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부장學’

“낀 왕따들이여, 깬 롬멜이 되어라!”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 일러스트·김영민

    입력2007-04-10 1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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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기업의 40대 부장들은 샌드위치의 햄과 너트크래커의 호두 중 하나가 될 운명 앞에 서 있다. 먹음직한 샌드위치가 되느냐, 본전도 못 뽑고 사라지는 너트크래커 속 호두가 되느냐.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유연한 의사소통 능력으로 한국 기업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이들의 내일은 낀 세대인가, 깬 세대인가.
    #Scene 1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부장學’
    윤병구 대리. 나이 33세. 한국물산 홍보실 사보(私報)담당. 술만 마시면 다음 날 어김없이 지각하는 약골이지만, 술자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분파이자 의리파다. 어제는 공연기획담당 한공연 부장과 1차 감자탕에 소주, 2차 골뱅이에 맥주 3000cc를 들이켰다. 3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한 부장을 윤 대리가 말렸다. 대신 포장마차에 들러 시원한 가락국수를 한 그릇씩 비웠다.

    “야, 윤 대리, 한잔 더 안 할 거야?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부장님, 새털같이 많은 날이 있는데, 오늘 꼭 끝장을 보시렵니까? 저는 갑니다.”

    다음 날 30분을 지각, 잠입하듯 사무실로 들어온 윤 대리는 책상 위에 놓인 메모를 보았다.



    ‘박명진 부사장 호출.’

    부사장 호출? 지각한 걸 혼내려면 홍보실 과장님만으로도 충분한데. 뭔 일이지? 상 받을 일도 없고. 아무래도 불안한데….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똑똑. 홍보실 윤병굽니다. 들어와.

    박 부사장. 언제나 깔끔한 외모에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 톤. 감정의 기복을 전혀 눈치 챌 수 없도록 엄청 훈련된 솜씨다. 눈은 얼굴에 두 개, 귀 옆에 두 개, 뒤통수에 세 개. 사방에 안테나를 가동해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감지한다. 일이 떨어지면 종마처럼 달리지만, 평소엔 메뚜기처럼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한국물산 임원의 전형. 오늘은 종마보다는 메뚜기 같다. 그런데 무슨 일로….

    “윤 대리가 보기에 나는 어떤 점이 장점인 것 같아?”

    “예?”

    “나야 삼류 대학 출신에, 영어도 잘 못하고, 집안이 부자도 아니고.”

    “아, 예.”

    “30년 이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누구보다 잘하는 게 하나 있지.”

    “하나만 잘하시겠습니…까?”

    “입 하나는 무거워. 입 닫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명문대 나온 내 동기들은 이걸 못해 다 깨지더군. 돌아보니까 나만 살았어. 자넨 어떤가?”

    엥? 왜 그런 질문을….

    “자네에게 일을 하나 맡기고 싶어. 말하자면 탐정놀이 같은 건데. 우리 회사 부장 5명의 명단이 이 봉투 안에 있네. 한 달 안에 이 부장들의 장단점을 보고해줘. 이 중 한 사람만 이사로 승진시킬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퇴직시킬 거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 경영진에선 대충 판단 끝냈어. 다만 후배들의 시각을 참고하기 위해서야. 윤 대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참고하지 않을 수도 있어. 중요한 건,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네나, 나나 사표 써야 돼.”

    “근데….”

    “근데 왜 자네에게 이 일을 시키냐는 거지? 자넨 사보담당이잖아. 각 부서의 누굴 만나도 사보에 실을 거라고 하면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

    회사가 다면평가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자신에게 그 일이 맡겨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부장들을? 그것도 승진과 퇴사의 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이렇게 민주적이었나?

    모두 분칠을 하고 있어!

    회사엔 대략 서너 개의 라인이 있다. 그 라인 안에 들어야 승진도 하고, 어려움도 피할 수 있다. 물론 라인의 꼭대기가 물을 먹으면 라인 전체가 물을 먹어야 한다. 라인에 선다는 것은 도박 같은 거다.

    윤 대리는 어떤 라인에도 서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갈등 회피적인데다, 어느 한 라인에 서면 술자리가 제한된다. 그건 싫다. 박 부사장은 이런 윤 대리의 ‘무색무취’한 성격을 간파하고 이런 일을 맡긴 것 같다.

    그런데 봉투에 들어 있는 부장들은 누굴까. 엥? 어제 술 마신 한 부장도 있네. 사장 비서실 김정도 부장도 있고. 어라, 2년 전 최고물산에서 스카우트한 홍보실 나영만 부장? 이쒸! 직속상관을 내가 어떻게 평가하라고…. 가만, 우리 회사의 유일한 여자 부장인 사회공헌팀 신수미 부장도 있네. 금융팀 이수치 부장은 내가 잘 모르는 분인데. 하여튼 큰일 났네, 큰일 났어. 말이 탐정놀이지, 살생부 만들기에 동참하라는 거 아니야!

    #Scene 2

    “뭐야, 한잔하자고? 오호! 윤 대리 웬일이야? 어제는 도망가 놓고.”

    공연기획팀 한공연 부장. 80학번인 줄 알았는데, 부사장이 준 자료를 보니 78학번이다. 대학에선 건축공학을 전공했는데, 공연을 좋아해 직장생활은 공연예술 분야에서 시작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시나리오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고 한다. 젊을 때는 여자깨나 따랐을 법한 외모에, 키도 크다. 늘 목을 감추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게 특징. 목이 긴 사람들은 어깨싸움에 약하다. 갈등을 싫어한다.

    “한 부장님,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난 후배가 술 산다는 소리가 제일 반갑더라. 오늘은 노래방 갈 거지?”

    “부장님은 노는 것도 좋아하고 일도 재미있게 하시는 것 같은데, 고민 같은 거 생기면 누구에게 털어놓으세요?”

    “공연예술 분야는 분장하는 곳이야. 특수분장도 하지. 가면을 쓰기도 하고. 투명해 보이지만 자신의 속내는 털어놓지 않아. 모두 분칠을 하고 있어서 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공연예술 쪽에서 일하면 낭만적이고 신비로울 것 같지? 천만에. 마음을 털어놓고 술잔을 기울일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어. 난 그래서 윤 대리가 좋더라. 너는 순수해 보여.”

    한 부장, 벌써 취했나. 하기야 그는 회사에선 늘 호탕한 척해도 어딘가 외로워 보이기는 했다. 술 한잔하자고 하면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나, 사실 우리 팀 사람들과 술 잘 안 해. 너는 특별 케이스라고.”

    공연예술팀은 돈을 버는 조직이라기보다는 회사 이미지를 관리하는 부서에 가깝다. 공연예술팀을 관할하는 최고 임원은 K상무인데, 곧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것 같다. 회사의 주력부서가 아니다보니 임원 교체가 잦다. 임원들도 이 부서를 잠시 머물러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내가 여기 부장으로 있으면서 무려 7명의 임원을 모셨어. 그분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첫째, 그분들은 늘 자신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해. 둘째, ‘원칙에 따라 일한다’고 하지. 근데 다 거짓말이야. 문제가 생기면 부하들에게 떠넘겨. 자리보전하고 싶은 게지. 원칙 운운하면서 변칙에 능해. 지들이 공연을 알아? 예술을 아느냐고?

    무식이 상상불허야

    꽁트로 엿본 한국 대기업 ‘부장學’

    기업은 오늘도 전쟁. 쉽지는 않겠지만 모두 살아남으시길….

    공연 기획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놈이래. 쓸데없이 돈 낭비한다 이거지. 우리더러 논리가 약하대. 그래서 실력이 없다나? 서로 분야가 다르면 다름을 인정해야지. 윤 대리, 오케스트라 알지? 거기서도 분야가 다르면 성격도 달라. 현악기 파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지. 관악기 파트는 자신보다는 조직을 더 챙기고. 연극 다르고 무용 달라. 왜 경영자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거야….”

    한 부장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가끔씩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시끄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속이 탄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지난해 초에 내가 기획한 ‘정월 대보름 축제’ 기억하지? 우리 회사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클래식 음악 듣고, 밤에 청량리역 가서 새벽에 동해 정동진으로 갔잖아. 그때 반응 얼마나 좋았어. 연인들, 가족들, 회사동료들이 와서 훌륭한 공연 듣고, 정말 오랜만에 기차에서 노래 부르고 맘껏 보름달을 즐겼지. 인생 뭐 있어? 사랑하는 사람끼리 좋은 추억 남기는 거지.”

    “아, 그 공연 대박이었죠. 500석 매진이었잖아요.”

    “난 올해 초에도 이 공연 준비했어. 그런데 기획서 만들어 보고했더니 상무가 뭐라는 줄 알아? 상상불허야. 공연은 공연장 안에서 해야 된대. 밖에 나가면 공연이 아니래.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근데 어떻게 해. 상대는 임원이고, 나는 일개 부장인데. 아이디어를 내면 뭐 하냐고. 상무가 그거 돈 되냐고 물어. 씨×, 그럼 돈 되는 거만 하면 되잖아. 그러지도 못해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한 잔 더 하시죠.”

    “윤 대리, 유럽에 가봤지? 유럽의 도시엔 광장이 있어. 거기엔 교회가 있고, 시청이 있고, 아담한 우체국이 있고, 공연장이 있어. 그중에서도 공연장은 시민에겐 자부심이자 자랑거리라고. 오스트리아, 체코 다 그렇잖아. 우리가 돈 벌자고 했어? 그러나 좋은 공연 하고, 추억 남기기 해주면 관객들이 우리 회사 좋아할 거 아냐? 우리 회사가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면 게임 끝나는 거 아냐?”

    할 말이 많으셨군요, 한 부장님.

    “난 불만 없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나저나 노래방 언제 갈 거야? 오늘은 도우미 언니들도 좀 부르자. 넌 다 좋은데 너무 고고한 척해서 탈이야. 뭐야, 그 표정은? 삐친 거야?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이 인간, 눈치 챌 텐데…

    #Scene 3

    사장 비서실 김정도 부장. 최연소 부장이다. 동기들은 아직 과장급이다. 키는 작은데,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다. 잘 웃지 않는다. 수도승 같기도 하고, 노회한 전략가 같기도 하다. 입 잘못 놀렸다가는 내 의도를 간파당할 수 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김 부장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를 댈까. 이 인간, 눈치 챌 텐데.

    “부장님, 사보담당 윤 대립니다.”

    “아, 예. 오랜만입니다. 올해 초에 사장님 신년사 실을 때 만났죠? 웬일이에요?”

    “이번 사보엔 훌륭한 선배가 되는 길이라는 기사를 써볼까 합니다. 김 부장님은 동기들보다 일찍 부장도 되셨고, 후배들이 꼽는 훌륭한 선배님이기도 해서….”

    “아이고, 무슨 말씀을. 저 그런 것 못해요. 그러잖아도 보는 눈이 많은데. 괜히 얘기했다가 본전도 못 찾아요. 우리 회사 분위기 잘 알잖아요?”

    이럴 땐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군요. 김 부장님 처지 이해합니다. 그럼, 취재는 그만두고 점심이나 같이 하시죠. 언제 한번 식사하자고 하셨잖아요?”

    “그건 가능하죠.”

    김 부장은 후배에게 말을 놓는 법이 없다. 언제나 깍듯하게 대한다. 이런 사람에게선 허점을 찾기가 힘들다. 질문이 많으면 틀림없이 경계할 것이다. 그냥 말하도록 내버려두고, 흐름을 타다가 딱 한 군데에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기서 그가 낚이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오, 이런! 기회가 왔다

    “저번 사보엔 임원의 경쟁력에 관해 쓰셨던데, 좋았어요. 잘 읽었어요.”

    “부장님도 임원 되고 사장도 하셔야죠.”

    “저요? 저처럼 스태프로 큰 사람은 임원은 몰라도 사장은 힘들어요. 적어도 사장은 마케팅, 기획, 영업 등 골고루 경험해본 사람이 맡아야죠. 기획통이니 인사통이니 하는 무슨 통이 사장 되면 회사 망해요.”

    어라! 방어벽이 예상 외로 겹겹이고, 단단하다. 방어하는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칠 수 없고, 공격하는 사람은 높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낮은 자세로 나를 보고 있다. 이럴 땐, 내 얘기를 하는 게 좋다. 그래야 상대가 경계를 푼다.

    “저는 정말 우연하게 우리 회사에 입사했어요. 졸업을 앞두고 어느 회사를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한국물산 홍보실에서 펴낸 잡지를 봤죠.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독일의 좌파 예술가 콜비츠를 다룬 기사를 읽었어요. 콜비츠라면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판화가인데. 자본주의의 첨병인 한국물산이 이런 사람을 다룰 정도면 일단 나와 가치관은 공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와서 보니 우연히 실은 거여서 약간은 실망했어요.”

    “와, 나도 그 기사 봤어요. 대단하다 싶었죠. 특히 홍보실이 그런 내용을 실을 생각을 한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어요. 사장님께도 보고했어요. 저는 홍보실의 주요 임무가 자본주의의 본원적 위기를 막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1920년대 미국의 공황을 막아낸 것이 PR이었죠. 록펠러나 카네기가 재단을 설립하고, 지역사회와 밀착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황 후유증을 극복하도록 했으니까요.”

    오, 이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 이럴 때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집에 있는 책장을 정리했어요. 저는 소설이나 역사책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리해보니 좀 달랐어요. 우선 생태학 관련 서적이 많다는 데 놀랐어요. 그리고 전쟁사 관련 책도 의외로 많더군요. 반면 문화인류학이나 미학책은 적었어요. 이런 책들은 뭐랄까, 마음의 부채의식이 있는 것들이라고 할까요. 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읽지 못하는 것들이죠. 이참에 제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정리할 수 있었어요. 관심 있는 것은 더 관심을 갖도록, 부채 의식에 짓눌린 것은 아예 털어내도록 했어요.”

    남의 눈물은 부메랑으로…

    “전쟁사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아버지가 책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책과 놀았는데, 특히 6·25전쟁 화보집을 좋아한 기억이 나요. 남자는 전쟁영웅에 대한 로망이 있잖아요. 나만 그런가? 하여튼 세상은 전쟁터이고, 기업은 전쟁터의 군인이니까요. 그런데 전쟁을 누가 제일 싫어하는 줄 아세요?”

    “글쎄요. 서민들? 대통령? 신혼여행 갔다 막 돌아온 신혼부부?”

    “하하하.”

    어, 김 부장이 웃는다. 오늘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군인이 제일 싫어해요. 죽는 사람은 군인이니까. 그래서 유능한 군인일수록 희생 없이 전쟁을 치르려고 하죠. 진정한 전쟁 영웅은 전쟁하지 않고 평화를 실현하는 사람이에요. 아무튼 전쟁사에는 인간이 겪는 모든 감정의 엑기스들이 담겨 있어요. 인류역사의 요점정리라고 할까요. 윤 대리에게 문제 하나 내볼까요? 전쟁사 얘기가 나왔으니,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 중에 아는 군인 있어요?”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그럼 롬멜 장군이 영관급 장교 생활을 몇 년 했는지 아세요?”

    “아이고, 그런 건 모릅니다.”

    “롬멜은 물론이고 2차대전에서 활약한 군인들은 15년에서 길게는 20년 동안 영관급 장교 생활을 했답니다. 이들의 특징은 조직에서 ‘왕따’였다는 거죠. 진급이 안 되면 조직을 떠나야 하는데 안 떠나고 무식하게 공부한 거죠. 롬멜은 기갑전 스터디를 했고요. 이렇게 준비하다가 때를 만난 겁니다.

    윤 대리도 이제 과장 되고, 부장 되고, 임원이 되실 텐데, 미리 목표를 정해놓으면 오히려 쉽게 지칠 수 있어요. 목표를 달성하자면 경쟁을 해야 하고, 경쟁을 하다보면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하고요. 그 눈물은 부메랑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옵니다. 저더러 승진이 빨랐다고 부러워하는 눈친데,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저는 목표가 없어요. 미래는 결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냥 흐름을 타다가 맡겨지는 일을 열심히 할 뿐이죠.”

    그게 김 부장식의 승진 코스라는 얘기인가. 설마, 목표가 없을라고? 그나저나 생태학 책은 왜 읽고 있는 걸까. 질문보다는 다시 흐름을 타는 게 좋겠다.

    “처음엔 전쟁사와 생태학 책이 많다고 하시기에 솔직히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근데 이제 좀 감이 잡히네요. 평화를 가장 염원하는 사람이 군인이다, 고로 전쟁사는 평화사이고, 그러자면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생태학을 읽어야 한다쯤이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우리 얘기는 비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요. 생태학 책을 읽는다고 제가 뭐 그 분야를 위해 실천하는 게 있느냐…그런 건 없고. 전 서울에 살아야 하고요. 자본주의 첨병인 기업에서 일해야 하고요. 얼마 전에 대학 동창을 만나 저녁을 먹었는데, 제 고민을 쭉 늘어놨더니 그 친구가 ‘긴장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하대요. 별말 아닌 것 같은데 상당한 위로를 받았어요.

    위로를 받았더니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조만간 강원도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할 생각이에요. 동물이 올무에 잡혀 죽기 직전 구해서 치료도 하고,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활동이죠.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어요. 직장생활은 결국 스트레스 관리가 핵심인데, 아름다움을 봐야 숨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김 부장님, 그렇게 딱딱한 사람만은 아니었군요! 그나저나 오늘 취재 잘 한 건가, 또 휘둘린 건가.

    “윤 대리, 질문 잘 하시네요. 제가 이런 얘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하여튼 오늘 우리가 나눈 얘기는 비밀.”

    #Scene 4

    2년 전 최고물산에서 스카우트한 홍보실 나영만 부장. 나의 직속상관이어서 그를 평가한다는 게 껄끄럽다. 이제 불과 우리 회사에 들어온 지 2년밖에 안 된 사람을 평가해서 뭐 한다고. 그럼 그때 평가한 경영진은 뭐가 되는 거야? 사람이 2년 만에 바뀌나. 그땐 엉터리로 평가했다는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지.

    “뭐야, 윤 대리. 똥마려운 사람처럼 왜 자꾸 날 쳐다봐? 화장실 같이 가줄까?”

    “제가요? 천만에요. 아침에 일 잘 보고 나왔습니다만.”

    “나왔습니다만, 뭐?”

    나 부장. 비록 최고물산이 2년 전 부도를 맞아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한때는 국내 최고의 기업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물산은 구멍가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 홍보실에서 차장까지 했다면, 속된 말로 ‘사람 죽이는 일 빼고는 다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락부락 각진 얼굴, 술만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는 괴력의 소유자. 아니, 괴팍한 술버릇의 소유자. 옆에 있는 사람이 여직원이든남자직원이든 상관없이 들어올린다. 생긴 게 워낙 씨름선수 같고 단순무식해 보여서 그런지 행동은 오히려 순진해 보인다. 그래서 여직원을 번쩍 들어도 뒷말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고소당할 일인데도.

    “뭐 할 말 있으면 해봐. 어제 시킨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해보니까 쉽지 않지? 내가 도와줄까?”

    성격도 좋다. 다른 회사 출신이라는 점을 의식하기 때문인지 지시하기보다는 도와주려고 한다. 생긴 것도 까칠한데 성격까지 더러우면 ‘왕따’ 되는 게 우리 회사 문화다. 그렇다고 뭘 바라고 도와주는 쪽은 아니다. 어쨌든 그는 단순하다.

    “뭐가 어려운지 내가 얘기해볼까? 요즘 신입사원들, 말 안 듣지? 일 시키기 쉽지 않지? 내가 신입사원 때만 해도 까라면 깠는데. 요즘 애들은 왜 그러니? 꼬박꼬박 대들어요.”

    이런 젠장, 돈이 있어야지?

    워낙 말소리가 커서 홍보실 사람들이 다 듣는 것 같다. 모두들 책상에 앉아 조용하게 일하는 것 같아도 귀는 나 부장을 향해 쫑긋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떠들다가는 ‘탐정’ 일 못 한다. 그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조용히 나를 부른다.

    “내가 부산에서 살았잖아. 내가 나온 고등학교에서 우리 때는 1년에 50명이 서울대 갔어. 그런데 얼마 전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물어보니까 지금은 서너 명도 못 간대. 부산에도 외고, 과학고 생겨서 거기서 다 서울대 보내나봐. 이런 젠장. 우리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외고반이 있어. 우리 때는 고등학교 때도 실컷 놀다가 대학 들어갔는데. 요즘 아이들 너무 불쌍해.”

    나 부장은 서울에서도 요지인 대치동에 산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다. 32평짜리 전세에 산다.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을 둔, 한 달에 과외비로 120만원을 쓰는, 자신의 용돈은 30만원인, 그런 아버지다.

    “요즘은 초등학교에도 ‘복학생’이 있대. 이런 젠장. 해외에 1, 2년씩 연수 갔다 온 아이들을 그렇게 부르나봐. 내 딸 친구는 지난 겨울방학 때 호주에 갔다 왔다면서 자랑을 하더래. 이런 젠장. 나는 돈이 있어야 보내지.”

    “대치동에서 전세 살 돈이면 다른 데서 집을 사세요. 굳이 거기서 사시는 이유가 뭡니까.”

    “야, 윤 대리, 넌 아직 애가 어려서 잘 몰라. 나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게 뭔지 알아? 직장에서 고등학교 출신들 엄청 챙기더라고. 걔네들끼리 모여서 그때 뭔 일이 있었고, 뭐가 유행이었고 하면서 떠드는데 끼고 싶어도 뭘 알아야 끼지. 고등학교 동문이면 바로 형, 동생 하고. 그럼 또 엄청 친해져요. 그래서 생각했지. 우리 아이들만큼은 서울 좋은 지역에서 학교 보내자, 그래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도록 해주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 있나. 그거라도 해주는 거지.”

    “친구 좋으면 뭐해요. 자기가 잘나지 못하면 무리에 끼지도 못해요.”

    “그건 그래. 내가 3남1녀 중에 차남으로 자랐는데, 부모가 챙겨주질 않아. 형은 형이니까, 막내는 막내니까 챙기는데,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나봐. 근데 내가 꼭 필요할 때가 있어. 방학 때면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댁에 날 보내는 거지. 외로움을 달래드리라고 보내는데 내가 제일 한가해 보였나봐. 그래서 방학 때마다 가서 놀았지. 부모가 신경도 안 쓰니까, 학교에서 뭔 일을 당해도 난 얘기 안 해. 그냥 혼자 해결하고 말았지. 그러다보니 생활력은 형제들 중에 내가 제일 강한 것 같아. 윤 대리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너무 강해서 탈이죠.”

    전선에서 이탈하면 끝장

    “이런 젠장. 근데 요즘 아이들은 참 이기적이야. 사회생활 별거 있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 아냐? 혼자 커서 그런가봐. 얼마 전에 누가 그러대.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요양병원에 보내겠다는 거야. 그 얘기 듣고 좀 충격이었어. 나 같으면 회사 휴직하고 부모님께 내려가지. 자식으로서 부모가 인생을 잘 마무리하시도록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고, 부장님. 부장님 나이에 회사 휴직하면 누가 다시 받아줍니까. 전선(戰線)에서 이탈하면 바로 아웃이라고요.”

    “이런 젠장. 아픈 부모 곁에 같이 있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돼. 까짓 회사 생활 몇 년 더 하는 게 무슨 의미냐? 나 최고물산 출신이잖아. 그 회사 회장 알지? 이런 젠장. 지금 뭐 하는지도 몰라.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이 말이야. 인생은 그런 거야. 뭣 때문에 일했던 거야? 그 회사 망하지 않았다면 나는 승승장구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뭔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있을 때 잘 살자는 거지. 윤 대리, 있을 때 잘해줄게. 필요한 게 뭐야? 어, 뭐야? 그 표정, 믿지 않는 눈친데? 한번 들어올려줄까? 힘도 남아도는데.”

    #Scene 5

    “윤 대리, ‘하얀 거탑’ 봤어?”

    “의사들 나오는 드라마죠? 마누라하고 마지막 장면은 봤어요. 눈물이 나오두만요.”

    “난 그걸 보면서 수컷들의 싸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힘이 약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자신보다 윗자리에 올라서면 바로 무릎을 꿇어. 남자들은 다 그래? 살기 위해선 자존심도 다 버려? 그런 거야?”

    사회공헌팀 신수미 부장. 독신이라는 얘기도 있고, 아이가 하나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에 관한 소문의 최신 버전은 그 아이는 입양한 아이라는 것. 고아원 봉사활동을 하면서 눈에 든 아이를 데려왔다는데, 워낙 우리 회사가 소문 만들어내기 좋아해 사실 관계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어 갖가지 소문이 떠돈다. 까짓 그런 소문쯤 돌면 어떠랴. 그는 우리 회사 유일의 여성 부장이자, 임원 1순위로 꼽히는 인재인 것을.

    “살려주세요”

    “나, 사실 그런 남자 알고 있어. 내 동료였는데 부서 상사가 한직으로 발령 났을 땐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래도 함께 생활한 게 몇 년인데. 근데 올해 초에 그 옛 상사가 덜컥 자기 부서 상사로 컴백한 거야. 난리가 났지. 근데 웃긴 건, 발령 난 다음 날 바로 찾아가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살려달라’고 했대.”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럴 수도 있죠 뭐.”

    “그 친구 비난하는 거 아니야. 아니, 처음엔 비난했어. 지금은 아니야. 이해해. 아니, 나도 닮고 싶어. 생존을 위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리라, 호호호.”

    그러면서 창문 밖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신 부장.

    “차 뭐 마실래?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할 건 마땅찮고. 이를 어쩌나, 호호호. 커피? 녹차?”

    “커피 한 잔 주시면 황공하옵나이다, 마마.”

    “크, 아부는…. 부장까지는 내가 중심인데, 임원이 되면 나를 버려야 하는 가봐. 무색이 되어야 하나봐. 목적을 위해 버리는 거지. 자기희생은 아니고 일종의 꾀라고 할까. ‘하얀 거탑’에서도 자기 색깔을 지키면서 야합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도태되잖아. 그나저나 지난 사보에 임원학 쓴 거 잘 봤어요. 읽으면서 생각한 거 알려주는 거야. 내가 임원이 되겠다는 뜻은 절대, 절대 아니라고, 호호호.”

    절대 아니라는 말씀, 절대 거짓이죠?

    “나는 부장이 임원보다 더 좋은 것 같던데. 아, 물론 임원을 해본 건 아니지만, 옆에서 보니까 그래. 부장은 소(小)사장 같은 거예요. 확실한 영역이 있고, 부서가 있고, 부하들이 있잖아요. 임원은 결정권자지만 조직과 격리돼 있잖아. 부장은 직원들과 어울려서 일하죠. 직원들이 오늘 아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임원은 잘 몰라. 그런데 부장은 잘 알지. 이게 부장의 힘이라고.”

    “조직과 더 가깝지만, 임원이 일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 하잖아요. 그건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아니야. 물론 싫어도 그 자리에선 ‘예’라고 해야지. 그러나 나와서는 꼭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임원 뒤통수 치자는 얘기는 아니고.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거지. 조직이 있으니까. 임원에겐 임원이 원하는 길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선 직원들 시켜서 내가 원하는 길을 뚫어놓고. 그래서 임원이 틀렸음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거야. 결국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지. 그건 부장만이 가능해요.”

    독하거나 못되거나

    “임원이 맞는지, 부장님이 맞는지 어떻게 확신하세요?”

    “자기 확신이 중요해요. 임원은 큰 그림을 보지만, 나는 내 분야만큼은 전문가잖아. 일을 알고, 핵심을 알고. 그건 문제 해결 능력도 있고, 반대로 사고 칠 능력도 있다는 얘기지. 임원이 틀려도 나는 조직을 올바른 길로 끌고 갈 수 있다는 확신, 그건 부장만 가능하지. 고로 부장은 소사장이라는 말씀.”

    신 부장은 우리 회사에서 20년을 근속했다. 회사 최초 여성 부장이다 보니 그에 관한 전설적인 얘기도 많다. 수컷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여성이 부장이 됐으니 독하다거나 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외환위기 때였던 것 같다. 회사에서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고 있었다. 그가 일하고 있던 마케팅팀에서도 누군가는 나가야 했다. 신 부장보다 1년 선배인 L상무가 그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더란다.

    “수미씨, 난 노모가 있고 아이도 둘이나 돼.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

    그래서 신 부장이 대신 희망퇴직서를 썼다. 그런 거 보면 그는 독신이든지 그 비슷한 처지가 맞는 것도 같은데…. 어쨌든 그 사직서는 반려됐다. 퇴사 대신 그는 부서를 옮겨야 했다. 남자라면 모두 가기 싫어하는 사회공헌팀으로. 이곳은 돈을 버는 부서가 아니기 때문에 실적을 자랑할 수 없다. 야망에 찬 수컷들은 결코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서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사회공헌팀은 회사 내 ‘블루오션’으로 떴다. 회장이 사회공헌팀에 엄청나게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슬로건이 ‘영혼이 아름다운 회사’라고 하면서.

    “남자 동료들이 내게 ‘사회공헌팀에서 일하면서 1년만 쉴까’라고 하는데, 천만에 말씀. 지들은 6개월도 못 버텨. 여기는 본류가 아니고 지류야. 승진에 눈먼 친구들이 어떻게 지류의 생활을 견뎌. 주목받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사직서를 냈을 때 신 부장은 동료들에게 택시 기사가 되겠다고 했다. ‘웬 택시 기사?’라고 동료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의아해했을 때 그는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고 했다. 돌아다니다 보면 소재를 많이 발견할 것 같다는 것이 이유. 또 다른 이유는 어릴 때 전차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꼭 친구들을 몰고 전차를 탔다고 했다. 신 부장님, 다시 보니 집시 기질이 있으셔.

    “나, 어제 점 봤는데. 스님 사주래. 평생 수행하면서 살라고 하던데.”

    거봐, 독신 맞네.

    든든한 기둥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돈 모으려고 하지 말래. 근데 난 이제껏 내 지갑에 돈 얼마 들었는지 세어본 적이 없어. 부동산 뜨기 직전에 강남 아파트 팔아서 강북에 아파트 샀잖아. 회사 근처에 살려고. 내가 팔자 1년 만에 2배가 올랐대. 다른 사람 같으면 배가 무지 아팠겠지. 난 안 그래. 욕심이 없으니까. 내가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잖아. 어릴 때부터 방목형으로 자랐다고요. 엄마가 맛있는 것 있으면 새끼들 안 주고 당신이 다 잡숴. 그래서 엄마가 계모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어쨌든 그때부터 ‘내 길은 내가 개척해서 살아야겠구나’하고 생각했지. 별수 없잖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 회사 부장들은 대부분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신 부장도 그렇고, 홍보실 나 부장도 그렇다. 형제가 많다보니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 특히 중간에 낀 차남이나 차녀는 위로는 큰형과 아래로는 막내의 의사소통 통로가 돼야 했다. 한국물산의 조직문화에서 중간급 간부로서는 기가 막히게 맞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회사의 부장들만큼 능력 있는 세대도 없다. 자기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선수이고 그 영역을 확장하는 데도 뛰어나다. 게다가 경직된 임원들 모시고,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부는 신세대 직원들 데리고 종횡무진 잘 이끌어간다. 이 또한 많은 형제 틈에서 자란 환경 덕분이다.

    이들이 임원이 되거나 퇴직하면 회사를 받쳐줄 든든한 기둥이 사라진다. 나만 해도 형제 중에 장남으로 커서 어디서고 매개자 구실을 배운 적이 없다.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두 세계의 다리를 놓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회사 부장님들이 최고인 것 같은데.

    “나 진짜 임원 되는 거에 관심 없어요. 나이 50이 되면 내 일을 할 거야. 어라? 부사장 호출이네. 윤 대리, 우리 다음에 보자. 나 올라가야 해.”

    #Scene 6

    금융팀 이수치 부장은 엄밀히 말하면 팀장이다. 나이가 부장급이지, 정식으로 부장을 달지는 못했다. 사실 금융팀 부장은 따로 있다. 하여튼 그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나와 어울려본 적이 없다. 술 없이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이 부장은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집안이 부유했던 것은 아니고, 미국 주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우리 회사에선 외환 관련 일을 담당한다. 환 위험을 피하는 금융상품을 설계한다고 하는데,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이렇듯 공부를 많이 한 덕분에 차장까지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 술을 못하고, 나처럼 어느 라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다. 자신의 처지에선 라인에 서지 않는 게 소신을 지키는 것이지만 남의 눈에는 회색인간으로 비친다. 이게 직장생활의 현실이다.

    지난해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을 때, 그는 어느 라인에도 서지 않아 금융팀 U부장에게 밀렸다. 확실한 전공이 있기 때문에 금융팀에서 떨려 나지는 않았지만, 후배인 U부장에게 윗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 때문인지, 회사에서 가끔 마주치면서 본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베테랑을 인정해주지 않다니. 회사가 썩었어.’ 이렇게 생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사실 회사가 그를 이용한 측면도 있다. 어느 라인에도 서지 않았기 때문에 재작년 금융팀 구조조정에서 그는 선배인 P부장을 제치고 팀장 자리에 앉았다. 회사는 이 부장을 이용해 그동안 능력 없는 사람들로 찍힌 간부 사원들을 내보냈다. 금융팀을 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 부장의 명분과 이를 통해 구조조정을 하자는 회사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몇 라인과 충돌을 빚었고, 그 결과가 올해 인사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은 우연히 커피 자판기 앞에서 이 부장을 만났다.

    “윤 대리님, 잘 지내십니까. 교회는 열심히 나가시고?”

    “자주 못 나가요. 바빠서….”

    “시간을 내봐요. 성경 말씀이 얼마나 삶에 위안이 되는데….”

    이 부장님, 술도 위안이 되는데요.

    “하, 어제는 집사람이 나더러 ‘위트는 있는데 유머가 없다’고 해.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위트는 남의 약점을 꼬집어서 웃기는 것이고, 유머는 다 같이 웃는 거래. 남의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삼가라고 하더군. 윤 대리가 보기에도 내가 그래?”

    글쎄요. 술을 한잔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대답 안 해도 좋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사람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너무 잘난 척했던 것 같아. 실력도 없으면서. 요즘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있어요. 비록 지금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고. 공부하고 논문 쓰고 해야지. 나중에 회사에서 필요할 때 부르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조직에서 물먹었더니, 요즘엔 물먹은 후배만 눈에 띄어.”

    컥, 그럼 내가?

    “윤 대리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위로가 필요한 후배들이 보인다고. 요즘 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실력을 쌓아라, 미래는 온다’고 격려하지. 예전에 잠도 못 자고, 밥맛도 없었는데, 요즘엔 괜찮아. 괜찮으니까 윤 대리하고 이런 얘기도 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교만했던 나를 쓰러뜨린 것 같아. 제대로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 언제 술 한잔할까?”

    “예? 그냥 차 한잔하시죠.”

    “윤 대리까지 나를 내치는 거야? 어차피 술은 못 마시니까. 내가 좋아하는 찻집으로 안내하지. 근데 오늘 얼굴 좋아 보인다, 좋은 일 있어?”

    좋은 일? 없어요. 부사장에게 줄 보고서 쓸 일만 남았어요….

    #Scene 7

    똑똑. 윤병굽니다. 들어와.

    “시간 빨리 가는군. 벌써 한 달이 지났나.”

    “여기 보고서 가져왔습니다.”

    “응, 거기 둬. 다시 말하지만 절대 비밀로 하고. 윤 대리,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가 뭔지 알아?”

    “그야….”

    “그리스는 피를 섞어야 같은 민족으로 인정했고, 로마는 뜻이 맞아야 같은 민족으로 인정했어. 그리스를 굴복시킨 로마제국의 성공은 그 차이에서 비롯된 거야. 회사가 발전하려면 뜻이 맞는 친구들이 있어야 돼. 그게 누구든, 어디 출신이든 상관없어. 수고했고, 일봐.”



    #Scene 8 에필로그

    한국 기업의 부장들을 샌드위치로 만들 것이냐, 너트크래커(Nut-Cracker)로 만들 것이냐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샌드위치는 빵 속에 든 양상추, 햄, 치즈, 소스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샌드위치를 사 먹는 이유는 중간에 내용물이 들어있어서다.

    반면 너트크래커는 위, 아래가 누르고 치고받아 속에 있는 내용물이 깨지는 것을 말한다. 경직된 사고의 경영진, 경험도 없으면서 우쭐거리는 신세대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의 능력을 소진하는 부장이라면, 그런 부장이 많다면, 그 회사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나저나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우리 부장은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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