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10년 불황’ 탈출, 일본에서 배운다

기업은 선택과 집중, 정부는 R&D에 공공투자

  • 글: 이종윤 한국외국어대 교수·경제학 leejy@hufs.ac.kr

    입력2004-08-25 1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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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경제는 대미(對美), 대중(對中) 수출 급증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정책당국의 노력으로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일본경제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인 수요가 안정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10년 불황’ 탈출, 일본에서 배운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일본경제가 지난해부터 회복 기미를 보이면서 닫혔던 소비자들의 지갑도 조금씩 열리고 있다.

    일본경제는 1990년대 초 버블 붕괴를 신호탄으로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1996~97년 일시적으로 회복 국면에 들어서는 듯했지만 곧 헤어날 길 없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일본은행이 재할인 금리를 제로상태로 유지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100조엔 이상의 재정자금을 투입했음에도 일본경제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증세를 보여왔다.

    기업의 부도율은 떨어질 조짐을 보이지 않았고 이는 바로 은행 등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금융시스템은 극히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자 구미(歐美)의 경제학자들 중에는 원천적으로 일본경제의 발전 구조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 약점 때문에 이대로 가면 일본경제는 결국 침몰해버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일본경제가 지난해부터 대미(對美) 대중(對中) 수출이 증대되면서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다. 꿈쩍도 않을 것처럼 보이던 기업의 투자 활동이 회복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소비자도 꽁꽁 싸맸던 지갑을 열었다. 각 경제주체의 이러한 움직임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지난해 일본은 경제성장률 3.2%를 기록했다.

    이러한 회복 기조는 올해 들어서도 이어졌다. 연초 일본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을 1.9%로 예측했다. 그러나 상반기를 지난 최근 시점에 성장률 전망치를 3.5%로 상향 수정할 정도로 일본경제가 활기를 되찾고 있는 것이다.

    활기는 자연스레 금융시스템에도 반영되어 도무지 줄어들 것 같지 않던 금융권의 부실채권 규모가 크게 축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경제의 암적 존재였던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도 내년이면 완전히 해결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최근 우리 경제는 일본과 비슷한 장기 불황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경제가 완전히 안정적 성장기조를 구축했는가, 그렇다면 일본이 장기불황의 늪에서 벗어난 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본경제의 회복 요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세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잘나가던 일본경제가 왜 장기침체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일본경제가 장기침체로 빠져들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1985년 9월의 ‘플라자합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진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미국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결정한 ‘플라자합의’에 따라 일본의 엔화(円貨)는 한순간에 미국 달러 대비(對比) 40%나 평가절상됐다. 급격한 엔고(円高)는 한편에서는 일본경제를 버블상태로 이끌어갔다.

    ‘플라자합의’의 충격

    달러 가치의 급락으로 인해 일본경제의 경상수지 흑자분이 미국으로 향하지 않고 통화증발로 이어졌다. 통화증발은 이자율을 떨어뜨려 부동산 및 주식 수요를 급증시켰으며 이에 따라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급등하게 됐다. 일본경제가 버블상태로 빠져든 것이다.

    한편 일본기업들은 급작스런 엔고를 극복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른 수건도 다시 짤 정도로 경비를 줄이는 동시에 핵심 생산 설비를 첨단화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높아진 인건비를 흡수했다.

    이러한 노력은 거시적으로 볼 때 생산능력을 크게 증가시켰으나 내수가 축소됨으로써 엔고가 극복되는 1990년대 초가 되자 30% 이상의 초과공급이 생길 정도로 심각한 수급 불균형상태를 초래했다.

    내수 위축의 직접적인 계기는 버블을 진정시키기 위해 내려진 일본은행의 고금리정책이었다. 그러나 이후 저금리정책으로 회귀하자 엔고 극복 과정에서 극심한 수급 불균형을 겪은 일본기업들은 1990년대 내내 과잉설비, 과잉노동력의 일상화를 견뎌야 했다. 나아가서 버블 붕괴로 부동산 가격이 급락했음에도 부채 규모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기업은 과잉설비, 과잉노동력에 과잉채무까지 끌어안게 됐다. 이와 같은 기업의 과잉채무는 곧 은행의 부실채권 누적으로 이어졌다.

    일본경제를 장기침체로 몰고 간 또 하나의 요인은 세계무역기구(WTO)체제의 출범이다. WTO체제의 출범은 관세, 비관세 장벽을 크게 축소시킴으로서 국제통상 질서를 완전경쟁 상태로 몰고갔다. WTO체제 출범 당시 ‘지구촌’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그것은 WTO체제의 출범으로 사실상 경제적 국경이 허물어져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 속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기술산업의 발달은 이러한 환경에 날개를 달아준 격으로, 기업은 세계를 무대로 한 다양한 정보수집과 다각적 이윤 추구가 가능해졌다. 곧 정보기술을 이용해 특정 대상에 관한 정보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업으로서는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말하자면 완전경쟁의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제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지 못한 채 국경이라고 하는 일종의 비관세 장벽에 의존해왔던 기업이나 경영자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 모두 금융산업이 취약했다. 한일 양국은 오랜 기간 금융산업을 하나의 독립된 산업이 아니라 제조업 발전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때문에 구미(歐美) 선진국과 같은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일본 은행들은 정부의 강력한 규제하에 호송선단(護送船團) 방식으로 운영돼 왔기 때문에 산업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WTO체제가 출범하면서 국제적 경쟁이 시작되자 일본의 금융산업은 적지 않은 충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금융기능의 취약성이 일본경제가 장기불황 상태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다.

    주주자본주의와 구조조정

    1980~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적으로 금융시장의 규제완화라는 커다란 흐름이 자리잡게 된다. 규제완화는 금융기관간 경쟁을 격화시키게 되고, 그 결과 고객의 증권매매를 중개하는 유통시장업무의 수익률은 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투자은행들은 거래규모의 대형화를 통해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게 된다.

    투자은행간 합병 내지 매수가 빈번해지며 이에 따라 증권매매, 발주업무가 소수의 대형 투자은행에 집중된다. 결국 주식은 투자은행의 주요고객인 보험회사, 연기금 및 투자신탁 등 기관투자가에 집중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관투자가들은 주가차익을 극대화하는 수동적 수준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기의 영향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소유주식의 주가를 올리는 행동에 나서게 된다. 즉 대주주 자격으로 이사회에 대표를 보내 주가 상승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한 활동에 돌입하는 것이다.

    경영자는 주가 상승에 대한 대주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경영방침을 확립한다. 이 방침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적극적인 구조조정 정책이다.

    새로운 흐름 속에서 일본 기업들은 종래와 같은 이해관계자 중심에서 주주 가치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의 실업률이 높아진 데는 이러한 가치관 변화가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경제는 구미(歐美)경제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따라잡을 것인가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이 단계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은 구미 기술을 도입하여 이것을 흡수 개량하는 생산기술, 그리고 종신고용 및 연공서열 중심의 일본식 경영 등이다.

    일본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은 기존의 기술을 개량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없던 기술을 개발하는, 말하자면 창조적 기술의 개발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종신고용 내지 연공서열 중심 구조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어렵다. 창조적 기술개발을 위해서는 전력투구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환경에서는 그러한 자세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저금리 정책의 효과

    일본경제는 1990년대초 버블 붕괴와 더불어 불황이 시작되었다가 최근 들어서야 회복세를 보일 정도로 장기간 불황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정책당국이 이러한 경기침체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경기를 회복시키려 100조엔 이상의 재정자금을 투입했을 뿐 아니라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초저금리 상태를 유지했다.

    초저금리 정책은 거대한 경상흑자를 초과할 만큼의 자본 유출을 유도함으로써 엔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증대를 꾀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1995년 8월 단행한 금리인하는 그야말로 엔화가치의 하락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 의도는 그대로 적중하여 비록 일시적이나마 1996~97년에는 수출수요의 증대에 힘입어 경기가 활기를 띠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일본경제는 결국 다시 침체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력이 주효하지 못하고 다시 침체가 지속된 요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첫째, 경기 활성화를 위한 재정지출이 성장산업의 잠재수요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잠재수요가 큰 부문에 맞춰지지도 못했다. 오히려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는 과잉공급 상태의 산업에 재정지출이 이뤄졌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극히 미미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수급불균형을 확대시키기도 했다.

    둘째, 부실채권 처리가 지연됨으로써 은행의 대출여력이 극히 제한되었다. 뿐만 아니라 불황으로 인한 부동산 가격 하락에 따라 부동산 담보 대출의 규모는 축소된 데 비해 신용평가에 입각한 기업대출 능력은 향상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특히 은행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억제와 나아가 대출 회수 현상이 나타나 중소기업과 지방경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10년 불황’ 탈출, 일본에서 배운다

    일본 정부는 주식교환 및 이전제도를 만들어 기업의 구조조정을 뒷받침했다.

    셋째, 당초 저금리 정책이 투자 활성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1990년대 일본경제는 기본적으로 초과공급 상태였다. 즉 각 산업 부문마다 공급능력에 비해 수요가 부족해 가동률이 낮은 것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저금리 정책은 투자유발 효과보다는 오히려 이자생활자의 이자소득을 크게 떨어뜨림으로써 개인소비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넷째, 일본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난 노동집약적 비교열위 산업을 자유로운 시장경쟁에 맡겨 축소하기보다는 복잡한 유통구조와 다양한 비관세 장벽을 통해 적지 않게 온존시켜 왔다.

    더욱이 성장부문 근로자와 쇠퇴부문 근로자의 소득격차를 가격정책과 소득이전 정책을 통해 인위적으로 줄여왔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는 쇠퇴산업이 상당부분 살아남았다. 이 부문의 자본과 인력을 성장부문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축소시키지 않는 한 일본경제의 불안정성은 쉽게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일본경제가 오랜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꿈쩍도 않을 것처럼 보이던 일본경제가 활기를 되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몇가지 점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한 구조조정

    가장 중요한 원인은 대중(對中) 대미(對美) 수출이 급증한 것이다. 미국은 대선을 염두에 두고 지난해부터 감세 및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경기 활성화를 추진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기대한 대로 미국의 경제성장률을 상당히 높였다. 미국경제의 높은 성장률은 직접적으로 일본의 대미 수출을 크게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의 대미 수출 증가에 연동하여 일본의 대중(對中) 수출도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 기업의 투자가 증가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용 및 개인소비 수요를 증가시키는 효과까지 가져옴으로써 전체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있다.

    둘째, 불황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기업들은 생존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추진해 과잉설비 및 과잉고용이 크게 축소됐다. 나아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별 기업들은 다각화되어 있던 사업분야를 선택과 집중이라는 슬로건 아래 우선순위에 따라 재배치하는 구조조정을 가속화했다.

    일본 정부는 기업의 구조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법제도를 대폭 정비했다. 구체적으로는 1997년의 합병법제 합리화, 1999년 주식교환 및 주식이전 제도 도입, 2001년 회계분할법제 신설 및 연결납세제도 도입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주식교환 및 이전제도는 주주가 보유한 기업의 주식을 계열관계를 갖고 싶은 회사의 주식과 교환할 수 있게 한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특정회사와 완전한 모기업-자회사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회사분할 제도는 사업부문을 기민하게 분할, 독립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선택과 집중을 용이하게 했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에 힘입어 기업들이 대담한 구조조정을 한 결과 경영체질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수요증가에 연동하여 투자를 늘릴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수출증가 및 기업체질 개선에 따른 수익증가가 주가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고용사정이 크게 호전됨으로써 가계의 소비지출도 점차 활기를 띠었다. 말하자면 수출증가가 투자증가를 유발하고 수출 및 투자 증가는 소비증가를 유발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안정된 경제성장을 실현시키는 구조를 복원해낸 것이다.

    넷째, 종신고용 및 연공서열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일본식 인사관리에 상당한 변화가 일었다. 그동안 일본기업들은 적어도 3~4%의 잉여인력을 끌어안으면서까지 종신고용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 구조조정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 종신고용제도는 상당히 후퇴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전체 노동자 중 정규직이 75%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니 종신고용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공서열제에 관한 한 기존의 관행이 크게 파괴되어 능력 및 성과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승급, 승진을 차별화하는 쪽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요컨대 종신고용제는 가능한 한 유지하되 연공서열제는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는 쪽으로 바꿔나감으로써 안정된 기반 위에서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식 경영의 재편은 분명히 일본경제의 회복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섯째, 고이즈미(小泉) 내각이 추진한 금융개혁도 경제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은행이 부실채권을 털어버리도록 강력하게 유도했으며 금융기관 경쟁력 강화를 기치로 통합을 유도함으로써 은행을 대형화했다. 리소나은행의 경우와 같이 경영체질이 약한 은행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국유화할 정도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추진하되 한국에서처럼 대량실업으로 이어지거나 외국인이 자국 기업을 소유하지 않도록 속도를 적절히 통제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개혁과 관련해서는 정부 운영에 민간기업의 작동원리를 대폭 도입함으로써 경영효율성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경기회복을 겨냥한 공공투자 지출에 있어서는 종래와 같은 도로, 항만 등 전통적 사회간접자본 투자보다는 산학(産學)을 묶어서 연구개발활동을 촉진시키고, 인재의 양성에 역점을 두는 방향을 견지하고 있다.

    대미(對美) 대중(對中) 수출 급증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민간기업 및 정책당국이 추진한 일련의 노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일본경제는 분명히 회복기로 접어들었다. 다만 이러한 회복 기조가 지속적으로 이어질지는 불분명하다. 이번 경기회복이 결정적으로 중국과 미국 등에 대한 수출증대에 힘입은 것일 뿐 일본경제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인 개인소비 수요가 안정적으로 증가될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었느냐 하는 점은 아직 명백하지 않다.

    예를 들어 기업의 높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여전히 동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연금제도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앞으로 일본경제의 회복기조가 그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개인소비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냐 여부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인력에 대한 공공투자를

    10여년에 걸친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있는 일본의 경험은 불황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경제의 진로에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는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경기회복을 위한 재정지출이 상당 기간 과잉생산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는 건설, 토목 등 전통적 사회간접자본 관련 분야에 집중됨으로써 지출의 승수효과가 극히 작았다는 점이다.

    나아가 효과가 충분히 가시화될 때까지 재정지출을 지속하지 못하고 경제가 다소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이내 안정화정책으로 선회했기 때문에 재정지출 규모에 비해 그 효과는 극히 미미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성을 토대로 최근 들어서는 재정지출의 방향이 전통적 투자활성화 정책보다는 산학(産學)의 연구인력을 최대한 활용한 기업의 신기술 개발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정책전환은 기업활성화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역시 경기침체에 당면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려는 시점에서 일본의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도 대학 및 기업 등에 산재해 있는 석·박사 등 모든 연구인력을 한국경제의 발전방향과 연동시켜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그들의 연구개발능력 및 기술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공공투자 정책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공공투자 정책은 기술개발이라는 직접적 성과로 이어질 뿐 아니라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생산성이 훨씬 높아진 우수한 연구인력을 현재 임금수준으로 고용하는 효과를 보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출의 파급효과를 통해 유효수요를 높일 수도 있다.

    일본의 경우 정책당국이 시의적절하게 제도적 장치를 정비시켰다는 점도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정책적·제도적 뒷받침을 받아 기업들이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인적·물적 경영자원을 적절히 재배치함으로써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영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빅딜’을 밀어붙이거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통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구속함으로써 사실상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적어도 일본의 경험을 활용한다면 기업이 스스로 국내외의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자기가 가진 경영자원을 적절히 재배치하고 가장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중소기업의 경영, 기술자원이 극히 빈약한 상태이다. 현시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중소기업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상호관련성을 가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접목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가진 기술과 경영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접목이 상호이익의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는 작업이 시급히 요구된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라는 일본식 경영을 변화된 환경에 맞도록 개선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IMF 관리체제로 접어든 이후 과도한 구조조정으로 인해 정규직 노동자가 45% 수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사실상 종신고용제도가 파괴되어버렸다. 노동자는 재취업이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열악한 고용환경 아래에 놓여 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누가 소비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겠는가.

    증시 외국인 비율 줄여야

    따라서 내수를 안정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고용은 최대한 보장하면서 승급, 승진에 관한 한 최대한 경쟁원리를 살리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주식시장의 과도한 외국인 지배구조 비율을 적절한 수준까지 축소,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잉공급과 수요부족 아래 일본은 장기간에 걸쳐 초저금리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투자증대에는 기여하지 못하면서 이자생활자의 이자소득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내수가 위축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은행이 공공적 성격을 벗어나 진정한 사기업으로 변신하는 과정에 들어섰다. 은행들이 능력 부족으로 경제성장에서 소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의 경우 아직 충분한 신용평가 능력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신용불량자를 대량으로 발생시켰으며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은행이 대출이자를 높여 기업의 금융비용을 높이는 반면 예금이자는 낮춰 내수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현재 금융회사들의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정부가 은행 등 금융회사들의 국민경제적 기능을 높이기 위한 과도기적 대응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은행이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대출심사를 받는 중소기업과 거래가 많은 대기업, 종합상사, 그리고 해당 중소기업의 기술을 평가할 수 있는 연구소 등과의 협력체제를 갖도록 지원해 신용평가 능력을 보완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중소기업의 대출 가운데 종합상사에 의한 상사금융이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중소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은행-기업-연구소 협력체제 구축해야

    한국와 일본경제는 다 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순조롭게 발전해오다가 1990년대 이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불황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시작하여 이제 긴 터널을 벗어나려 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이제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두 나라가 같은 조건 아래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황을 극복하는 방법도 같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경제가 적지 않은 분야에서 일본식 방법을 채택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불황 극복 과정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겐 일본의 경험을 심층분석해 불황을 보다 빨리 극복하는 데 적극 활용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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