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9일 TV로 생방송된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대화
이날의 조찬은 검사장급 이상 검찰간부에 대한 승진 및 전보 인사를 단행하기 위한 자리. 먼저 강장관이 인사안을 내밀며 결재를 요청했다.
“한번 보시죠.”
“아이고 안 볼래요. 강장관이 잘 알아서 했겠죠.”
노대통령은 손사래를 치며 서류를 물리쳤다. 강장관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그러나 강장관은 다시 서류를 노대통령에게 되밀며 말했다.
“그래도 보시죠.”
강장관의 강권(?)에 노대통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 서류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인사 서류엔 보직은 물론 각 간부에 대한 이른바 ‘존안 파일’이 첨부돼 있었다. 존안 파일이란 얼굴사진과 함께 출신과 학력, 경력은 물론 업무 능력 등 인사대상자에 대한 모든 내용이 들어 있는 ‘병풍식 두루마리’. 한번 기재되면 영원히 지울 수 없다는 게 존안파일만이 갖는 특징이다. 설령 잘못된 기록일지라도 추가 기재를 통해 바로잡을 수 있을 뿐이다.
노대통령은 한 검찰 간부의 얼굴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 어때요?” 하고 물었다. 강장관 대신 26년째 검찰에 몸담고 있는 송 총장내정자가 답변에 나섰다.
“예. 그 사람 괜찮습니다. 업무 능력도 뛰어나고 검찰 내부에 신망도 높은 편입니다.”
“아 그래요.”
노대통령은 몇 사람 더 물어보더니 곧바로 결재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송 총장내정자에게 몇 가지 주문을 했다.
“검찰은 국민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도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검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떻게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죠.”
노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의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검찰에 부탁이나 지시 전화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SK 수사도 검찰이 알아서 하십시오. 국익에 대한 고려도 검찰이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노대통령은 이날 검찰의 정치적 중립 보장을 위해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강장관이 알아서 했겠죠”
노대통령은 이에 앞서 9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과 평검사와의 토론회에서도 검찰을 장악할 의도가 없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노대통령의 말대로라면 그가 검찰을 장악할 의도는 없어 보인다. 또 이번 검찰 간부 인사에 대해 “그런대로 무난하다”는 평가도 들린다. 그런데도 검찰 내부에서는 이번 인사를 두고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운 검찰 장악”이란 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노대통령은 실제로 12일 청와대에서 박희태(朴熺太) 대표권한대행 등 한나라당 수뇌부와 가진 여야 수뇌부 회담에서 다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갖던 도중 엉겁결에 “검찰은 이번에 꽉 쥐었는데…”라고 털어놓았다. 실수한 발언인지 몰라도 그 뜻은 이번 인사를 통해 노대통령이 ‘검찰을 장악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평검사들이 ‘검찰 장악하기’라는 의혹을 제기하자 여러 차례 “절대로 그럴 의사가 없다”며 부인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검찰을 장악할 의사가 있었던 걸까.
이는 단순히 추측해서 될 일이 아니다. 노대통령이 정말 이번 인사에서 검찰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인사 내용을 꼼꼼히 뜯어봐야 한다. 의도가 있건 없건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런 결과가 나타났는지 여부이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검찰 인사파동’의 원인도 여기서 출발한다.
청와대를 떠난 검찰 간부에 대한 인사안은 이날 오전 10시 법무부에서 발표됐다.
법무부는 “검찰 내에 신망 있는 검사들을 전진 배치하고 검찰의 신뢰를 손상시킨 책임이 있는 간부들은 요직에서 배제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또 “기수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에 따라 간부들을 발탁해 적재적소에 배치,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인사안을 받아든 검사들은 경악했다. 인사가 파격적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예상은 했지만 이처럼 ‘과격’한 인사일 줄은 전혀 몰랐던 것. 대검의 한 간부는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들어선 5공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검과 법무부의 고위 간부들은 “이번 인사는 원칙 없는 인사”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검찰 중간 간부들도 “도대체 발탁의 근거가 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평검사들은 “나름대로 문책과 발탁을 했다고 하지만 일부 인사의 경우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며 평가절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