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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 글: 이이화 역사학자 history13@hanmail.net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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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그래요. 어느 아이가 이 산속에서 아버지를 잃었다면서 헤매고 있길래 성이 뭐냐고 물었더니 ‘나’가라고 합디다. 당신 나가요, 나가!”

바로 그 사람의 성이 ‘나(羅)가’였다고 한다.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돌다보니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점점 더 늘었다.

그 무렵 나도 산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어른들 틈에서 호된 수업을 받으면서 야뇨증과 말더듬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석천암에서 108명의 제자를 기르면서 정치를 해보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현실정치만큼은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경찰관, 사회주의자, 친일파, 순수한 한문쟁이 등 다양한 배경의 제자들은 서울말씨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투리를 뒤섞어가며 밤이면 밤마다 열띤 논쟁을 벌였다. 어린 나는 이 논쟁에 늘 귀기울였다. 가끔 그들이 들고 오는 신문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한창 성장할 나이였던 나는 이 절간 같은 곳에서 줄곧 배고픔에 시달렸다. 논산 등 인근에서 공부하러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 먹을거리를 들고 와서 뒤주에 부어놓았다. 하지만 서울이나 먼 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쌀 뒤주는 자주 비었으며 세 끼 모두 멀건 죽으로 때우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야산선생이 어디론가 편지를 써보내면 먹을거리가 제법 넉넉하게 공급되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서 3년을 지낸 뒤 한국전쟁 직전 서산 안면도(당시는 서산군에 속함)로 이주하였다. 좁은 안면도에 300여호의 주역패가 몰려들었으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아버지가 3년간 살던 대둔산 수락리와 석천암이 한국전쟁 말기 빨치산의 손에 넘어가 모조리 불에 타버리고 안면도만 안전한 피난지가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야산선생을 신통한 예언자로 받들 수밖에 없었다.



9·28 수복 후 아버지는 다시 제자들을 데리고 부여로 옮겨왔다. 나는 이 무렵 주로 아버지를 따라다녔으나 1년에 한 번씩 이리에 사시는 어머니에게 들렀다.

가출과 고학생 시절

이렇게 아버지가 나를 어머니에게 보내주신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아버지의 커다란 실수였다. 그때 나는 도시의 마을로 내려와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영어와 역사 등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보다 그 아이들의 말쑥한 교복과 내가 걸치고 있는 바지저고리를 비교하면서 무언가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무렵 나는 이광수의 ‘사랑’을 비롯해 소설을 여러 권 빌려 읽게 되었는데, 이런 신소설들을 읽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배우던 한문과는 다른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도 가출의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가출할 무렵 어머니는 이리에서 부여읍내로 옮겨와 살고 계셨다. 어머니에게만 가출의 결심을 밝히고 여비를 얻어냈다. 어머니는 외가로 가서 외삼촌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라고 일렀다.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경북 성주에 있는 외가로 달려갔다. 외삼촌들은 나를 극진하게 맞아 주긴 했으나 학교에 보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나는 내가 머무르는 주소를 쓰지 않은 채 아버지에게 가출의 뜻을 밝힌 한문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렇게 외가에서 1년쯤을 빈둥거리다가 어릴 적부터 나를 무척 아껴주시던 고령의 이모부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트럭을 얻어 타고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왕래하면서 이발소 같은 데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결국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부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처럼 고아 아닌 고아로서는 피난지 부산의 혼란이 오히려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아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든지, 초등학교 졸업장 없이도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든지, 이 학교 저 학교 옮겨다니면서 월반을 할 수 있었다든지 하는 따위 역시 이러한 혼란을 틈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고학생으로 부산 여수 광주 등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그래도 번듯한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환경에 힘입은 바 크다.

나는 다른 학우들과는 다른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또래 아이들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다는 점이다. 학령(學齡)을 놓쳐 늦게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누가 내게 나이를 물어오면 나는 늘 머뭇거렸다. 남들보다 나이가 많은 이유를 한참 설명해야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지 않은 탓에 수학 과학과 음악 미술 과목은 점수가 형편없었다. 고학생 처지에 과외를 받을 수도 없었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셋째, 동료들보다 한문을 잘했다. 덕분에 유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당시 모든 교과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었던 터라 국어 역사 등 인문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를 능숙하게 읽어낼 수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상계’ 애독자였다. 역시 한문 실력 덕분일 것이다. 인문과목의 선생님들만큼은 나를 귀여워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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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이화 역사학자 histor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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