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봄에 피는 꽃

  • 글: 이오덕 아동문학가

    입력2003-03-25 1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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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에 피는 꽃
    버들강아지

    봄에 피는 꽃이 세상에서 그 누가 봄을 가장 애타게 기다렸던가? 그것은 겨우내 얼어붙은 냇가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떨던 나무들이었다. 그리고 그 벌판의 얼음 위에서 썰매 타기로 날을 보내던 아이들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겨울, 그때는 요즘보다 더 추웠을 텐데, 우리는 내복이란 것을 몰랐고, 양말조차 변변히 신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 아니면 날마다 얼음 덮인 시내와 논으로 못으로 달려가 썰매를 탔다.

    그 썰매는 시게또라 했다. 마을의 아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일찌감치 시게또를 만들어 놓는다. 재료는 담배 창고 짓는 공사장 같은 데서 주워 놓은 판자 조각과 철사와 못이었다. 늦가을, 솔괭이(관솔 옹이)를 잘라 팽이를 다듬던 톱과 낫으로 시게또를 만들어 놓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겨울날 얼음이 꽁꽁 언 마을 앞 무논이나 거랑(내)에는 언제나 아이들로 들끓었다. 그 얼음판에서는 누구 시게또가 일등으로 빨리 가나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만 사고가 났다. 저쪽에서 오는 아이와 내가 아주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죽었구나 싶었다. 머리가 아주 박살이 나 버린 듯했다. 겨우 정신이 돌아와서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굵은 밤알만한 혹이 무섭게 만져졌다. 그런데 나하고 부딪친 아이와 그 패거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마구 몰아세웠다. 두 아이가 서로 부딪쳤으면 얼음판에 무슨 교통규칙이란 것도 없었으니 앞을 안 보고 달린 두 아이가 모두 잘못했을 터인데, 그 아이들은 내게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장터 아이들은 본래 그랬다.



    시게또 타기는, 거랑이나 무논보다 좀 멀지만 못이 더 넓어 좋았다. 추위가 한풀 꺾여서 얼음이 못가에서 조금씩 녹기 시작했는데도 우리는 아침부터 시게또를 옆구리에 끼고 산골짝 못으로 달려갔다. 시게또에 앉아서 송곳으로 얼음을 찔러 쫙 나가면서 신나게 돌아다니는데, 어느 곳을 지나니 그 넓은 얼음장이 금이 가서 배처럼 움직이는가 싶더니 조금 스르르 내려앉는다. 우리는 그게 도리어 재미있다고 되돌아서 또 그곳을 지나오고 했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나 싶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해서 추운 겨울을 얼음판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냇가 모래밭 한쪽이나 방천둑 밑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버들강아지다. 아직도 찬바람이 귀를 에는 벌판에서 아이들 무릎 높이로, 더러는 키 높이로 자라난 갯버들 가지마다 눈부시게 보송보송 피어난 귀여운 버들강아지들! 모진 추위를 이겨낸 겨울 아기들!

    “야아, 버들강아지다!” “어디, 어디?” “이것 봐, 벌써 나왔어.” “정말! 얘들아, 버들강아지다!”

    아이들은 모두 그 버들강아지를 들여다보고 감탄한다. 두 손으로 감싸안고 살짝 손가락을 대보고 한다. 아, 네가 왔구나. 얼마나 보고 싶었던 너였던가. 정말 그것은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지냈던 그립고 그리운 동무였던 것이다.

    버들강아지는 진정 봄의 선구자였다. 그리고 겨울 들판의 아이들은 버들강아지와 너무나 닮았다.

    하지만 이제 그 버들강아지는 사라졌다. 버드나무와 함께, 피라미와 버들붕어들이 헤엄치던 냇물도 방천둑도 간곳이 없어졌다. 어쩌다가 썩은 물 개천가에 버드나무가 있어도 그곳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은 죄다 방 안에 갇혀 봄이 오는 것도 달력을 쳐다보고 머리로 알 뿐이다.

    지난해 어느 자리에서 꽃다발을 받았는데, 그 꽃다발 속에 버들강아지가 있었다. 그런데 빛깔이 이상하다 싶어서 살펴보았더니 물감을 들여 놓은 것이었다. 그뿐 아니고 그 버들가지를 얇은 비닐로 온통 싸 감아 놓았다. 세상에, 이런 잔인한 짓을 하다니! 인간이 참으로 끔찍한 동물로 되어 버렸구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교과서에도 나오고 노래로도 부르는 버들강아지가 이런 것이라고 알겠지. 어른들이 읽는 책도 아이들의 동화집 동시집도 뻔질뻔질한 비닐로 겉장을 입힌 것이 잘 팔린다고 들었다.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포장한 상품과 도시와 인간! 정말 섬뜩한 세상이 되었다.

    ※ 남북한의 모든 사전에서 버들강아지를 ‘버들개지’라고 잘못 적어 놓았다. 버들강아지는 이른 봄에 피는 꽃이고, 버들개지는 늦은 봄에 흰 털이 달린 씨앗으로 바람에 날아다니는 것이다.

    할미꽃

    얼음이 다 녹으면 아이들은 산으로 짠대를 캐 먹으러 간다. 이 짠대는 지금 표준말의 ‘잔대’와는 다른 것이다. 이른 봄 잔디밭에 쑥빛으로 싹이 돋아나는데, 그 뿌리가 달근하다. 호미를 들고 짠대를 캐 먹으러 뒷산을 오르내린 지 며칠쯤 지나면 어김없이 할미꽃을 만나게 된다. 할미꽃도 양지바른 잔디밭 마른잎들 속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기 때문이다. 땅에 딱 붙은 키로 수줍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할미꽃은 피어나도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곁에 가서 보면 손가락 사이에 보드레한 꽃송이가 고개를 쳐드는데, 아, 그 고운 진자줏빛! 야, 할무대다, 할무대!(우리 고향에서는 할무대라 했다) 할무대 다! 내가 맨 처음 봤어! 이래서 할미꽃을 맨 처음 본 아이는 마을에 가서도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날부터 할미꽃은 며칠 사이에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피어났고, 봄은 할미꽃과 함께 왔던 것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 교단에 섰을 때, 새학년 새교실에서 시를 가르친 것도 흔히 할미꽃에서 시작했다.

    할미꽃 잎이 말랐기에파 보니맹아리가 노랗게 올라온다.풀로 덮어 주었다.(1959. 2.25 상주 공검국교 2년 권두임)

    생명에 대한 사랑은 자연 속에서 느끼게 된다.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면서 참된 사랑을 배운다.

    할미꽃 속에까만 것도 있고노란 것도 있네.가만히 들여다보니할미꽃이 어예 생겼노 시프다.(1969. 4.13 안동 대곡분교 3년 김순희)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의 신비스러움을 이렇게 해서 또 받아들인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얻어 가지게 되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한테서 배웠던 노래는 ‘뒷동산의 할미꽃(줄임) 싹날 때도 할미꽃 호호백발 할미꽃’ 어쩌고 하는 것이었다. 그 노래는 그저 웃기는 말일 뿐이다. 할미꽃이란 이름부터 내 느낌으로는 맞지 않다. 그 꽃 모습은 귀여운 아이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지, 결코 할머니가 허리를 꼬부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꽃이 다 지고 난 뒤에 하얀 털을 달고 있는 씨앗들을 보고 할머니 머리 같다고 해서 할미꽃이란 이름을 붙였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꽃이 아니다.

    할미꽃은 이른 봄부터 우리나라 어느 들판 어느 골짜기를 가도 논둑이고 밭둑이고 신작로가에까지 꽃밭을 만들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는 풍경의 하나는, 보통학교 1학년 첫 소풍 날이었는데, 종달새 소리를 들으면서 걸어가던 십릿길 냇가의 그 넓은 돌자갈 벌판에 온통 눈이 모자라게 피어 있던 할미꽃 꽃밭이었다.

    그런데 이 할미꽃도 이제는 본 지가 까마득하다. 할미꽃도 이 땅에서 거의 모두 사라졌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산골에서도 할미꽃을 볼 수 없다.

    진달래는 참꽃이라 했다. 할미꽃과 참꽃, 어느 것이 먼저 피나? 거의 같이 핀다. 다만 어느 쪽을 먼저 보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양지쪽 따스한 곳이면 참꽃이든 할미꽃이든 일찍 핀다. 그리고 참꽃은 꽃망울을 가지째 꺾어 와서 병에 꽂아 방 안에 두고 몇 밤을 자고 나면 활짝 핀다.

    참꽃이 한창 필 때는 살구꽃도 피고, 조밥꽃 이밥꽃도 피어나 온 산이 꽃천지가 된다. 그러면 아이들은 날마다 참꽃을 보러 산에 올라간다. 꽃을 따 먹고, 꽃방망이를 만들고, 꽃싸움을 한다. 참꽃은 꺾어도 꺾어도 무진장으로 있고, 그렇게 산마다 온통 꽃으로 덮여 있는데도 참꽃만 보면 반갑고 노래가 나온다. 잔솔밭(이 잔솔밭이 그대로 참꽃밭이다)을 뛰어다니면서 꿩병아리를 쫓고, 멧새알이 들어 있는 둥지를 찾아내고, 딱주(잔대)뿌리를 캐 먹는 것도 즐거웠다. 우리들 어린 시절의 봄은 그렇게 해서 꽃동산에서 보냈던 것이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버들강아지도 할미꽃도, 참꽃이 필 때 찾아와서 빨랫줄에 앉아 재재골재재골 뭐라고 인사하던 그 오랜 옛 친구 제비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들었던 노래가 ‘보리밭의 종달새 봄이 왔다고’로 시작되는 윤복진 선생의 동요였다. 그 노래는 내가 아기로 누님 등에 업혀 다닐 때 누님이 불러 주시던 노래였다. 그런데 이제는 봄이와도 종달새 소리를 들을 길이 없다.

    나를 키워 주고 내 영혼이 자리잡을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그 산천의 꽃들이며 새들이며 물고기들이 다 사라진 이 적막강산에, 그래도 진달래 참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서 해마다 봄이 와서 진달래 붉은 산을 쳐다보면 눈물이 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땅에다만 있는 것은 납덩이 같은 하늘뿐인데들이고 산이고 물이고 모조리 다 삼키고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는도시라는 괴물뿐인데그래도 너는 앞날이 있다는 것이지 꺾이고 뽑히고 밟히고 또 짓밟혀도살아남은 끈질긴 목숨이 강산 영원한 지킴이네 이름은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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