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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우연한 기회에 獨 감리교병원과 2명으로 시작… 9년간 1300명 초청

나의 한국 간호요원 독일 개척기

  • 이종수|독일 본대 종신교수

1962년 우연한 기회에 獨 감리교병원과 2명으로 시작… 9년간 1300명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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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도착한 편지

나는 독일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을 병원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모두 고향에 가고 중환자 몇 사람만 병동에 남아 있어 너무나 적적했다. 그런데 나는 병실에서 몇 통의 성탄절 축하편지와 함께 어떤 분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보낸 이의 주소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감리교 부녀회장 루이세 숄츠 부인/ 파울리너가 30, 베를린(Pauliner 30, Berlin-Lichterfeld)’ 나는 이 편지를 병상에 누워 읽었다. 숄츠 부인은 ‘한국 광주에 있는 전쟁고아와 빈곤층 자녀를 위해 설립한 고등학교에서 2명을 뽑아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도록 초대하겠으며 그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썼다. 감리교 선교회장 방문 4개월 뒤의 일이었다. 나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내게 건강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리라고 확신했다.

1961년 4월 의료보험공단 측에서 나에게 남부 독일 도나우 강가에 있는 니데랄타이(Niederaltei) 수도원에서 4주간 요양을 하도록 도와줬다. 그곳에서 요양한 덕분이었는지 나는 건강이 매우 좋아졌고, 그해 여름학기부터 공부를 계속해도 좋다는 허락을 DAAD로부터 받았다.

감리교 부녀회의 초청을 받은 간호사 지망생이 독일로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과 독일에서 여권을 수속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린 것이다. 1962년 늦여름 한국 간호학교학생 2명이 독일에 도착해 프랑크푸르트 감리교병원(Diakonischen Krankenhaus Bethanien)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 간호요원이 독일에 정착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라 하겠다.

간호요원 교육이 시작된 지 6개월 후에 프랑크푸르트 지역에서 이 두 간호학생에 대한 호평이 들렸다. 한국 여성은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환자에 대해 천사와 같이 친절하다는 거였다. 뉘른베르크와 함부르크에 있는 감리교병원에서 한국 간호학교 학생들이 더 오면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독일 감리교 부녀회는 그 두 병원을 위해서도 간호학교 학생 초청 비용이나 여권 수속을 열심히 도왔다.





‘제가 너무 고단해요 하나님!’

1962년 우연한 기회에 獨 감리교병원과 2명으로 시작… 9년간 1300명 초청

1966년 서독에 진출한 한국 간호사들.[동아 DB]

1962년 나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정보다 1년 늦게 독일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63년 1월 외과의사로서 뒤스부르크에 있는 베데스다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50병상의 외과에 과장 1명, 상의(Oberarzt) 2명, 의사 4명이 근무했다. 의사가 말할 수 없이 부족해 나는 내 몸을 보살필 여유도 없이 무척 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그 후 한국 간호학교 학생 교육은 감리교 산하 병원 3곳에서 이뤄졌다. △프랑크푸르트 감리교병원: 1962년 2명, 1964년 11명, 1967년 6명 △뉘른베르크 감리교병원: 1963년 10명, 1964년 9명 △함부르크 감리교병원: 1964년 9명, 1965년 6명 등이다.

이렇게 독일 감리교병원에서 한국 간호학교 학생 53명이 교육을 받게 됐다. 오로지 독일 감리교 부녀회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 에센에 있는 루터교병원인 휘센스 스티프퉁(Huyssens-Stiftung)에서 1964년 초 연락을 해왔다. 감리교병원으로부터 ‘한국 간호학생 교육이 만족스러웠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이 병원의 간호학교 교장 좀머(Sommer) 여사가 자기 병원 간호학교에서 한국인 간호학생 교육을 실시하고 싶은데 이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독일연방경제협력부(당시 후진국원조부)에 신청하겠다고 나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1964년 가을에 한국 간호학교 학생 14명이 독일정부의 후원으로 독일에 왔다. 독일연방정부 초청이라 사증 수속이 아주 빨리 진행됐다.

1963년 나는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겐 아주 고단한 한 해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술해야 했다. 더욱이 부상 환자의 외래진료, 45개 병상을 돌봐야 하는 병동 일, 밤 당직 그리고 주말 당직을 하면서 한국 간호학교 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병원 일만 해도 너무 고단해 한국인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내가 간염으로 오랜 기간 병 치료를 받으며 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내 건강은 더욱 악화돼 간경화증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이 악화될 경우 의사라는 내 직업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1963년과 1964년 당시 독일 병원에 의사가 대단히 부족해 나는 쉬는 일요일만 한국 간호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나 함부르크 병원의 간호학생들을 보살피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졸거나, 길가에 차를 멈추고 자는 경우가 잦았다. 1964년 12월 초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나는 함부르크 감리교병원 간호원장의 요청으로 함부르크로 차를 몰았다. 새로 한국에서 함부르크에 도착한 간호학교 학생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며 내가 와주기를 바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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