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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구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노무현 친위대’ 386 정치인들아, 趙光祖에게서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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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것은 전하가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신씨를 ‘반정공신’들에게 빼앗긴 사실이었다. 아무리 신씨가 연산군의 처제이며, ‘거사’를 반대하던 신수근의 딸이라지만, 전하가 등극하면서 이미 왕비가 된 분을, 임금의 ‘간청’을 무시하고, 그리도 표독스럽게 폐위시켜 내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전하는 그 이후 공중에 매달린 줄 위를 걷는 듯 모든 것에 극도로 소심해졌다. 즉위한 후 나를 만나기까지 10년 동안 발생한 5건의 역모사건도 전하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위 2년에 발생한 ‘이과(李顆)의 역모’는 임금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했다. 공신책봉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현재 임금을 폐위하고 견성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중종실록’ 2/8/26) 했던 이 역모사건 이후 전하는 왕위를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힘들어했다.

당신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경험이 있는 터라 자신도 언제 누구에 의해서 형처럼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때문에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하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고야 말았다.

사실 나를 비롯한 사림집단의 결정적인 패인(敗因)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가 그른가만 생각했지, 전하가 우리를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광통교를 지나는 우리에게 백성들이 말 앞에 늘어서서 엎드려 절할 때, 운종가의 상인들이 우리에게 지지와 성원을 보낼 때, 우리는 ‘역사의 승리’만을 확신했지, 전하의 커져 가는 불안감을 헤아리지 못했다.



언로가 통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역사가 가면을 벗어 던지기 전까지 우리는 진리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세인의 이목을 처음으로 집중시키고 전하의 마음을 잡아끈 이른바 ‘폐비 신씨 복위 논쟁’(중종 10년)은 그 한 예다. 당시 전하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 번개와 천둥소리가 나자 “비상한 재변(災變)이 있다면 반드시 비상한 변고(變故)가 있기 마련”이라면서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렸다.

이에 대해 박상과 김정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폐비 신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궁궐 밖으로 몰려난 지 벌써 10년이 되었는” 바, “명분도 없고 까닭도 없이 내쫓은 신씨를 다시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중종실록’ 10/8/8). 이는 ‘반정공신’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취한 조처가 “명분도 없고 까닭도 없는” 행위였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이었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당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반대세력의 반발과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여전히 권력을 장악한 공신들은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을 당장 잡아다 문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몇몇 사림은 구언의 명에 따라 올린 상소 내용을 문제 삼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를 막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정언 표빙(表憑)은 “언로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이 사건은 실로 그 사악한 생각이 종묘와 사직의 안위에 크게 관계”됨을 보여주는 일이라면서 “문초”를 더욱 강력히 요청했다. 대부분의 대간은 박원종·성희안 등 반정의 주역이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기정사실화한 이 일을 다시 거론할 경우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이들을 “문초”하고 “유배”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언로냐 국가기강이냐’를 놓고 조정이 떠들썩할 즈음 마침 나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임명된 지 이틀 만에 나는 상소를 올려 대간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즉 나는 먼저 “언로가 통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대간이 된 자는 언로를 연 후에야 비로소 대간의 직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상과 김정의 일에 대해서 나라의 재상들이 그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하더라도, 대간에서는 반대로 그들을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언로를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대간에서 언로를 막고 그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막 정언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그 본분을 잃어버린 대간들과 함께 근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사헌부·사간원의 대간 전원을 파직”하든지, 아니면 나를 파직하라고 상소했다(‘중종실록’ 10/11/22).

이에 대해서 많은 동료·선배가 비난했다. ‘문과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정언이 되어서, 그것도 임명된 지 이틀 만에 감히 대간 전체를 탄핵해?’ “함께 임명된 유옥·박명손은 그 일에 대해 가만히 있는데, 왜 조광조 너만이 그런 주장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구차스럽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지도 않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지만, 나는 폐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대간의 태도와 언로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일이 발생하기 5개월 전인 1515년(재위 10년) 3월에 두 번째 왕비 윤씨가 죽자 전하는 매우 쓸쓸해하셨고, 새 왕비를 간택할 것이냐 아니면 “분홍색 치마를 뒷동산 바위에 펼쳐놓고” 기다리는 신씨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고 계셨다.

그래서 폐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 전하가 좋아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원칙론만 얘기함으로써, 선비들의 신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전하의 뜻에도 부합하려 했다. 내 상소로 인해 조정의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고, 전하께서도 “조광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온 조정이 서로 대립하니 매우 놀랍다”면서(‘중종실록’ 10/12/乙卯) 빨리 이 문제를 끝맺으라고 지시했다. 결국 이 문제는 좌의정 정광필을 필두로 한 많은 관료가 그들을 용서해주자고 하여 박상과 김정은 다시 관직에 돌아올 수 있었다(15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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