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꼭꼭 숨은 겨울 서정 강원도 태백·정선

높고 맑은 山의 날숨, 풋풋한 두메 村의 들숨

  • 글·사진: 정 영

    입력2003-12-30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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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하얀 서리꽃과 눈꽃이 마음 시리게 하는 태백의 고원에서 새해를 맞는다. 백두대간을 잇는 태백산과 함백산 산자락이 꿈틀대는 태백, 그리고 정한 깊은 아라리 가락이 흘러내리는 오지 산골마을 정선. 겨울 강원도의 물줄기와 산줄기 따라 굽이굽이 발길을 옮겨본다.
    꼭꼭 숨은 겨울 서정 강원도 태백·정선

    함백산 정상의 상고대. 나뭇가지마다 서리꽃이 피어 켜켜이 쌓였다.

    겨울 풍경과 먹을거리가 남다르다는 태백과 정선. 고원지대인 데다 오지라 찾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가보면 ‘숨어 있는 자연’이라 확실히 다르다 싶게 아름다워 후회하지 않게 된다. 태백에선 해마다 1월에 ‘태백 눈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눈꽃 트레킹과 등산대회, 눈 조각전 등이 열리고, 태백산과 함백산 정상에서는 새해 일출을 볼 수 있다. 태백의 산자락엔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연못이 있어 맑디맑은 정수처럼 정갈한 마음으로 새출발을 다짐할 수도 있다.

    정선과 영월과 태백을 잇는 만항재(1330m)는 백두대간을 잇는 고개 중 가장 높다. 태백의 주능선인 태백산과 함백산 사이에 있어 높은 고갯길이 구불구불하지만, 포장이 잘 돼 드라이브 코스로는 태백에서 으뜸이다. 새벽엔 운무에 휩싸인 정취에, 낮엔 고갯길에서 내려다보는 산줄기에 넋을 잃는다.

    만항재 정상쯤에서 ‘대한선수촌’ 가는 길로 빠지면 함백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 한가운데 자리한 함백산(1573m)은 태백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서면 태백산, 일월산, 백운산, 가리왕산이 한눈에 굽어 보인다.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어 차로 오를 수도 있고, 도보 산행을 원한다면 두문동재에서 오르는 등산로를 택하면 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엔 겨울나무들이 일렬로 섰는데, 나무 아래로는 낮은 산죽(山竹)들이 곳곳에 푸르게 깔렸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선 주목과 고사목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다다르니 나뭇가지마다 서리꽃이 피었다. 북풍이 불면 북쪽을 향해, 남풍이 불면 남쪽을 향해 켜켜이 쌓인 서리가 날처럼 서 장관이다. 둥글게 펼쳐진 서리꽃 산정(山頂)이 설원의 비밀궁전 같다. 운무가 바람에 쓸려다닐 때마다 산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하고, 서리꽃은 쨍그랑거리며 바위에 떨어지기도 한다. 저기, 붉게 떠오른 해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낮은 가지에 걸쳐진다. 서서히 서리꽃이 녹으며 반짝이자 운무가 걷힌다. 지난밤 이를 데 없이 짙은 태백의 어둠이 눈앞을 가린 듯하더니, 이토록 믿음직스럽고도 깊은 날숨 같은 산자락을 보여주려 했음인가. 산의 날숨을 한껏 들이마시니 온몸이 맑아진다.





    꼭꼭 숨은 겨울 서정 강원도 태백·정선

    함백산의 운무가 바람에 쓸릴 때마다 산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한다.

    운무가 걷히고 말끔해진 산을 내려와 만항재 끝자락의 정암사를 찾았다.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산마루에 수마노탑을 짓고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모셨기에 적멸보궁이다.

    험한 산세를 빠져나와 태백시로 방향을 잡으면 백두대간의 중추 금대봉 하부능선인 920m 높이에 자연 석회 동굴인 용연동굴이 있다. 전국 최고지대에 있는 동굴로 길이가 843m에 달한다. 동굴 안의 은은한 조명을 따라가면 물과 시간이 빚어낸 다양한 석순과 종유석, 석주를 만난다. 1억5000만~3억년 전에 생성됐다니 깊이 들어갈수록 시간을 거슬러가는 것만 같다.

    태백 시내에서 찾은 먹을거리는 역시 한우다. 주공아파트 앞 태성실비식당(033-552-5287)은 한우전문점인데, 등심의 결과 색이 눈꽃이 핀 듯 곱다. 그 ‘눈꽃’을 태백의 상징인 연탄불 위에 올려놓으면 사르르 녹아드는데, 눈꽃은 입안에서도 살살 녹는다. 이 집에선 태백의 목장에서 실어온 특수 부위만 사용하는데 좋은 고기가 없는 날은 문을 열지 않는단다.

    간이역이 많은 태백엔 태백선과 영동선이 지나가는데, 강릉으로 가는 영동선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나한정역-흥전역 구간에선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시스템 열차가 운행된다. 나한정역에 서 있으니 열차가 멀리서 달려와 방향을 바꾼 뒤 다시 빠져나간다. 열차는 이내 산등성이를 달려 흥전역으로 떠났다. 급한 경사지대여서 열차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산을 오르내려야 그 구간을 통과할 수 있다.



    날이 저물자 몸도 저물어 머물 곳을 찾았다. 만항재 중턱에 자리잡은 장산콘도 (033-378-5550)는 하늘과 맞닿은 1200m 고지에 있어 태백의 밤하늘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숙소다. 통나무로 지어져 산속의 청정한 공기를 실내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함백산과 태백산까지 차로 5분 거리.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할 만하다. 숙소 앞마당에 서니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구름빛을 머금은 함백(含白)의 달빛이 슬며시 통나무집 창가에 내려앉았다. 사락사락 눈이라도 내리듯 소리 없이 태백의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정선으로 향했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곳’이라는 정선. 험한 길 넘어오느라 지쳐서 울고, 갈 때는 정든 이들과 헤어지는 서운함에 운다는 말이다. 태백선 철길을 따라가려니 선로 또한 그 험한 길을 따라간다. 다리를 건너고 수많은 터널을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열차는 달린다. 증산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은 비둘기호 완행열차인데, 이름도 예쁜 별어곡역과 선평역, 정선역까지 달린다. 속도는 이 세상 열차 중 가장 느릴 시속 40km다. 승객은 통학생 몇몇, 보따리를 든 촌로들, 몇 안 되는 관광객이 전부다. 그들을 태우고 하루에 세 번, 객차 한 칸을 매단 꼬마열차는 한가로운 산골 오지를 달린다.

    꼭꼭 숨은 겨울 서정 강원도 태백·정선

    용연동굴. 다양한 석순과 종유석, 석주들이 발길을 잡아끈다.

    정선에선 옛 시골장터 풍광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찾아들 만큼 5일장이 유명하다. 겨울엔 감자떡, 옛날 찐빵, 메밀부침 등이 가장 인기가 좋다. 정선등기소 앞에 있는 이모네식당(033-562-9711)은 감자옹심이를 전문으로 하는데, 한 그릇 비우면 배가 든든해 추위가 말끔히 가신다.

    정선아라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북면의 아우라지는 구절 쪽의 송천과 임계 쪽의 골지천이 합류해 ‘어우러진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강물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여 있다. 이제 그곳엔 섶다리가 놓였지만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인지, 노래만은 오래도록 불려지고 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우리 둘이 들었던 정이야 변할 리 있나’.

    물길도 사랑도 어우러지는 곳에서, 세상과 어우러지는 삶을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정선같이 놀기 좋은 곳 한번 오세요/검은 산 물밑이라도 해당화가 핍니다’ 정선아라리 한 구절을 흥얼거리며 오래도록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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