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이전의 죄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유감동 사건’ 연루자의 처벌 대상을 최소화하라는 주상 전하의 지시였다. 지지난해 극심한 가뭄이 들자 “혹시 형벌이 중도를 잃어 원통한 자의 탄식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07/06/23) 두렵다면서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셨는데, 그 사면 이전의 잘못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쥐를 잡으려고 들었던 돌을 다시 내려놓는 것은 항아리가 깨질까 두려워서’라는 속담처럼, 상께서는 법규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지키고, 유능한 인재도 구해내신 것이다.
그런데 유감동의 조사과정을 보면서 내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단순한 색녀라면 욕정을 채우는 데 급급해야 하는데, 그녀는 동침한 상대의 이름과 관직까지 너무나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위 관료나 공신 가문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간통하면서 증거를 확보해두기까지 했다. 마치 무슨 보복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남편 불알을 끌어당겨 죽인 아내
사건이 마무리된 9월16일 이후에야 드러났지만, 그녀를 그 같은 ‘음부(淫婦)’로 만든 것은 기실 김여달이었다. 무안군수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갔다가 병을 치료(避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유감동을 집단 강간한 것이다. 조사결과 김여달은 어둔 밤에 무뢰배와 함께 거리를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을 핑계로 외진 구석으로 끌고가 저항하는 그녀를 위협해 밤새도록 희롱”(09/09/29)한 사실이 드러났다. 추측건대 그후부터 그녀는 작정하고 조정의 관료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녀자 하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자기 나름의 보복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 희생(?)당한 공직자들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지 50여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국가의 법제나 사회윤리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염집 부녀들의 성 윤리도 자리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관료들의 건전한 성 관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인들만 정조를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더러 강포한 짓을 자행”(09/09/04)하고 있으니, 풍속을 바로잡지 않으면 “부부간의 큰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내 말이 그것이다.
남편의 첩에게 똥과 오줌을 먹이다
사실 유감동 사건말고도 부녀자의 간통사건은 부지기수였다. 중과 간통하다 남편에게 들킨 영돈녕부사 이지(李枝)의 부인이 꾸짖는 남편을 그 자리에서 “불알을 끌어당겨 죽인” ‘이지 살인사건’(09/01/03), 친척을 포함한 뭇 남자와 간통한 사헌부 관리의 딸 동자(童子), 유부녀 금음동(金音同)과 양자부(楊自敷)의 연쇄 간통사건, 세자(나중의 문종)빈의 시녀와의 동성애사건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치정사건과 유감동 사건은 성격이 달랐다. 유감동 사건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때문에 주상께서도 기계적인 법 적용을 넘어서 정치적 재량권, 즉 ‘권도(權道)’를 발휘하신 것이다.
집현전 응교 권채의 ‘인간돼지사건’은 또 다른 사회문제였다. 이 사건은 형조판서가 우연히 발견했다. “모습은 사람 같은데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 비할 데 없는” 이상한 물체를 지고 가는 노비가 길을 가던 형조판서에게 발각돼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만약 그때 발견되지 않았으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형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권채는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는데, 그의 아내가 이를 질투해 덕금을 ‘인간 돼지’로 만들어버렸다. 즉 권채의 아내 정씨가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도망친 것을 붙잡아왔다”고 말하자, 권채는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에 가두라”고 했다.
정씨가 칼로 덕금의 목을 베려 하자 다른 여종 녹비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니 고통스럽게 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정씨는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해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다.” 하지만 덕금이 오줌과 똥 안의 구더기를 보고 먹으려 하지 않자 정씨는 “침으로 항문을 찔러 그 고통을 참지 못해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게 하는 등 수개월 동안 침학했다.”(09/08/24).
이 사건은 주상께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나는 권채를 안존(安存·안온하고 얌전함)하고 세밀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는가. 아마도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 같으니 끝까지 조사하라”(09/08/20). 권근의 조카로 가학(家學)을 전수한 덕에 학문적 식견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사로서 당신의 지우(知遇·남이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을 알아서 잘 대접하는 것)를 입은 권채가 그럴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
법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법 제시
실제로 의금부에서 다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권채는 여종 덕금이 학대받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권채가 집현전 일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의 아내가 덕금을 학대했다는 진술이 남자 종과 또 다른 여종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권채와 그의 아내 사이에 진술이 엇갈리고, 결정적으로 여종 녹비와 덕금, 그리고 권채의 말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세 사람을 대질할 수도 없었다. 종이 주인을 고소하거나 그와 관련해 당국이 조사할 수 없게 만든 ‘부민고소금지법(剖民告訴禁止法)’ 때문이었다. 이 법은 사실 7년 전인 1420년(재위2) 내가 건의해 제정됐다. “근자에 들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일을 엿보다가 조그마한 틈이라도 발견되면” 참람하게 고소하는 일이 잦은 것을 보고, 나는 “아전이나 백성으로서 그 고을의 수령이나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의 죄를 논해서는 안 되며,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아랫사람은 보통의 죄보다 더 중하게 처벌받게 하는”(02/09/13) 법을 제안해서 통과시킨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대명률’에 의거해 “노비가 주인을 고발할 경우 거짓과 참을 묻지 않고 그 노비를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는”(03/12/26) 법규도 추가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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