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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취재

부산 주먹의 어제와 오늘

영화 ‘친구’로 뜨고 불법오락실로 쫓기고…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부산 주먹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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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이강환씨는 부산 주먹계 대부로 군림해왔다. 이름값이 전국적으로 통한다는 이른바 전국구 주먹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지난 20여년 간 전국 교도소를 돌며 건달들을 상대로 교화교육을 해온 교계 관계자는 몇 년 전 기자에게 “한국 주먹계 최고의 두목은 이강환”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씨는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한쪽 팔에 이상이 있었다는 것. 체구도 작고 마른 편이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보스의 자리에 올랐을까. 부산 주먹계 사정을 잘 아는 체육계 관계자 B씨에 따르면 이씨의 파워는 주먹보다는 두둑한 배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간이 몸보다 몇십 배 크다고 보면 된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겁을 안 내는 성격이다.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이강환의 전설

주먹계에 따르면 이씨는 요정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이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왜 맞고 다니냐”며 야단을 쳤고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다해줬다. 이씨는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배포를 키우고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칠성파 ‘현역’으로 사업을 하는 A씨는 이씨에 대해 “존경한다”는 표현을 썼다.



“원래 기질이 있는 분으로, 외길을 걸어왔다. 어느 분야든 고생하고 성취한 사람은 인정해주지 않느냐. 이 세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많은 건달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최고다.”

이강환씨는 1988년 10월 경남 경주에 있는 경주문화원에서 화랑신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화랑신우회는 자유당 정권 시절 이정재의 동대문사단과도 같은 연합조직으로 부산·경남 지역의 주요 조직이 연대한 것이다. 발족 당시 회원은 약 300명에 이르렀다.

화랑신우회는 그 전에 결성된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과 일송회를 본뜬 것이었다. 1987년 7월 서울에서 창설된 호청련은 전북 출신 주먹계 거물인 이승완씨가 안기부 지원을 등에 업고 만든 유사 폭력단체다. 자유당 말기의 대한반공청년단(대표 신도환)을 흉내내 대학생 조직까지 만드는 등 청년우익단체임을 표방했으나 19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당시 이씨가 정치폭력사태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이후 공식무대에서 사라졌다.

일송회는 1988년 8월 결성됐는데, 이리배차장파를 비롯한 전북 지역 토착 주먹들이 주축이 됐다. 전북 레슬링협회 회장이며 이리배차장파 두목 김향락씨가 회장을 맡았다. 부산 영도파(천달남)와 양은이파(조양은), 전주 나이트파(김용구) 등 다른 지역의 조직과도 연대하는 등 세력을 과시했으나 김향락씨가해상 폭력사건으로 구속되면서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8년 11월 이강환씨는 칠성파 간부인 김영○, 조명○, 안효○씨 등 8명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야쿠자 조직과 의형제 결연식(사카스키 배)을 가졌다. 이 행사엔 평소 이씨와 친분이 있던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들도 대거 참석했다. 수원 주먹계의 대부인 최창식씨가 부하 7명과 함께, 그리고 호남 쪽에서는 1970년대 번개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떨쳤던 박종석씨, 광주 국제PJ파와 관련된 여운환씨, 그밖에 서방파 조직원 6명이 동참했다. 당시 이강환씨와 의형제를 맺은 야쿠자는 오오사카 사카우매 조(組)의 방계조직인 가네야마 조의 두목 가네야마 고사브로였다.

1989년 3월 이씨는 칠성파 부두목 조명○씨의 동생 조영○씨가 이끌던 서면파를 흡수해 세력을 강화했다. 씨름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체육계에도 명함을 내밀었던 이씨가 구속된 것은 19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때다.

1990년 5월 서울지검 강력부에 있으면서 3대 패밀리의 선두주자인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를 구속했던 조승식(현 대검 강력부장) 검사는 그해 8월 부산지검 강력부로 발령을 받았다. 부산 주먹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조검사가 칠성파 간부들을 잡아들이자 위기를 느낀 이강환씨는 서울로 도피했다.

1991년 4월 서울에서 시경 특수대에 체포된 이씨는 부산지검으로 압송됐다. 부하들을 시켜 신칠성파 두목 김영찬씨를 회칼로 난자해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히는 등 10여 차례에 걸쳐 폭력을 배후 조종한 혐의였다. 조검사는 이씨에게 범단(범죄단체 구성)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이씨가 출소한 것은 1999년. 하지만 검찰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듬해 11월 이씨는 협박, 탈세 등의 혐의로 재구속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도중 또 다른 혐의로 기소돼 형이 추가돼 이씨는 2003년 8월 출소했다. 원래 2003년 3월이 만기였는데 벌금 4억원을 내지 못해 약 5개월을 더 살고 나왔다. 이씨가 벌금 대신 교도소에서 치른 노역의 대가는 하루 200만원 꼴. 이씨는 4억원 중 절반 이상을 노역으로 대납했고 나머지 1억여원은 처가에서 받아 완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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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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