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축구를 가리켜 민족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스포츠라고 얘기하는데, 한국 선수의 문전 처리 미숙과 주먹구구식 축구행정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본프레레 감독이 희생양인지, 진짜 삼류 감독인지는 논외로 하고, 왜 이런 패턴이 한국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는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 문화에 내재된 문제점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는 너무 고분고분해”
박지성이 세계 최고 명문 팀의 하나로 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을 때 국내 축구계엔 그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평소 ‘순둥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그가 내로라하는 세계적 킬러들과 기(氣) 싸움에서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왜 한국산 킬러는 세계적 킬러의 표준과 현저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축구계의 순둥이는 박지성만이 아니다. 히딩크는 한국팀 감독으로 부임한 초기에 우리 선수들이 운동선수답지 않게 고분고분하고 착해서 놀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한국팀의 실력을 급성장시킨 데는 감독 앞에 더없이 고분고분한 한국 선수들의 성향도 한몫 했을 것이다. 히딩크는 착한 한국 선수들에게 킬러본능이 없음을 지적하고 투쟁심을 키울 것을 주문했다. 한국에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는데, 정작 스포츠 세계의 승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향을 보인다.
▲유아독존적 성향. 그래서 종종 팀워크를 해치기도 한다.▲눈앞의 목표에 강한 집중력을 보인다. 상대적으로 장기적 비전을 갖추는 경우는 흔치 않다.▲리스크가 높은 목표에 올인 하는 것을 즐긴다. 반면 분산투자와 같은 리스크 최소화의 방식에는 흥미가 없다.
그런데 이런 성향의 소유자는 한국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히기 쉽다. 당연히 이런 사람을 우리의 모델로 가르치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좋건 싫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승자의 보편적인 성향이라는 점이다. 한 사회가 도덕적 이상국가를 추구하지 않는 한, 현실에 적용 가능한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성공모델 없이 이상적 모델만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도덕적 원리주의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
킬러 못 키우는 ‘싹수론’
이런 점에서 필자는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지 말라고 한다. 위인들의 삶이 아이들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위인전 모델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여러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여기에선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밝혀보겠다.
최근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혐한류’라는 만화는 한 사회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얼마나 상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일본 우익의 시각을 반영한 이 만화는 안중근 의사를 멍청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물론 그가 일본 위인전 속의 주인공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악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다를 건너 한국 땅에 이르게 되면 이토 히로부미는 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린 침략의 원흉이 되고, 테러리스트 안중근은 의사(義士)로서 존경받는다. 아마도 많은 한국인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일본인의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위인전이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역사적 인물에 대해 조작된 이미지를 유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위인전의 주인공은 대체로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무결점의 인물로 묘사되는데, 우리가 이런 신화에 매몰될 경우 필연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 바로 ‘싹수론’이다. 한마디로 위대한 인물은 떡잎 시절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품성론에 해당하는데, 만일 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이런 식의 인물관을 가지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선택되는 지도자, 선수, 신입사원은 자신이 맡아야 할 본질적인 역량보다 무결점의 과거 기록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