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역사는 운명도, 관념도 아니다”

최초의 사회과학자 몽테스키외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03-25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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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권 분립의 주창자로 추앙받는 계몽주의의 거두 몽테스키외.
    • 그러나 그의 사상이 빛나는 건 그 속에 자유에의 천착과 날 선 현실인식,과학적 사회 분석의 첫 시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법의 정신’을 통해 그를 만난다.
    “역사는 운명도, 관념도 아니다”
    ‘계몽’이란 어둠을 밝힌다는 것이다. 대구지하철 사고를 보며 나는 아직 우리에겐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하에 갇힌 이들에게 유일한 출구라도 알려줄 ‘안전한 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지금, 계몽이란 말은 낡고 촌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광수나 최남선의 글들, 특히 심훈의 ‘상록수’를 연상케 한다. 아무리 가까이 끌고 와도 새마을운동의 요란한 스피커 노랫소리나 조국근대화와 유신이라는 구호 또는 국민교육헌장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그런 계몽의 분위기는 사라졌다. 근대화 대신 민주화란 구호가 등장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대통령 직선제’가 사라졌기에 그를 다시 쟁취하자는 주장이 등장했다. 1980년대 후반 그것이 쟁취되자 우리는 자가용과 지하철의 양분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가용은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로 요란스레 장식되었다. 지하는 아직도 어두운데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과연 역사로서의 계몽이 있었던가? 1789년의 대혁명에 준하는 계몽이 있었던가? 누군가는 조선시대의 저 실학으로부터 우리 계몽의 역사를 찾는다. 그러나 내게 그것은 조선의 지배 이념이던 유교의 한 갈래,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르네상스’라는 말처럼 ‘계몽’이란 단어도 이미 일반명사가 되었으나 ‘르네상스’처럼 화려하게 쓰이지는 않는다. 호텔은 물론 선술집 이름에도 계몽이란 것은 없다. 있다면 오히려 술맛을 해치겠지만. 내가 아는 한 계몽이란 오직 한 출판사의 이름으로 쓰였을 뿐인데, 이 역시 지금은 사라졌다.



    사실 계몽은 르네상스보다 우리 시대에 더 가까우나,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된 느낌을 준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야단스러운 시대에 모더니즘도 아닌 하물며 계몽이랴.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나는 참여정부의 ‘참여’란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단 하나, 내가 참여임을 확인한 것은 대통령직인수위가 아닌 법원에서 발표한 시민의 사법참여, 재판참여에 대한 것이었다. 즉 배심제와 참심제를 말한다.

    이 두 가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비롯해 1215년 영국에서 마그나 카르타로 확정된 뒤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유럽 국가의 관료재판 개혁을 위해 요구된 계몽시대, 그러니까 1789년 대혁명 후 프랑스에서 채택됐다. 그 후 세계 각국은 배심제나 참심제를 채택해 시민의 재판 참여를 인정했으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채택되지 못했다.

    계몽시대였던 1764년, 베카리아는 배심제 도입을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배심제를 찬양한 볼테르는 “프랑스의 형사법전은 시민을 파멸시키고자 하나, 영국의 그것은 시민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그런 주장을 폈다.

    나는 볼테르처럼 배심제가 없는 지금 우리 법제도가 ‘시민을 파멸시킨다’고까지 비판할 용기는 없다. 그러나 관료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법 제도는 춘향이를 단죄한 ‘사또재판’에 다름아니다.

    우리 법원의 배심제 또는 참심제 채택 모색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다음 하나만큼은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지금 같은 재판 체제에서는 배심제든 참심제든 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재판이 판검사의 격무와 권위주의 및 변호사 채택의 곤란 등으로 인해 신중한 증거재판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을 재판에 참여시킨다면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 나오는 식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계몽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이 모든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베카리아는 사형폐지론자로 더 유명하다. 우리는 지금도 그 논쟁을 하고 있다. 볼테르는 이단의 처벌에 반대했다. 우리는 지금도 국가보안법을 두고 있다. 또한 볼테르는 고문 금지를 주장했다. 얼마 전에도 우리 검찰에서 고문으로 피의자가 죽었다. 그것도 검찰이, 인권 보장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찰이 아닌 바로 검찰에서.

    ‘참여정부’라는 노무현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치 이념은 교수의 참여가 아니라 국무총리의 참여인 것 같다. 즉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분권에 의한 국무총리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하고, 앞으로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방향의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즉 대통령은 안보나 외교 등을 맡고, 소위 ‘내치’는 총리에게 일임한다는 복안이다. 이는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리는, 사실은 독재제를 방불케 하는 현행 제도를 개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3권 분립이란 종래 제왕이 독점한 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누어 그 셋 사이의 견제와 균형으로 독재를 막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 대통령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을 입법과 사법에 의해 견제토록 하는 것이어야지,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와 나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종래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을 철저히 줄이고, 대통령과 행정부 사이에서 정치적 바람막이 기능을 하는 국무총리를 아예 없애 대통령이 직접 장관들과 국사를 도모해야 하며, 특히 또 하나의 정부처럼 존재하는 저 막강한 대통령 비서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국무총리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다는 것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4권 분립, 아니 제왕 대통령을 여전히 으뜸에 두되 행정부는 국무총리에게 맡겨 형식적이나마 3권 분립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이번 정부는 그 비서실을 더욱 강화하고 있어서, 과연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우리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행정부 독주 하에 살고 있음은 사실 고리타분한 헌법의 분석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당장 거리를 보라. 어디에나 경찰, 공무원, 군인이 있다. 골목에는 동사무소, 파출소, 군부대가 있다. 이런 거리 풍경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현대 풍물이다.

    우리 현대사에는 대통령 이름뿐이지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의 이름이 없다. 지금도 국회의장, 대법원장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왕조와 무엇이 다른가? 국회의장은 패거리 난장판에서 나무망치를 급하게 두드리고 도망가는 노인 정도로 기억되고, 더욱이 대법원장은 그런 사람도 있나 하는 정도다.

    의회 지도자가 한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를 결정하고, 사법 지도자를 통해 그 시대의 철학을 읽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의회도, 사법도 “없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권은 구태의연하게, 아니 더욱 강한 대통령과 행정부를 지향한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나는 다시 계몽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계몽주의인인 몽테스키외는 3권이 서로 독립해 기능한다는 ‘권력분립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테스키외가 그런 이론을 수립했다고 주장되는 ‘법의 정신’ 제11편에는 3권의 동등한 분립이라는 엄격한 내용을 갖는 권력 분립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엄격한 3권 분립이 역사에서 실현된 경우도 없다.

    흔히 몽테스키외는 로크의 행정권과 입법권의 2권 분립에 사법권을 더하여 3권 분립을 세운 인물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3권 분립이라고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입법권과 사법권은 행정권에 비해 약하다. 특히 재판을 중심으로 한 사법권에 입법권이나 행정권에 버금갈 권력이 부여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재판이란 시민 사이의 분쟁이나 범죄를 해결하려는 수동적 제도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능동적으로 어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몽테스키외도 사법권의 이런 특성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몽테스키외가 사법권을 3권의 하나로 본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다. 로크와 달리 몽테스키외는 판사였던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기 전에 그 시대가 소위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 재위)와 루이 15세(1715~74 재위)라는 절대 군주들이 서서히 몰락하던 시대였고, 왕과 귀족이 정치적 권위를 두고 대립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고 또 하나, 우리로서는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귀족의 정치적 권위는 귀족이 독점한 고등법원이란 권력기관을 중심으로 한 점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몽테스키외는 그 고등법원의 판사를 거쳐 법원장까지 지낸 점을 주의하자. 또한 계몽사상가 중에서 몽테스키외는 귀족, 볼테르는 시민(부르주아), 루소는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도 눈여겨보자. 물론 그런 점만으로 그들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시대는 가톨릭이 지배한 시대여서 지금 우리가 아는 사회과학이란 신학 교리에 불과했고,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란 전무했음도 이해하자. 르네상스에서는 인문과학과 예술은 존재했으나, 사회과학은 없었음도 이해하자.

    그리고 르네상스에서 인간이란 군주와 귀족 및 그들에 결부된 특권계급에 불과했음도 기억하자.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찬양한 ‘욕망의 달성’도, 베이컨이 말한 ‘아는 것이 힘이다’도 그 소수를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런 세상살이는 르네상스 후 2세기가 흐른 18세기까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몽테뉴(1533~92)와 2세기쯤 세월 차이가 나는데도 가끔 혼동된다. 백과사전에도 같은 쪽의 아래위에 나온다. 이름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우선 고향이 같고 출신이 같다. 즉 두 사람 모두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옛 성에서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도 보르도 부근에는 수많은 성들이 남아 있다.

    거대한 학문의 토대를 구축하다

    그들이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된 점도 같다. 1557년 몽테뉴가 그랬듯이 1713년 몽테스키외는 보르도 고등법원의 판사가 되었고, 몽테뉴보다 더 출세해 1716년에는 고등법원장까지 오른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러나 이 출세는 당시 고등법원장을 세습하거나 매매하는 관습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법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고전 연구에 몰두한 점도 같다. 그러나 16세기를 산 몽테뉴와 달리 자연과학이 발달한 18세기의 몽테스키외는 당시 막 설립된 보르도학술원에서 과학, 특히 물리학·생물학·지학도 연구한다. 그런 과학의 연구는 뒤에 몽테스키외를 법학은 물론 역사학·정치학·사회학 등 사회과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게 하는 거대한 학문의 토대를 형성한다.

    당시에는 또한 지리상의 발견 이래 유행한 동양 취향이 왕성했다. 그가 1721년 완성한 ‘페르시아인의 편지’도 그런 배경에서 쓰여진 것이다. 최근 우리말로 다시 번역된 이 책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 및 사회풍속을 풍자한 ‘극히 위험한 사상’이어서 익명으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빵처럼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밥처럼 팔린’ 것 같지 않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몽테스키외가 동양에 대한 책을 쓴 당시의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인종에 대한 획일적인 분류 방법을 채택한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식민지 침략의 학문으로 본격화되는 것의 선구를 이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나는 몽테뉴와 함께 몽테스키외가 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노예제도나 식민정책을 반자연적 현상이라고 비판한 점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본다.

    “역사는 운명도, 관념도 아니다”

    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태양왕’ 루이 14세의 초상

    또한 반자연에 대립되는 자연정치라고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자애로운 가부장 정치도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만 비판할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정도도 당시로서는 볼테르가 말했듯이 가장 격렬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출판하고 나서 몽테스키외는 파리에서 산다. 물론 법원장 역할은 1726년 37세에 그것을 ‘팔아 치울’ 때까지 10년간 지속했으나 법원 일에는 아랑곳없었다. 판사직을 37세에 사임한 점도 몽테뉴와 똑같고, 그 후 유럽 전역을 여행한 점도 같다. 그러나 그는 유럽 대륙만을 여행한 몽테뉴와 달리 영국까지 간다. 이 점이 그가 1748년 ‘법의 정신’을 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여행 후 고향의 성에 칩거해 집필에만 몰두한 점도 두 사람은 같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1세기 반의 세월은 몽테뉴에게는 ‘에세이’를 남기게 하나, 몽테스키외에게는 역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하는 책들을 쓰게 한다.

    먼저 1734년 낸 ‘로마인의 위대성과 그 몰락의 원인에 대한 고찰’은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역사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를 분석한 점에서 정치학의 선구로 꼽힌다. 지금은 상식적인 이야기이나 아직 신에 의한 운명적 역사관에 젖어 있던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기본은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정에 대한 비판, 특히 ‘태양왕’을 자처한 루이 14세의 로마제국 같은 세계 왕국 건설 시도가 시대착오적이고 실현성이 없는 것임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어 1748년 법학은 물론 사회학의 선구가 되는 ‘법의 정신’을 저술하나, 20년에 걸친 집필의 노고로 백발이 되어 그 7년 뒤 죽는다. 이 책 역시 “모든 국가에 적합한 정치나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법에 대한 연구는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지금은 상식적이나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탓에 출판 3년 뒤 금서 목록에 오른다.

    몽테스키외 자신 이 점을 미리 우려한 듯 “한번 읽어보기만 하고 20년의 사업을 판단치 말라는 것, 이 책 전체를 칭찬하건 비난하건 간에, 그 몇몇 구절에 구애치 말라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이 작품 전체의 의도 속에 그것을 찾아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지금 일반인은 물론 법학도 대부분도 ‘법의 정신’을 읽지 않는 것을 암기 중심의 고시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난잡하게 모아진 자료들을 멋대로 섞은 것이어서 도대체 ‘고전’이라는 이름의 권위에 의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역시 몽테스키외 자신이 자랑스럽게 말한 ‘의도’는 분명히 있고, 그것을 알면 이 책이 왜 ‘고전’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의도는 바로 ‘자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전제는 나쁘므로 권력은 분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권 분립론은 ‘법의 정신’의 일부, 즉 제11편에 설명된 것에 불과하다. 그 분량은 우리말로 번역된 책 전체인 564쪽 중 몇 쪽에 불과하다. 물론 양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564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그 부분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한 권의 책을 그 전체로 읽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다양성과 보편성, 현실성과 구체성

    나는 도리어 3권 분립론보다 더 중요한 자유를 향한 외침들을 이 책에서 본다. 예컨대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한 사형 선고에 대한 비판, 밀고자나 고문에 의한 증거 유도나 모든 형태의 잔혹한 형벌의 폐지 주장, 반역 고발에 대한 회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심제의 채택을 통한 시민의 재판 참여 주장과 같은, 현대 재판 제도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들어 있다.

    ‘법의 정신’ 일부는 물론 한 권 전체, 아니 그의 저술 전부를 읽는 경우 그 핵심을 나는 ‘다양성과 보편성, 현실성과 구체성’이라는 휴머니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르네상스의 기본정신이라고 나는 지적한 바 있는데, 계몽주의 사상가들 중에서 그런 르네상스 정신을 몽테스키외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솔직히 말해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론보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반한다. ‘법의 정신’을 비롯한 그의 저술은 지금 우리의 눈에 크게 흥미롭지 않다. 그러나 ‘법의 정신’이 아닌 ‘그의 정신’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 시대를 ‘다양성과 보편성, 현실성과 구체성’에 입각해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에 대해서 그렇다. 몽테스키외는 당대를 지배한 가톨릭 신학의 교리에 사로잡힌 정치관, 사회관, 역사관을 비판했듯 당시 법학을 비판했다. 사실 그의 법에 대한 비판은 19세기 말에 와서야 법비교학이나 법사회학, 법사학으로 열매를 맺는데, 우리 법학은 지금도 그런 분야 또는 시각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다.

    그런 학문들이 고시 과목에 밀려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은 전문적인 문제라고 하더라도, 19세기말 유럽에서 일본인들이 베껴와 일제 시대에 강요한 왜곡된 우리 법이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또 그 괴리를 우리 현실에 맞추기는커녕 법조문의 해석에만 얽매여 재판이 진행되는 현실은 더욱 심각한 것이다.

    예컨대 최근 인수위는 파업 등을 이유로 한 엄청난 손해배상 판결 때문에 노동조합의 약화는 물론 조합원의 분신 자살까지 벌어진 현실에 대한 대책으로 노동법원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런 새 법원의 설치로 문제가 해결될까? 19세기말에나 통했을 법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상, 그것을 신주처럼 믿는 판사가 있는 이상, 그런 법을 그런 판사가 보고 내리는 판결이 변할 리 없다.

    더욱이 사또재판식의 관료재판이 유지되는 한 더더욱 변할 리 없다. 여기서 위에서 설명한 시민의 재판참여가 다시 긴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즉 노동자의 참여가 없는 관료재판을 이름만 노동법원으로 바꾼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회의 ‘현재’를 분석하라”

    몽테스키외를 귀족 옹호의 보수주의자로 규정한 알튀세르는, 동시에 몽테스키외가 스승도 없이 홀로 자기만의 탐구를 거듭하여 30년 만에 새로운 세계를 찾았다고 평가한다. 그 새로운 세계를 알튀세르는 정치과학이라고 부르나, 그 내용은 ‘무수한 법과 습속’이다. 몽테스키외는 그 속에서 “사람은 결코 의지에 의해서만 지배당하지 않고 있음”을 믿게 된다.

    즉 인간은 항상 합리적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모든 법은 ‘보다 더 일반적인 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 일반적인 법이 정신이다. “구체적인 것을 충분히 고찰할수록 원리의 확실성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부분을 고찰하는 것은 모두 전체를 판단하기 위해서이고, 모든 원인을 검토하는 것은 모든 결과를 알기 위해서이다.”

    알튀세르가 지적했듯이 몽테스키외는 당대의 계몽주의자들과는 달리 사회계약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코와 같다. 즉 당대 사회계약론자들이 당위를 주장했음에 반해 몽테스키외와 비코는 사실을 분석한다. 몽테스키외는 사회란 이미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 기원을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 제1편 제1장에서 법을 정의하며 먼저 최광의(最廣義)의 그것을 검토한다. 즉 법은 ‘사물의 성질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법칙과 같은 것으로 “먼저 원시이성이 존재하고 법이라는 것은 그것과 다른 가지가지의 존재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및 이들 가지가지의 존재 상호간의 관계이다.” 즉 제1편 제2장에서 설명한 자연법이다. 자연법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이어 제1편 제3장에서 실정법을 설명한다. 그것은 만민법과 정치법 및 시민법이다. 이는 인간 이성이 적용되는 특수한 경우로서 각 민중에게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민중의 법이 다른 민중에 적합할 수 없다. 그것은 지세, 기후, 민중의 생활양식, 법이 인정하는 자유의 정도, 종교, 민중의 성품, 재화, 상업, 습속 등의 여러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법의 정신’을 형성한다.

    실정법은 ‘균일성 속에서의 그 다양함과, 항상성 속에서의 그 변화를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 즉 인간제도의 다양화의 법칙과 그 발전의 법칙을 인간제도 자체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가능함’을 전제한다. 그것은 ‘더 이상 관념적인 명령이 아니라, 현상에 내재하는 관계’이다.

    따라서 법은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 없이, 연구하고 비교함으로써, 시행착오를 통해, 사실 자체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몽테스키외는 끝없이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요인인 기후, 토양, 풍속, 제도들의 내적 논리 등등을 연구하여 인간이 왜 법을 일탈하는가를 탐구한다. 물론 몽테스키외는 그러한 일탈 판단의 기준이 되는 보편적인 당위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몽테스키외의 관심은 그런 보편적 당위의 연구에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실정법의 분석에 있다.

    “역사는 운명도, 관념도 아니다”

    루이 14세가 완공한 베르사유 궁전. 이즈음부터 왕의 절대 권위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상 제1편의 설명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그가 실제로 발견한 원리는 무엇인가? ‘법의 정신’은 모두 31개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다시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제2~13편은 정체와 그 본성 또는 원리에 의존하는 다양한 법에 대한 이론인 유형론을 담고 있다. 둘째, 법을 형성하는 요인으로서 물질적인 요인인 기후(제14~17편), 토양(제18편), 상업(제20~21편), 화폐(제22편), 인구(제23편), 그리고 정신적인 요인인 풍속(제19편), 종교(제24~25편)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셋째, 역사에 관한 것으로서 로마상속법(제27편), 봉건법의 기원(제28, 30~31편), 법제정의 방법(제29편)을 설명한다.

    이러한 유형, 요인 및 역사라는 세 가지 설명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새로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체계적 구조가 있다. 첫째, 각 정체(공화정, 군주정, 전제정)는 고유한 성질과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질이란 정체의 구조이며, 원리란 정체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정념이다. 정념은 시민의 현실적 삶 전체를 정치적으로 표현한다. 원리는 추상적인 본성의 구체성이다. 현실적인 것은 양자의 통일성과 전체성이다.

    정체의 본성은 권력을 누가 장악하고 집행하는가에 따라, 공화정은 인민 전체 또는 일부가 주권을 갖는 것, 군주정은 1인이 통치하나 고정되고 확립된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 전제정은 역시 1인이 통치하나 법이나 규칙 없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정체는 필연적으로 고유한 동력인 원리를 갖는다. 공화정은 덕성, 군주정은 명예, 전제정은 공포다. 예컨대 덕성이란 시민들이 스스로를 공적 이익에 희생시키는 것,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정념보다 조국을 선호하는 것을 말한다. 조국애 즉 평등애를 말한다.

    몽테스키외는 정체의 본성 및 원리의 전체성에 대한 이러한 사고로부터 새로운 이론적 범주를 제안한다. 몽테스키외 이전에도 법의 다양성에 대한 설명은 있었으나, 그것은 본성에 대한 설명에 그쳤다. 따라서 정념은 몽테스키외에 의해 최초로 논리적으로 설명된다. 즉 제4편에서 제7편까지 기술된 교육, 토지분할, 재산 정도, 재판 기술, 형벌과 포상, 여성의 지위, 전쟁의 지휘 등을 결정하는 법의 내용에 대한 고찰은 몽테스키외의 시대까지 행해지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필연성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국가란 현실적인 전체성이며 국가의 입법과 그 제도 및 풍습의 모든 특징은 그 내적 통일성의 효과이자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설을 사실들 속에서 발견하고 입증한다.

    정체의 본성과 원리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모순되는 경우 그 본성은 유지될 수 없으나 일정한 기간에는 존속한다. 원리를 상실한 정체는 부패한 정치라고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 제8편에서 말한다. 이는 당시 계몽주의자가 공유한 믿음, 즉 역사는 목적을 가지며 이성과 자유의 ‘계몽’ 왕국을 추구한다는 믿음을 몽테스키외는 갖지 않았음을 뜻한다. 또한 이는 몽테스키외가 마르크스 이전에 비관념적으로 역사를 사유한 최초의 인물임을 의미한다.

    “역사는 운명도, 관념도 아니다”

    익명으로 발표돼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페르시아인의 편지’

    나아가 몽테스키외는 역사의 동력을 최초로 탐구한다. 역사의 발전은 본성과 원리 사이의 통일성 자체에 내재하는 관계에 의해 지배된다. 그 둘이 조화로우면(공화정 로마와 덕 있는 로마인들) 국가의 전체성은 평온하고 사람들은 위기 없는 역사를 영위한다. 반대로 그 둘이 모순이면(공화정 로마와 덕 없는 로마인들) 위기가 발생한다.

    여기서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본성은 그 모순을 줄이고자 하나 그것은 변화한다. 예컨대 상황의 도움으로 새로운 조화가 출현하거나(전제 로마와 공포 속 로마인들) 파국에 이른다(이교도에 의한 정복). 본성과 원리 중에서 기본적인 것은 원리다. 이는 마르크스가 기본적인 것을 경제로 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따라서 정체의 유형론과 역사 사이의 통일성이 설명된다.

    둘째, 그 밖의 결정요인들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영토’라 하자. 작은 나라는 공화정, 중간 크기는 군주정, 대형은 전제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기후가 다시 문제된다. 추운 나라는 1인 통치, 온화한 나라는 공화정이라는 식이다. 다음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1인 통치냐 공화정이냐가 결정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고 간접적이다. 제18편 제3장에서 말하듯 “토지는 그 비옥함에 비례하여 경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에 비례하여 경작된다.” 그 자유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 풍속, 상업, 화폐 및 종교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에 의해 국민의 일반정신이 생긴다. 이러한 요인들은 기계적이지 않고 순환적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즉 기후나 토양이 법을 결정하듯이 법이 거기에 반작용을 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그는 세 가지 정체를 설명한다.

    “권력에 덕을 요구하는 건 미친 소리”

    공화정의 경우 인민이 전체로서 주권을 가질 때 민주정이고, 주권이 인민의 일부에 속할 때 귀족정이다. 투표권을 정하는 것이 공화정의 기본법이고, 인민이 그 집정관과 의원을 선출한다. 루소는 대표를 통한 대의민주정을 부정한다. 반면 몽테스키외는 대표가 없는 민주정은 인민적 전제정이라 말한다. 몽테스키외는 인민의 통치를 믿지 않으나, 대표를 선택하는 능력은 믿는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몽테스키외가 말한 대표는 입법, 행정, 사법은 물론 군사나 경제, 심지어 문화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몽테스키외는 자신이 산 시대에 공화정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 로마와 같은 소국에서만 가능한데 현실은 중간 또는 대형의 제국이고, 또한 덕을 요구하나 현실은 사치와 상업이 지배한다. 따라서 덕을 주장하는 것을 몽테스키외는 미친 소리라고 말한다.

    공화정의 덕성은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삶 전체가 끝없는 교육이다. 왜냐하면 사적 인간에서 공적 인간으로의 회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법은 언제나 그것을 상기시키는 국가의 회개다. 덕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통치자의 권력 안에 시민들을 가둬둘 수 있도록 교화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공화정은 루소의 인민의 공화국이 아닌 통치자의 공화국이다.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시대를 봉건적 군주정의 시대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정되고 확립된 법에 의해 다스려진다. 군주정의 원리인 명예란 ‘각자 및 각 계급의 편견’이라고 몽테스키외는 말한다. 명예는 허위로서 진실이나 도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솔직, 복종, 공손, 관대 등을 뜻한다. 그것은 명령하는 모든 것에 멋대로 날조된 규칙을 추가하고 의무를 멋대로 확장하거나 제한한다.

    홉스는 명예를 타인을 넘어서려는 끝없는 인간적 투쟁의 욕망에서 찾았다. 또한 헤겔은 위신과 인정을 위한 보편 투쟁을 야기하는 보편적 정념으로 이해하고, 그것으로 주인과 노예가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명예란 그러한 구분 전에 이미 존재하며, 투쟁 이전에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귀족의 것이라고 보았다.

    몽테스키외는 유럽의 현대가 군주정이듯이 아시아의 현대는 전제정이라고 한다. 그것은 극한의 공포 정체이자 지배의 극한으로 묘사된다. 이는 명백히 오리엔탈리즘적이나, 몽테스키외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전제정은 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어떤 구조도 없이 종교를 유일한 권위로 삼는다. 그것은 부패하고 왜곡된 군주정으로 결국은 인민혁명을 유발한다. 따라서 남는 것은 군주정뿐이다.

    몽테스키외는 3권이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즉 그는 행정권은 입법권을 저지하는 권능을 가지며, 반대로 입법권은 행정권이 법을 어떻게 집행하느냐에 대해 감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사법권이 입법권에 의해 침해되는 세 가지 예외를 인정하기도 한다. 즉 귀족은 입법부의 귀족에 의해 구성되는 상원에서 재판받고, 정치적 사건은 하원의 고발에 의해 상원에서 재판하며, 입법부의 특별사면권을 인정한다.

    이러한 3권의 관계는 흔히 3권 분립의 내용인 견제와 균형-현대의 그것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할지라도-의 관계로 설명된다. 따라서 몽테스키외가 그런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3권 분립을 설명했다 해서 그를 현대 3권 분립론의 창시자가 아니라고 보거나 그런 주장을 신화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비판은 몽테스키외가 실제로 문제삼은 것은 권력분립이 아닌 권력의 결합이라는 비판으로 나아간다. 몽테스키외에 의하면 3권 중 사법권은 권력이 아니라 ‘무’이다. 그것은 일정한 등족(等族)이나 직업에 속하지 않으며, 나아가 ‘법의 말을 말하는 입, 그 힘이나 엄격함을 연화할 수 없는 무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입법권과 행정권인데, 몽테스키외에 의하면 당시 유럽에서 입법권과 행정권은 군주가, 사법권은 신민이 갖고 있다. 이를 그는 제한정체라고 하고 정치적 자유는 그곳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민주정 또는 귀족정은 자유국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행정권은 1인의 군주에 속해야 하나, 입법권은 다수에 의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행정권이 입법권에 의해 선출된 몇 사람에게 부여되면 자유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몽테스키외가 사법권을 군주의 것에서 제외시키고, 행정권이 입법권에 의한 선출자에 부여되는 것을 부정한 것을, 알튀세르는 귀족을 왕과 인민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자 귀족이라는 보호벽을 통해 왕을 보호하려 한 것으로 본다. 몽테스키외 자신이 귀족이었고 귀족 계층이 당시의 군주정에 위협을 느낀 점도 사실이다.



    따라서 몽테스키외를 민주주의적 3권 분립론의 주창자로 숭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명백히 군주정을 옹호한 자였고, 그것으로 자신이 속한 귀족의 보호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몽테스키외에서 주목할 점은 개인적 또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그런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그의 연구가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이 ‘다양성과 보편성, 현실성과 구체성’이라는 휴머니즘 정신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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