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변호사는 제13대(1964~65년), 17대(1968~69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유신 독재 시대에 민주 회복을 위해 싸운 인권변호사의 원조(元祖).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제정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수시로 긴급조치를 발동해 철권통치를 했다. 1974년 이 변호사는 윤형중 신부, 함석헌씨, 강원용 목사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를 발족하고 대표위원을 맡았다.
유신치하에서 검찰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사법부의 법관들은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양심범들에게 ‘정찰제 판결’을 내려 감옥으로 보냈다. 이 변호사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 회복과 인권 옹호를 위한 활동을 치열하게 펼치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옥고를 치렀다. 변호사들이 변협회관 로비에 이 변호사의 흉상을 세운 것은 변협이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라 인권옹호기관임을 말하려는 뜻일 게다.
변호사는 법원, 검찰과 함께 사법의 한 바퀴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최근 법원, 검찰, 변호사회의 세 바퀴가 유례없이 삐걱거리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공판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법원 우월주의에 입각한 발언이 쏟아지면서 법원과 검찰, 변협과 법원의 대립이 날카로워졌다.
이진강(李鎭江·64) 제44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검찰이 친정이다. 법무부와 대검에서 주요 보직을 오가며 왕성하게 일하던 이 검사는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을 잃고 고통 속에 검찰을 떠났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으로 병마(病魔)를 이겨내고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거쳐 지난 2월 대한변협 회장에 취임했다.
격동의 역사가 휘몰아치던 1986~88년 이진강 부장검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과장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재수사와 5공(共) 비리 수사의 실무 주역이었다. 올해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 20주기가 된다.
젊은 변호사 표심(票心) 잡다
대한변협 회원으로 개업 중인 변호사는 현재 8066명. 휴업 변호사까지 합하면 1만명이 넘는다. 대한변협회장의 선출은 2단계로 치러진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5230명 회원의 직접 투표를 통해 대한변협회장 선거에 나갈 후보를 선출한다. 대한변협회장 선거는 대의원 간접선거 방식이다. 서울변호사회가 대한변협 전체 회원의 3분의 2를 차지하므로 사실상 서울변호사회에서 추천받으면 그대로 대한변협회장에 당선된다.
근년 들어 보수와 진보가 변협회장을 교대했다. 1999년에는 ‘민변 1.5 세대’로 불리는 김창국 변호사가 당선됐고, 2001년에는 보수 성향의 정재헌 변호사가 회장을 맡았다. 2003년 박재승 회장은 진보로 분류됐고, 2005년 천기흥 회장은 보수다. 이 회장은 보수나 진보로 분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굳이 가르자면 보수 쪽에 가깝다.
“기자들도 그런 질문을 하더군요.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진보냐 보수냐 따지는 것보다는 누가 변호사 대표로서 적임자냐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