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7년(세종 9년) 8월17일에 황치신·김여달 등 5명의 ‘근각(根脚·조선시대 범죄자 기록표)’이 처음 확인됐을 때만 해도 이 사건은 그저 흔한 추문의 하나로 간주됐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녀가 쏟아낸 ‘간부(姦夫)’의 수가 불어났다. 그중에는 현직 재상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면서 조정은 긴장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 오른쪽의 사헌부 관청에 누가 들어가느냐가 세간의 큰 관심거리였다. ‘유감동 명부’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불려왔다. 자연히 그 건너편에 있는 이조(吏曹)에서도 누가 붙들려 가는지 주목하게 됐다.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는 내 직책(이조판서)상 조사 대상 인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자…
모두들 처음엔 딱 잡아떼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유감동 여인과 대질신문을 하자 상황은 일변했다. 그녀가 일시와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밀한 정황까지 소상히 설명하자, 피의자는 물론 조사관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제는 그녀가 여염집 정실부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가끔 한 명의 첩실을 두고 여러 사내가 다투거나, 기생 하나가 부자 형제와 관계를 해 문제가 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현직 관료의 정실부인이 수십명의 조신(朝臣)과 통간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처음엔 자신을 기생이라 속이기도 하고, 또 때론 아무개의 첩이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감현감 최중기의 아내라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조정의 많은 신료가 한 번 내지 수차례씩 그녀와 동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흘 후(20일)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등 9명의 명단이 추가로 공개됐다. 중앙군의 정예 당상관(정3품)들과 해주의 판관, 그리고 도성의 장인(匠人)과 상인 등 잡다한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 주로 무반계 인사들이었다. 숙부와 조카가 동시에 통간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열흘 후(30일) 또 새로운 명단이 확인됐다. 이번엔 과거에 갓 급제한 자로부터 의정부의 재상(宰相·종2품 이상의 관직자)에 이르기까지, 현직 관료에서부터 퇴임한 관료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신분의 이름이 나열됐다. 먼 지방으로 이미 파견 나간 수령도 많았다. 조사를 위해 그 수령들을 불러들일 것인지가 어전회의에서 제기됐다.
“이 여자를 더는 추국(推鞫)하지 마라. 이미 십수명의 간부가 나타났고, 또 재상까지 끼여 있으니 일의 대체(大體)가 벌써 다 이루어졌다.”(‘세종실록’ 9년 8월20일자, 이하는 ‘09/08/20’ 식으로 날짜만 표기함)
상(上)께서는 이 문제를 계속 수사할 경우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뒷사람의 감계(鑑戒·거울)”로 삼는 데서 얻는 이익보다 공직자의 도덕성이 실추됨으로써 오는 손실이 더 크다고 보신 것이다.
이조의 수장인 내 처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여러 재능 있고 덕망 높은 공직자가 이른바 ‘유감동 명부’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9월2일 새롭게 드러난 성달생의 경우 공조판서(정2품)이면서도 자신의 딸을 중국에 공녀(貢女)로 보냄으로써 온 나라에서 “진신(縉紳·고위 관료)의 도리를 다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이국만리 명나라 황제를 위해 가족을 궁녀로 보내야 하는 약소국의 처지가 개탄스러웠지만, “일이 외국과 관계돼 있어서 피할 수도 없는”(09/07/21) 연례행사였다.
1427년의 여름날 17세의 성달생의 딸이 자물쇠가 채워진 가마에 타고 건춘문을 출발할 때 부모 친척은 물론 구경하는 온 도성 사람들이 함께 울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09/07/20). 물론 할당된 공녀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조정의 고위 관료가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두 차례나 누이를 공녀로 보낸 소경(少卿) 한확의 사례도 있었다. 어찌됐든 현직 재상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은 함께 끌려간 처녀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