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기로에 선 ‘왕따 전경련’

생존모델은 ‘헤리티지’ 아니면 ‘왕사쿠라’?

  • 글: 윤경호 매일경제신문 산업부 차장 yoon218@mk.co.kr

    입력2004-08-25 19: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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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경련이 흔들린다. 재계와 정치권, 재계와 사회단체를 이어주던 가교(架橋) 기능에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청와대에서 전해지는 냉랭한 기류에 ‘대기업 십자군’의 드센 기세도 한풀 꺾였다. 위상과 역할의 재정립이 초미의 과제로 떠올랐다.
    기로에 선 ‘왕따 전경련’
    지난 7월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기획조정실 관계자들 사이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그 주초 청와대가 발표한 국민경제자문회의 2기 위원에 강신호 전경련 회장이 빠진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2기 국민경제자문회의를 구성하면서 “앞으로는 원로분과회의 대신 현장 중심의 실물경제 전문가 목소리를 중시하겠다”고 밝혔다. 그 결과 교수 그룹 외에 경제단체와 연구기관장들이 대거 위원에 포함됐다.

    하지만 정작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은 회장이나 부회장 누구도 위원에 임명되지 않아 ‘현장 중심의 실물 경제 전문가’ 대열에 끼지 못했다. 산업통상 부문의 자문위원 9명에는 대한상의,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무역협회, 벤처캐피탈협회 등의 경제단체 대표들이 포진했지만 전경련은 쏙 빠진 것.

    그로부터 두 달여 전인 5월25일 청와대 영빈관. 자산 기준 30대 그룹 총수 가운데 청와대로부터 ‘선택’된 15명의 총수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다. 탄핵안 부결 후 업무에 복귀한 노 대통령이 “경제를 직접 챙기겠다”며 마련한 자리였다.

    통상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회동을 준비하는 것은 전경련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날 회동 준비에 전경련은 전혀 끼지 못했다. 현명관 전경련 상근 부회장은 오래 전부터 예정된 앙골라 방문 일정까지 취소하며 청와대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사인은 오지 않았다. 전경련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지난 2월 회동 때만 해도 전경련이 분명한 매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왕따’냐, ‘거리 두기’냐

    재계에서는 이 두 가지 ‘사건’을 전경련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의 시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해석한다. 전경련이 정부와 재계의 가교로서 기능하지 못한 정도를 넘어 다른 경제단체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왕따’라는 표현까지 썼다.

    전경련을 자문위원에서 제외한 데 대해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처 박용만 기획조정실장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박 실장은 “당초 산업통상 부문의 대상자가 너무 많아 한두 명을 빼려고 했다”며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이나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보다 연세도 많고 해서 제외됐을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지난 2월 회동은 전경련이 사실상 실무 준비를 다했다. 참석대상이 전경련 회장단이었기 때문이다. 전경련 회장단에는 강신호 회장과 현명관 부회장 외에 재계 유수 그룹 회장들이 포함돼 있다. 우선 삼성 이건희, 현대자동차 정몽구, LG 구본무 회장 등 ‘빅3’가 있다. 여기에 대한항공 조양호,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포스코 이구택, 삼보컴퓨터 이용태, 효성 조석래, 한화 김승연, 동양시멘트 현재현, 코오롱 이웅렬, 롯데 신동빈, 풍산 류진, 녹십자 허영섭, 두산 박용오, 삼환기업 최용권, 삼양사 김윤, 이건산업 박영주 회장 등을 합쳐 모두 21명이다. 당시 대선자금 수사의 칼날을 피해 해외에 머물고 있던 김승연 한화 회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했다.

    그런데 5월25일 회동의 참석 기준은 조금 달랐다. 자산총액 기준 상위 그룹 20개사를 기준으로 청와대가 직접 선정했던 것. 여기에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등 3개 경제단체장이 추가됐다. 또한 확정 단계에서 실제 참석자는 몇 가지 이유로 제외되거나 바뀌었다.

    자산총액 기준 대기업에서 한국전력, 도로공사, 주택공사, 토지공사, 가스공사 등 공기업은 제외됐다. 이와 함께 가족이나 형제 또는 친척 관계인 총수들은 가능한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했다. 옛 현대그룹에서 분가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과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재계 14위와 19위지만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형제 관계라는 이유로 제외됐다. 재계 21위인 신세계 이명희 회장과 CJ 이재현 회장도 이건희 삼성 회장과 친인척이라 제외됐다. LG그룹에서 분가해 새롭게 재계 22위에 오른 LG전선 구태회 명예회장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재계 24∼29위인 동양, 대림, 효성, 동국제강, 코오롱 등 중견 그룹 총수들이 참석하게 됐다. 재계 12위의 한화 김승연 회장은 해외 체류를 이유로 참석 불가 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이 회동에서도 제외됐다. 결과적으로 노대통령과 총수들간의 회동은 전경련과 ‘거리 두기’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업무 복귀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실체 없는 위기론’을 강하게 질타했다. 쓸데없는 위기론이 오히려 불안심리를 높이고 그 결과 경제에 자신감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경제단체 관계자들이 이런 위기론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시각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실제로 그간 일련의 강연과 간담회 등에서 경제위기를 보는 정부의 안이한 자세를 비판해온 현명관 부회장은 노 대통령의 지적이 있은 후 입을 닫았다. 청와대에서 전해지는 냉랭한 기류에 전경련도 적잖이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로에 선 ‘왕따 전경련’

    노무현 대통령(가운데)이 전경련 회장단 및 기업 총수들과 오찬을 갖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1월19일).

    전경련은 “시장경제의 창달과 자유기업주의의 확산을 통해 우리나라를 기업하기 좋은 나라,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구체적으로는 ▲글로벌 민간경제 협력 선도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경영 환경 개선 ▲기업시민의 역할 선도와 자유시장 경제 실현 ▲회원 서비스 확대와 경제계의 구심점 역할 수행 등을 제시한다. 420여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되는 단체인 만큼 이런 비전과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나름의 기능에 충실한 편이다.

    7월21일 경기도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IT센터에선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전경련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마련한 ‘대기업 경영 노하우 중소기업 전수 프로그램’이 그것.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한 협력사업의 하나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모델을 구축하고 대화를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힘으로써 더불어 발전해가는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중소기업청이 추천한 각 지역 중소기업 CEO 3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특히 이날 노하우 전수에서는 대기업과 협력회사와의 상생 방안이 제시됐다. 아토 등 삼성전자의 협력업체 대표들이 삼성전자와의 국산 설비 공동개발, 6시그마 구축사례, 품질 및 생산성 향상 성공사례 등을 발표했다. 앞으로 이 프로그램에는 삼성전자 외에 현대자동차, LG전자, SK 등의 대기업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전경련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공동 핵심기술 개발사업, 투자 및 제휴, 해외시장 개척 등의 비즈니스 협력 기회를 늘려갈 방침이다.

    전경련은 올해부터 체계적인 시장경제 교육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올초 새로 만들어진 사회협력실에서 이를 주도하는데, ‘시장경제원리 확산과 반기업정서 해소를 위한 경제교육’을 2004년 최대 역점사업으로 내세우고 있다. 연인원 2만8000여명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전개한다는 목표다. 단순한 강좌개설 차원을 넘어 교육 이수자들의 자율적인 동아리모임 등 다양한 후속모임을 적극 지원해 시장경제 이념의 지속적 확산을 위한 전방위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취지다.

    전경련은 “민간 차원에서 이러한 대규모 경제교육사업을 전개하는 것은 초유의 일”이라며 의미를 부여한다. 전경련 사회협력실장 김석중 상무는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고조된 사회 전반의 반기업정서가 위험수위에 도달했으며, 이를 방치할 경우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상황인식에서 시작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반기업정서의 확산은 과거 기업의 일부 불합리한 관행에서 비롯됐지만, 다른 한편 시장경제원리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 부족에 기인한 측면도 작지 않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반기업정서를 해소하기 위해선 기업이 먼저 투명경영과 윤리경영에 매진하는 동시에 친시장·친기업적인 사회여론을 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기업 규제에는 총력 대응

    전경련은 대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일을 자임하면서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규제조치의 하나로 꼽는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대표적인 사안이다.

    출자총액제한이란 자산총액이 일정 규모 이상인 대기업이 본연의 영업이나 투자와 상관없는 계열사에 대한 출자를 총자산의 25%를 넘겨서는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규정이다. 재계는 이 규정이 기업들의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경련은 7월26일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출자총액규제와 의결권 제한 등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한 역차별적 규제를 성토하고 나섰다. 자산규모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대기업을 규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이런 규제가 신규 투자에 장애물이 된다는 내용이다. 출자총액제한 대상 기업집단에 지정되지 않으려고 자산 규모가 5조원을 넘지 않도록 고의로 억제하는 등 부작용도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8월4일 ‘대기업집단 차별규제 주장에 대한 의견’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전경련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공정위는 자산 기준으로 대기업을 규제하는 것은 총수에 의한 그룹총괄경영, 순환출자를 통한 무분별한 계열사 확대 등 재벌의 소유지배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며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로 인한 불투명한 기업경영과 소액주주권 침해 등은 결과적으로 대외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같은 문제가 재계 상위 그룹에 집중돼 있어 자산규모를 선정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일부 개선됐으나 아직 크게 미흡하기 때문에 시장의 자율 감시장치가 정착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입장이다.

    전경련은 공정위의 반박을 재반박하는 자료를 만들었지만 발표를 보류했다. 실무진이 만든 반박문은 윗선의 결재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전경련 관계자는 “공정위가 반박자료를 내자마자 이를 재반박하면 자칫 소모적인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사례 하나. 7월22일 전경련은 “지난해 총자산 5조원 이상 18개 그룹의 설비투자 규모가 30조200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2% 늘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8개 그룹의 결합(연결)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2003년 설비투자가 증가했는 데도 그간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금융감독원이 “18개 그룹의 ‘투자활동으로 인한 순현금 유출’이 2002년 46조원에서 2003년 31조원으로 33.5% 감소했다”고 발표하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작성됐다.

    전경련은 재무제표상 ‘투자활동으로 인한 순현금 유출’은 현금 유출에서 현금 유입을 뺀 순개념으로, 금융거래에 의한 현금 흐름이 대부분(2003년의 경우 80%)을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 제조업 부문의 생산능력, 고용창출, 산업파급효과 등을 나타내는 ‘기업 설비투자’ 지표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18개 그룹의 ‘투자에 의한 현금 유출’ 150조5000억원 중 금융(자본)거래에 의한 현금 유출은 120조4000억원(80%), 유형 고정자산 거래에 의한 현금 유출은 30조1000억원(20%)이다. 이 가운데 ‘기업 설비투자’ 개념에 근접한 유형 고정자산 거래만 보면 18개 그룹의 지난해 투자는 전년 대비 11.5% 증가했다는 것.

    특히 삼성, LG, 현대차, SK, 한화 등 5대 그룹은 2002년 17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21조5000억원으로 설비투자가 22.3% 증가했다는 설명이다.

    ‘회심작’ 기업도시 프로젝트

    올 들어 전경련이 진행해온 ‘회심의 역작’은 기업도시 프로젝트다. 전경련은 올초 1000만평 규모의 기업도시를 건설해 고용 창출과 지역 균형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겠다며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전담팀이 만들어졌고 건설교통부 등 정부당국과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6월15일 대강의 윤곽을 공개했다.

    기업도시 건설을 위해서는 일단 특별법(가칭 기업도시건설특별법) 제정이 추진된다. 이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이 협의해 기업도시특구 지역을 선정하고 직접 개발계획을 수립해 산업단지·문화·연구개발(R&D)·배후도시 기능을 효율적으로 연계하게 된다. 그동안 협의를 통해 압축된 기업도시 후보지는 제주 서귀포, 전북 군산·익산, 전남 광양·무안, 경남 김해·진주, 경북 포항, 강원 원주 등 9개 도시.

    전경련측은 “현행법상 제약으로 기업도시 건설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업 주도로 추진하는 데 한계가 크다. 따라서 특별법을 마련해 참여 기업에 규제 등을 혁신적으로 완화해줄 필요가 있다”는 주문이다. 전경련이 제안할 기업도시건설특별법에는 ▲기업이 주도적으로 도시개발계획에 참여하고 ▲자율적으로 조성 토지를 처분하며 ▲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또한 ▲기업도시 내 기반시설은 기업이 담당하고 도시 밖의 기반시설은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토록 하며 ▲기업에 부담이 되는 조세·부담금 등은 경제자유구역 수준으로 낮추고 ▲기업도시 건설 투자시 출자총액제한 제약을 받지 않게 하며 ▲현행 25%로 제한된 동일인 신용공여 한도를 40%로 높이는 방안 등도 건의된다.

    전경련은 “당초 20여개 지역이 기업도시 유치를 신청했지만, 도별로 1∼2개로 압축해줄 것을 요청했고 수도권과 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인 충남·북은 제외했다”고 밝혔다. 지자체들은 기업도시 유치 희망지역에 대해 세제지원과 인센티브 부여는 물론 투자에 대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래 모델은 헤리티지 재단?

    그러나 이같은 전경련 본연의 활동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관심이 그다지 쏠리지 않는다. 분명 전경련이 과거와는 달라진 것 같은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 꼭 집어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까.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7월16일 사법연수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경련 경제강좌 수료식에서 “전경련을 ‘재벌의 대변인’으로 보는 비판적 시각이 있음을 안다”며 “이런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경련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발언이다.

    요즘 전경련의 최대 고민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당당한 대응논리를 내놓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벌들의 모임인 전경련이 과연 필요하냐”는 단순한 물음에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로에 선 ‘왕따 전경련’

    참여연대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앞에서 재벌그룹 불법 정치자금 제공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2003년 10월20일).

    과거 전경련은 ‘재계의 창구’였다. 정치권과의 가교였고, 사회 각 단체에 대한 재계의 지원도 이곳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기업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재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여기에다 대선자금 수사를 둘러싸고 정경유착이 다시 도마에 오르면서 ‘대기업의 이익단체’ 또는 ‘재벌들의 모임’인 전경련의 위상과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경제 5단체의 면면을 따져봐도 그렇다.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 다른 단체들의 성격은 명확하다. 상공회의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아우르는 중소상공인 모임이고, 무역협회는 수출입업체들간에 정보를 공유하고 업무협조를 기하는 기구다. 또한 경총은 노동조합에 맞서 노사문제를 전담하는 사용자 단체이며, 중기협은 중소기업조합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대표기구다. 이처럼 다른 단체들이 목적과 회원 범주에 있어 비교적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것과 달리 전경련은 이게 그리 쉽지 않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을 전경련의 미래 모델로 지향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고민에서 비롯됐다. 헤리티지 재단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치로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이데올로기나 지향점을 함께하는 기업과 개인을 회원으로 확보해 이념의 바탕을 제공한다. 정치적으로도 공화당 노선과 연결돼 있다.

    헤리티지 재단을 지향점으로 삼는다는 얘기는 전경련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는 차원에서 의미심장하다. 현재처럼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만족하려면 이런 논의는 필요없다. 사회 여건이 어떻게 변하든 스스로 당당하게 나서면 된다. 하지만 헤리티지 재단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논리는 ‘보수세력의 보루’로서 전경련을 상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재계 관계자는 “한국 사회에는 아직 보수를 제대로 대변하는 단체나 집단이 없다”며 “더욱이 노무현 정부 등장 이래 가속화되고 있는 이념논쟁의 와중에는 보수세력의 보루가 절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보수세력은 그저 누리려고만 하지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 행동에 나서려면 시간과 돈,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존중하고 존속시키고자 하는 공통의 가치를 찾아내고 발전시켜 이를 이론으로 무장하는 역할을 전경련이 담당하자는 것이다.

    “‘왕사쿠라’가 살 길”

    그러나 전경련이 지금 상황에서 이런 역할로 전환하자는 발상은 현실성이 부족하다.

    전경련 홍보실장 조성하 상무는 “헤리티지 재단 지향론은 아직 회장단이나 회원사나 회장단 어디에서도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실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간단치 않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계단체인 전경련이 갑자기 보수세력의 보루를 기치로 내걸고 나서면 진보진영이나 시민단체의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재계 관계자는 “경제단체란 모름지기 ‘왕사쿠라’가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경제단체장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도 ‘왕사쿠라론’ 신봉자다. 경제단체는 회원인 기업과 정부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서로에게 이득을 주는 거간꾼 노릇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정통성이 있든 없든, 이념적 지향이 같든 다르든, 어느 정부라도 찬성하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경제단체인 만큼 생리적으로 친여당, 친정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협조하는 가운데 기업에 유리한 것을 끌어내면 되지, 굳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런 관점에서 봐도 전경련의 헤리티지 재단 지향론은 아직은 신기루일 따름이다.

    이렇듯 뻔한 한계를 감안해서인지 전경련은 요즘 실리 추구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우선 여의도에 있는 회관을 헐어내고 새 건물을 지어 재정자립을 확보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미 실무진이 새 건물 건립계획을 마련했고 회장과 부회장이 이를 승인했다. 이제 회장단 회의와 총회에서 동의만 얻어내면 되는 상태. 회원들의 회비에 의존하고 있는 재정구조를 건물 임대사업을 통한 수익사업 위주로 전환해 자립도를 높이겠다는 의도다. 오는 연말까지는 결론을 내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매월 초 열리는 회장단 회의에 ‘실세’ 회원사 대표들이 모습을 비치지 않아 진전이 더딘 형편이다. 삼성, LG, 현대차 등 재계 빅3 그룹 총수들이 좀처럼 참석하지 않는 회장단 회의는 늘 썰렁한 분위기다. 6월10일 열린 정례회의에도 강신호 회장, 현명관 부회장 등 집행부를 빼면 단 3명의 그룹 총수만 나왔다. 이날 회의 안건에는 닷새 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투자전략보고대회, 7월초 열릴 예정이던 한미재계회의 보고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들어 있었다.

    이렇듯 썰렁한 회장단 회의는 전경련의 오늘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년 2월 전경련은 다시 한번 위상과 진로를 놓고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강신호 회장의 임기가 끝나 새 회장을 선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경련으로서는 빅3 그룹 총수 가운데서 회장이 나와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빅3 총수 중 누구도 선뜻 전경련 회장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는 다른 총수들에 비해 더 강도높은 압박이 가해지고 있지만, 이를 받아들일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회장의 선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전경련의 초대 회장을 맡은 바 있다. 이 회장이 선친의 뒤를 이어 전경련 차기 회장직을 수락할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삼성 관계자들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초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지낸 현명관 삼성 일본담당 회장을 전경련 부회장으로 보낸 것도 삼성이 전경련을 지원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는 동시에 이건희 회장에게 쏠리는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로 읽혔다.

    현 부회장은 전경련 사무국에 ‘삼성식 경영’ 바람을 불어넣었다. 부임 한 달여 만에 구조조정을 단행해 인원의 30%를 명예퇴직시켰고, 지난 연말에는 기업정책팀을 이끌던 임원(상무보)을 팀원으로 강등시켜 발령내는 ‘피바람 인사’도 했다. 기업관련 정책에 대한 전경련의 입장을 국회와 정부 등 외부기관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이었지만, 전례가 없는 조치였다.

    사무국 직원들은 “현 부회장이 부임한 뒤 업무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늘어났다”고 전한다. 빈틈없이 일을 시키고 실적을 평가해 인사에 반영하는 삼성 스타일 그대로라는 것이다. 오는 연말 현 부회장이 내놓을 두 번째 인사에서 누가 희생양이 될 것인지도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한때 재계에 나돈 정보지에는 현 부회장이 일으키고 있는 소용돌이가 이건희 회장의 전경련 회장 안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분석이 실리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이 ‘봉사와 희생’을 요구하는 전경련 회장직을 굳이 맡을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전경련 회장이라는 공직을 맡을 경우 이 회장의 ‘신화적 이미지’가 훼손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도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성공한 경영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국내외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는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된다면 어떤 배경에서일까. 분석가들은 그 이유가 단 한 가지라고 단언한다.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에게 그룹 경영권이 무사히 넘어가도록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현 정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인수를 둘러싸고 참여연대의 고발로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이재용 상무의 경영권 승계는 아직도 지뢰밭을 건너야 할 처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내년 2월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경련의 전성시대가 다시 오느냐의 여부는 다음 회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로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경련은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전경련이 기로에 서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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