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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86 참모들, ‘盧心’이용하면 곧 비판 받게 될 것”

노무현 대통령 향한 김근태 의원의 쓴소리

  • 글: 엄상현 gangpen@donga.com

“386 참모들, ‘盧心’이용하면 곧 비판 받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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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권 전 고문이 다시 정치일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정계복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고문(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이 아직도 권고문이라고 부른다)의 정치 복귀 여부는 본인의 판단과 결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교동은 더 이상 정치적 실세그룹이 아닙니다. 실세라는 힘을 활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복귀 자체를 막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권고문 자신이 ‘김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본인도 현실정치를 그만하겠다. 김대통령의 대화의 상대자로 남겠다’고 말한 사실을 많은 국민이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권고문으로서는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억울한 일도 많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세대의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정계 원로로서 국민에게 기억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권 전 고문에게는 빚을 진 기분일텐데요. 권 전 고문은 ‘신동아’와의 인터뷰(2003년 3월호)에서 김의원께서 양심고백 후 직접 찾아와 사과를 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좀 말씀해주시죠.

“권고문이 구속됐다가 시내 모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갔었습니다. 가서 미안하다고 했죠. ‘양심고백한 것이 권고문에게 부담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도움은 내가 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권고문에게 부담이 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만일 그 돈을 영수증 처리했다면 권고문이 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의원께서는 양심고백 직후(2002년 3월12일) 후보에서 사퇴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당 안팎에서 굉장한 역풍이 불었습니다. ‘왜 한나라당에 빌미를 주느냐’ ‘안 받았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는 비판이 거셌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제주도 대선후보경선 토론방송에서 ‘김근태가 양심고백한 이후를 보니 자기는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제주 울산에서 꼴찌를 했는데 정말 쓰라렸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광주에서의 경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인들로부터 후보단일화 요구를 강하게 받았습니다. 노무현·김근태가 후보 단일화해야 이인제를 꺾을 수 있다는 이유였죠. 나도 그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소 서운하기도 했고 기회를 더 갖고도 싶었지만 그것이 대의였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민주당은 성공적인 국민경선을 치르고도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빌미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당내 흔들기가 시작됐습니다. 반면 노후보와 쇄신파 의원들은 ‘노무현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당시 김의원께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는데요. 노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후보와 가까운 정치인들이 노무현당을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던 것은 부패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쇄신파는 DJ당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노무현당으로 하자는 주장이었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습니다. 노무현당의 결과는 뻔했습니다. 당도 노후보의 위상도 소수로 전락할 게 불을 보듯 뻔했던 겁니다. 만일 그때 당이 분당사태로까지 이어졌다면 노무현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분당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 상식적인 정치인은 모두 동의했고, 저 역시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 비겁자라는 말은 못 들어”

―김의원께서는 8·8 재보선 당시 선거 특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습니다. 당시 재보선 후보 인선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재보선 참패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후보 인선과정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나요.

“무엇보다 민심이 떠나 있었습니다. 지자체 선거에서도 부패정권 심판론이 먹혔는데 그게 계속되고 있었던 거죠. 나도 정치인인데 성과 없는 선거를 맡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노후보가 처음 요청했을 때 고사했고, 한대표가 다시 부탁했을 때도 거절했었습니다. 그래서 정대철(鄭大哲) 의원이 맡는 것으로 거의 결정됐다가, 한대표와 정의원이 나에게 ‘혼자만 살려고 그러느냐’고 하더군요. 난 ‘비겁자’라는 말은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그렇다면 같이 죽자’고 그러면서 결국 맡게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에 이길 수 있는 방안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어요. 내부적으로 누구를 공천할 것이냐를 두고 견해 차이가 무척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후보교체론을 주장하는 의원들과 노무현당을 주장하는 측간의 대립이었죠.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오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분당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지자체 선거패배에 이어 8·8 재보선에서도 참패하면서 9월 말까지 극에 달했습니다.”

―한 두 차례 한화갑(韓和甲) 대표도 당 대표직을 내놓고 탈당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김의원께서 가장 적극적으로 만류했고, 결국 주저앉혔다고 하던데요.

“그런 설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대선 이후에도 그런 뒷이야기가 나돌았고요. 하지만 한대표의 탈당설은 논의차원에서 그친 것으로 압니다. 한대표도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이회창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다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탈당 논의는 그런 고민과정에서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노캠프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탈당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개혁당으로 가자는 것이었죠.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정 안되면 ‘헤쳐 모이자’는 내부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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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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