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정연주 체제’의 KBS

개혁만능시대! 만발한 코드 논란·편향성 시비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4-08-25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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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잇따른 정 사장 비판글
    • 국장급 특별승격, 전임 사장 때의 4배
    • ‘자율성’ 강화가 프로그램 편향성 부추기는 한 원인
    • “‘PD 5인방’이 KBS 움직인다”
    • ‘송두율 프로그램’ 사전심의 생략됐다
    • 모 국장, 인기가수 서모씨측에 고가 와인 접대받아
    • 견책받은 간부, 한달 만에 부주간에서 주간으로 승격
    • 팀제 시행에 대한 반발, “팀장 인사는 ‘코드 맞추기’ 인사”
    • 직장협의회 준비모임, “3∼4개월 후 팀제 중간평가 하겠다”
    ‘정연주 체제’의 KBS

    정연주 KBS 사장과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오른 KBS 직원들의 비판글들.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뒤 1년여가 지난 지금 KBS는 현재의 집권세력과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사내 곳곳에 점령군처럼 진주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최근의 이런 양상은 서로의 위치에 따라 한쪽에는 ‘통쾌(痛快)한 것’일 수 있고 다른 한쪽에는 ‘통한(痛恨)의 것’일 수 있다…(하략)….”

    지난 6월24일 한국방송공사(KBS) 사내 온라인 게시판(KOBIS)에 오른 ‘KBS 개혁의 진정한 방향성을 묻는다’는 제목의 비판글 서두다. 대체 무엇이 ‘통쾌’이고 무엇이 ‘통한’이라는 것일까.

    정연주(鄭淵珠·58) 사장이 진두지휘하는 KBS 개혁의 방향성과 목적에 대해 질타한 이 글의 작성자는 KBS 정책기획센터의 평직원 유모(40)씨. 그는 “KBS를 사랑하는 한 구성원으로서 지인(知人)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며 KBS 개혁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했다. 팀제 시행이나 지역방송국 통폐합 등 일련의 내부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진지한 논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시간에 쫓기듯 허둥대며 일방적으로 추진해서는 합리적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피력한 것”이라고 글을 게시한 이유를 설명했다.

    유씨의 담당업무는 대외정책. KBS의 각종 정책을 국회나 방송위원회,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등 유관기관과 부처에 적극 홍보해야 할 위치에 있는 그가 되레 조직에 쓴소리를 던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유씨는 이 글에 앞서 같은날 KOBIS에 올린 또 다른 글 ‘KBS는 기업이 아니라, 다만 공영방송일 뿐입니다!’에서 “비(非)방송인 출신인 정연주 사장이 추진중인 7개 지역국 통폐합은 임기 3년의 KBS 사장에게 허용된 철학과 이념 차이의 한계를 넘은 것”이며, “원칙도 없고 기준도 제각각”이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KOBIS는 KBS 임직원만 접속가능하다. 유씨가 올린 2개의 글에 대한 조회 수는 1600여건. 조회한 이들로부터 각기 200여회씩 ‘추천’을 받았지만 댓글은 단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반문했다. “‘추천’은 하면서도 정작 공감 혹은 반대의 뜻을 담은 댓글은 전혀 달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이는 곧 KBS가 의사소통조차 자유롭지 않은 경직된 조직이라는 현실에 대한 방증이다.”



    삐걱대는 ‘대한민국 대표방송’

    KBS가 삐걱대고 있다. 정연주 신임 사장이 취임(2003년 4월28일)한 지 1년3개월 남짓. 그동안 KBS 조직 내부에서조차 ‘정연주 체제’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이 공공연히 제기돼왔다. KBS가 이처럼 심각한 내부 균열에 봉착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유씨가 올린 글들은 KOBIS에 오른 여러 비판글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주지하듯, KBS는 정부가 전액출자한 공영방송이자 국가기간방송이다. 또한 국민이 부담하는 준조세 성격의 TV수신료를 주요재원으로 삼는다. 연간 수익·비용이 1조2000억∼1조3000억원대에 이르고 직원 수만 5000명을 넘는 매머드 조직이다.

    이런 KBS에 메스를 들이대 KBS 개혁문제를 사회적 화두로 부각시킨 건 감사원이었다. 감사원은 지난해 11월11일 국회의 감사청구를 받아들여 KBS의 지배구조(소유구조, 의사결정시스템, 견제·감시시스템)와 재원구조(수신료, 광고수입 등), 조직·인력 운영, 예산편성 및 집행 등 운영실태 전반을 126일(2003년 12월8일∼2004년 4월12일) 동안 분석·진단한 특별감사 결과를 지난 5월21일 전면공개했다.

    감사보고서는 ▲KBS 경영에 대한 외부감독 미흡 ▲최고의결기관인 이사회의 구성과 역할 미흡, 사장 견제기능 약화 ▲자체감사를 담당하는 감사의 독립성 미흡 ▲경영평가의 객관성 및 실효성에 한계 ▲KBS 2TV의 광고수입 과다 ▲기능이 미약한 16개 지역방송국 통폐합 필요 ▲국장급·부장급 전문직의 정원초과 ▲퇴직금 누진제 존치 ▲사내근로복지기금 과다 출연 ▲자녀 대학학자금 무상지급 ▲개인연금 예산지원제도 존치 등 숱한 사안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 KBS의 ‘방만 경영’을 여실히 입증했다.

    그러나 공영방송의 정체성 확립을 권고한 감사원의 특감은 KBS의 경영상 비효율성, 즉 ‘하드웨어’적 측면만 다룰 수밖에 없었던 만큼 일정한 내재적 한계를 안고 있다. 감사원도 애써 감사결과의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김재선(56) 감사원 사회복지감사국장은 “방송법상 보장된 방송의 독립성을 고려해 감사원은 순수하게 경영적 측면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감사원 지적사항에서 제외된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 KBS의 ‘방만’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KBS 안팎에서 흘러나온다. 소프트웨어적 측면이란 KBS 내부의 의사소통과 조직운영시스템, 방송프로그램 제작 및 편성 등과 관련한 문제를 말한다.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KBS 내부 상황은 어떨까. KBS는 진정한 공영방송인가, ‘무늬만 공영방송’인가. ‘정연주 체제’의 KBS. 그 가려진 1년3개월여의 속사정을 들췄다.

    우선 지난 5∼6월 한창 논란거리로 떠올랐던 프로그램 편향성과 관련, KBS 내외부에서 터져나온 비판부터 눈여겨보자.

    5월27일 강동순(59) KBS 감사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가톨릭언론인협회 주최로 열린 ‘사회통합을 위한 언론과 종교의 역할’ 토론회에 참석, KBS가 ‘당파적 저널리즘’에 빠져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는 틀리다는 논리의 틀 속에서 공공재인 공영방송이 사회통합의 정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라며 KBS의 변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강 감사는 1973년 KBS에 입사해 TV본부 TV2국 주간, 심의평가실장, 시청자센터장을 거쳐 지난해 7월 감사에 선임됐다.

    강 감사의 공개비판에 대해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위원장 김영삼·이하 KBS노조)는 이튿날 즉각 성명을 내고 “강 감사의 발언은 지극히 부적절하며 KBS 감사로서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망각한 소치”라고 반박했다. KBS PD협회(회장 이강택)도 5월31일 “강 감사의 언행은 ‘KBS 흔들기’를 목적으로 한 ‘계산된 도발’”이라는 요지의 비판성명을 내는 등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강 감사는 지난 2월2일 KBS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도 “이른바 개혁프로그램을 주도하는 이들은 개혁이 시대적 소명이며, ‘정의’라는 확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지만, 감정적이고 완성도가 낮은 내용을 성급하게 내보냄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KBS 개혁프로그램을 비판한 바 있다.

    KBS 내부에서 불거져나온 이런 비판들은 과연 ‘KBS 흔들기’에 불과한 것일까.

    KBS 내부에서 쓴소리가 터져나온 건 강 감사의 비판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김형태 당시 KBS 시청자센터 주간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KBS가 표류하고 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정연주 사장의 인사(人事)는 ‘개혁’이 아니라 ‘혁명’에 가깝다는 등 ‘정연주 체제’를 정면비판해 한바탕 파문이 일었다. 당시 그의 행동을 두고 4·15 국회의원총선거 출마를 위한 ‘친정 때리기’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강 감사나 김 전 주간의 비판이 ‘팩트(fact·사실)’에 근거한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KBS가 표류하고 있다’

    ‘당파적 저널리즘’이란 말 그대로 KBS 방송프로그램들이 정치적·이념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고 편향성을 띠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KBS 보도국장, SBS 상무이사, 한국방송진흥원 상임이사 등을 두루 지낸 우석호(64)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겸임교수(현 방송위원회 보도교양 제2심의위원회 심의위원)는 이런 비판들에 힘을 보탠다.

    “개인적으로 방송3사의 뉴스를 모니터하고 있는데 보도내용이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은 사례가 적지 않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이라크 파병 등 남북관계나 국제문제를 다룰 때 보수세력에 대한 비판은 넘쳐도 정부 여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좀체 찾기 힘들다. 군사정권 시절엔 권력이 방송에 10가지 지침을 내려보내면 보도책임자들이 저널리즘의 본분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5개 정도만 받아들이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권력의 요구가 사라졌는 데도 객관적이지 못하고 친(親)정부적 보도행태를 보인다.”

    우 교수는 공정성을 잃은 보도의 한 예로 ‘주한미군 이라크 파병’ 관련보도를 든다. KBS가 뉴스 소재로 선택한 것들을 파악해본 결과,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부시 미 대통령이 고전한다든지 이라크 현지의 미군 피해를 부각시키는 등 편파적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또 남북 이산가족 상봉 관련보도에서도 북한주민이 ‘장군님의 덕분으로’ ‘50년 헤어져 산 건 미국놈 때문’이라는 등 비속어를 써가며 원색적으로 내뱉은 정치선언식 멘트를 여과없이 방송으로 내보낸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감정이나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고 팩트만 ‘드라이(dry)’하게 보여줘야 하는 뉴스보도에까지 형용사를 남발, 시청자의 가치판단을 유도해 여론 독과점을 시도한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지적은 강 감사가 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탄핵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에 비해 7대3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공영방송인 KBS가 같은 비율로 편성해 방송하는 게 정당하다는 논리는 공영방송의 사회통합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며 KBS의 탄핵 관련보도를 ‘당파적 저널리즘’의 사례로 든 것과 궤를 같이한다.

    실제로 한국언론학회(회장 박명진·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방송위원회(위원장 노성대)의 의뢰로 작성해 6월10일 방송위원회에 제출한 ‘대통령 탄핵 관련 TV방송 내용분석’ 보고서는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인 지난 3월12∼20일 KBS를 비롯한 방송3사가 방영한 프로그램들을 분석한 결과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공정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비록 방송위원회가 7월1일 전체회의를 열어 탄핵방송 전반의 공정성 문제는 방송위원회 심의대상이 아니라고 각하 결정을 내렸지만, 각하는 어떤 사안이 아예 심의대상이 될 수 없을 때 내려지는 결정일 뿐, 공정성에 문제가 없을 때 내리는 기각과는 다른 것이다.

    ‘정연주 체제’의 KBS

    지난 5월27일 한국가톨릭언론인협회 주최 토론회에서 KBS의 ‘당파적 저널리즘’을 지적하는 강동순 KBS 감사.

    그렇다면 KBS 프로그램의 편향성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그 기저엔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직후부터 국장급과 고참 부장급에 해당하는 중간간부들이 제작현장에서 무력화한 것이 주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 사장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KBS를 젊고 신뢰받는 조직으로 만들겠다”며 능력에 따라 적소(適所)에 배치되는 시스템 도입을 위해 인사정책 개혁문제를 노조와 진지하게 논의할 것이라 밝힌 바 있다.

    한 전직 KBS 간부는 정 사장 취임 이후의 KBS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장 선임과정에 정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KBS는 일찍부터 관료화되고 정체된 조직이다. 정년(58세)도 보장된다. 이런 조직에 개혁의지로 똘똘 뭉친 신임 사장이 사풍(社風)을 개혁한다며 과감한 ‘인적 쇄신’을 단행하고, 독창력과 창의력을 억압해온 과거의 틀을 깬다며 기자와 프로듀서(PD)들에게 보도·제작의 자율성과 재량권을 크게 강화해줬다. 이에 상대적으로 입지가 크게 약화된 중간간부들은 정 사장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을 제외하곤 제 목소리를 잃고 사장과 후배직원들의 눈치만 살핀다. 그야말로 3년의 사장 임기가 ‘무사히’ 지나가기만 바라는 형국이다. ‘복지안동(伏地眼動)’이 따로 없다.”

    국장급 특별승격만 20명

    정 사장 취임 이후 두 차례 단행된 특별승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신동아’가 입수한 KBS 국장급 특별승격 실시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3년 5월9일과 2004년 2월10일자로 단행된 특별승격에서 무려 20명의 간부가 승격에 필요한 직위재직기간을 단축해 국장급으로 승격했다. 전임 박권상(75) 사장 재임 5년(1998년 3월∼2003년 3월)간 국장급 특별승격자가 5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두 사장의 재임기간을 감안하지 않고 단순히 수적으로만 따져도 4배나 많은 수치다.

    승격사유를 보면, 장해랑(48) KBS 비서실장이 ‘업무능력 및 리더십 탁월’을 이유로 승격을 위한 직위재직기간 2년2개월이 단축된 것을 비롯해 ‘제작관련 기획 및 창의력 탁월, 리더십 및 제작능력 탁월’ ‘리더십 및 조직장악력 탁월, 연예프로 PD로서 청렴하다는 평가’ ‘개혁성 및 공정성 탁월, 프로그램 제작능력 우수’ 등 갖가지 사유가 망라돼 있다.

    KBS의 한 간부급 직원은 “인사권자인 사장이 ‘개혁의 이름으로’ 특별승격을 단행한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과도하게 특별승격을 실시하면 비슷한 승격요건을 갖췄음에도 승격에서 제외된 다른 여러 직원에게 ‘코드 인사’라는 불필요한 위화감을 조성해 조직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반면 일선 기자나 PD, 방송기술·행정직 등 KBS의 젊은층 다수는 정 사장의 개혁노선에 광범한 지지를 보낸다. KBS의 한 지역총국 소속 기자는 “정 사장에겐 현업부서부터 챙기려는 면이 있다. 경북의 지역국을 순회하는 자리에서도 ‘왜 이렇게 일선에서 뛰는 기자인력이 부족하냐’며 애정어린 지적을 아끼지 않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적인 정 사장과 강성화한 KBS노조의 손발이 잘 맞다 보니 본사 간부급 직원들의 반발심리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도 귀띔했다.

    취임사에서 ‘KBS는 신명나는 일터가 될 것’이라던 정 사장의 공언이 무색해질 정도로 KBS는 내부 분열이 심각한 상황이다. 일각에선 KBS가 이른바 ‘PD 5인방’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비판마저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KBS 관계자의 말.

    “‘PD 5인방’이란 PD 출신으로 편성·제작파트를 비롯해 KBS의 주요 포스트에 있는 간부급 및 평직원 5명을 지칭한다. 모두 KBS PD협회장과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이들이 방송에 비전문가인 정 사장을 적극 보좌하며 ‘KBS 개혁호(號)’의 운항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KBS 구성원들 사이에선 KBS의 주요정책이 ‘PD 5인방’에 의해 사실상 결정되는 것 아니냐는 넋두리마저 공공연히 나돈다.”

    ‘PD 5인방’은 KBS 내부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隱語)로 취재과정에서 수차례나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PD 5인방’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한 국장급 간부는 “‘PD 5인방’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PD 5인방’에 대한 경원(敬遠)의 분위기는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PD 출신인 KBS 한 부장급 직원의 귀띔이다.

    “예전엔 편집회의 과정에서 여러 직원의 의견을 반영해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였지만, 요즘은 담당PD 차원에서 거의 마무리된다. 더욱이 사내에서 노조나 PD협회의 목소리가 워낙 커 중간간부들은 프로그램이 기대에 못미치거나 못마땅해도 예전과 달리 자율성이 한껏 강화된 후배 PD에게 좀처럼 지적하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자칫 잘못했다간 구시대적 인물이나 반개혁세력쯤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을 자초하기 싫은 것이다.

    이른바 ‘PD 5인방’ 중 4명이 KBS PD협회장 출신이다. 이를 마뜩찮게 여기는 시니어 PD들 사이엔 7월21∼23일 이뤄진 차기 PD협회장 선거에서 전임 PD협회장(공채 17기)보다 높은 기수가 PD협회장이 돼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생겨나 공채 9기 후보가 출마하기도 했다.”

    기자직 등 다른 직능의 직원들이 PD직과 미묘한 긴장관계를 보이는 징후도 감지된다.

    KBS의 한 기자는 “기자들 사이에선 PD들이 만드는 시사교양프로그램, 특히 ‘한국사회를 말한다’ ‘인물현대사’ 등 정 사장 취임 이후 신설된 소위 ‘개혁프로그램’의 소재나 제작방향이 중립적이지 않다고 평가하는 시각이 꽤 존재한다. 편파성 시비에 휘말릴 소지가 큰 프로그램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또 정 사장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현 노조위원장이 PD이다 보니 ‘올해 11월로 예정된 차기 노조집행부 선거에서 PD 출신이 위원장에 당선되는 일만은 절대 막아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고 털어놨다.

    기자직과 PD직 간 불협화음은 감사원 특감 결과가 발표된 지난 5월21일 열린 KBS 시청자위원회 회의에서도 언급됐다.

    김춘옥 KBS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 최영묵 위원께서는 5층에서 오늘 KBS 사장선임과 관련된 주제발표를 하고 조금 전에 내려오셨는데,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최영묵 KBS 시청자위원회 교양분과 위원(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저는 ‘시사투나잇’을 즐겨 보기 때문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과거의 ‘세계는 지금’이나 다른 형태의 지면뉴스를 묶어놓은 느낌은 드는데, 제가 실제로 우려한 것은, 아까 답변을 하셨는데 기자하고 PD들이 실제 많은 불협화음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화학적 결합 얘기를 하셨는데 그렇게 되고 있다면 다행이고 자리는 차츰 잡아가지 않겠느냐 생각은 듭니다. (2004년 5월 KBS ‘시청자위원회 회의록’ 발췌)

    자체감사 후 사전심의 부활

    중간간부가 무력화될 경우 가장 큰 폐해는 프로그램 제작과정에서 최종 완성물의 오류를 미리 여과하고 프로그램의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해 완성도를 높이는 ‘게이트키핑(Gate Keeping)’ 기능이 유야무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직의 지도자 주변 몇몇 측근이 이런저런 영향력을 발휘하는 행태는 사실 어느 조직에나 있을 수 있다. ‘PD 5인방’ 운운하지만, 그런 경향은 오히려 전임 사장 시절에 더욱 심했다. 소위 ‘○○고 마피아’로 불린 특정고교 출신 이너서클이 조직을 장악했다. 이에 비해 정 사장 취임 이후 학연·지연에 얽매이는 경향은 사라졌다. 정작 심각한 구조적 문제는 중간간부들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게이트키핑 등 중간 제어기능 또한 약화되고 이것이 종종 프로그램 편향성을 낳는 한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KBS 한 부장급 직원의 말이다. 그는 또 “정권과 가까웠던 전임 사장 재임시절에도 친정부적 방송행태는 나타났다. 그럼에도 소위 ‘형식적 객관주의’ ‘기계적 중립성’ 등으로 불릴 만큼 일정한 균형성은 갖추려 노력했다. 반면 ‘정연주 체제’에선 균형감각의 결여로 한쪽으로 경도(傾倒)되는 경우가 두드러진다”고 평했다.

    게이트키핑 실종의 대표적 사례는 지난해 10월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송두율 프로그램’이다. 같은해 9월27일 KBS 1TV는 시사교양프로그램 ‘특별기획-한국사회를 말한다’(부제: ‘귀향, 돌아온 망명객들’)를 방영했다. 입국이 금지돼온 해외 반체제 인사들의 귀향(歸鄕)을 특집으로 다룬 이 프로그램은 당시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60) 교수를 미화했다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정연주 사장은 같은해 10월2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KBS 국정감사에서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당시 논란의 초점은 프로그램의 ‘색깔’에 맞춰졌다. 정 사장은 당시 대국민 사과에서 “송두율 교수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송 교수의) 결백하다는 주장과 다른 사실이 밝혀져 매우 당혹스럽고 혼란과 오해를 부른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언급했다. 이에 반해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PD연합회)는 이 프로그램에 제45회 ‘이 달의 PD상’을 안겨줬다.

    보도된 바 없지만, 이 프로그램은 제작과정에서 절차상 중대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신동아’ 취재 결과 확인됐다. 논란이 됐던 프로그램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프로그램 방영에 앞서 거치도록 돼 있는 사전심의 절차가 생략됐던 것. 더욱이 KBS측은 이와 관련해 자체감사까지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제작진은 제작과정상 하자 유무를 묻는 기자에게 함구로 일관했다. ‘한국사회를 말한다’ 제작진의 황모 책임프로듀서(CP)는 “묻는 의도가 뭐냐? 절대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며 입을 굳게 닫았다. 해당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던 최모 PD도 “내가 제작한 다른 프로그램에 대해선 말할 수 있지만, 그 프로그램에 대해서만큼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정연주 체제’의 KBS

    지난해 9월27일 KBS 1TV가 방영한 ‘한국사회를 말한다’는 사전심의를 생략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신동아’는 KBS 심의평가실을 통해 절차상 하자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심의평가실 관계자는 “당시 프로그램 방영에 임박해 ‘한국사회를 말한다’ 제작진이 ‘내레이션 더빙작업이 방영 당일까지 이어져 제작진이 자체적으로 위임심의를 하겠다’는 요지의 요청서를 보내와 이를 수락했다. 심의실로서는 사실상 사전심의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논란이 일단락된 뒤 KBS 감사실 관계자가 심의평가실을 찾았다. 그 뒤 사전심의의 필요성이 새삼 불거졌고, 자체감사 결과 지난 5월3일부터는 생방송을 제외한 모든 녹화프로그램에 대해 심의평가실에서 의무적으로 사전심의를 하게끔 조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KBS는 자체감사를 하기 전부터도 모든 녹화프로그램에 대해 사전심의를 거치도록 하는 원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연주 체제’ 이후 점차 이 원칙이 느슨해지면서 사전심의 대신 위임심의만 거치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을 다루는 주요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청자와 사회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사전심의를 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임심의는 프로그램을 제작진 스스로 검토하는 것을 뜻한다. 부연하면, 주요프로그램에 비해 사전심의의 필요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프로그램, 예컨대 ‘TV유치원 하나, 둘, 셋’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의 경우에 위임심의가 이뤄져왔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말한다’가 위임심의만 거쳤다는 사실은 심의에 관한 한 이 프로그램이 ‘TV유치원 하나, 둘, 셋’과 결과적으로 동격(同格)으로 취급됐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송두율 교수 문제가 던질 사회적 파장을 감안할 때 이는 난센스에 가깝다. 결국 주요프로그램에 해당하면서도 매우 ‘이례적’으로 위임심의만 거친 ‘한국사회를 말한다’는 자체감사의 대상이 됨으로써 아이러니컬하게도 흐지부지해졌던 KBS의 사전심의시스템을 재정립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망각된 공영방송의 역할

    KBS 프로그램의 콘텐츠에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지난 5월31일 방송위원회가 발표한 지상파 방송3사의 2004년 봄 정기개편 TV프로그램 편성 분석결과를 보면 교양보다 오락 위주로 흐르는 현상이 공영방송인 KBS 2TV가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KBS 2TV의 전체시간대 오락프로그램 편성비율은 48.0%로 상업방송인 SBS의 41.6%보다 높았다. 지난해 봄 개편 때도 KBS 2TV는 오락프로그램 비중이 방송3사 중 가장 높았다.

    KBS 2TV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조차 모호한 상태로 상업방송과 다를 바 없이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이런 현상은 당초 정 사장이 취임사에서 “KBS가 상업주의에 매몰되고 시청률 경쟁의 노예가 된다면 더 이상 공영방송으로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진정으로 국민과 시청자에게 봉사하는 프로그램, 공익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KBS의 존재 이유”라고 공언했던 것과 정면배치되는 것이다.

    전체 방송시간에 비해 오락성 프로그램이 많은가 적은가를 따지는 형식상 논란 못지않게 내용 면에서도 양질의 프로그램을 보려는 시청자의 욕구를 감안해야 할 공영방송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KBS의 채널들은 ‘놀자판’이다. 불륜, 일탈, 사랑타령으로 넘치는 ‘사랑방’, 그저 웃고 즐기면 그만인 ‘노래방’ ‘놀이방’으로 변질돼버렸다. 이런 현상은 방송3사가 비슷한 실정이지만, 그래도 공영방송인 KBS만은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나.”

    김우룡(61) 한국외국어대 교수(언론학)는 “정권은 흔들려도 공영방송이 흔들려선 안 되는데 KBS가 과연 대한민국 대표방송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며 “KBS의 한 간부가 ‘저런 프로그램도 (방송으로) 내보내냐’고 탄식하는 걸 보았다. KBS는 사회발전을 위한 의제설정이 가능한, 진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몇 달 전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지나치게 많아 그 제작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려 방송3사에 관련자료를 요청했더니 KBS는 자료의 초안만 보내왔다. 그래도 KBS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MBC와 SBS는 ‘영업기밀’이라며 자료를 내주지도 않았다”고 귀띔했다.

    취지 무색해진 윤리강령

    “비윤리적이고 부정한 사례들에 관련된 분들은 스스로 KBS를 떠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바란다.”

    정 사장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이렇게 격앙된 어조로 언론인의 윤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제 KBS 내부의 윤리의식은 정 사장의 바람과 적지 않은 괴리를 보이기도 한다.

    ‘신동아’ 취재 결과 KBS의 모(56) 국장은 지난 3월 국내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인기가수 서모(32)씨측의 초대에 응해 고가의 와인을 포함한 저녁식사 접대를 받은 뒤 이런 사실을 예능국 CP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거론, KBS 감사실이 해당 국장과 가수 서씨측, 해당 음식점 등에 대해 경위조사에 나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같은 조사사항은 6월 중순 정연주 사장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의 당사자인 KBS 국장은 고가의 접대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지난 7월9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저녁식사 자리엔 가수 서씨도 있었다. 10년 전 ‘서○○ 빅쇼’를 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포도주 한잔 얻어마셨을 뿐이다. 이 일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회사의 명예에 누를 끼치게 된 셈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해줄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와 관련, 장해랑 KBS 비서실장(8월9일 팀제 시행 후 비서팀장)은 국장 접대건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비서실에서 답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면서도 “아직 관련조치는 취해지지 않았지만 윤리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필요한 절차를 거칠 수도 있다”고 답했다.

    KBS가 노사 공동으로 제정해 지난해 9월1일 선포한 KBS 윤리강령 15개 항 가운데 제12항은 ‘KBS 임직원은 직무관련자로부터 3만원 이상의 식사와 향응 등의 대접을 받지 않도록’ 규정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직무 관련자로부터의 향응에 대한 엄격하고 구체적인 규정이다. 공무원 윤리규정을 준용한 규정이지만 공무원 사회에서조차 비현실적이라고 지적받고 있는 3만원을 적용한 것은 공영방송 KBS인은 공무원보다도 더욱 엄격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라는 친절한 해설까지 달아놓았다.

    ‘신동아’의 취재가 있은 뒤 문제의 KBS 국장은 7월말 윤리위원회에 회부돼 윤리위원장으로부터 ‘경고’조치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윤리강령 제정을 준비해온 KBS는 지난해 8월 1TV 교양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의 담당 PD가 해외취재에 가족을 동반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도덕성 시비에 휩싸이자 그를 해임한 뒤 강령 선포를 앞당긴 바 있다.

    KBS 윤리강령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영화배우 문성근(51)씨다. 정치색이 짙은 문씨가 지난해 6월 신설된 KBS 1TV ‘인물현대사’의 진행을 맡아오다 지난 2월 중도사퇴한 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파문을 던진 것에 대해 당시 정연주 사장은 문씨가 KBS 윤리강령을 사실상 위반했음을 인정한 바 있다. 이에 즈음해 KBS 노조위원장 출신의 한 기술직원은 KOBIS에 ‘문성근에게 우롱당한 KBS,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비판글을 올리기도 했다.

    KBS 윤리강령 제3항은 국내 언론사 최초의 규정으로 ‘공영방송 KBS 이미지의 사적 활용을 막기 위해 TV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자, 그리고 정치관련 취재 및 제작 담당자는 해당 직무가 끝난 후 6개월 이내에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공공장소 TV채널 바꾸는 소형 리모컨

    박모(48) 예능국 주간의 승격 문제도 KBS 내부에서 한동안 직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박 주간은 KBS 2TV ‘해피투게더’의 담당 CP(당시 부주간)로 있으면서 인기개그맨 겸 MC 신모(33)씨를 해당프로그램 MC로 영입하기 위해 외주제작사에 2001년 11월부터 3년간 제작비를 과다하게 지급하고 외주사가 부담해야 할 장비임차비 등 일부 제작비를 KBS측이 대신 지급하도록 KBS 제작시설을 외주사에 편법 제공, 이를 통해 발생하는 외주사의 초과이윤을 MC 신씨에게 지급케 해 KBS에 2억600여만원(KBS 추산)의 손실을 입혔다고 한다. 더욱이 박 주간은 이 같은 사실을 숨기려 외주사 선정 관련 문서를 허위로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 올해 1월8일 징계(견책)처분을 받았다.

    문제는 박 주간이 징계를 받은 지 한달여 만인 올해 2월10일 부주간에서 주간으로 승격했다는 점. 이에 대해 장해랑 KBS 비서실장은 “견책처분을 받긴 했지만 박 주간의 징계 사유는 개인비리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박 주간의 승격은 인사권자인 사장의 권한에 따른 것이며 회사 차원에서 많이 고민한 뒤 판단한 결과”라고 답했다.

    KBS 인사규정 제28조 2항은 ‘견책인 자는 징계일로부터 6월 이내에는 승진임용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승격 제한에 대해선 별도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승진이 아닌 승격을 시킨 정 사장의 인사를 두고 사규를 무시했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하자 있는 승격’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KBS의 한 관계자는 “승진은 직급 자체가 올라가는 것을 말하지만 승격은 다르다. 박 주간의 경우 직급은 그대로인데 직책이 부주간(부장급)에서 주간(국장급)으로 이동한 것이다. 주간은 부주간보다 업무와 관련한 역할과 관리대상의 범위가 훨씬 확대되는 자리다. 부주간 몇 명도 거느릴 수 있다. 그런 만큼 승격은 직급 상승만 의미하는 승진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도 제작질서를 문란케 해 징계까지 받은 사람을 굳이 승격시킨 것에 대해선 좀처럼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KBS TV제작본부는 지난해 12월 박 주간을 포함한 ‘해피투게더’ 제작팀에 대한 단체표창을 상신했지만, 징계심의중이라는 이유로 의결이 유보됐다. 상신 사유는 시청률과 광고판매율을 높여 KBS 2TV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KBS가 상업주의에 매몰되고 시청률 경쟁의 노예가 된다면 더 이상 공영방송으로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던 정 사장의 공언이 또 한번 무색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 아니다. 얼마 전 KBS 직원 상당수는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주문제작한 초소형 TV 리모컨을 단체구입했다. 개당 3000원인 이 리모컨은 1회용 라이터만한 크기로 KBS 로고가 찍혀 있다. 버튼을 누르면 TV 채널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 가정용 리모컨과 같지만 이 리모컨은 역 대합실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TV 채널까지 바꿀 수 있게 되어 있다.

    KBS의 한 기술직원은 “마음만 먹으면 이 리모컨으로 공공장소 TV 채널도 몰래 KBS 채널로 돌릴 수 있다. 한 기술직원이 이런 기능을 활용해 사외에서 애사심을 발휘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에 공감하는 직원이 많아 제작을 주문한 것”이라며 “솔직히 지나친 애사심이 아닌가 싶다. 어쩐지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 리모컨은 1000여개나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색 짙은 KBS노조

    KBS노조를 두고도 말이 많다. 1988년 결성된 KBS노조엔 차장급 이하 직원 4300여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

    “KBS를 자동차에 비유하면 경영진은 가속장치, 노조는 이를 제어하는 제동장치에 해당한다. 과거 KBS가 비판기능을 상실할 때면 노조가 ‘방송은 국민의 것’이라며 방송민주화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1990년대 불어닥친 방송3사의 광고전쟁과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KBS노조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보다 노조의 권익신장과 자사이기주의에 앞장서면서도 ‘정치적 독립성’을 운위하고 있다. 지금은 노사 구분이 불분명해진 듯하다.” 우석호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겸임교수의 비판이다.

    KBS노조가 정치색 짙은 활동을 한 데 대한 비판도 있다. KBS노조는 4·15 총선을 앞둔 지난 3월29일 발행된 제237호 노보(勞報)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10명의 면면을 소개하는 글을 실으면서 귀퉁이에 민주노동당 정치후원금 기부 안내 문구를 덧붙였다. 이에 앞선 3월26일에는 KOBIS에 ‘4월15일 판 갈아주세요’란 제목의 민주노동당 관련 게시물이 올랐음이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 현행법상 노조의 정치활동은 보장돼 있다. 그러나 언론기능을 담당하는 공영방송사의 노조가 특정정당을 지지하는 내용의 게시물을 공공연히 전파하는 행위엔 문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7월3일 방영된 ‘한국사회를 말한다’(부제 : ‘신문, 왜 위기인가-75.2%의 진실’)에 출연한 성선제(38) 가톨릭대 교수(법학)는 “공무원노조의 특정 정당 지지에 대해 법원과 정부가 제지하지 않는 게 현실인 만큼 정부가 100% 출자한 KBS라 하더라도 그 노조가 정치활동에 해당하는 일을 한 것에 위법성이 있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KBS가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위탁·관리하며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언론기관인만큼 KBS노조 또한 일반기업 노조보다는 훨씬 강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KBS노조 김용덕 부위원장은 “민주노동당 지지와 관련해 KBS 내부에서도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KBS노조의 상급노동단체인 민주노총이 띄운 정당인 만큼 노조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팀제 시행 둘러싼 내부 반발



    KBS는 감사원 특감 이후 ‘체질개선’을 추진중이지만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지역방송국 기능조정. 이는 감사원이 특감에서 권고한 사항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이미 박권상 전 사장 시절부터 KBS 내부에서 구조조정 및 경영합리화를 위해 논의돼온 문제다. KBS는 현재 지역방송국으로 갑(甲)지국인 9개 총국(부산 창원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춘천 제주)과 을(乙)지국인 16개 지역국(울산 진주 안동 포항 목포 여수 순천 군산 남원 공주 충주 강릉 원주 영월 태백 속초)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KBS가 외부용역을 거쳐 폐국(廢局)을 추진중인 7개 지역국(여수 군산 남원 공주 속초 영월 태백)이 소재한 지역의 주민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지역방송국 살리기 KBS개혁 국민운동본부’를 결성, 지역국 통폐합은 지방분권에 역행하는 것인 동시에 민의(民意)를 수렴하지 않은 일방적인 ‘위로부터의 통폐합’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국 기능조정에 관해 KBS 노사는 이미 합의를 마친 상태여서 통폐합은 예정대로 진행될 전망이다.

    반면 이와 함께 KBS 개혁의 한 축을 이루는 팀(team)제 시행을 두고는 KBS 내부의 균열이 만만치 않다.

    팀제는 지난해 6월 사장 직속기구로 발족한 ‘개혁추진단’이 조직·인력의 효율성 제고 방안으로 내놓은 것. 국장 부장 차장 평직원 등으로 세분화된 기존의 직제를 연공서열을 과감히 탈피한 팀장-팀원 체제로 개편해 군살을 빼고 현업 중심의 효율적인 제작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당초 추진키로 했던 팀장-팀원의 2단계 방안(대팀제)을 회사측이 한때 국장-팀장-팀원의 3단계 방안(소팀제)으로 재검토하자 노조가 비효율적인 관료형 조직을 그대로 두는 것은 간부들의 자리를 보전해주기 위한 것으로 개혁에 대한 후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KBS 내부에서 논란이 거듭되다 7월21일 KBS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8월9일부터 대팀제로 시행됐다.

    이를 위해 7월30일과 8월3일 단행된 팀장 인사 결과 1121명에 달하던 국장 부장 차장 등 중간간부 자리는 모두 폐지되고 부서장은 184명의 팀장으로 단일화됐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평팀원이다. 간부 자리가 예전에 비해 84%나 사라진 것. 특히 이번 인사에서는 평직원 5명이 팀장에 임명됨으로써 상위직책과 하위직책의 대폭 변동이 이뤄졌다. KBS 사상 최대 규모의 직제개편이다.

    팀장 인사에 대해 KBS노조측은 기대만큼의 파격적 발탁이 이뤄지지 못해 다소 미흡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론 무난했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직원들도 적지 않다. 팀장 인사와 관련, 일부 중간간부들은 “팀제는 가히 조직을 허물어뜨릴 만한 폭발력을 지닌 사안인 데도 정 사장과 노조가 ‘코드’를 맞춰 노조 또는 PD협회 같은 직능협회의 간부 출신 직원들을 대거 팀장으로 발탁하는 ‘편가르기 인사’를 했다”고 비판한다.

    팀장 중 27명, 노조 및 직능협회 출신

    실제로 ‘신동아’가 이번 인사에서 팀장이 된 직원들의 출신을 조사해본 결과 그중 27명이 KBS노조 또는 각종 직능협회의 간부 출신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평사원(2직급 을)으로서 팀장이 된 5명은 모두 노조 및 직능협회 간부 출신이었다.

    알려진 바 없지만, 강동순 KBS 감사 역시 팀제 시행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강 감사는 팀제 시행을 확정지은 7월21일 이사회에서 정연주 사장과 이사들에게 ‘KBS 조직운영체제 개혁에 대한 감사 의견’이라는 자료를 배포했다.

    ‘신동아’가 입수한 이 자료는 ▲팀제 도입의 당위성에 대한 조직 구성원들의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고 ▲팀제가 KBS의 다양한 조직과 업무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으며 ▲팀제 시행으로 인해 고위직급의 유휴인력화가 심화될 것이 예상되며 ▲게이트키핑 기능을 맡아온 부·차장 직위의 폐지로 인해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오류가 우려되며 ▲부·차장 직위 폐지로 인해 노사분규 발생시 사측의 대응력 약화가 우려되며 ▲‘평가와 보상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팀제 도입은 혼란만 초래하며 ▲KBS의 업무 및 조직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팀제를 시행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등의 지적들을 조목조목 담고 있다.

    이번 팀제 시행과 함께 일부 부서에서는 평팀원이 된 옛 간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들이 한동안 현업을 떠나 제작현장과 유리돼 있어 ‘감(感)’이 떨어진다는 이유가 컸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충환(52) KBS 홍보팀장은 “팀장 인사의 기준으로 제작·보도 파트의 경우는 능력을 우선시했으며 기술·경영 파트는 능력과 함께 조직의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며 “이번 인사로 간부였다가 평팀원이 된 직원에 대해 일부 팀에서 경원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교통정리가 된 상태”라고 말했다.

    감사원 특감 이후 잇따르는 언론의 비판에 KBS측은 ‘흠집내기’쯤으로 치부하는 분위기다. ‘한국사회를 말한다’ ‘인물 현대사’ 등 개혁프로그램을 제작해온 KBS 기획제작국의 한 PD는 “KBS에 대한 비판은 일부 보수신문과 정치권이 정략적으로 하는 부당한 공격이다. KBS는 사회공동체의 보편적 선(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규환(52) KBS 기획제작국장(현 정책기획센터장) 역시 지난 7월9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기획제작국 PD들은 국민의 진정한 뜻을 대변하고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각자 양심에 따라 최대한 자율적으로 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KBS의 한 30대 중반 PD는 “운동권적 마인드를 가진 일부 기획제작국 PD들이 공정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의욕과잉에 가까운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협의회는 정치적 집단?

    팀제 시행 등 KBS 개혁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 8월5일 가진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정연주 사장은 직장협의회 결성 움직임과 관련, “직장협의회 결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KBS의 경영이 어려워졌다고 평가하거나 프로그램의 공정성이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가칭) KBS 직장협의회는 제작 보도 기술 경영 등 KBS의 전 직종을 망라한 친목모임 성격의 단체로 공영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사내 의견수렴 활동을 하게 될 전망이다. 현재는 일부 간부급 직원들이 주축이 된 임시조직인 (가칭) KBS 직장협의회 주비위원회(대표 윤명식·심의위원)가 지난 7월30일 KOBIS에 ‘직장협의회를 조직하며’라는 글을 올린 뒤 직원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비위원회는 오는 8월말 KBS 직원 60여명이 참여하는 발기인대회를 열어 직장협의회 창립을 서두를 예정. 이들의 주된 주장은 편파성 논란을 빚은 탄핵방송과 같이 균형감을 상실한 보도로 KBS에 대한 신뢰도와 광고수입이 떨어지고 있으며, 방송을 모르는 정연주 사장이 노조나 직능협회 등에서 활동했던 직원들로부터 제한적인 정보를 제공받아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명식(52) 주비위원회 대표는 “팀제로의 전환은 조직의 머리와 발만 남기고 중간간부층에 해당하는 몸통을 잘라낸 것”이라며 “안 그래도 프로그램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판에 이번 인사로 인해 중간거름장치마저 사라져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3∼4개월 후 팀제 시행에 대한 중간평가를 위해 사내 공청회를 열겠다”고 덧붙였다.

    왜 이렇게 극명히 대비되는 것일까. 한쪽에선 정 사장의 개혁노선을 강력 지지하고 다른 한쪽에선 그를 성토하며 파열음을 내고 있는 ‘정연주 체제’의 KBS. 지금 KBS를 지배하는 것이 조직공동체를 ‘개혁세력’과 ‘반(反)개혁세력’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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