성에게는 성적 흥분을 억제하는 기제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면, 20대 여성에게서는 이런 억제 기제가 훨씬 약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설명이다.

    한국의 성과학은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그 중심에 ‘남성’을 치워버리고 대신 ‘여성’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 지난 20년간 남성 성기능 장애는 각계의 많은 관심과 첨단 진단기기의 발달로 그 진단과 치료에 눈부신 발전을 보였고, 음경 발기 생리에 대한 꾸준한 연구로 명확한 발기기전이 제시된 데 비해 여성 성생리에 대한 연구는 심리적 측면에 치우쳐온 경향이 있어 아직까지 임상과 이론 모두에서 발전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윤수 원장은 남성의 성기능 장애 진단이나 치료방법은 거의 개발이 끝나가고, 수술과 주사약의 발전으로 높은 치료율을 올리는 데 비해 여성의 성기능 장애는 미개척 영역이 많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로, 남성용 발기촉진제인 비아그라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의학 정보도 성기능 장애연구 분야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경구피임약이 처음 보급되었을 때 불필요한 임신을 예방해 낙태 수술이 대폭 감소함으로써 산부인과의 경영이 어려워졌던 것처럼 비아그라는 성클리닉의 주요 수입원이던 발기부전 환자를 빼앗았다. 남성클리닉은 ‘포스트 비아그라’의 대책으로 이제 여성의 성기능 장애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깨지는 ‘침묵의 카르텔’

    두 번째 변화는 한국의 성의학 분야가 각 과별 체계적 상호 접근이 부실하다는 데 대한 반성의 흐름이다. 제대로 된 성의학의 확립을 위해 내분비계 내과, 비뇨기과, 산부인과, 신경정신과의 유기적인 협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비단 성의학 분야만이 아니라 다른 전문 분야에도 존재하는 전문가들 간의 ‘침묵의 카르텔’이 깨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 몇 년 사이 정신과와 비뇨기과 사이에 협동과 갈등의 2중적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 심인성 성기능 장애자를 주로 치료하는 정신과와 기질성 성기능 장애자를 주로 치료하는 비뇨기과가 접근법이나 치료법에서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치료법을 다른 한편에서는 그 부작용과 불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에(박스 인터뷰 기사 참조) 일반인들은 판단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라도 성치료법에 대한 논쟁을 좀더 공개적이고 활발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성과학 연구기관 세워야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사회에서 진행된 성혁명은, 섹스를 배우자끼리의 종족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한정된 행위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쾌락 자체가 목적인 행위로 전환시켜 ‘섹스와 생식의 분리’를 낳았다. 또 성혁명은 남녀의 성기적 결합만이 아니라 동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성지향성도 허용하는 ‘섹스와 삽입의 분리’라는 결과도 낳았다. 한국 사회에서 진행중인 성혁명이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진행될지 전망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과학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성과학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세계적인 성과학 연구기관인 미국의 킨제이 연구소에서 한국인 최초로 2년간 연구하게 된 강동우 전문의는 “이제 우리나라에도 성과학 관련 각 분야의 균형적 발전과 체계적 연구가 가능한 독립연구기관을 설립할 때가 왔다”고 강조한다. 독립연구기관에 병설된 성의학 전문 의료기관을 양성해, 연구결과의 실질적 활용과 괴리돼 있는 임상 각과의 유기적인 협진을 유도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한다.

    성과학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성의식과 질 높은 성생활을 도와주는 ‘행복의 과학’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성과학은 성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범주를 구분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오르가슴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권력자이며, 사람들에게 성적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끊임없이 강박감을 주는 ‘불안제조업자’일 수도 있다. 그것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없을 때 성과학은 나쁜 권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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