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윤 대리, 한잔 더 안 할 거야?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부장님, 새털같이 많은 날이 있는데, 오늘 꼭 끝장을 보시렵니까? 저는 갑니다.”
다음 날 30분을 지각, 잠입하듯 사무실로 들어온 윤 대리는 책상 위에 놓인 메모를 보았다.
‘박명진 부사장 호출.’
부사장 호출? 지각한 걸 혼내려면 홍보실 과장님만으로도 충분한데. 뭔 일이지? 상 받을 일도 없고. 아무래도 불안한데….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똑똑. 홍보실 윤병굽니다. 들어와.
박 부사장. 언제나 깔끔한 외모에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 톤. 감정의 기복을 전혀 눈치 챌 수 없도록 엄청 훈련된 솜씨다. 눈은 얼굴에 두 개, 귀 옆에 두 개, 뒤통수에 세 개. 사방에 안테나를 가동해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감지한다. 일이 떨어지면 종마처럼 달리지만, 평소엔 메뚜기처럼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한국물산 임원의 전형. 오늘은 종마보다는 메뚜기 같다. 그런데 무슨 일로….
“윤 대리가 보기에 나는 어떤 점이 장점인 것 같아?”
“예?”
“나야 삼류 대학 출신에, 영어도 잘 못하고, 집안이 부자도 아니고.”
“아, 예.”
“30년 이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누구보다 잘하는 게 하나 있지.”
“하나만 잘하시겠습니…까?”
“입 하나는 무거워. 입 닫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명문대 나온 내 동기들은 이걸 못해 다 깨지더군. 돌아보니까 나만 살았어. 자넨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