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이었다

  • 글: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4-08-25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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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의장 부친 신상묵, 1940년 일본군 지원병 합격자 명단에 등재
    •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개명 후 일본군인 신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좌담회에 참석
    • 대구사범 동기생 “1943년 일본군 헌병 오장이 된 신상묵은 충북 옥천에서 일본군 징병기피자 정보수집 했다” 증언
    • 신 의장 “부친은 일제시대 교사로 있다 광복 후 경찰에 투신” 주장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이었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좌). 신기남 의장 부친 신상묵씨(우).

    최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부친의 친일행적이 논란이 되었다. ‘진보누리’ 등 인터넷 사이트에 “신 의장 부친 신상묵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일제 시대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잠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일본) 경찰에 투신했으며 광복 후 다시 한국 경찰에 몸담아 고위간부가 됐다”는 글이 실린 것. 일부 언론은 이 글을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기남 의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2004년 7월15일 신기남 의장은 열린우리당 정책의원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모 신문 가판에서 제 선친에 대해 일경 간부를 지냈다느니, 친일파라고 쓴 것 같다. 본판에는 그 기사가 빠졌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신문에서는 그 기사가 본판에 실렸다. 두 신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초적인 사실확인 작업도 없이 오보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허위사실,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이날 신 의장은 한 인터넷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선친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8·15 광복까지 전남 화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후인 1946년 국립경찰 양성 1기로 경찰에 입문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선친 관련 보도에 대해 “열린우리당이 추진하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의 순수한 의도를 훼손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라고 주장했다. 신 의장은 또 박정희 전 대통령 등 논란이 있는 일부 인물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는 문제와 관련, “농사꾼은 잡초를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신기남 의장은 과반수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대표로서, 친일조사 대상자들을 ‘잡초’에 비유하면서까지 열린우리당의 친일행위 진상규명을 이끌고 있다. 그러면서 선친의 친일의혹에 대해선 “일제시대 교사로만 재직했다”며 여러 차례에 걸쳐 강하게 부인했다. 신의장의 이러한 주장은 진실일까. ‘신동아’는 관련 자료와 핵심인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신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의 일제시대 행적을 추적해보았다.



    청풍소학교 훈도로 사회생활 시작

    신상묵(辛相默)씨는 1916년 8월 전북 익산시 춘포(春浦)면 용연(龍淵)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3년 4월8일 대구사범학교(경북대 사범대 전신)에 5기생으로 입학한다. 이러한 사실은 대구사범 졸업생들의 인적 사항과 졸업 후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대구사범심상과지(誌)’(‘심상(尋常)’이란 ‘보통’이란 뜻) 등 관련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됐다. 대구사범학교 전체 졸업생 중 신상묵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신기남 의장의 부친 이외엔 단 한 명도 없다. 당시엔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학교에서 5년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소학교로 발령받아 훈도(訓導·현재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일제시대 대구사범학교는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수재가 모이는 학교였다. 졸업생들은 기자에게 “면내 소학교 전체에서 1, 2등 해야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졸업하면 당시 ‘엘리트’ 직업인 교사직이 보장되는데다 5년간 학비가 전액 면제되기 때문에 빈곤층이 절대다수였던 조선인들의 입학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이다. 신상묵씨의 동기인 5기의 경우 조선인이 82명, 일본인이 18명 입학했다.

    ‘대구사범심상과지’(이하 ‘심상과지’)는 신상묵씨의 학창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기생들에게 학창시절 가장 지긋지긋했던 기억으로는 아무래도 교련시간, 검도시간을 들 수 있다. 5학년 여름방학 때는 경남 창녕까지 걸어가서 2주 동안 야영훈련을 받기도 했다. 황윤주가 대대장이요 신상묵이 나팔수였다.”

    신상묵씨의 5기 동기생인 이정덕씨는 기자에게 “신상묵씨는 대구사범 재학시절 처음엔 나팔수를 했지만 나중엔 대대장까지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신상묵씨의 대구사범 1년 선배(4기)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구사범 재학시절 나팔수였다.

    신상묵씨는 1938년 3월20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고 같은해 6월 훈도로 발령받았다. 신기남 의장은 부친의 근무처를 전남 화순초등학교라고 밝혔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따르면 신상묵씨는 전남 화순군 청풍소학교에서 훈도 생활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신기남 의장은 “부친이 광복 후까지 교사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논란의 발단이 된 진보누리 사이트의 글은 조금 다르다. “신상묵씨가 잠시 교사로 있다가 일본경찰이 된 뒤 광복 후 경찰에 다시 몸담았다”고 한 것이다. 진보누리의 이 글은 대구 ‘매일신문’의 ‘청년 박정희’라는 연재물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기자는 이 연재물의 저자에게 글을 쓴 경위를 물었다. 저자는 “신상묵씨 동문들의 증언을 토대로 쓴 글이다. 신상묵씨는 일제시대에 경찰이 아니라 일본군 헌병이었다. 고인의 명예를 고려해 경찰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심상과지’는 졸업생 전원의 졸업 후 경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5기의 신상묵씨에 대해선 “姓名 辛相默, 原籍 全北 益山, 略歷 訓導 軍人 警察官, 濟州警察局長…”으로 기록했다. ‘심상과지’는 신상묵씨가 교사(훈도)를 하다가 곧바로 경찰관이 된 것이 아니라 중간에 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명시해놓고 있는 것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입학성적이 상위 40%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관비생(官費生)이라 하여 학비 전액 면제와는 별도로 매월 7원의 생활비를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당시 관공서 하급직원의 월급이 5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반면 생활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학생은 사비생(私費生)이라 불렸다.

    관비생은 졸업 후 4년간 의무적으로 교사직에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사비생의 교사 의무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신상묵씨의 대구사범 5기 동기인 송성욱씨는 “신상묵씨는 사비생이었다”고 밝혔다. 1938년 6월 교사에 임명됐으니 1940년 6월 이후엔 본인이 원할 경우 교사직을 그만둘 수 있었다는 얘기다.

    3000명 모집에 8만4000명 응시

    1940년 2월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특별지원병’을 공개 모집했다. 지원병은 일종의 직업군인. 이 제도는 1938년 처음 시행됐는데 자원해서 일본군이 된다는 점이 강제징병과 달랐다. 소학교 졸업 학력이면 아무나 지원할 수 있었는데 매년 수백 명의 조선인이 이 제도를 통해 일본군인이 됐다. 1940년 2월엔 모집정원 3000명에 무려 8만4000명의 조선인이 지원병에 지원했다.

    지원병 지원자들은 자신의 연고지역에서 국어(일본어), 작문, 산술 등의 필기시험과 체력검사를 치렀다. 선발된 지원병들은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집결해 신병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해엔 훈련소 규모가 적어 3000명을 한꺼번에 선발하지 못했다.

    지원병에 합격하면 수개월 동안 훈련소에서 일종의 신병훈련을 받은 뒤 각지의 일본 군대에 배치되어 일반적인 일본군인처럼 진급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특별지원병이 일본군 하사관이나 장교가 되는 길도 활짝 열어두었다”고 선전했다.

    일본군 연구에 정통한 성균관대 신주백 교수에 따르면 일제시대 일본군의 계급은 이등병-일등병-상등병-오장(한국군의 하사급)-군조(중사급)-조장(상사급)-준위-소위-중위-대위-소좌(소령급)-중좌-대좌-소장-중장-대장으로 돼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 경찰이나 지원병은 중국이나 태평양 전방의 최전선에 배치될 확률이 적어 특히 인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1940년 초 조선총독부는 ‘지원병 열풍’에 크게 고무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지원병 모집 관련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춘원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1940년 3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조선특별지원병을 칭송하는 글을 ‘매일신보’ 1면에 싣기도 했다.

    일본군 지원병 합격자 명단에 ‘辛相默’

    1940년 7월25일 조선특별지원병 1차 합격자 1415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이 명단은 ‘매일신보’에 게재됐다. 신상묵씨는 전북지역 합격자 명단 맨앞에 나와 있다.

    신상묵씨는 화순 청풍소학교 훈도로 재직중 조선특별지원병에 응시, 합격하자 교직을 사임하고 지원병 훈련소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교직 의무복무기간을 채운 상태여서 별 문제가 없었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일본군 지원병 합격자 ‘전북의 辛相默’이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특별지원병 합격자는 거의 대부분조선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침에 따라 신상묵씨를 비롯한 모든 조선인 지원병 합격자는 훈련소 입대 후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이었다
    ① 전북 익산 출신 신상묵은 1940년 본인의 자원입대로 일본군인이 됐다. 1940년 7월2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된 일본군 지원병 합격자 명단에 신상묵(辛相默·밑줄친 부분)의 이름이 들어 있다.② 신상묵은 일본군 자원입대 직후 ‘辛相默’에서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개명했다. 호적자료에 따르면 신상묵의 부친 신공집(辛珙集)이 ‘辛’씨 성을 ‘重光’으로 바꿨고 신상묵은 부친의 ‘重光’성을 받아 이름을 ‘相默’에서 ‘國雄’으로 바꿨다(자료 오른쪽). 같은 호적자료에서 신상묵은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부친임을 알 수 있다(자료 왼쪽).③ ‘시게미쓰 구니오’로 창씨개명한 신상묵은 1940년 11월8일 일본군 지원병 수료생 신분으로 ‘매일신보’좌담회에 참석했다(사진 왼쪽). 좌담회 참석자 명단에 나오는 창씨개명한 이름(重光國雄), 본적(全北), 출신학교(大邱師範), 나이(二四歲)는 이 인물이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과 동일인임을 보여준다(사진 오른쪽 밑줄).④ 대구사범학교 동문회가 졸업생의 약력을 기록한 ‘대구사범심상과지’. 신상묵이 ‘군인’으로 복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시대 호적자료에 따르면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는 전북 익산시 춘포면 용연리에 호적을 두고 있었는데 신상묵(辛相默)씨의 부친이면서 신기남(辛基南) 의장의 조부 신공집(辛珙集)씨는 ‘시게미쓰(重光)’로 성을 바꾼 것으로 확인됐다. 신상묵씨도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 호적자료에 신기남 의장은 ‘신상묵의 자(子)’, ‘신공집의 손(孫)’으로 돼 있다.

    시게미쓰라는 성은 당시 일본 명망가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공격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었으며 1945년 9월 태평양전쟁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 외상의 성도 시게미쓰(重光)였다.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씨는 훈련소에서 수개월간의 훈련을 수료한 직후인 1940년 11월8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신상묵씨 등 10여 명의 지원병 수료생들과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령소장(대좌)이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자유롭게 얘기하는 방식이었다. 수료생들은 모두 조선인으로 창씨개명을 한 상태였다.

    이 인터뷰는 1940년 11월30일부터 8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연재기사의 큰 제목은 ‘우리들이 入營(입영) 하기까지!’이고 작은 제목은 ‘지원병수료생좌담회(志願兵修了生座談會)’였다. 기사 제목은 내용에 따라 매회 달리 붙였다.

    기사 하단엔 좌담회 출석자(座談會出席者)의 이름과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이 출석자 명단에 ‘시게미쓰 구니오’가 등장한다. ‘매일신보’는 좌담회출석자인 일본군지원병 시게미쓰 구니오의 한자를 ‘重光國雄’이라고 썼으며 그의 약력을 ‘전북 출신, 대구사범졸업, 24세’라고 소개했다. 창씨개명한 이름, 본적, 출신학교, 나이(1916년생)가 모두 일치하는 사람은 당시 조선인 중엔 단 한 사람,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뿐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신상묵씨가 같은해 7월25일 지원병에 합격한 기록이 있으므로 좌담회 출석자인 일본군지원병 시게미쓰 구니오는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와 동일인물인 것이다.

    ‘전 조선청년의 영예, 감격은 크다’

    ‘매일신보’ 연재기사는 일본군 지원병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군에 앞다퉈 지원하라고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은 조선인 학부모들을 향해서도 “아들을 일본군에 보내라”며 각성을 촉구했다. 연재기사 중 하나는 제목이 ‘志願兵(지원병)의 將來(장래)는 당신들에게! 어머니들은 覺醒(각성)하라’였다.

    연재물의 다른 기사들의 제목은 각각, ‘십만 각 청년의 감격, 반도를 석권한 애국혼의 선풍(旋風)’ ‘전 조선청년의 영예, 우리들의 감격은 크다’ ‘정신, 내체 모두 다 갱생, 우리는 생의 의지를 깨달았다’ ‘제대된 후에도 활동, 우리의 앞길은 희망이 있을 뿐’ ‘고통 후에 오는 희열, 규칙생활을 맛보고야 안다’ ‘지도적 계급에서 먼저 지원병이 되자’ 등이었다.

    신상묵씨가 ‘매일신보’ 좌담회에서 털어놓은 입대소감 중 일부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무엇이고 하면 반다시 성공할 수 잇다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가능이라는 것은 업는 줄 압니다. 그리고 복종이 잇서야 세상사가 모도 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엇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대개는 다소 실허도 절대로 복종하야 되겟다는 정신수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1415명에 이르는 일본군 지원병 가운데 신상묵씨가 인터뷰 대상자로 발탁된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매일신보’는 다른 기사에서 “지원병 희망자가 많아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지원자 대부분이 소학교 졸업의 일천한 학력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원자는 극히 적어 아쉽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던 차에 조선의 명문 고등교육기관의 하나였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지도층인 교사로 재직하던 사람이 지원병이 되었으니 일제로선 신상묵씨의 선전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신보’의 좌담회 연재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다. 교사의 일본군 지원행위가 나이 어린 조선인 학생들을 세뇌시켜 일본군대에 동원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내용이다.

    “소학교 아동들은 선생을 무조건하고 숭배 복종하는 관계로 선생이 하는 것은 모도가 좋은 것이고 선생이 하면 나도 하것다는 신념을 가지고 잇습니다. 그런 마음을 잘 아는 관계로 선생인 내 자신이 먼저 지원병이 되어야겟다고 생각햇습니다. 후진을 위하고 귀여운 아동들을 정신적으로 고무하기 위해선 역시 선생인 내가 지원병이 되어야겟다고 굿게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신상묵씨가 1940년 교직을 그만두고 일본군에 자원입대했다는 사실은 신씨의 대구사범 5기 동기생 상당수가 알고 있었다. 신씨의 일본군 자원입대 사실이 당시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어 화제가 되는 바람에 많은 동기생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상묵씨의 동기생 대부분은 졸업 후 교사가 됐고, 학교로 신문이 배달되기에 매스컴 보도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런 보도를 바탕으로 ‘대구사범심상과지’도 신씨의 경력을 ‘訓導, 軍人, 警察官’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신상묵씨는 1984년 작고했다. 대구사범 5기 동기생들은 현재 89~91세로 생존자가 많지 않다. 그중 두 사람의 동기생이 기자에게 신상묵씨의 일제시대 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이들에 따르면 신상묵씨는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를 나온 뒤 주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에 배치받아 근무했으며 일본군 헌병 오장(憲兵 伍長·겐뻬이 고쪼)이 됐다. 오장은 한국군의 하사관에 해당한다.

    대구사범학교 동기생 송재천씨는 “1943년 6월 헌병 오장 군복을 입고 말을 탄 신상묵씨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송씨에 따르면 일본 헌병 오장 신상묵은 당시 일본군 징병기피자 정보수집작업을 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1942년 말부터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강제징병이 실시됐다. 1943년 6월은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병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다음은 송재천씨의 증언이다.

    “1943년 6월 충북 옥천의 죽향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신상묵이 찾아왔다. 1938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일본군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군인이 된 모습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신상묵은 오장 계급이 달린 헌병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있었는데 자기는 ‘대전에서 일본군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경황이 없어 신상묵에게 차를 내놓거나 식사를 대접하지 못했다. 신상묵은 내게 ‘일본군 징병기피자들을 찾고 있다. 교사를 하고 있으니 징집을 피해 숨어다니는 졸업생들과 관련된 정보가 있지 않으냐. 알고 있는 게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이 정도의 대화만 나누고 그는 돌아갔다. 수개월이 지난 가을 무렵 신상묵은 다시 집으로 찾아왔다. 그때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대전으로 가서 술 한잔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가 잘 다닌다는 대전시내 한 바(Bar)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이번엔 군대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학창시절 얘기만 했다.”

    “광복 직전 ‘조장’까지 진급”

    동기생 송성욱씨는 기자에게 “신상묵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엔 일본군 헌병 조장(한국군의 상사계급)까지 진급해 부산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송씨는 또 신기남 의장이 언급한 것과는 달리 신상묵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다음은 송성욱씨의 증언이다.

    “1940년 경북 영일군 죽남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땐데, 교무실에서 신문을 보다가 동기생 신상묵이 일본군 지원병이 됐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 내 기억으로는 한 신문이 아니라 여러 신문에 났다.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 교직생활을 하다가 일본군 지원병이 된 것은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시골에서 대구사범은 경성제국대학만큼이나 평판이 좋았다. 그런데 대구사범을 나와 좋은 직장도 내팽개치고, 일본군 장교도 아닌 일개 이등병을 자원했다고 하니 뉴스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신상묵을 빼고 일본군 지원병이 된 대구사범 졸업생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신상묵은 고등교육을 받은데다 교사경력까지 있어 일본군에 들어간 뒤 헌병이라는 좋은 보직을 받았고 진급도 빨랐다고 동기들에게 들었다. 일본 패망 직전엔 일본군 헌병 조장까지 진급해 부산에서 근무했다고 들었다.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한 신상묵은 승진이 빨랐으나 4·19혁명 무렵 공직에서 물러났는데 5·16 직후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신상묵은 ‘대구사범 한 해 선배인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박 의장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그냥 돌아왔다. 박 의장에게 섭섭했다’는 말을 내게 했다.”

    대구사범 동기생 김규옥씨도 기자에게 “신상묵은 처음엔 전라도의 소학교 교사로 갔다가 그만둔 뒤 일본군 헌병이 됐다”고 증언했다.

    신상묵씨는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해 경북도경 보안과장,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일본군(만주국군) 장교 출신뿐만 아니라 신상묵씨처럼 일본군 지원병 출신자 중에서도 광복 후 한국군과 경찰에 투신해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적지 않다. 광복 후 일본군 복무경력이 있는 군인, 경찰은 군 경력이 전혀 없는 동기들에 비해 진급에 유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문모씨는 합참의장, 한모씨는 군 부사령관, 양모씨는 군수기지사령관, 박모씨는 부군단장, 강모씨는 해군사령관을 역임했다.

    ‘신동아’는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측에 “신기남 의장 부친 신상묵씨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 신 의장에게서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신 의장 측근은 “신 의장은 의장 취임 이후 기자를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지금까지 한번도 어기지 않고 있다”면서 이 요청을 거부했다.

    이어 신 의장 측근은 “신상묵씨는 광복 후까지 전남 화순초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1945년 경찰간부학교에 들어가 다음해 1월 경찰로 임관했다”며 최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는 해명을 되풀이했다. 신 의장측은 “신상묵씨가 광복 후 경찰에 투신했음을 보여주는 당시의 경찰기록 등을 갖고 있다”고 밝혔으나 “광복 이전 신상묵씨의 경력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신동아’는 신 의장 측근에게 “신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가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개명한 사실을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신상묵씨의 일제시대 활동과 관련, 신 의장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재차 요청했다. 이에 대해 신 의장 측근은 “신 의장에게 물어보겠다”고 했으나, 잠시 뒤 “내가 신 의장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신 의장은 ‘부친이 창씨개명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라고 답했다. 신 의장이 기자와 개별적으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방침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사실무근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 의장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신 의장이 말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신 의장의 공식 방침은 ‘사실무근이다’라고 해두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또 다른 신 의장 측근을 통해 “신 의장의 부친이 1940년 일본군에 자원해 헌병 오장이 됐다는 기록과 증언이 있다. 신 의장 본인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신 의장에게 재차 반론을 요청했다. 신 의장 측근은 “신 의장에게 반드시 전하겠다”고 말했으나 이후에도 신 의장은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친일청산 관련 법개정은 수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국민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따라서 입법 추진자의 객관성, 진실성, 도덕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이 법개정을 주도하는 여당의 최고책임자 자신이 부친의 친일 의혹에 대해 계속 사실과 다른 해명으로 일관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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