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전두환-레이건 서울 정상회담

“저는 각하의 ‘힘을 통한 평화정책’을 지지합니다”

  • 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leescorner@hotmail.com

    입력2004-08-26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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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두환-레이건의 정상회담.
    • 전두환은 2차 비공개 회담에서 레이건을 앞에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한다. 이에 레이건은 “미국에서는 무력으로 정부를 뒤엎을 수 없다”고 뼈 있는 대꾸를 하는데…
    전두환-레이건 서울 정상회담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레이건 미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번은 1981년 2월초 전두환의 방미로 이루어진 워싱턴 정상회담이고, 또 한번은 2년 후인 1983년 11월 중순 레이건의 방한으로 성사된 서울 정상회담이다.

    이 두 정상회담은 장소와 시간이 다른 만큼 회담의 겉모습이나 기본 성격도 판이했다. 대통령이든 총리든 ‘아쉬운 쪽’이 상대방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첫 번째 워싱턴 정상회담 때의 전두환이 그랬고, 두 번째 서울 정상회담의 레이건이 그랬다. 어쨌든 전두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는 제 발로 워싱턴을 찾아갔고, 두 번째는 앉아서 레이건을 맞았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문서는 전두환-레이건의 서울 정상회담 대화록이다. 배석자 없이 두 사람만이 마주 앉는 소위 ‘비공개 단독 회담’의 대화록도 있고, 실무 관계자가 배석하는 ‘확대 정상회담’ 대화록도 있다.

    1983년 11월 당시 한미 관계나 국제 정세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전두환-레이건 두 사람의 대화록은 마지막 한 구절까지 읽어볼 만한 재미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이 만나면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은 ∼을 재확인하고 ∼에 이해를 같이했다’ 따위의 외교적 수사가 덧칠해지기 이전의 ‘날것’이고, 두 정상간의 공동성명이니 합의문이니 하는 이름의 ‘문패’가 붙기 이전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격식을 차리기 위한 인사말이나 상대방에 대한 찬사가 들어 있긴 하지만, 이런 의례적인 인사말에 이어 본론을 끄집어내는 대화술도 엿볼 수 있다.

    정상회담은 가장 치열한 외교전의 현장이고, 대통령은 한 나라의 국익을 대변하고 관철해야 하는 최고위급 외교관인 만큼 말 한 마디,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정치철학, 지도력, 성품, 국제 조류를 들여다보는 통찰력 등이 모두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론 말 속에 뼈가 들어 있을 것이고, 허튼소리인 듯싶지만 괜한 말 따위는 늘어놓을 시간조차 없는 것이 정상회담이기도 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론과 실제가 꼭 일치하란 법은 없다. 전두환-레이건 대화록이 그 이론과 실제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우선 두 사람 사이의 비공개 회동 대화록이다. 미 국무부의 2급 비밀 문서다.

    “그레나다 개입은 평화유지의 최선책”

    『다음은 1983년 11월12일 오후 2시30분, 한국 서울의 청와대에서 있었던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간의 비공개 회동 대화 내용을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것임(통역관이자 외교관인 데이비드 스트라웁이 작성했음).

    레이건 대통령 : 오찬석상에서 영부인(이순자 : 옮긴이)께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미국과 전세계는 랭군 참사와 사할린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 당시 각하께서 보여주신 신중한 대처에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베이루트 사건 때 각하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행동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그건 전쟁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저는 나카소네 총리를 만났을 때 일본이 북한을 응징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 점심식사 때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올해 우리는 두 번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각하와 미 국민이 보여준 지지에 한국민은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981년 각하를 뵈었을 때 저는 오늘날의 국제 상황이 아주 불확실하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지금은 국제 상황이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이 시대는 용기와 지도력을 갖춘 위대한 정치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각하와 같은 지도자를 갖게 된 점을 우리는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각하의 힘을 통한 평화정책을 지지합니다.

    일부에서는 각하의 그레나다 개입(그레나다 침공 : 옮긴이)을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평화를 유지하는 최선책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각하의 선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각하께서 취한 행동의 동기와 정당성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레이건 : 대단히 감사합니다. 워싱턴을 떠나기 하루 전날, (그레나다 침공을) 비판하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을 만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레나다에서 구출된 400여명의 의과대학생들이 자신들을 구출해준 젊은 병사들과 해병들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에 온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위험에 처해 있던 우리를 구해줘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함께 자리한 것을 보길 잘했습니다.

    우리는 그레나다에서 소련제 무기와 수백만 발의 탄알로 가득한 창고들을 찾아냈습니다. 갖가지 문서도 그 창고에서 나왔는데, 그것들을 모두 공개 전시하기 위해 앤드루 공군기지로 실어왔습니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각 나라의 대사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할 참입니다. 인구가 고작 10만명뿐인 이 작은 섬에 무려 1만5000명의 병사들이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그레나다에 있던 수백 명의 쿠바인들은 단지 건설노동자였을 뿐이라는 쿠바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일부 문서도 찾아냈습니다. 그중에는 건설노무자 명단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문서도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대공포 부대와 박격포 부대원의 명단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던 막사도 모두 군대 막사였습니다.

    전두환 : 가서 쉬실 시간이 되었습니다만, 내일 전선 시찰을 하러 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덧붙였으면 합니다. 현재의 한미연합사령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네월드 장군(당시 미8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 : 옮긴이)과 워커 대사의 공이 큽니다. 두 사람은 우리의 문화와 관습과 특수한 환경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미연합사에 대해 저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합니다. 전세계의 어느 연합군보다도 협조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다고 확신합니다.

    레이건 : 그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확인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국가적 비극 겪은 두 지도자의 동병상련

    이것이 두 정상간의 이른바 ‘비공개 단독 회담’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한미 양국간 현안을 놓고 씨름하기보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자리다. 전두환과 레이건 사이의 이 정도 분위기가 양국 대변인 입으로 옮아가면 ‘화기애애’한 것이 되고, ‘신뢰와 우의를 바탕으로 진지한 대화가 오간’ 것이 된다.

    레이건은 랭군 참사와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을 언급하며 한미일 3국의 공조와 우호관계를 재확인했다.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레이건의 동남아 순방 목적 가운데 하나를 짚은 셈이다. 대북 관계도 포함시켰다. 레이건은 이 사적인 자리에서 그레나다 침공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자신으로서는 당시 가장 곤혹스러운 외교 현안이었고, 전세계의 비판을 받고 있던 사안이었다.

    전두환이 그런 그를 전폭 지지한다고 했으니 레이건으로서는 더없이 고마웠을 것이고, 이 참에 하고 싶던 하소연도 했다. 레이건이 한 얘기의 절반이 그레나다 건이다.

    전두환은 ‘백악관 친구’를 손님으로 맞아 개인적으로는 햇수로 3년짜리 ‘우정’을 상기시켰고, 공적으로는 미국과 레이건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한국의 입장을 분명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만하면 문제 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최상의 분위기다. 랭군 참사, 베이루트 사태 등 국가적인 비극을 겪은 지도자끼리 동병상련까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날 11월12일 오후의 전두환-레이건 단독 회담은 실무 오찬에 이은 첫 공식 회동이었고, 이튿날인 13일 오후에는 두 번째 회동으로 확대 회담을 갖는다. 그만큼 첫 회동 때의 분위기로 봐서는 한미간 현안을 논의하는 두 번째 회동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첫 비공개 회담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11월13일 회담록은 전두환-레이건의 12일 비공개 회담에 비해 훨씬 길다. 미 국무부의 2급 비밀문서 9장짜리이고, 확대 회담인 만큼 참석자 수도 많고 발언자도 다양해진다. 배석자들이 두 정상이 참석한 이 확대회담 자리를 빌려 한미간 현안에 대한 최종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 실무자인 양국 관리들이 현안을 거론하는 시점과 방식 등이 이채롭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대화록에서 주목할 점은 양국간 회담인 만큼 미국의 한국 시장 개방, ‘미국의 소리 방송(VOA)’ 송신기 한국 배치, 전력 공급, 공동성명 합의문안 최종 결정 등 양국의 국익이 걸려 있는 민감한 의제를 다루는 부분이다. 회담 진행이나 대화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 전두환이나 레이건의 말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부분도 그대로 옮긴다.

    “정말 무서운 것은 한국군 호신술 시범”

    『주제 :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간의 11월13일 회담

    다음은 1983년 11월13일 오후 6시, 한국 서울의 청와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간에 있었던 확대 양자 회담 내용을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것임(통역관이자 외교관인 데이비드 스트라웁이 작성했음).

    미국측 참석자 :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무장관, 워커 주한 미 대사, E. 미즈, 제임스 베이커, M. 디버, R. 맥팔레인, R. 다먼, 폴 월포위츠, R. 맥나마, 개스틴 시거

    한국측 참석자 : 전두환 대통령, 신병현 부총리, 이원경 외무장관, 김만제 재무장관, 류병현 주미 대사, 강경식 대통령비서실장, 김병훈 의전수석비서관(통역), 정순덕 정무수석비서관, 사공일 경제수석비서관, 황선필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 박건우 외무부 미주국장

    전두환 : 레이건 대통령과 일행이 한국에 오신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하는 바입니다. 레이건 대통령께서 비무장지대의 경계초소(GP, Guardpost)를 방문하셨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전례 없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레이건 대통령께서 비무장지대에 가시는 것을 가능하면 막아보라고 경호원들에게 지시했었습니다. 어쨌든 대통령께서는 초소를 방문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초소는 북한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의 병력은 밤낮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적이 침투해 우리 병사의 목을 베어가기도 한 곳입니다. 아주 위험한 지역입니다.

    세네월드 장군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장성급이라 하더라도 초소 지역을 방문하려면 특별 허가를 받고, 특수복을 착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레이건 대통령께서 그곳에 들어갔다 오셨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일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대통령께서 그런 용기를 지니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각하께서 전선을 시찰하시는 동안 필요하다면 각하를 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포의 장막을 치도록 지시했고, 매분마다 상황을 보고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상황장교로 근무했던 한국전 때가 생각났습니다. 초긴장 상태였으나, 각하께서 리버티 벨 캠프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긴장을 풀고 혼자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자유와 평화 방위를 위해 용기를 보여주신 레이건 대통령을 위해 박수를 보내십시다.

    전두환-레이건 서울 정상회담

    전두환-레이건 서울 정상회담이 열리기 1년 8개월 전인 1982년 3월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1980년대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레이건 :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곳에 가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걱정됩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는 사실을 그곳에 갔을 때는 알지 못했으니까요. 오늘 한국군과 미군이 같이 근무하는 것과 사기 진작된 모습을 보고 감명 깊었습니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한국군의 호신술 시범을 봤을 때였습니다. 15장의 기왓장을 한 주먹에 모두 깨부수더군요. 나라면 해머가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시범을 보고 나서는 안심을 했습니다. (레이건 특유의 재담이 들어가 있는 부분으로 해석해야 할 듯하다 : 필자)』

    “각하의 초소 시찰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

    『전두환 : 미국 국민들이 비무장지대의 초소를 단순한 관광지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지, 레이건 대통령께서 그곳을 방문했다는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할까봐 걱정스럽습니다. 각하의 방문으로 그곳의 병사들이 더 용기를 갖고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밤 병사들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미국의 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갔는데 어떻게 우리가 무서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다른 대통령들도 비무장지대를 시찰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전선을 시찰하시긴 했지만, 아주 위험한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위험한 지역인 탓에 저 역시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로는 아직 가보지 않았습니다. 각하의 초소 시찰은 한미간 역사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것입니다.

    레이건 : 저 혼자서만 간 것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갔었지요. 정찰대가 위장한 채 개인 화기로 무장하면서 정찰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실감이 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한 가지만은 꼭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동맹국들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아주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봤듯이 한미 양국군처럼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긴밀하게 협력한 적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전두환 : 여러분 모두 어제 양자 회담을 잘 진행했으리라 믿습니다. 이 귀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우선 레이건 대통령께서 어떤 말씀이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 다음에 제가 간단히 말씀을 드린 후, 저희 외무장관과 제가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을 제 서재로 모셔서 비공개로 회담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나머지 분들은 양자 회담을 계속하시도록 하구요.』

    전두환이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탐색전이다. 레이건이 먼저 미국의 요구사항을 끄집어 내놓는다. 시간이 짧은 만큼 단도직입적이다.

    “필리핀 재정 지원해달라”

    『레이건 : 우리측 사람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일을 진척시켰는지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으나, 저희는 귀국에 석탄과 천연 가스를 공급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상의했고, 서로 정리가 됐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너무 어렵지 않으시다면 소련으로 송신시킬 ‘미국의 소리 방송(VOA)’ 송신기를 한국에 설치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벌써 토의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슐츠 : 대통령께서 이 문제를 거론해주셨으면 했습니다. 그레나다에서 우리가 찾아낸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레나다 정부는 국민들이 말을 잘 안 듣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을 봤습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의 영향력이 아주 큽니다. 저희 대통령의 요청을 우호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전두환 : 현 상황이 어떤가요?

    이원경 외무장관 : 그 사안은 현재 토의중입니다. 관련 부처가 세심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내법상 일부 개정이 필요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현재 신중하게 검토중입니다.

    사공일 경제 수석비서관 : 에너지 문제에 대한 것인데, 저희는 지금 역청과 무연탄, 천연액화가스, 알래스카산 원유를 포함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추후 한미 실무자급 회의에서 논의할 예정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장기 계획에서 일부 부정이 필요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계획과 같이 검토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전두환 : 포항제철에서 미국산 석탄을 쓰고 있지 않나요?

    사공일 :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사용량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후 사공일 경제수석비서관의 발언 부분은 비밀 해제에서 삭제되어 있음 : 옮긴이)

    전두환 : 대통령께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레이건 : 특별히 더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자유시장 신봉자이자 보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무역 장애가 제거되고 무역이 더욱더 개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슐츠 : 몇 가지 문제를 언급했으면 합니다. 필리핀 지원, 특히 난관에 처해 있는 필리핀의 재정 문제와 관련해 한국측이 임시 융자를 해주기로 한 점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은 벌써 이 임시 융자에 참가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 필리핀 지원에 대한 한국측의 결정도 아주 건설적이라고 확신하고 있고 저희도 그 점에 대해선 아주 기뻐하고 있습니다. 태평양권 문제에 대해서도 이번 경우처럼 모두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 귀측 재무장관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다는 얘기를 듣고 기뻤습니다. 슐츠 장관이 말했듯이 아시아 지역을 진정으로 돕기를 원하고 지역내 분쟁 위협에 맞서는 아시아 국가의 노력을 지원하고자 한다면 이런 조치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사공일 : (전두환 대통령에게) 필리핀이 일부 재정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 측에서 공동지원 참여를 요청해온 상태로, 많은 지원을 할 수는 없지만 안정이라는 이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했으면 합니다.』

    “올림픽 전에 새 영사관 지어달라”

    『전두환 : 우리가 그런 지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빚도 많은데.

    신병현 부총리 : 명목뿐인 지원입니다.

    전두환 : 좋습니다.

    맥나마 : 필리핀 지원 건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슐츠 : 대통령 각하, 워커 대사가 건설 건에 대한 요청이 있습니다. 1988년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에 새 영사관을 지었으면 합니다.

    전두환 : 아직 해결이 안 되었나요?

    이원경 외무장관 : 아직 협의중입니다.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류병현 주미 대사 : 우리도 워싱턴에 한 채 지었으면 합니다. 워싱턴DC 당국의 협조를 얻어주셨으면 합니다.

    전두환 : 슐츠 장관께서 이 문제에 협조를 해주십시오.

    워커 : 공동 서명식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이 가장 원했던 부분은 레이건의 입을 통해 서두에 나왔고, 나머지 부차적인 현안들은 슐츠 국무장관과 기타 실무 배석자들이 거론하고 있다. 레이건이 옆에서 적시에 훈수를 두고 있다.

    워커 대사의 발언 다음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이 대화록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자 가장 지루한 부분이기도 하다. 약 60분간 진행된 이 회담에서 한 사람이 가장 길게 한 발언이며, 9장의 문서에서 1장 반의 분량을 차지한다. 전두환-레이건의 서울 정상회담을 두고 떠돌았던 이런저런 말 가운데, ‘전두환이 상대방 시간을 제멋대로 물고 늘어졌다’ ‘회담을 좌지우지 일방적으로 이끌어갔다’ ‘레이건을 상대로 강의를 했다’ ‘선생이 학생(레이건) 다루듯 했다’는 해석이 나온 것도 이 대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두환 : 세 가지 사안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렸으면 합니다. 레이건 대통령께서 보호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선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에는 천연자원이 없기 때문에 무역을 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1930년의 보호주의는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입니다. 경제 전문가들 말을 들으니 무역이 물물교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보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한국은 저개발 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비약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새로운 공업국가라고 말합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제 선진 개발도상국입니다. 1986년에 가서는 우리 수입의 90%가 자유화될 것으로 봅니다. 오늘날 개발국 수준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둘째, 2차세계대전 이후 한국은 자유세계와 공산권 간 갈등의 한 사례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두 시스템 중 어느 쪽이 우월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적지입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는 미국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한국전을 치르면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레이건 대통령께서 국회 연설에서도 언급하셨듯이 미국은 우리에게 많은 지원을 했고 한국이 모델국가가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미국은 대단한 긍지를 가져도 된다고 봅니다. 한국은 시스템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북한은 경제 사정이 아주 어렵습니다. 세계 경제가 좋지 않음에도 우리는 상대적으로 아주 잘해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하나의 모델로 지목해도 좋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취임한 지 이제 2년9개월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각국의 왕과 대통령, 총리, 비동맹국 장관 등 모두 565명을 만났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우리의 성공 사례를 얘기하면서 미국과의 협력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사례를 따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버마를 방문하고 인도와 스리랑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려는 것도 비동맹국과의 외교를 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아시겠지만, 한국이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세계 속에서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다수 미국민과 이 방에 계시는 일부 분들조차도 한국을 일본과 동일시합니다. 일본의 GNP는 1조2000억달러가 넘지만 GNP의 1%만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외채도 없습니다. 사실상 일본은 채권국입니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올해 GNP는 675억달러에 불과합니다만, 국방비는 GNP의 6%입니다. 대단한 수치입니다. 외채도 182억달러나 됩니다. 한국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를 일본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두환의 ‘강의’ 후 레이건은 미국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전두환의 자기 과시에 정중한 감사를 표한다. 이어지는 비공개 회담에서는 서두에서부터 전두환의 2차 강의가 계속된다. 정상회담 자리에서의 대화인지, 앞에 후배 하나 앉혀놓은 술자리 대화인지는 독자가 판단한 일이다. 전두환의 2차 강의 후 레이건의 뼈 있는 듯한 대꾸도 흥미롭다.

    『레이건 : 걱정 마십시오.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많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외국 수반들에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그런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토를 탐내거나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합니다. 번영은 개인의 자질과 기업가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번영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보다 나은 기회가 마련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나라에 메시지를 전파시켜주고 계신 점 다시 감사드립니다.』

    (오후 7시5분경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 이원경 외무장관 및 통역관들을 비공개 회담을 위해 자신의 서재로 안내함)

    2차 비공개 회담

    『전두환 :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긴 합니다만, 제 재임 기간 2년9개월 동안 한국은 해방 후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고 봅니다. 사회 안정과 정치 안정 없이는 경제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국민들은 일을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의 첩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학생들을 동요시키면서 반정부 인사라고 자처합니다. 저는 자유롭고 개방된 시스템을 원합니다. 통행금지를 없애고 고등학생들의 짧은 머리와 교복을 없앤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종교계의 반정부 인사와 다른 반정부 인사들을 대화를 통해 설득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행도 자유화시켰습니다. 제가 취임하기 전에는 한국계 미국인 반정부 인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한국 동포들에게 말했듯이, 정부 비판을 한다고 해서 모국에 못 오게 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도 해외여행이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일부 문제가 있긴 합니다. 그중 하나가 여행 자유화가 지급 균형 상황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하 일부 내용 비밀문서 해제에서 삭제 : 옮긴이)

    “미국 TV에서는 탱크나 군인 안 보여”

    『해방 이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고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와 폭력을 행사하면서 이 대통령을 하야시켰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집권 연장을 했고 마침내 폭력으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국민들은 대통령이 바뀌는 것은 오로지 폭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건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물론 우리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모방할 수도 없고 따라가서도 안 됩니다만, 저는 각하께서 국회 연설 때 제 임기가 1988년까지이고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가 국회의원이 되기만 하면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교통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임기 동안 이러한 생각이 고쳐지도록 교육시키려고 합니다. 꼭대기까지 모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법을 어겼으면 저도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레이건 : 민주주의의 정신은 법에 따른 자유입니다. 선거로 당선된 사람들은 주인이 아니라 공복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국회의원들은 그 점을 배워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정부를 비난할 자유가 있습니다. 투표를 통해 항의하고 바꿉니다. 하지만 무력으로 정부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였을 때 닉슨 대통령이 물러났습니다. 미국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그러나 미국인들 사이에는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TV에서 탱크나 군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최고 권력자 자리에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가 뽑은 부통령이 업무에 아무런 차질이 없이 즉각 대통령 자리를 승계했습니다. 투표로 정부를 뽑았기 때문입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국민을 설득해 선거에 이길 수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만,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가 할리우드의 배우조합 회장이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이 조합을 통제하려고 든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고, 저도 그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력하게 대처했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해주신 것 깊이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해 잘 말하고 한국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으면 논박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긴 합니다만, 슐츠 장관이 뭔가 말씀드릴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슐츠 : 공동성명문이 잘 되었습니다만, 한 문단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원경 외무장관 :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처 말씀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슐츠 : 한 문장을 제안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풀릴 것 같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문제가 된 문장을 각하께 읽어드리고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두 정상은 자유와 개방,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제도를 수호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입니다.

    전두환 : 저는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장관에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원경 : (전 대통령에게) 저희 쪽 문안은 조금 다릅니다.

    슐츠 : 더 이상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전 대통령께서 문장에 동의하신다면 이 문제는 저와 이 장관이 따로 만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후 7시35분경 미 일행, 전두환 대통령 서재를 나옴)

    군사정권 지원한다는 비판 의식

    노련한 기지로 슐츠가 전두환의 직접 언급을 통해 해결한 문안은 공동성명 9항에 나오는 것이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후 당시 한국 정부의 반대로 공동성명 문안 작성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도 바로 이 9항의 문항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국측으로서는 인권 문제와 민주화 등 국내 문제로 비난을 받고 있던 전두환 정권에 어떤 방식으로든 재갈을 물릴 필요가 있었다. 바로 한 달 후면 선거의 해였고, 레이건 행정부가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원한다는 미국 내 여론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레이건의 서울 정상회담이 있었던 1983년 11월의 한국은 ‘해방 이후 가장 안정된 시기’라는 전두환의 표현과는 달리 심각한 갈등상황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광주사태의 그늘이 짙었다. 광주의 비극과 미국의 책임은 거의 동의어였다. 게다가 미 공화당 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전두환 정권 지지는 반미 정서를 부채질했고, 전두환 집권 이후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 학생시위대의 구호에는 ‘반파쇼, 반미 투쟁’이란 용어가 빠지지 않았다.

    ‘좌경’ ‘용공’ ‘불온’이 전두환 정권의 애창곡이었고, ‘민족’ ‘민주’ ‘민중’ ‘통일’이 반독재 민주세력의 구호였다. 한미 정상회담 한 해 전인 1982년은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던 해였고, 그해 3월 반미운동의 대표격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권이 내세웠던 ‘선진 조국 창조’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인권 문제로 구호조차 무색해졌고, 국내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럴수록 레이건 행정부와 전두환 정권은 밀착했고, 두 정권 모두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다. 전두환-레이건 서울 정상회담 대화록의 백미는 어쩌면 두 정상 사이의 대화가 이런 한국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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